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사평을 다녀왔습니다.
정난주 마리아의 묘소가 있는 대정성지, 그리고 김대건신부의 제주포착을 기념하는 용수성지와 더불어
제주도 3대 가톨릭 성지중 하나인곳입니다.
참으로 슬픈 곳.
참으로 아이러니 한 곳.
그리고 역사란 결국 이긴자의 편에서 기록된다는 것과
역사를 통해서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바랄수 없는 이상이라는 것을 새삼 일깨워 주는 곳입니다.
이길을 지나는 김에 잠시 들러보자고 가벼운 마음으로 들렀던 곳인데
이생각 저생각 꼬리를 뭅니다.
정문인데...
이리는 들어가지 말랍니다.
장례식 및 공식행사시에만 열리니 옆으로 돌아가랍니다.
묘역이니 죽은 사람만 정문으로 들어가라는 모양입니다.
정문 옆에 이 묘역내에 애국지사 묘역이 3기가 있다는 표식이 있습니다.
이곳도 둘러보렵니다...
서쪽 입구
교회의 공식적인 이 묘역의 대한 설명입니다.
제주도민들이 미신을 믿음으로 일어나는 정신적, 경제적 피해와 축첩 등 비윤리적 풍습에 강력히 반대하는 교회에 대하여
토착 세력의 기득권 수호를 둘러싼 갈등이 있는 가운데 봉세관과 천주교 신자들이 서로 상부상조하며 백성을 착취하는 것으로 오해하여
이재수라는 관청의 포졸이 우두머리가 되어 민란을 일으켰다.
사건이 일어나자 봉세관은 도피해 버렸고, 민군들은 공격의 대상을 교회측으로 돌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700여명의 교인들과 양민들이 관덕정 등지에서 피살되었다.
사태가 진정되면서 시신들은 별도봉과 화북천 사이 기슭에 버려지듯 묻혔다.
교난의 수습에 나선 불란서 공사는 조선조정에 편지를 보내어 공동 안장지에 해한 조속한 해결을 요청하였다.
1903년 제주목사 홍종우와 구마실 신부와의 접촉으로 블란서 공사와 조선 조정과의 교섭이 원만히 이루어져,
동년(광무 7년) 4월에 조정으로부터 황사평을 양도받게 되었다.
당시 별도봉 밑에 묻혔던 희생자 중 연고가 있는 분묘는 이미 이장해 간 상태였고 무연고 시신들만 이곳에 이장하였는데,
26기의 분묘에 28구를 모셨다.
그 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재차 단장을 하고,
1995년에 신 아우구스티노(재준), 김 토마(영만), 양윤경 등 당시 순교자 28기를 합장하였다.
그리고 현 하롤드 대주교를 포함한 성직자들의 분묘를 이장 축복하였고,
1866년 병인박해 때 경남 통영에서 순교한 김기랑(펠릭스베드로)의 순교비를 이곳에 건립하였다.
그 당시 관덕정일대에 쌓여져 있던 시신을 불란서 함장이 찍은 사진이랍니다.
그 직후의 관덕정 사진이랍니다.
아래 사진 그러니까 순교자묘역 좌측 맨앞단 쪽에 있는 묘역이 그당시 돌아가신 분들의 묘역 이랍니다.
비석은 바꾼 분들이 많구요 .묘비가 없거나 옛묘비 그대로인 묘소도 많습니다..
성가정상
순교자묘역
제단
합장묘뒤 십자가
김기량 순교비
함덕리출신으로 제주 출신으로 처음 영세 입교한 분입니다.
약재와 그릇을 팔던 상인으로 모슬포로 항해하다가 표류 중국광동해역까지 흘러가다 영국상선에 구조받아 홍콩에 있는 파리외방선교회에 맡겨지고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영세를 받게 됩니다. 그
뒤 제주로 돌아와 생활하며 제주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다합니다.
