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셔와 가꾼 아뜨리움/그림읽기

Georges Rouault

하늘타리. 2009. 2. 13. 22:52

 

 

조르쥬 루오(Georges Rouault)

 

마티스, 블라맹크와 함께, 흔히 야수파의 대표적 작가로, 또는 20세기 최고의 종교화가로 불리는, 조르쥬 루오는 이렇게 중세의 스테인드글라스 조각으로부터 태동합니다

 

 
베로니카
 
 

Head of Christ  

 

 


 

 

 

조르쥬 루오 作 <상처입은 어릿광대>

 


인생은 광대같다는 말이 생각나는
루오의 그림입니다.
일생을 아주 가난하게 살았던 루오는
성스런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렸던 작가로 유명하며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면 이렇게 광대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며
그 이유로 인해 신앞에서 늘 광대처럼 살아가야하는
그런 나약한 존재를 표현했는지도 모를일이지요
아뭏던 루오는 가난하고 힘든 삶을
검정색의 두꺼운 윤곽선으로 표현하고 있답니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이 검은 윤곽선으로 포장되어 있고
그 검은색의 틀 속에 자신을 가둬 버렸는지도 모를일이지요.

루오는 마티스와 더불어 야수파의 대표적인 작가이며
작품의 소재는 두꺼운 마티엘을 이용하여 표현한 성화와
이렇게 인생을 광대에 비유하여
표현한 광대 그림이 그의 그림의 대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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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쥬 루오(1871-1958)  타바랭 무도회에서의 사위 춤 파리시립근대미술관 소장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 너를 긍휼히 여기는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54:10).



그리스도의 얼굴



1871년 5월 27일, 파리의 빌레트가 51번지의 지하실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납니다. 당시 파리는 정규군과 코뮨사이에 포격전을 벌인 혼란 속에 있었고, 사내아이의 집은 마침 두진영의 중간에 있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포성 속에서 산기를 느끼고 지하실로 달려가 이곳에서 아들을 낳는 것이죠. 가구 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난 아이는 어려서부터 예술적 재능을 나타냅니다. 그리하여 열 살 때부터 그림공부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열네살이 되던 해 때부터 공예미술학교 야간부에 다니면서 주간에는 스테인드 글라스 업자의 견습공으로 일하게 됩니다. . 처음에는 타모니 밑에서, 이어 이르쉬 밑에서 일하면서 적,청,녹색 '의 중세기의 옛 유리조각으로부터 눈부시고 그윽하고 신비로운 색광을 발견합니다. 아이는 이 색유리를 통해 중세를 알게 됐고 예술의 깊은 세계를 알게 됩니다.


마티스, 블라맹크와 함께, 흔히 야수파의 대표적 작가로, 또는 20세기 최고의 종교화가로 불리는, 조르쥬 루오는 이렇게 중세의 스테인드글라스 조각으로부터 태동합니다. (루오를 야수파의 작가로 분류하지만 사실, 여기에는 다소의 문제가 있어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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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오는 1902년 이후 무서운 정열로 일련의 창부들을 그리게 된다. 이 작품은 그 중에서도 유명한 작품이다.

 

그는 많은 나체의 창녀들을 그리고 있는데 그들의 고달픈 삶의 탓일까? 모두가 노기(怒氣)가 서린 표정들이다.

 

이 작품 역시 냉정한 입장에서의 사회 관찰이나 비판성은 전연 찾아볼 수 없다. 오직 노기에 찬 격렬한 고발심과 격정적인 분위기를 표출하고 있다.

