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미술 이야기 - ‘겐지 모노가타리 에마키’
그림으로 그린 헤이안(平安)시대의 애정소설
일본미술, 겐지 모노가타리 에마키(源氏物語繪卷)
간무천황(桓武天皇)과 국풍문화(國風文化)
794년 간무천황(桓武天皇,737-806)은 율령정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수도를 교토(京都)로 옮긴다. 새로운 수도는 평화로운 세상이 오래 지속되길 바란다는 의미에서 平安京라고 불렀으며, 이 때부터의 약 400년 간을 헤이안(平安)시대라고 불렀다. 이 헤이안 시대 초기, 귀족은 중국풍(唐風)의 문화를 즐기고 있었으나 9세기말이 되자 당나라가 쇠퇴를 이유로 견당사(遣唐使)가 폐지되고, 대륙의 영향이 줄어들자 새로운 일본적인 문화가 일어났는데 이를 국풍문화(國風文化)라 한다. 국풍문화의 선두주자답게 9세기 중엽부터 히라가나(平假名)와 카타카나(片假名)가 사용되게 되었는데, 카타카나는 학자나 승려 등이 사용했었고, 한자의 초서체에서 나온 히라가나는 여자들이 주로 사용했었다. 한자를 주로 사용했었던 당시의 남자들과는 달리 여자들은 히라가나를 사용했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이나 기분을 자유롭게 일본어로 써서 표현할 수 있었고, 와카(和歌)뿐만 아니라 일기, 수필, 모노가타리(物語:이야기, 소설) 등도 많이 남겼다. 겐지 모노가타리 에마키(源氏物語繪卷). 이러한 연유로 병풍과 후스마 문 위의 그림의 테마를 일본화 시켜가고 있던 10세기 초반기에 일본말로 쓰여진 일본어 소설이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이런 것들 중 『타케토리 모노가타리(竹取物語)』와 『이세 모노가타리(伊勢物語)』가 있다. 이 새로운 장르의 문학은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에서 그 절정을 이루는데, 헤이안(平安)시대 여류 문학의 대표작으로 이 유명한 애정소설은 11세기초에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 978 (?)-1016)에 의해서 쓰여진 것이다.
여류문인,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
그리고 실제로 많은 문헌들에서도 작자가 무라사키시키부(紫式部)임을 증명하는 근거를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일본에서는 굳이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나 작자는 무라사키시키부(紫式部)라고 선뜻 대답한다고 한다. 무라사키 시키부일기(紫式部日記). 무라사키시키부(紫式部) 개인에 대해서는, 소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널리 사랑받은 데에 비해, 작자의 전기나 기록은 거의 없어 그 실태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다행히도 작자가 쓴 무라사키 시키부일기(紫式部日記)와, 무라사키 시키부집(紫式部集)의 두 권이 남아있어, 그녀의 생애를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긴 하지만, 이 역시 충분한 자료 역할을 할 정도는 아니다.(※무라사키시키부일기는 그녀가 궁녀생활을 할 때의 기록이고, 무라사키시키부집은 소녀시절부터 무라사키시키부(紫式部)가 적어서 모은 본인의 시집(詩集)이다.) 이 무라사키시키부(紫式部)가 몇 년에 태어나 몇 년에 사망했는지에 관해서는 분명하지가 않아서 설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여러 가지 자료를 종합해 볼 때 973년 출생하여 1014년 사망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고 한다. 그녀의 가족관계는 비교적 정확하게 알려져 있는데, 무라사키시키부(紫式部)는 중류계급 출신으로, 그녀의 가문에는 노래에 뛰어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겐지 모노가타리’ 애정소설작가,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
무라사키 시키부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와카(和歌)와 문장, 당시 남성의 필수 학문인 한문학에 대한 소양이 깊어,「사기(史記)」나 「백씨문집(白氏文集)」등의 한문 서적을 자유롭게 읽었다고 한다. 한편 가정적으로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 태어나자마자 곧 어머니와 사별해 의지하고 있던 언니도 요절해 버린다. 그 후, 999년에 귀족인 후지와라노 노부타카(藤原宣孝)와 결혼하여 딸을 출산하지만, 삼 년 후에 남편과 사별하게 된다. 누구보다도 그녀의 슬픔은 깊었고, 때로는 절망적인 기분을 맛보았을 것이다. 이러한 고뇌 속에서 여성이라는 것의 불행을 절실하게 느끼고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응시한 『겐지 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그리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겐지 모노가타리 에마키(源氏物語繪卷) 겐지 모노가타리. 주인공 남자의 두 여인간의 갈등으로 빚어지는 싸움 장면. 모노가타리(物語)라고 하는 허구의 세계를 통해서 귀족 사회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사랑과 고뇌, 이상과 현실을 묘사하고, 인간의 진실을 추구하려 하고 있다. 그의 놀라운 통찰력과 빼어난 글 솜씨는 작중 인물의 대화와 심중의 생각 등을, 교묘한 표현으로 묘사하고 있고, 사람의 내면을 파고 들어간다. 일반적으로 불교적인 영향이 배어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 이 작품은 히카루 겐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애정행각을 바탕으로 인과응보의 측면이 엿보인다. 즉 동양의 유교적 엄숙주의보다는 서양의 낭만주의와도 같은 정서가 있어서 당시의 상류층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았는지도 모른다.
