제주이야기/한라산 자락

신선을 찾아서....방선문계곡2.

하늘타리. 2010. 7. 29. 07:50

 

제명을 볼까요
최익현, 이기온


제주도 유배가 풀려 출륙하기 직전에 이곳을 거쳐 한라산을 오르시면서 남긴 제명이지요.

두분 다 아시는 분이지요.
특히 최익현님은 대원군에게 당신이 왕도 아니면서 왜 정사를 주관하느냐고 비판하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결정적으로 등을 지게 되지요.
그래서 제주로 유배 왔다가 당시나 지금이나 제주시 중심가인 칠성통에서 1년 3개월 유배생활을 하다가

유배가 풀려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이기온의 길안내로 방선문과 죽성마을을 거치는 등산로를 따라 한라산을  등반했지요.

그 흔적입니다.

고종이 친정을 하면서 유배가 풀리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고종이 정치를 잘 했나요?
대원군의 가장 큰 잘못은 고종을 임금의 동량으로 키우지 못한 것입니다.
친정을 한 고종의 행적은 그 풍전등화의 시국에서 민씨일파의 품속에서 아니면 어떻게든

이쪽 외세던 저쪽 외세던 외세에 의존해서 사직을 연명하고자 한 것 뿐입니다.
유배에서 풀린 최익현은 실망했겠죠.

그래서 이제는 고종에게 국정을 바로잡지 않으면 일본이 곧 나라를 삼킬 거라고 갖은 방법으로 직언을 합니다.
고종은 그에게 경기관찰사로 가던지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명하지요.
결국 고향에 돌아와서 나라가 망해가는 것을 목격한 최익현은

74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적지 쓰시마에서 단식 끝에 순절합니다.
그가 지키려 한 것은 무엇일까요?
왕조와 유교적 가치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그를 추모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자신이 지키려던 가치를 위해 최선을 다했고

그것이 실패했음을 알았을 때 지키고자 하던 그 가치를 위해 목숨을 던진 지식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기온님은 제주의 인재양성에 힘쓴 분입니다.

현재의 제주도청 인근에 칠봉서당을 창설해 후학을 양성했고

화재로 소실되자 그 아들 이응호가 문연서당을 세워 많은 제자를 배출했습니다.

 


판관 강인호.

동원주둔소 자리 총맞은 비석에 선정비가 있지요.

 삼성혈 전사청을 중수한 목사 송구호.

 

모슬포 신영물 옆에 있는 오좌수 의거비.

그 비에 쓰여 있는 사건 당시의 목사 심원택

 

고,양,부 삼성의 후손 중에서 有識者 각10명씩 30여명을 뽑아 三姓廟齋生으로 삼은 방어사 안경운

 

목사 김몽규


자기 스스로 자기가 제주에서 제일 큰사람 이라네요.
말이라도 위민의 자세는 없고 군림의 자세만 있습니다.
탐라기년에 제주 돌하르방이 이 김몽규목사때 만들어 세워진 것이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제주에 흉년이 자주 들어 굶주려 죽고 전염병으로 죽는 자가 매우 많아

그 중에는 원귀가 되어서 산사람을 괴롭힌다 하므로

제주목에 있는 제주성문 밖에 옹중석을 만들어 세우고

중국전설에 나오는 진시황시절 완옹중이라는 자가 흉노족을 물리치듯이

원귀가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였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정의현과 대정현에도 옹중석을 만들어 세웠다고 하네요.

 

 

복잡하게 써있습니다만 심약이라는 관직이 눈에 띕니다.


궁중에 바치는 약재를 감시하기 위하여 조정에서 팔도에 파견하던 종9품 벼슬입니다.
우단에 그 이름이 써 있는 것으로 보아 위세가 대단했나 봅니다.

 

 

영조 때 제주에 와서 남양 홍씨의 위세를 한 껏 세운 인물.

방어사 홍태두

 

권세공.  

 

참판 한학수


목사 이현택.
제명 옆에 제영도 있었던 듯 한데 누군가의 고의로 파여있습니다.

 

목사 목인배, 목사 강면규


판관 고경준


철종 13년(1862) 2월에 부임한 任憲大 목사는 토호들의 청탁을 받아들여 부역과 목장세를 면제해주고

그 부담을 불쌍한 농민들에게서 부과했지요.

이에 같은 해 10월 西廣里사람 姜悌儉 등이 시정해 주기를 요구하고 나서 많은 호응 자를 규합하여

 10월 18일에는 제주성을 부수고 관청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목사와 판관이 파직되고, 목사는 유배를 갔습니다.
이 강제검의 난 수습 과정에서 출세한 사람이 바로 판관 고경준입니다.

 

민란이 나면 조정에서는 찰리사를 보내 사태를 수습하면서 과거시험을 베풀고

 소수의 인물이나마 권력 안으로 포섭합니다.

백성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한 회유책의 하나이지요.

고경준은 그런 기회를 통해 관직에 나갔고

그 뒤 1883~1885년 기간에 제주 판관을 역임했습니다.