병인박해가 한참일 때 자기가 전교한 예비신자들을 데리고 세례를 받게 하려고 육지로 나갔다가
여비를 마련할 목적으로 당시 금지품목인 박하유를 팔다 체포되어 천주교인임이 밝혀지고
이를 인정하여 교수를 당한 후 가슴에 대못이 박혀 순교한 분입니다.
성직자묘역
공덕비옆이
미국 태생으로 광주대교구장으로 사목하다가 제주교회가 제주 지목구로 설정되면서 자원하여 이를 맡으신 헨리 대주교의 묘소입니다.
그 멀리 세곳은 신부님들의 묘소입니다.
외국인 선교 사제 공덕비
제주도에서 선교활동을 하며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데 큰 몫을 담당했던 것은 파리 외방전교회와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성직자들이었답니다.
지난 100여년 동안 제주도에는 55명의 외국인 사제들이 사목활동을 했고 지금도 활동 중이라 합니다.
그중 이미 선종한 분들의 명단이 공덕비에 새겨져 있습니다.
일반묘역을 지키고 게신 마리아
이제는 일반묘지를 납골묘역으로 꾸미려는가 봅니다.
사실 더 이상 장지를 확장할 수가 없겠지요.
지금현재 묘역의 크기가 총 18000평이나 되는 큰 평수이지만 현재 제주교구 천주교인의 공동안장지로 지정되어 있으니
감당하기 어려울겁니다.
신축교안이후 처음에는 황사평 거의 전 마을이 천주교 공동묘지로 사용할 수 있게 애매하게 문건이 작성되어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마을 전체를 묘지로 한다는 것은 무리한 것 아니냐고
기나긴 소송 끝에 승소하여 천주교 묘지를 현재의 넓이로 확정하였다고 합니다.
납골묘역을 지키시는 마리아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
묘역 너머로 한라산을 봅니다.
역사의 현장을 지켜본 한라산이 한마디 합니다.
이사람아!
여기는 원래 천주교도들의 묘역이기 전에
제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모여든 민군들이 주둔했던 장소라네.
민군의 주둔 터에 거꾸로 그들에게 살해된 천주교인들이 묻히게 된 것이라네.
참으로 아이러니 한 일입니다.
그 한쪽의 역사의 기록은 이렇습니다.
1886년 한불수호조약과 1896년 敎民條約 이후 한국에서는 천주교선교사들이 선교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거기에 더하여 조정에서는 외국인 신부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우대하고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외국 신부들은 이 점을 이용하여 천주교인이면 죄를 범해서 옥에 들어간 자라 하여도
신부가 자신의 특권을 이용하여 관청에 압력을 넣고 석방시키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지금 주한미군 병사들이 국내에서 죄를 짓고도 수사 한 번 제대로 받지 않는 것보다 더 분통터지는 일을 당시 제주 백성들도 목격하며 지냈던 것이다.
이러다 보니 종교에 관심이 없으면서도 천주교 신부의 특권을 이용할 목적으로 교인이 되는 불량배들이 많아졌다.
그런데 당시 세금을 거두던 봉세관 강봉헌이라는 자가 천주교 불량배들을 시켜서 법에도 없는 각종 세금들을 징수하면서
봉세관과 천주교인에 대한 주민들의 원성이 높아져만 갔다.
봉세관과 천주교인들의 횡포에 불만을 품은 백성들이 처음에는 이들의 작폐를 시정해줄 것을 호소하기 위해 제주성에 모이려 하였으나,
천주교도들은 이들을 욕보이거나 폭행했고 심지어는 군중을 향해 총을 쏘기까지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흥분하여 들고 일어나 민병대를 결성하고 제주성을 향해 집결하게 되었는데,
제주의 동부 진영은 강우백이 서부 진영은 이재수가 지휘하였다.
황사평 마을은 조선말엽에 군병을 교련하던 장소로 쓰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1901년 5월 21일에 민병대들은 굳게 잠긴 제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황사평에 진을 치고 제주성을 공격하였다.
