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답사로 다시 가 본 제주주정공장터
참 여러 가지 이유로 가보게 되는 군요.
가보게 된 목적은 각각 다르지만
한 장소에 이렇게 여러 가지 사연이 엮인 곳도 드물거에요.
제주도 특유의 해녀신앙과 민속신앙이 담겨져 있는 영등굿의 칠머리당이 한 때 위치했던 곳.
해방전 제주도의 주요한 산업시설로서 일본과 한반도 많은 지역에 주정을 공급하기도 하고
군사용 비행기의 연료로 보급하였던 곳.
해방직후에는 이 공장창고에 보관된 절간切干 고구마를 배급하여 도민들의 식량난을 해결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장에 있는 발전기를 이용하여 전력을 보급하기도 했던 곳.
4ㆍ3 당시 폭도 현행범도 아닌 일반 귀순자를 남녀노소 부상자 임산부 구분 없이 창고에 몰아서 수용한 곳.
혹독한 고문후유증과 열악한 수용환경 때문에 죽어 나가거나 아기를 낳는 경우도 있었고
육지형무소로 이송된 이들 대다수가 집단희생 당한 전도민의 피와 눈물이 점철되어 있는 곳.
지금도 4ㆍ3 당시 행방불명된 원혼들을 위무하는 '제주4ㆍ3 행방불명인 진혼제'를 봉행하고 있는 곳.
조병창이 설치되어 무기를 제조하던 곳
(제주도분들은 여기에 조병창이 있었다 하는데 군기록에 의하면 조병창은 제주여상자리에 있었고 여기는 제5훈련소본부(1훈련소는 모슬포)가 잠시 있었다 합니다)
한국전쟁 시에는 성공여부가 불투명한 반격작전(인천상륙작전)에 투입하기 위하여 남자 인구 11만 명의 제주에서 당시 중학교 3학년이상 6학년까지의 어린학생들과 교사. 청년 3000명을 모집하여 1950년 8월 27일 부터 31일까지 수용하였던 곳.
1950년 9월 1일 출항하는 누군가의 아버지, 아들, 손자, 형, 동생, 오빠를 태극기 흔들어 전송할 때 제발 살아만 돌아오라고 절규하던 통곡의 강이 산지항에서 이곳까지 흘렀던 곳.
지금은 당시의 건물이 모두 헐리고,
수용소 터에는 대규모 아파트가 들어서 있어
당시의 흔적은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는 곳.
이번 답사에는 주제가 항일투쟁과 일본군사시설이니
일본군사시설과 연계되어 군사용 비행기 연료 제조 및 공급에 대하여 주로 이야기되고
당시 제주도 사람들이 심고, 수확한 고구마, 감자 공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 주가 될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만 ....
역시 4ㆍ3의 상흔이 너무 깊고 크기에 4ㆍ3당시 상황에 대해 주로 이야기가 되더라고요.
그리고 경사면 상단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콘크리트도관에 대해서 꽤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습니다.
그 자리에서 대답을 드리려 했는데....
어떤 분은 창고에서부터 공장까지 고구마를 운반하던 통로일 것이다 하셨고
또 어떤 분은 공법으로 보아 얼마 되지 않은 것이라고 하시는 와중이라 그 뒤에 다른 말씀을 드릴 수 없더라고요 .
이 콘크리트도관은 공장터 상단 사장밧지역의 물골을 모아서 공장으로 흐르도록 도수관을 만든 것이고
이 물을 바로 고구마를 씻는다는지 등에 사용했기 때문에 윗부분은 철망 등으로 걸렀고
내려가는 지점부터 뚜껑을 해서 나름대로 물이 더렵혀지는 것을 방지했다 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하수도로 쓰이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 하단 중앙에 있는 큰 돌을 들어내면 집수구를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공장과 창고를 연결하는 계단은 현대아파트 들어선 맨 왼쪽에 있었다 합니다.
그리고 이곳 주정공장의 4.3에 관련된 사항 한 가지 더 말씀을 드리면 ...
05년 4월에 제주도4.3사건희생자유족회 송승문 전 사무처장이 제주시 옛 주정공장 터 옆에 있는 동굴에서 수형인 들이 집단 학살당했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제주의 소리).
주정공장터 바로 옆에 위치한 동굴은 길이 20여 미터로 자연동굴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판 흔적이 있어 일제시대 군사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송승문씨는 이곳 주정공장에 수용되었던 문순선 할머니가 수용소에서 낳은 아들로서 어머니가 직접 학살현장을 보았다고 하셨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위치의 동굴입니다.
콘크리트 도관의 연결지점을 찾아 언덕 계단길로 올라갑니다.
(바로 위 사진부터는 답사당일 사진이 아니고 이전에 제 블로그에 있던 사진입니다)
이 계단 끝 동대머들 끝자락 언덕은
주정공장터에 있던 칠머리당이 사라봉과 별도봉경계지경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위치했던 곳입니다.
그리고 해남촌 또는 호남촌이라고 불리우던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마을은 1930년대 이 지역 동쪽지역 언덕(지금의 해양경찰서)의 바위와 돌무더기를 깎아내려 부두를 확장할 때(지금의 동부두 *졸락코지에 있는 부두가 서부두) 해남인근의 호남사람들이 이곳으로 많이 이주하여 일용직 노동자로 생활하였고 부두가 확장된 후에는 부두하역일에 매달려 살았기 때문에 그 이름을 해남촌 또는 호남촌이라고 부른 것이랍니다.
그 당시 여기 살던 많은 분들은 열심히 일하신 만큼 성공하셔서 지금은 거의 일도동 지역으로 이주하셨다 하고
지금은 보상 문제가 풀리지 않은 집 몇 채가 남아있고 주차장과 체육공원이 들어서 있습니다
이 마을 끝자락 무너진 집터옆 경사지에 위의 사진에서 보는 사장밧마을의 맨홀로 덥혀진 하수관로가 주정공장 도수관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주변에 잡초와 잡목이 많아 식별은 조금 어려우시겠습니다만
그냥 참고로 보시죠.
동행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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