 

이 작품이 단숨에 그린 수채화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드가나 로트렉도 나부를 많이 그렸지만 화면에서 풍기는 냄새가 전연 이질적으로, 루오 특유의 세계가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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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앞의 娼婦




루오는 서커스의 광대,가난한 자들,위선의 권력자들을 그렸지만 그 중에서도 창녀를 소재로 한 20여 점이 특히 강렬합니다.19세기말은 매춘이 범람하고 있던 시절입니다.도시 산업화가 급속하게 이루어지면서 농촌 인구의 도시 유입이 급증하였지만 일자리는 거의 없었고,여성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손쉬운 길은 매춘이었던 것이죠. 그들은 극심한 가난 말고도 성병으로 시달려야 했고,거리에 나설 수 있는 것은 불과 몇 년,성병에 걸렸을 때는 격리 당해야 했지만 같은 처지의 남성들이 통제되지 않은 상황인지라 그들은 일방적 피해자 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루오가 창녀를 그리기 시작한 시점과 동기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어느 순간 그들에게서 전율하는 듯한 내면의 고통을 느꼈다고 밝인 바 있습니다. 거울 앞의 저 창백한 나신은'그림에서 추구하는 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표현'이라는 말이 새삼 떠오르게 합니다. 냉정한 입장에서의 사회 관찰이나 비판성보다는 노기에 찬 격렬한 고발심과 격정적인 분위기를 표출하고 있는 듯 보이는 이 작품은 단숨에 그린 수채화라고 합니다.



우리들의 쟌(쟌 다르크),1948~49,파리 개인 소장,판 유채



대전이 끝나고 프랑스는 나찌스에게 유린당했다가 해방이 됩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누구보다도 조국을 사랑한 루오의 마음 속에 구국의 성녀 쟌 다르크 상이 강하게 의식되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쟌 다르크는 구국의 영웅으로서보다는 오히려 수난의 사람으로서의 강렬한 의지와 깊은 고뇌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청, 적, 족, 그리고 강한 흑색을 쓰고 있으며, 그 콘트라스트도 강렬합니다. 깎아 내고 그리고 깎아내고 다시 그리기를 2년이 걸린 작품이라고 하며 배경은 이 시기에 꾸준히 그린 그리스도가 등장하는 풍경화와 비슷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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娼婦


조르쥬 루오는 창녀와 같은 하층민의 분노를 거칠게 그렸다.

루오를 가리켜 ‘격정적인 서정주의 화가’라고도 일컫습니다. 20세기 벽두에 순수 색조의 격정적인 붓놀림을 구사하면서, 기존의 미학적 기준에 구애받지 않고 기독교 미술을 현대라는 시대적 상황에 맞게 해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대담한 표현, 굵은 선, 직접적인 묘사 등은 루오만이 갖는 회화적 특징들로 규정됩니다. 유화나 판화에서 원색이나 강한 색채의 대비가 발견되지는 않지만 덩어리 중심, 단순한 구성, 힘찬 선 등은 어릴 때 쌓은 스테인드글래스의 조형적 훈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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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야수파에 속하지만 루오는 동료 화가들과 구별되는 점이 있습니다. 동료들의 작품이 헬레니즘에 의한 인본주의에 기초한다면, 루오는 헤브라이즘에 의한 신본주의에 근거합니다. 그는 스스럼없이 스승인 모로보다 복음의 화가인 렘브란트를 더 존경한다고 말했습니다. 작품에서는 모로의 영향을 받았지만, 정신력에서는 렘브란트를 선망하고 예수를 마음에 모시고 살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가 작품에서 다룬 인물들은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들, 천한 신분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광대, 창녀, 호객꾼, 피난민 등을 주로 그렸죠. 검은 필선과 두터운 질료감을 살려 우직하게 표현했고 제작 기법도 특이했습니다. 캔버스에 물감을 바르고 일정 시간이 지나 칼로 긁어낸 후 다시 그 위에 물감을 덧입히고 또 긁어내는 작업을 반복했던 것이죠. 화면 바탕이 거칠고 둔탁하게 보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그의 20대의 작품으로 엄격한 형체를 내세우고 있으며, 대자연의 엄숙하고도 고고한 자세를 인간적인 의미에서 관찰하며 표현하고 있습니다. 1900년경부터 렘브란트 풍의 종교화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며, 이와 같은 대담한 필치의 수채화가 등장하게 됩니다.



북을 치고 있는 道化師
 
 

 

소가족


주제 면에서도 정답고 고상하며 예쁘고 사랑스러운 것들이 모두 빠져 있습니다. 무섭고 추악하며 고뇌하는 인간, 밑바닥으로 추락한, 혹은 벼랑 끝에 몰린 위기의 인간상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루오는 ‘어둠의 화가’라는 달갑지 않은 평을 들어야 했다고 합니다.

