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셔와 가꾼 아뜨리움/그림읽기

신 사임당의 그림

하늘타리. 2008. 12. 14. 22:46

 


◐---한국적인 서정과 감각, 세밀함이 돋보이는 신 사임당의 그림---◐



* 가지와 방아개비(종이에 담채, 33.2x28.5cm) *

신사임당은, 1504년인 연산군 10년,외가인 강릉 북평촌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아버지 명화는 사임당이 13세 때인 1516년 (중종11년)에 진사가 되었으나 벼슬에는 나가지 않았으 며, 기묘명현의 한 사람이었으나 1519년의 기묘 사화의 참화는 면하였습니다.서울에서 주로 생활한 아버지와는 16년 간이나 떨어져 살며, 아버지가 가끔 강릉에 들를 때만 만날 수 있었습니다.



* 수박과 들쥐(종이에 담채, 33.2x28.5cm) *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높았으며 어려서부터 경문을 익 히고 문장,바느질, 자수에 능숙하였으며,특히 시문과 그 림에도 뛰어나 여러편의 한시 작품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7세 때에는 화가 안견의 그림을 본떠 그렸을 뿐만 아니라 산수화와 포도, 풀, 벌레등을 그리는 데도 뛰어난 재주를 보였습니다.



* 어숭이와 개구리(종이에 담채, 33.2x28.5cm)*

19세에 덕수이씨 원수와 혼인했으며,그 뒤 남편의 동의를 얻어 아들없는 친정에 머물면서 서울 시댁과 율곡리를 내 왕 하였습니다. 이때 어머니로부터 여자의 도리와 더불어 학문을 배워 부덕과 교양을 갖춘 현부로 자라납니다.그러 던 38세가 되던 해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서울로 올 라오게 됩니다. 이때 사임당은 대관령 고개를 넘으며 시한 편을 읊으며 어머니를 향한 마음을 달랩니다.
* 대관령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 *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 길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 원추리와 개구리(종이에 담채, 33.2x28.5cm) *

사임당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그림은 40폭 정도인데 산수, 포도, 대나무,매화, 풀과 벌레등 다양한 분야의 소재를 즐겨 그리고 있습니다.또한 안견의 영향을 받은 그녀의 화풍은 여 성 특유의 섬세함에 매우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어 한국 제일 의 여류화가라는 평가를 듣고 있습니다.



* 양귀비와 도마뱀(종이에 담채, 33.2x28.5cm) *

38세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서울로 떠나온 뒤로,수진방 지금의 수송동과 청진동에서 살다가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 하였습니다. 그러던 이해 여름인 1551년, 남편이 수운 판관이 되어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로 떠났을 때,신사임당은 그리많지 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 맨드라미와 쇠똥벌레(종이에 담채, 33.2x28.5cm)*

사임당의 자녀들 가운데 그의 가르침과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이 셋째 아들 이이입니다. 이이는 그의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하였는데, 그는 여기에서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정결한 지조, 순효한 성품 등을 소상히 밝히고 있 습니다.이렇게 현모로서의 사임당은 아들 이이를 백대의 스승으 로, 아들 이우와 큰딸 이매창을 자신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키워냈습니다.



* 산차조기와 사마귀(종이에 담채, 33.2x28.5cm) *

풀과 벌레를 소재로한 그림들 외에도 현재 채색화, 묵화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는데,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수십 점이나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후세의 시인과 학 자들은 그녀의 그림을 한결같이 극찬하고 있는데, 그윽하고 정갈하다는 평가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명종 때의 어숙권은 그녀의 예술적 재능을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안견의 다음 간다'" 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는 조선왕조가 요구하는 유교적 여성상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한 여성이라 평가 할 수 있습니다.또한 그런점에서 500년이라는 시공을 뛰어 넘어 현대에 와서도 본받을 만한 어진 어머니 상으로 칭송 받는 이유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