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제주 올레

처음 열리는 길 제주올레 1코스 (종달리 중산간도로-옛소금밭-해안도로)

하늘타리. 2009. 6. 14. 22:54

중산간 도로를 따라 내려오면 종달리에 이릅니다.

 

 

 

 

 

 

 

 

 

 

 

말미 알오름을 지나서 중산간 도로를 따라 내려오면 종달 교차로와 만나게 되죠.

종달이라?

이 길을 종달새처럼 지지배배 거리며 걸으란 뜻인가 봅니다.

그럼 나처럼 혼자 걷는 사람은 누구와 우짖을 까요?

 

종달이란 명칭의 유래를 책에서 찾아보면

“조선 시대 濟州牧의 목내(牧內)의 마침이란 뜻에서 지리적 또는 행정적으로'마침 이루어진 부락'이라는 데서 終達이라 호칭한다.

(진성기의 '남국의 지명 유래'(1985))라고 되어 있네요.

그러니까 제주도가 태종 16년(1416년) 山南 지방 인구가 증가되고 처리 사무가 많아져서

旌義와 大靜의 2縣을 신설할 때 종달리는 '제주목의 끝 마을, 즉 마지막 마을'로 '종달'이라 명명했다고 봐야 되겠습니다.

 

시작하는 마을 始興里에서 올레 걷기를 시작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벌써 끝마을 終達이네요.

 

 

 

 

 

 

 

마을 왼쪽에 오름이 하나 보입니다.

지미봉이라 하는데 '地尾'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은

이곳이 제주도 땅의 꼬리 부분에 해당되기 때문이랍니다.

제주도는 고구마 모양의 타원형 섬인데 종달리와 정반대 방향에 있는 바닷가 마을이 두모리(한경면 두모리)입니다.

頭毛라고 이름이 붙여진 것은 그 곳이 섬의 머리 부분에 해당되기 때문이랍니다.

그곳 두모리는 13코스걷기할 때 스치듯 지나가실 겁니다만

지형적으로 함진 곳이 많고 오목한 곳이 많아 사람이 힘으로 땅을 파지 않아도 물이 풍부한 지역으로

제주에서 가장 큰 논농사 지역이지요.

두모리 선창에는 조선 세종 때에 축조된 연대가 있고

이 연대 위에 일제강압기초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대불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갈라서 따로 세워놨습니다)

 

그런데 그 두모리지역은 예부터 고산까지를 통틀어 ‘두모' 또는 ‘두미'라 불러왔고

‘두모'를 한자 차용 표기로 쓴 것이 ‘頭毛(두모)'입니다.

그래서 그 일대에 형성된 마을을 ‘頭毛里(두모리)'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한자 표기를 중시하여 제주도의 머리 마을이라 소개하는 것은 지나친 것 같아요.

 최근에 ‘두모리'를 ‘釜浦村(부포촌)'으로 표기된 기록을 확인하면서

기존 해석과 설명이 잘못된 거라고 하는 의견도 많아졌답니다..

 

그리고 행정구역으로 제주목의 끝이라 종달이라 일렀다면

두모가 제주목의 시작이라야 서로 대응이 될 텐데

여기는 산 이름이 지미봉이고 거기는 동네이름이 두모라는 것을 가지고 서로 대응하는 것은 잘 안 맞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제주도가 머리와 꼬리가 있다면 어떤 동물의 형상일 텐데 그럼 어떤 동물일까요?

 

또한, 지미봉은 '指尾(제주도의 봉수 연대 일람에서 : 제주도지 상권, 1982.)와

 只未(按撫使 韓承舜이 세종 21년(1439년) 2월 임금에게 防築計劃과 여러 조건을 보고한 내용에서)' 등으로 표기되고 있으나

 지금은 '地尾'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종달 지명 유래와 관련지어 '땅의 꼬리, 즉 땅의 끝 봉우리'라고 한 데서 연유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과연 지미봉이 한라산 주변 삼백예순여덟 개의 오름 들이 이어져 오다가

마침내 그 갈 길을 멈춘 곳이라면 시작하는 오름은 어디일까요?

그냥 궁금합니다.

 

이곳 종달리는 호종단(고종달)에 관한 설화도 있지요

중국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북적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만리장성을 쌓았고

동이(東夷)의 지리서에 의하면 탐라가 심상치 않아

훌륭한 인걸이 태어날 것을 염려하여 인걸이 나올 혈을 끊으라고

풍수사 고종달(호종단,胡宗旦)을 파견했다합니다.

『조선(朝鮮)이 배 형체라면 탐라(耽羅)는 닻가지 모양이다.

배라는 것이 항해하려면 닻을 거둬야 할 것인즉 탐라로 먼저 가서 지맥·물혈을 끊어라.

높은 지맥은 깎아 내리고 굽이 친 물은 터서 장부 하나 나지 못하도록 말려 버려라』

고종달(호종단,胡宗旦)은 제주의 동쪽에 상륙하여 점차로 서쪽으로 가면서 수맥을 찾으면서 끊으려 했답니다.

 

 

고종달의 눈은 명의가 사람의 뱃속을 꿰뚫어 보아 병을 알 듯

땅을 들여다보면 어느 물길이 어디로 흐르는지 훤히 보이는 신안이었다고 하고

더욱이 그는 물혈을 찾는 커다란 개를 데리고 제주에 상륙했습니다.

제주도 해안에에 상륙한 고종달은 『이곳이 어디냐』고 물었습니다.

『종달리외다』

『무엄하게 내 이름을 닮아? 이곳부터 물혈을 뜨자』

고종달은 대번에 이곳 속칭 「물징거」샘의 혈을 따버렸습니다.