이 작품은 루오가 사망했을 때 아틀리에에 방치되었던 작품으로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을 미완성 상태로 버려 두었던 것입니다. 물론 서명이나 연대도 없습니다.

 

대작을 별로 안 그린 루오에게는 예외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대작이다.

 

높이만 2m가 넘는다. 원래 이것은 규도리 부인에 게서 의뢰받은 다피스리를 위한 그림이다.

 

매우 감동적인 표현이다. 상처 입은 가족 중의 한 사람을 두고 서로가 위로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생활의 고통을 나누려는 표정은 무한한 인간의 사랑을 말해 주는 듯, 아니 보다 더 종교적인 차원에까지

 

끌어 올리고 있다.

 

필경 루오는 이와 같은 슬픈 사연의 사람들을 등장시키고 있는데, 궁극적으로는 그것에서 인간의 참다운

 

행복과 사는 보람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깃털 모자를 쓴 여인




이 작품에와서 그의 화필은 노기가 다소 누그러집니다. 화면은 명랑하고 필치는 리드미컬 합니다.



유객(誘客)



그의 정신적인 세계가 철저하게 화면을 뒷받침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곡마단은 서구 작가들이 즐겨 그리는 소재입니다. 쇠라, 피카소나 드가, 로트렉 같은 작가들이 특히 즐겨 그렸던 소재죠. 이 장면은 손님을 유치하기 위하여 간단히 그들 특유의 흥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왼쪽 구석에는 도화사가 서 있는데 그는 난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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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씨
 
 
쟉 보노무

루오의 작품 가운데서 수작으로 평가받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이것은 어느 특정인을 모델로 해서 그린 것이 아니라 그의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것이라 합니다. 그가 어느날 친지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나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X씨는, 사람들이 그가 죽었다고 생각할 때면 나에게 소생되어 나왔습니다. 내가 그를 잊고 싶어 그리스도의 태형을, 때로는 도화사나 창부들을 그렸던 것입니다. 혹은 풍경이나 현실에서 패배한 군상들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나의 마음속에 항상 자리잡고 있습니다.' .



X부인




예리한 관찰력과 풍부한 소묘력이 빛나는 작품입니다. 루오가 이사를 하는 날, 의사 지라루단이 와서 도와주자 그 사례로 '어느 것이나 당신이 마음에 드는 것을.' 하고 건네준 작품이라고 하는데, 이것 역시 연대나 서명이 없습니다.



풍경



1911년 루오는 교외로 이사를 합니다. 이 시기를 고비로 여러 장의 전원풍경을 남기는데요, 공원 또는 한적한 농촌의 풍경들입니다. 필치는 무척 경쾌하고 대개의 경우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분위기가 감도는 작품이며 세잔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특기할 것은 루오 특유의 암색조에서 경쾌하고 밝은 화면으로 변화한 점입니다.



겨울(풍경)




제 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수년 전부터 루오는 많은 풍경화를 수채로 그렸는데, 그 대부분은 20×30cm의 소품들입니다. 경사진 언덕과 도로, 수직으로 된 나무들, 지극히 의도적인 구성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구성적 의식은 후일에는 거의 찾아보기가 어려워집니다.



누추한 집



이 작품은 실내의 모자상인데 어머니가 병고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무심한 어린이의 안면과 대조를 이루면서 한층 더 드라마틱한 효과를 이루고 있습니다.



개혁자



제 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해서 약 10년 동안 루오는 수채화로 인물화(소품)를 많이 그렸습니다. 그 주제는 거의 가난한 사람들(남녀) 때로는 관리, 교육자 등을 등장 시키고 있죠. 굵은 윤곽선으로 그린 이 작품은 과거에 있었던 고발적 정신이나 노기에 찬 열기에서 벗어나 지극히 냉소적인 자세입니다. 종교 개혁자 로터를 모델로 그린 모양인데, 화면 오른쪽 아래로 '폰 루터'라고 쓴 것을 보면 그 교만한 표정으로 보아 전형적인 독일인을 꼬집은 듯 싶습니다. 이 작품이 그려진 것은 1915년, 그러니까 전시 중으로 독일에 대한 반감을 노출시키고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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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외의 그리스도




