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어릴적엔(1960년대~70년대) 동네의 골목길이 참 커 보였었다. 학교 갈 때 집을 나오면 이리저리 구부러진 이웃집 담사이로 생겨난 골목길에 동네 친구들이 등교길에 뱉어놓는 왁자지끌한 이야기 소리가 갈데없이 막혀버린 메아리처럼 웅웅거리곤 했었다.
그 골목길엔 쌀 배달하는 아저씨의 커다란 짐자전거도 다녔고 자그만 수레에 생선을 담은 머리에 흰수건을 둘러쓴 아주머니 모습도 있었다. 그리고 좀 넓은 담벼락 한켠에는 나무판으로 가판대를 만들어 '뽀빠이','라면땅','자야'등 우리나라 최초의 인기 인스탄트 과자들을 잔뜩 쌓아 놓고 동네 코흘리개 아이들을 유혹했던 구멍가게 아저씨의 미소도 있었다.
주거문화가 바뀌어 대부분이 아파트에 살고있는 요즘의 도시에서는 잘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일 것이다.
그래도 오래된 도시의 중심부에는 골목길이 아직 남아있기도 하다. 그중 하나가 경남 마산의 창동과 오동동의 골목길이다. 마산의 창동과 오동동은 지금은 상권을 이웃한 창원과 다른 곳에 빼앗겨 버렸지만 60년대에서 90년대 초반까지는 경남 최고의 상권을 자랑하던 곳이다.
마산은 리아스식 해안을 끼고 있어 태풍의 피해가 적고 파도가 잔잔해 일제강점기시대에는 많은 수의 일본인들이 모여들어 일본인들의 거주지역으로 개발되어 상권이 형성되었고 특히 박정희 정부의 1970년대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에 힘입어 자유수출지역이 마산에 들어서자 경남뿐 아니라 전국의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얻고자 마산으로 들어오게 되어 창동과 오동동은 크게 번영했었다.
그 당시 창동과 오동동의 골목길에는 밤늦게까지 사람들로 붐비었었고 노래소리가 끊이지 않았었다. 특히 크리마스 전야에 통금이 해제되면 길을 걸어갈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창동거리로 쏟아져 나와 서울 명동이 부럽지 않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웃도시인 창원의 급격한 발전으로 많은 젊은층들이 창원으로 옮겨갔고 마산시내에서도 상권은 경남대가 있는 신마산 댓거리 지역과 시외버스터미널이 위치한 합성동으로 분산되어 지금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건물이 노후화되고 주차공간이 부족하여 젊은소비층을 끌어들이기 쉽지않아 마산시와 창동,오동동의 상인들이 옛시절의 번영을 되살리고자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모았고 창동과 오동동의 각 구역을 문화와 먹거리에 따라 특색있게 꾸며 이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단순한 의류나 먹거리등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역의 이색적인 문화퍼포먼스를 보여주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이른바 '공공미술'이란 개념을 도입하여 삭막한 모습의 도심을 미술을 통해 문화가 있는 도심으로 거듭나게 하고자 모인 젊은 미술인들의 단체인 '프로젝트 쏠'과 뜻을 같이하게 되었다. '프로젝트 쏠'은 지자체나 상인들이 만든 단체가 아니라 미술을 전공하는 전문미술인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실내에 안주해 일부를 위해 창작하는 미술이 아닌 열린공간에서 모두를 위한 미술을 창작한다는 취지로 2006년 9월에 탄생된 순수 '민간문화단체'이다.
이 미술인들과 지역 상인들이 뜻을 함께 해 죽어가고 있는 마산 도심을 살리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프로젝트 쏠'의 젊은 미술인들은 위치에 따라 '통술골목','아귀찜골목','창동골목'으로 명명된 곳곳을 특색에 맞게 정감있고 생동감있게 채색해 가고 있다.
골목길마다엔 지역 시인들의 시가 있는 벽화가 그려지고 가로등은 새롭게 치장되어 하나의 조각품으로 거듭나고 있다. 어두침침하고 냄새나던 도심의 뒷골목길에 생기가 돌고 미술의 향이 느껴지게 되자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은 역시 이 곳을 찾는 시민들이었다. 가끔씩 창동을 찾는다는 40대의 한 아주머니는 "젊은 시절의 추억이 남아있는 이 거리가 점점 위축되어 가는 것이 안타까웠는데 골목길까지 이렇게 화사하게 바뀌니 너무 좋다"며 "앞으론 아이들과 좀 더 자주 창동으로 나와야겠다"고 즐거워했다.
물론 이 공공미술 작업에도 어려운점은 있다고 한다. 우선 대부분이 외지인인 건물주들의 승락을 받아내기가 쉽지않아 연속적인 작업이 힘들고 작업을 허락하였더라도 인부들이 페인트 공사하는 정도로 인식을 해 상업적인 것들로 요구를하는 건물주들이 대부분이라 그들을 설득하여 원래 계획대로 공공미술을 해나가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프로젝트 쏠'의 신종진 부장은 전했다. 또한, 그는 "지자체에서도 일회성 문화예술행사 보다는 공동화 되어가는 도심의 경제활성화와 시민들이 가까운 곳에서 미술을 접하게 하기위한 노력에 꾸준한 지원이 절실하다"고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창동상가번영회 관계자인 김경년 간사는 "허물어져 가는 창동의 상권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미술인들과의 윈윈전략은 필요했다"고 밝히며 "앞으로도 이 같은 문화마케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 시민들이 다시 찾는 창동거리가 되게하겠다"고 말했다.
70년대 하나 둘씩 생겨나 한때는 60여개 이상의 통술집이 있던 오동동 통술골목이 지금은 20여개도 채 남지 않아 명맥만 이어가고 있다
크게 개인의 이익이 되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공공미술 작업에 나서준 젊은 미술인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필자의 고향인 마산의 "아귀찜 골목","통술집 골목","창동 뒷골목"등이 새롭게 태어나고 있었다. 지나간 7~80년대의 영화를 찾기위함은 물론, 무너진 상권을 되살리려는 상인들의 노력이 미술과 접목되어 창동거리를 찾는 시민들에게 지속적으로 특별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신선한 문화공간으로 다가선다면 백화점이나 대형마트에 빼앗겼던 시민들의 발길을 다시금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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