펑펑 흐르던 물은 물이 솟아나왔던 구멍만이 남게 되고 갑자기 말라버렸죠.

은월봉(윤드리오름이라고 하죠) 인근 속칭 「대머들」에서 이 물에 의지해 살던 마을 사람들은

샘이 말라버리자 해안으로 이주를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마을을 지나면 종달리 소금밭이라는데 가 나오죠.

어느 분이 올레후기로 쓰신 글에 보면

소금밭이라고 해서 염전인지 알았더니 갈대밭이더라. 낚인 기분이라고 쓰셨던데 경치가 좋아서 용서한다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진짜 이 지역은 소금밭이었데요.

육지라면 여기저기 염전이 있어서 소금을 구하기가 쉬웠겠지만

제주에는 갯펄이 없으니 염전을 조성하기가 쉽지 않았을 게고

그러다 보니 소금 값도 많이 비쌌겠죠.

 

그래서 음식에 소금을 거의 않쓰다보니 제주도 전통음식이 밍밍한 거 아닐까요.

제주시 하귀해안도로를 지나시다 보면 신엄.구엄, 중엄이라는 지명의 마을이 있습니다..

여기 해안가를 유심히 보시면 평평하고 폭도 넒은 바위들이 보일 겁니다.

 

옛날에는 여기서 소량의 소금을 만들었답니다.

지금도 신엄리 일대에는 돌 위에 염전으로 사용하던 돌 소금밭 흔적도 남아있고

안내문도 있습니다만 모든 사람이 그냥 지나치고 말죠.

하여간 바위위에서 소금을 만들다 보니 파도가 많이 치거나 큰물이 들면

말리던 소금도 다 떠내려갔을 거고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래서 도내 어딘가에 안정적 소금생산지가 필요하게 되었던 거죠.

그래서 조성된 소금밭이 이곳 종달리 해안가입니다.

 

'한국수산지' 제3집(1910)에 의하면,

 "조선 중엽 1573년 姜侶 목사가 종달리 해안 모래판을 염전 적지로 지목하고,

종달리 유지를 육지부로 파견해서 제염술을 전수하게 하여 제염을 장려한 것이 제주도 제염의 효시이다.

1900년대에 종달리는 353호 가 있는데 그 중 제염에 종사하는 사람은 160여 명에 달했고

소금을 생산하는 가마(釜 : 속칭 가망·가매)가 46개가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네요.

그래서 '소금하면 종달, 종달하면 소금'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한때는 종달리민을 가리켜 「소금바치(소금밭+이 : 소금밭 사람)」라 불리어지기도 했고.

"… 종달리의 큰애기덜은 소금 장시 제격이여 …."라는 민요의 한 구절을 창출시키기도 했답니다.

 

염전으로 이용되던 간석지(干潟地)는 1957년부터 근 12년 동안 대대적인 간척 공사를 벌여 수답을 만들었답니다.

이유는 육지에서 들여오는 소금값보다 생산비용이 더 많아 경제성이 없다고 보고

 지역민의 소득창출을 위해 논을 만들자고 한거죠.

그런데 수리 시설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서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관리 또한 소홀해지면서 논은 차츰 습지대로 변해 현재는 갈대가 무성하게 자라나게 된 거랍니다.

 

소금밭 바로 앞에 커다란 팽나무가 있는 곳이 있죠.

아마도 거기서 잠시 쉬다 오셨을 텐데 그 나무 밑에 비석이 제법 많이 있습니다.

그 비석들 중에 바닷물을 막아 .둑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신 분들의 공덕비도 있는데

그 분들 갈대가 무성한 지금의 모습을 보면 얼마나 속상할까요....

 

갈대라고 하니까 생각나는게 있어서요.

누구는 제주에는 모두 억새만 있다고 하는데...

글쎄요...

억새와 갈대를 한번 구분해 보면

억새는 산이나 물에서 모두 자랍니다.

그런데 갈대는 산에서 자라지 못하죠.

그래서 오름중턱에 있는 것은 모두 억새라는 말이 맞습니다.

하지만 습지나 물가에서는 물억새도 있지만 갈대가 더 많이 자랍니다.

물가나 습지에서 갈색이나 그 비슷한 색으로 자라는 것은 나이먹은 억새가 아니고 갈대라고 보시면 됩니다.

 

 

 

 

소금밭을 지나서 올레 길은 오른쪽으로 돌아 성산포쪽으로 뻗어나갑니다.

 

어느 지점을 바라보던 시계가 탁 트이는 종달 해안도로....

한라산, 일출봉, 식산봉이 보이고 바다 넘어 우도가 계속 따라오고

해안도로는 드디어 오조리경계에서 마침내 끝나게 됩니다.

하지만 아쉬움도 잠깐 일출봉과 광치기해변을 향해서 계속 되는 여정이 이어집니다.

 

해안도로를 걸으면서 느끼는 것은 걷는 분의 마음가는대로일테니까 생략하기로 하죠

 

 

 

 

 

 

 

 

 

 

 

 

종달리 해안도로를 따라오면서 바닷가에 걸려 있는 준치,한치를 보면서

맛있겠다. 먹고 싶다. 관광지인데 비싸지 않을까? 등 등 의 생각을 하다가

사먹든 안사먹든 지나치게 되면 해녀상이 인사를 하지요.

어서가라고.... 다시 오라고...

 

 

여기서 부터가 다시 성산읍 지경입니다.

 

오조리일겝니다.

아니 조금더 걸으면 우측에 보이는 해녀의 집이 시흥해녀의 집이니까 시흥리 인가요.

 

 

 

 

 

 

 

 

 

 

 

 



Pavlo - Love You Fore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