겐지 모노가타리 에마키(源氏物語繪卷).
겐지 모노가타리 에마키(源氏物語繪卷). <겐지 모노가타리 에마키(源氏物語繪卷)>는 처음부터 미술에 대한 감식안을 가졌던 대 귀족 여인들의 취향에 맞춰져서 그림으로 그려졌다. 이 같은 궁중의 귀족적, 여성적 취향에 젖은 삽화미술은 소설보다 약 1세기 가량 늦게 만들어졌으나, 뛰어난 해석을 보여주는 이 <겐지 모노가타리 에마키(源氏物語繪卷)>시리즈에서 완벽한 단계에 이르렀다. 이 방대한 연속적인 에마키는 열 개로 이루어졌는데 원래 기다란 실생활을 묘사한 서사시 54장을 삽화로 만든 약 80 내지 90 장면을 그 내용으로 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것들은 13장에 대응하는 19 장면 뿐으로 나고야(名古屋)의 토쿠가와(德川)미술관과 토쿄(東京)의 고토(五島)미술관에 남아 있다.
겐지 모노가타리 에마키(源氏物語繪卷). 이 각각의 그림들은 같은 크기의 종이들에 세심하게 그려졌으며, 각각 소설의 중요한 대목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아름답게 장식된 종이에 초서체로 쓰인 글 대목들의 바로 뒤에 나타난다. 주제의 선택을 보면 화가는 주인공들의 행동을 묘사하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사건의 내용을 그림으로 전달하는 서정성과 감상적 분위기 묘사에 힘썼다. 각 장면들은 일반적인 서양식 투시법과는 매우 다른 특이한 투시법을 보여주고 있다. 즉 두루마리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퍼지면서 비스듬히 위에서 아래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내려다보게 구성된 것이다. 또 화가는 실내가 다 들여다 볼 수 있도록 지붕을 없애버리는 과감함을 보여주고 있다.
겐지 모노가타리 에마키(源氏物語繪卷). 인물묘사 또한 특이하여 작은 코, 가늘게 찢어진 듯한 선으로 표현된 눈, 입술은 작고 붉은 점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여기에서는 성격묘사나 사사로운 감정의 표현이라고는 전혀 보여지지 않고 있다. 이러한 형식적인 표현은 상류층 사람들의 감정을 최대한 절제되게 보이려는 고의성이 다분하다. 그러나 하층계급 사람들은 상당히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매우 대조적이다. 그래서 이 그림을 소유하고 찬미했던 상류층 사람들이 쉽게 이야기의 주인공들과 자신들을 동일시 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으로도 보여진다.
겐지 모노가타리, 주인공 히카루 겐지(光源氏). 세월의 무게 탓인지 군데군데 채색이 떨어져 나가서 비록 지금은 바탕의 종이가 다 보이게 되었지만 원래의 그림에서의 색채는 종이가 보이지 않도록 불투명하게 여러 번 두껍게 칠하였다. 또한 여자들의 매혹적인 긴 머리카락과 검은 관을 쓰고 있는 남자들의 머리모양은 전체 색조에서 검은 색조의 역할을 잘 보여준다. 다른 색채의 종류와 배열은 세심한 배려가 엿보이며, 각 장면들은 그 주제에 알맞은 색채가 주조를 이루게 된다.
겐지 모노가타리 에마키(源氏物語繪卷). 현존하는 초기의<겐지 모노가타리 에마키(源氏物語繪卷)>를 보면 작가가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에 의해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최초로 그려졌던 시기도 1119년 황제의 명에 의해 그려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나 현존하는 이 그림들이 과연 최초의 작품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길이 없다. 이후 겐지 그림들은 양식적인 발전을 거듭하지만 점차 형식화되고 도식화되어서 생명감이 없는 그림들 즉, 장식화로서만 남게 되는 불운을 안게 되었다. 지금도 많은 박물관의 장식장을 장식하는 <겐지 모노가타리 에마키(源氏物語繪卷)>들은 화려한 금채와 채색을 뽐내면서 감상자들의 묘한 감정을 자극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박물관을 나서는 사람은 겐지모노가타리 엽서를 한 두 장씩 사 들고 가는지도 모르겠다. 그 속에서는 우지공주가 슬피 울고 있기도 하고, 방황하는 겐지의 모습이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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