민병대의 공격이 일주일간 이어졌으나 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그런데 성문은 기대하지 않은 방식으로 열렸다. 땔감과 곡식이 떨어진 성안의 비천주교도들이 성 위의 대포를 뽑아 던지며 환호성을 질렀다.
민병대는 성안으로 들어와서 성안의 천주교도들을 잡아들여 이들을 처형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민란에 의해 처형된 자들이 사망자 317명에 이르는데 그중 천주교인이 309명이다.
하지만 5월 31일에 프랑스 함대 두 척에 이어 6월 2일과 10일에 강화도의 병력과 수원의 병력이 제주에 들어오면서 이재수의 난은 진압되었다.
난을 주도했던 이재수, 오대헌, 강우백 등은 사형이 확정되어 교수형에 처했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 이재수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지금 천주교인들이 비록 다른 나라의 글을 배웠다고 하나, 본시 우리나라의 신하이고 백성입니다.
그러나 한 번 천주교 속에 들어가면 관청에서는 그 백성을 다스릴 수 없고, 감히 두려움도 없이 남의 재물을 빼앗거나 남의 소송을 간섭하여
그 누구도 어찌할 수 없으며, 심지어 사람을 죽였다 해도 감옥에 가두어 놓지 못합니다.
이번 제주의 백성들이 세금을 거두는 폐단에 견디지 못하여 일제히 모여서 하소연하려고 한 것이므로, 어찌 천주교인에 관계되겠습니까?
그렇지만 천주교인들이 관청의 무기를 탈취하여 제주성을 봉쇄시키고, 백성의 집들을 제멋대로 하니 이는 역적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들이 죽인 것은 곧 역적이니 양민이 아닙니다. 비록 나는 죽더라도 원한이 없습니다."
한편 민란 와중에 파괴된 교당과 두 신부의 집물보상으로 총 5160원의 배상금이 부과되어 삼읍의 백성들이 돈을 모아 배상하였고,
프랑스 함장과 이재호 제주 목사 간에 피살된 천주교인들에게 매장지를 제공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렇게 하여 1903년 11월에 황사평이 피살된 천주교도들을 매장할 장소로 결정되었다.
누구의 기록이 더 진실할까요?
어디에도 진실은 없습니다.
양쪽 모두 불쌍할 뿐입니다.
양쪽 모두 이땅의 목민관들을 믿지못하고
한쪽은 비선교지역에서 토착화보다는 유럽 문화를 절대우월시하여 미개인들에게 선교되는 방식으로 선교하는 외래종교에
한쪽은 위세에 빌붙어 억압하고 착취하는 집단에 저항하는 민중의 힘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2001년 11월 제주에서는 1901년 제주항쟁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공동대표 김영훈·김창선)와 천주교 제주교구(당시 교구장 김창렬)가 공동주최하고
제주도사연구회와 역사학연구소가 주관한 '진실과 화해'를 주제로 한 '1901년 제주항쟁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가 열린적 있습니다.
당시 오마이뉴스 기사에 의하면
천주교인, 제주도민 100년만에 '화해'라는 제목하에
당시 각계 참석자 100여 명은 "그 간의 갈등을 씻고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 역사적 흔적지에 '화해의 탑'을 세우자고 했다는 기사가 있는데
그 뒤 어디다 화해의 탑을 세웠는가를 저는 모릅니다.
나만 모르는 것 같습니다.
애국지사 묘역을 찾으러 묘역 전체를 두바퀴 돌았습니다.
아무런 표시도 없고
조그마한 묘비를 일일히 읽으며 찾아야 합니다.
이 넓은 묘역에 문밖에 제주시장이 세운 안내판을 제외하면 이들을 위한 안내판 하나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일이 아니니 교회에서 표시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관심을 써주면 그 교우의 가족들이라도 고마워하지 않을 까요.
결국 못 찾아보고 돌아갑니다.
주님, 저들의 영혼을 당신의 나라에서 오래도록 곁에 두소서. 아멘.
Paganini
Concerto for Violin no 1 in D major, Op. 6 (M.S.21) 1. Allegro maestoso Gil Shah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