고득종과 김진용이 배향된 오현단 향현사 유허비의 글을 지었으며

삼성사 서쪽에 선정비가, 화북 비석거리에 거사비가 남아있습니다.


 

 

탐라첨사 박선양


박선양 목사는 관덕정을 중수하고 호남제일정이라는 편액을 쓴 분입니다.

 

그 옆에 제주축항사무소라고 쓰여져 있네요

1955년도 중앙정부에 해무청이라는 게 만들어 지고 그 밑에 지방 해무청이 만들어 지지요.

그전부터 있던 축항공사사무소가 지방해무청 산하 조직으로 들어갑니다.
그때의 사람들이 망중한을 즐긴 것인지

아니면 일제 때 쥐꼬리만한 보수로 노동력을 착취하던 축항공사사무소 사람들인지 ...

하여간 한 글자 남기고 갔습니다.


 

목사 홍규


화북동 비석거리에도 이름이 있습니다.
목관아지내 연희각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적객 윤상화입니다.

 아마도 최익현과 바톤터치하지 않았을까요?
대원군의 사람 중 한 명
대원군이 실각한 후 밀려나 이곳으로 유배옵니다.
어떤 이의 부침에 따라 누구는 풀려나고 누구는 들어오고...
유배 중에도 이렇듯 탐승을 할 수 있었으니 이곳 생활이 그리 힘들지는 않았나 봅니다.

 


정조 23년에 명월만호에서 바로 제주목사를 제수 받은 목사 정관휘 

  

 

 

들렁궤 건너편 바위로 갑니다.

 


판관 고경준 당시의 제주목사인 지주 심현택


개국 493년 갑신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1884년..

 

 

그리고 그 옆 바위 수운계라고 쓰고 많은 분의 이름이 쭉 적혀 있어요.

이곳에도 개국 493년이라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 제영하나.


글쓴이는 영초 그러니까 한라산 나무꾼이라는데요.
연미마을이 나오는 것을 보니 동네분인것 같은데 글씨체가 참 보기 좋군요.

 

바위굴 주위 꾸불꾸불 휘도는 골짜기
냇물은 흐르다 연미마을에서 나뉜다.
신선은 뵙기가 어렵구나
오랜 세월 잠겨버린 연기 때문에.....

 

 

들렁궤 쪽으로 돌아섭니다
바라보는 방향 왼쪽 바위위
홍종우입니다.

 
1890년 조선 최초의 프랑스유학생으로 유학 중 춘향전을 불어로 번역 출간하기도 했습니다만

조선개화에 대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후에 김옥균을 암살하지요.
그 사람 입장에서는 처형이겠지요.

 

소위 개화파들, 그 중 김옥균.

일본군의 힘을 빌어 대신들을 제거하고

자기사람을 임명하여 국왕을 조정하려 하다 결국 3일만에 실패하여

동지들은 투옥당하고 멸문의 화를 입는데

일본으로 도망가서 망명하였으나

일본에서 토사구팽 당하여 오가사와라, 삿보로등지로 추방되어 있다가 도쿄로 돌아오더니

 일본에 실망했다고 하면서

청나라로 가서 이홍장을 만나서 그가 자기를 지원하도록 하겠다는 등의 행태를하는 김옥균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겁니다.

김옥균....
그가 말한 개화는 무조건 일본을 따라가자 였다고 말하고 싶네요..
지나치게 대일의존적이었으며

늑대를 믿은 빨간 망토소녀처럼 일본공사 다케조에 진이치로를 믿었지요.

그에게는 불쌍하게도 늑대를 잡아 배를 갈라서 그를 구해줄 사냥꾼이 없었습니다.
일본의 배신을 처절하게 느꼈을 때는 이미 그의 정치생명은 끝나 있었고

그의 그릇된 판단이 일본의 한국침략에 이바지 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혁명의 실패가 확정된 그 순간

홍영식은 우리를 믿어 준 왕을 떠날 수 없다고 왕을 지키다가  혁명의 제물이 되었지만

김옥균은 죽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며 일본망명길에 올랐지요.

일본에서도 그에게 일본을 떠나라 하였고,

갈데 없다 버티자 오가사와라에 연금시켜버리지요.
습한 기후 등을 견디지 못하고 연금해제를 탄원하다 북해도로 이송되었죠.
유배 끝에 연금에서 풀려나서 도쿄로 돌아오자 방탕한 생활 끝에 청국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홍종우에게 죽습니다.

그에겐 차라리 명예를 회복시켜준 고마운 일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홍종우는 김옥균을 죽인 후  과거에 응시, 급제하여 관직에 오릅니다.

요직에 오른 뒤에도 일관되게 반일의 길을 걷습니다.
친일세력에게 밀려 1903년 제주목사로 내려가서도 일어학원을 없애는 등 노선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그는 스스로 목사직을 버리고

시베리아를 거쳐 프랑스로 간 뒤에는 행방을 알 수 없습니다.

