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로산도라고 아세요?
한라산신들을 부르는 이름인데요.
설문대 할망의 아들 딸들은 한라산신(하로백관도라고도 합니다)이 되어 한라산 자락의 마을들의 수호신이 되었죠
이중 호국신계열에 황서, 국서, 병서가 있습니다.
원래 황서는 애월읍 고내리 일대의 수호신이고 국서는 한립읍 금악리일대, 병서는 안덕면 동,서광리의 수호신이라 합니다.
이 세 명의 신이 힘을 모아서 어느 장수를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지금으로부터 7백여년전의 어느 겨울.
고려와 몽고연합군에 쫒긴 김통정과 삼별초잔군이 제주에 상륙하게 됩니다.
이들은 지금의 애월, 한림일대의 백성들을 동원,
당시 귀일촌 위(지금의 항파두리)에 둘레 15리(약 6키로)의 토성을 쌓고 그 안에 다시 둘레 750미터의 석성을 쌓습니다.
前 해에 관군들에게 동원되어 제주섬둘레에 환해장성을 쌓느라고 생업에 종사하지 못했던 백성들은 다시 항파두리성을 쌓느라고 고초를 겪게 됩니다.
생업에 종사하지 못한데다 삼별초군대에 먹을 것 까지 제공하느라 정작 백성들은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었지요.
먹을 것도 마실 것도 없는 백성들은 목이 마르면 오줌을 받아먹고 똥을 누며는 돌아앉아 그것을 먹었습니다.
또 김통정은 부역에 추가하여 가호마다 재 다섯 되, 빗자루 하나씩을 일일세금으로 걷어서
성을 은폐하고 병력의 수를 과대포장하게 할 목적으로 재를 성벽위에 뿌리고 말꼬리에 빗자루를 메달아 그 위를 달리게 합니다.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에 이르자 하늘에서 세신이 나타납니다.
이들은 광양당신, 광정당신, 서낭당신이라고도 불리던 세 명의 한라산도 황서, 국서, 병서입니다.
세신이 공격하자 김통정은 무쇠방패를 던져 타고 바다로 달아납니다.
바다의 사신용왕이 김통정의 깔고 앉은 방패를 잡아당기자 이번에는 매로 변하여 관탈섬쪽으로 달아납니다.
도망 다니는 중간에 김통정은 무수한 칼과 활을 맞았으나 죽지 않은 이유는 그의 몸에는 온통 비늘이 덮여 있기 때문이었답니다.
세 신중의 하나가 모기로 변하여 김통정을 쏘았습니다.
김통정이 모기를 잡으려 팔을 드는 순간 비늘이 일어서자
황서신이 비늘 틈으로 활을 맞혀 결국 김통정은 바다에 떨어져 죽게 됩니다.(출처 : 한국의 신화 / 이재민)
이 설화를 다시 해석하면 김통정장군을 비롯한 삼별초군은 고려와 몽고 연합군에게 의해 전사한 것이 아니고
결국 제주도민에 의해 배척되어 소멸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저도 이 의견에 동조합니다.
강화에서 진도로, 진도에서 다시 제주로 패주해온 삼별초군대가 고려 조정의 군량미등의 지원을 받았을 리 만무 할 것이고
그 군대를 유지하고 전쟁준비를 하기 위해서는 지역주민들에게 공출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로는 대의명분도 없었습니다.
몽고의 통치에 반대한다는 것인데 이미 몽고의 섭정을 받는 고려조정의 입장에서는 역적의 무리와 다름없었을 것이고
고려 중앙정부로부터 파견되어진 제주지방관아로 부터도 반군의 무리로 취급당했을 겁니다.
그러니 더욱 자기가 점령하고 있던 한림 애월일대의 백성들의 등을 계속 짓누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고려정부이던 몽고군이건 삼별초이건
당시의 제주백성으로 보자면 전부 외세가 아니었을까요.
생활에 어떠한 보탬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옥죄고 누르기만 하는 그런 뻔뻔한 집단들...
역사는 항상 재해석됩니다.
주로 당대에 힘있는 자에 의해서 각색되어 지지요
어느날 어느시기 비슷한 성격의 집단이
삼별초를 외세에 대한 저항이라고 나름 깔끔하게
미화시켰네요
항파두리와 유수암리를 지나며 생각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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