쓸쓸한 집, 지평선으로 이어지는 길 저편의 달, 길은 달빛을 받아 환합니다. 도화사들이 그들의 생활에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갔을 때, 그 고요의 대기 속에는 항상 예수가 함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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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로루오



루오가 그린 피에로 작품 가운데에서 온화한 표정을 가진 그림입니다. 어둡게 처리된 배경에 안면이 부각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루오 자신의 모습일 것입니다. 언뜻 무표정 하면서도 어딘지 쓸쓸한 분위기 이러한 구성은 만년까지 계속되는데 전체적인 색감, 공간의 처리 등의 많은 변화를 겪습니다.



성탄절의 풍경




민가의 지붕에는 잔설이 희게 비치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한없이 적막한 풍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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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꾼의 제자(자화상)



54세 때 작품입니다. 이미 50 고개를 넘은 연령에도 불구하고 14세의 순진한 소년상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린다는 기술에 앞서 작가의 심적 충동이 크게 작용한 작품이라 보여집니다.




상처를 입은 道化師




상징적이면서도 설화적인 내용입니다.  설화 속에 등장하는 달, 구름, 도화사의 의상과 표정들이, 보면 볼수록 인생의 끝없는 이야기를 도란거리고 있는 듯 싶습니다. 앞의 두 사람은 기운없이 눈을 아래로 뜨고 있으며, 키가 작은 뒷사람은 앞을 뚫어질 듯이 쳐다보고 있습니다. 상단 부분에 안면을 내보이는 인물은 누구일까요? 도화사는 아닌 듯 한데...



법정에 나온 그리스도




맑은 표정을 가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 주위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의연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남녀 하나하나가 모두 윤곽이 다르고 인상이 다릅니다. 그들은 천사의 얼굴도 아니요, 사도의 얼굴도 아닙니다. 피고와 증인 같은 세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인상이 험상궂게도 보입니다.



소가족



대작을 별로 그리지 않았던 루오에게는 예외라고 할 수 있을 작품입니다. 높이만 2m가 넘는다고 합니다. 의뢰받은 그림으로 상처 입은 가족 중의 한 사람을 두고 서로가 위로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聖顔(성안)




그리스도가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는 도중 한 여성이 수건으로 땀을 닦아 줍니다. 이상하게도 그 수건에 그리스도의 상이 찍혀 사람들은 이것을 기적이라고 부르면서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하지요. 이 때의 그리스도의 모습을 성안이라고 한다는데, 루오는 여러 장의 성안을 그렸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 작품은 파리 국립 근대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지극히 종교적인 걸작입니다.



푸른 새



전쟁 중 연극계에서 명성을 얻은 여배우 마리아 라니가 모델입니다. 고개를 약간 갸우뚱한 자세로 눈을 아래로 깔고 있는 이 미녀는 루오 자신이 화면 윗부분에 표기해 둔 바와 같이 '푸른 새'를 상징적으로 그리면서 화면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저녁놀



루오는 1937년부터 39년까지 많은 풍경화를 그렸습니다. 1920년경에 그린 <교외의 그리스도>, <성탄절 풍경> 등에 비하면 화면이 맑아졌습니다. 이미 그의 풍경화는 시각의 자연에서 심각의 자연으로 변해 온 것입니다. 구도나 여기 등장되는 건물, 인물들은 물론이지만 광선 처리나 화면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종교인으로서의 심각적 감정에서 솟아난 새로운 차원의 세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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受難(수난)에서(같은 밤 함께 죽어)




핏빛으로 물든 골고다 언덕 아래로부터 달이 떠오르고 있습니다. 은은한 광선은 하반신을 비추고 화면 구석구석에까지 드라마틱한 처리가 가해졌습니다. 화면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마치 액자의 테두리 같은)부분의 수법은 주인공들을 돋보이게 하는 데 효력을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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受難(수난)에서(무게도 부피도 없이 그는 나간다)

 


 

 

受難(수난)에서

 

화면에 골고다 언덕은 가운데, 그리고좌우로 십자가가 그려 있을 뿐 언뜻 보아 적적하고 음산하고 무섭다. 십자가는 하늘을 향해서 치솟아 있을 뿐, 모든 지상의 든다.