 


홍우순과 남만리의 제명이 있는 바위입니다.


홍우순은 1904년 홍종우목사 당시 제주군수이고 남만리는 대정군수입니다.
두분 제명 옆에 갑진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아마 1904년 늦봄 무렵 제주목사와 두 명의 군수가 여기서 즐거운 모임을 가졌었나 봅니다.
러일전쟁이 1904년 2월 시작됐으니 이때는 한참 불이 붙어 있을 시기였을 텐데
그들에게는 강 건너 불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해 여름 영국이 수에즈운하를 봉쇄하여 아프리카를 돌아 오느라

지치고 지친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박살낸 일본의 도고헤이하치로

(잡설 : 이 이름을 치면서 엄청 반가운 마음이 듭니다.

 30여년전 군생활초기 정말 훌륭한 제독이라고 배웠거든요.

그 기억때문인것 같습니다.

잘못된 교육은 바로 잡을 수가 없어요)

동년 음력 7월 말에 일본해군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제주도 동쪽 우도와 서남쪽 모슬포일대를 사전 점령하여 감시 초소를 설치하라고요.

이 명령을 받은 일본 함대는 고도의 훈련을 받은 수병 몇 십 명씩을 보내 하모리 포구에 상륙, 모슬봉에 초소 2개.

우도 연평리에 상륙, 가건물을 짓고 진주합니다.
남의 땅에 아무 사전 협조도 없이 군사시설을 건립하는 것을 보고받은 홍우순과 남만리는 그저 멍할 뿐입니다.
아무 조처도 못하고 제주목사에게 알립니다.
제주목사 홍종우는 불같이 화를 내고 조정에 관군투입에 대한 승인을 요청하고

외무대신에게 정식으로 일본국에게 퇴거시킬 것을 요구하라 하였지만

 조선의 조정 역시 그냥 놔두라고 할 뿐이었습니다.

 


홍우순은 제주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이 와중에도 가렴주구를 일삼은 것 같습니다.
1904년 연말에 濟州牧裁判所判事署理濟州牧裁判所檢事試補 黃鎭菊명의로 조정 법부대신에게

제주군수 홍우순의 탐학행위에 대한 처벌을 청원하는 문서가 올라갑니다.
결국 1905년 음 1월 홍우순은 의원면직의 형태로 관직을 놓습니다.

 

 

그 밑에 풍영록이라는 제목하에 꽤 많은 사람의 이름이 써있습니다. 


풍영록이라는 글씨와 앞부분 몇 사람이름 밑에는 원래 어떤 글이 써있었는데 지우고

그 위에 다시 글씨를 판 흔적이 있습니다.
개국 493년에 썻다하고 누구누구가 개수했다고 되어 있는 것을 보아 건너편 벽 수운계명단과 관련인사들이지,

위에 이름이 있는 홍우순, 남만리와 동행했다거나 관련 있는 인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순수하게 마애 그 자체만 감상한다 했는데 그 배경이 자꾸 떠오르는 걸 어찌합니까?


역사탐방이 이래서 싫어요.
한 바퀴 돌고 나면 답답할 뿐입니다.
그 좋던 경치도 뿌옇게 보이고 이것 저것 생각하다 머리만 아픕니다.

 

고개를 빙글빙글 돌려 주변 경치를 봅니다.
보고 또 봅니다.
또 보고 또 봅니다.

 

 

 

 

 

 

 

 

 

 

 

 

 

 

 

 

 

 

 

 

 


머리를 비우고 눈만을 채우려고.....

그러다 문득 배비장과 애랑이가 생각나네요.
이곳 들렁궤옆 넓은 沼가

판소리 배비장전에서 기생 애랑의 목욕하는 장면을 몰래 훔쳐보던 漢拏山花遊場所 水布洞 綠林間입니다.

 

 

 


그래! 춘향전에서는 업고 놀지만 여기서 우리 벗고 놀자.
목욕하는 애랑이는 없지만

애랑이가 목욕했을 만한 곳을 윗사진 나무사이에서 몰래 숨은 듯 살펴 보다
느닷없이 어지자지 舍方知를 만납니다.

 

혼자 키득 이다가….


또 키득 이다가….


혼자 오버한 것 같아 뻘쭘해져서
돌아갑니다.

 

 

 

물이 적당히 흐르는 날 물놀이나 오렵니다.
그 때 같이 오시죠.
Mozart
Quartet for Piano and Strings no 2 in E flat major, K 493 1. Allegro

Beaux Arts Trio
Performer
Menahem Pressler, Piano
Isidore Cohen, Violin
Bernard Greenhouse, Cello
Bruno Giuranna, Viola
Rec, 1983

'제주이야기 > 한라산 자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래리 포리물  (0) 2010.08.12
제주의 계곡...물흐르는 날  (0) 2010.08.11
신선을 찾아서....방선문계곡1.  (0) 2010.07.28
바매기일대 습지  (0) 2010.06.29
차귀도  (0) 2010.06.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