 

우리 나라에서도 시화전이 가끔 열리고 있으며 앞으로도 열릴 것이다. 그런데 화가가 작가의 뜻을 표피적(表皮的)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이라면, 루오의 작품은 인간의 예술적 영감의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는지 모르겠다.

 

그저 루오의 그림이 심원하고 신비롭기만 하다. 후일 다시 보게 되면 필경 새로운 양상으로 감명을 받게 될 것이다.

 

(여기서 이 세상은 없어지고 새 세계가 탄생했다)

 



 


늙은 왕,1937,캔버스에 유채, 77*54cm,피츠버그 카네기 미술관
 

노왕(老王)의 표정은 몹시 침통하다.이 작품에서는 왕의 권위나 위신 등은 찾아볼 수 없다.

왕관 그리고 화려한 의상에서도 그와 같은 허영심은 없다. 마치 <수난의 그리스도> 나 <상처입은 도화사> 상과

일맥 상통하는 인간상이다.

신비롭게 가라앉은 화면 처리는 마치 중세 시대의 없는 것을 보면 다시 가필하려는 작가의 고원(高遠)한

인간상을 물씬 느끼게 된다.  

한편 이 작품은 루오 인간상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작가의 정신 내부를 잘 표현한 걸작이다.

 
 

여기에 그려진 왕은, 무언가를 상실하고 있는 듯한 비애감을 주고 있습니다. 늙은 왕 이라는 명제로 미루어 생각한다면, 여기서 왕이 상실하고 있는 것은, 과거의 젊음과 야망 혹은 미래에 도전했던 원대한 꿈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어떻든 이 작품의 왕은 화려한 복장이긴 하지만, 결국 한 인간의 모습으로 비쳐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서커스 단원을 그릴 때의 루오의 눈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습니다. 청록색을 주조로 한 화면에는 왕의 빨간 복장이 눈부시고, 그 두 색조의 대비가 또한 강렬합니다. 루오가 일찌기 배웠던 고딕기의 스테인드 글래스를 연상시킬 정도로 타는 듯한 선명한 색채와 검은 윤곽으로 구획된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강하게 눌러 붙인 페인트의 견고성은 이 작품에 기념비적인 요소를 부여하고 있지요.

루오에게 권력이란 부패이자 악이었었습니다. 그만큼 부르주아와 가진 자들의 탐욕과 위선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역사의 진보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그는 인간 본성의 변화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고 합니다.그의 작품들은 그가 살던 시대가 그만큼 소외,빈부 차와 같은 부르주아 사회의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난 시기였음을

증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도화사의 이야기 

 

                        

 



 


쟉 보노무



쟉 보노무는 농민을 가리키는 속칭입니다. 백의와 푸른 하의, 그리고 붉은 띠를 두른 이 사나이는 뒤에 무거운 짐을 지고 상반신을 약간 수그린 채로 걷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들의 보이지 않는 숙명을 대변해 주는 듯한 그림입니다.  멀리 지평선 위로 보이는 외딴 집 한 채 집의 흰 벽면은 인물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붉은 띠와 지붕이 또한 색채적인 조화를 형성하면서 한층 화면을 돋보이게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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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



루오가 처음부터 시도한 시리즈 피난 가운데에서도 대표적인 그림입니다. 루오는 그의 '독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피난하는 사람들, 그 모습들은 우리 세대의 모든 사람들의 상(像)이다. 사람들은 병마와 권태와 빈곤에서 벗어나려고 애쓴다. 그리고, 겨우 벗어나려고 하면 다시 재난이 닥쳐오며 급기야는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하지만 벗어날 수 없다. 아무 의욕이나 희망을 갖지 않은 피난자들은 얼굴을 숙이고 힘없이 걸어야 한다. 뒤를 돌이켜볼 여유도 없이, 그리고 많은 예언자들이 약속한 행복따위는 잊은 채 거닐고 있다.'




풍경(세 사람이 있는)



루오는 만년에 이르자 화포에 바른 유채 물감을 나이프로 깎아 내고 다시 바르는 기법을 버립니다. 따라서 화면은 울룩불룩하고 터치 자국이 더욱 생생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중기 작품의 특색인 문지른 듯한 색의 투명감은 없어지고 '용암과 같은 중후한 색채 덩어리가 조형의 수단으로 화하는 것입니다. 색채는 선명하고 밝으며 건강합니다. 이와 같은 분명하고 자신감에 넘치는 조형 의지는 그의 기나긴 고난 끝에 얻어낸 예술 경지와 독실한 신앙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저녁놀 2 

                       

 

 

                                                                            예루살렘 

                     

 

 

 

                                                                          풍경(세 사람이 있는) 

                         

 

 


 

 

북을 치고 있는 道化師

 

이 작품은 루오가 사망했을 때 아틀리에에 방치되었던 작품으로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을 미완성 상태로 버려 두었다.

 

물론 서명이나 연대는 없다. 1905년경 시작한

북을 두드리는 도화사의 모습이 주제가 되어 있다.

 

 

道化師(도화사) 빨간 코

 

관객들 앞에 나와서 웃음을 팔던 도화사들이 이제부터 자취를 감추게 된다.

주로 수채를 써서 그린 제 1기에 해당되는 작품 들은 인간 사회에서 최고로 노동을 강요당하던 비애와 슬픔에 얽힌 군상들이다.

 

그러다가 제 2기에 들어서면서 내면적인 변화가 점차 심화되어 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수채화가 아닌 유채화이다. 뿐만이 아니라 관중 앞에 나온 도화사도 아니다.

 

그의 억세고도 굵은 상과 그리고 강렬한 색채 및 표정 등은 전자보다 더욱 작가의 내면적인 상을 보여 주고 있다.

 

이와 같은 양식은 만년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그리스도교적 夜景

 

루오가 그린 수많은 풍경화 중에서 가장우주적인 작품으로 보여진다.

구도는 아랫부분에서 윗부분으로 장대하게 울려퍼졌고, 수 개의 원(圓)과 반원(半圓)의 포름이 화면 중심부에 위치해 루오 특유의 안정감을 나타내고 있다.

 

내면 세계를 표출 시키는 그의 회화 언어가 그러하듯 이 그림에 등장한 배, 바다, 달, 섬, 집, 수목 등은 달빛을 받은 달밤의 자연 현상을 시각 체험대로 재현시킨 것이 아니고, 그 실체를 보는 루오의 내면적인 세계, 즉 심각적(心覺的) 진실을 그린 것으로 해석된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티베리야스 호(湖)에서의 그리스도와 제자(그림 아랫부분)가 모티브인데, 신비스러운 빛과 검은 그림자 및 무한히 크고 넓은 화면이 어떤 영겁의 세계, 영원한 정신 세계를 표상하고 있다.

 

 

쟉 보노무

 

쟉 보노무는 농민을 가리키는 속칭(俗稱)이다. 백의와 푸른 하의, 그리고 붉은 띠를 두른 이 사나이는 뒤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상반신을 약간 숙인 채로 달이 떠 있는 밤에 어디론가 걸어 가고 있다.

. 모든 인간들의 보이지 않는 운명적이며 숙명적인 상(像)을 그는 이 그림을 통해서 대변해 주고 있다. 그리고 더욱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고독감이다. 멀리 지평선 위로 외딴 집이 한 채 서 있다.

 

집의 흰 벽면은 인물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붉은 띠와 지붕이 또한 색채적인 조화를 형성하면서 한층 화면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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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에서(두 궁전에 연한 이 인기(人氣)없는 길) 

 

 

수난에서(여기서 이 세상은 없어지고 새 세계가 탄생했다) 

 

 

수난에서(너희들은 이 세상의 어려움을 아느냐?)

 

 

수난에서(모든 이의 惡의 지식) 

 

 

수난에서(무게도 부피도 없이 그는 나간다) 

 

 

수난에서(풀에 샘물이 속삭이듯) 


 

그리스도 안에 모여 

 

                                                                          

 

 

                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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