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블로거기자단팸투어

봉화여행 - 충재 권벌의 청암정과 닭실마을

하늘타리. 2017. 12. 3. 08:30

"아래의 포스팅은

 경북 산림휴양도시 봉화군과

친환경 울진군의

 문화 관광 맛집을 알리기 위하여

경북관광공사에서 초청하여 진행한 공공 팸투어에 참가 한 후

후기로 작성한 글입니다"


봉화를 갑니다.


치악휴게소에서 잠시 쉬고

 또 다시 열심히 달려 봉화를 갑니다.


36번 국도로 들어와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에 도착했습니다.

닭실마을 또는 달실마을로 널리 알려진 이곳은

현재는 안동권씨들이 모여 사는 봉화의 대표적인 집성촌입니다.
이 마을에 안동권씨들이 모여 살게 된 것은 충재(沖齋) 권벌(權橃, 1478~1548) 이후입니다.


권벌은 성균관 생원 권사빈(權士彬)과 파평 윤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밝았는데

 27세 때인 연산군 10년에 대과에 급제하였으나

연산군에게 직언을 올렸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내시 김처선의 ‘처’(處)자가 글에 있다는 이유로 취소되었다가

 3년 뒤인 1507년에 다시 급제하여 관직에 발을 들였습니다.


1519년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당하고

파평윤씨(坡平尹氏)의 터전이자 어머니의 묘소가 있던 유곡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13년 뒤인 1533년 복직된 뒤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고

68세 때인 1545년 의정부 우찬성에 이르렀습니다.

이 해에 명종이 즉위하면서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윤임 등을 적극 구하는 계사를 올렸다가 파직되었고,

이어 1547년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삭주로 유배되어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을길을 걸으며 골목을 기웃거려 봅니다.



종택인듯한 솟을대문채앞을 지나갑니다.
문인방과 문지방을 위로 아래로 활처럼 휘어 놓았습니다.

풍수적 해석으로는 낮에는 해가, 밤에는 달이 대문을 향해 들어오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대문의 바탕쇠는 길상자인 만(卍)를 좌우에 투각시키고

그 밑으로 한글로 수와 복자를 좌우문에 각각 투각시켰습니다.

아마도 당시의 장석은 아닐것이고

후대로 내려오는 어느날 안주인의 입김이 세졌을때

장석을 고치면서 한글로 수와 복자를 새기게 했을 것 같습니다.
내생각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담장너머로 사당인듯한 고택을 당겨 찍어보고 청암정으로 갑니다.


마을에서 오는 길에 있는 협문이 닫혀있어

 청암정으로 가기위해서는 270도를 빙돌아야 합니다.
각각의 지점에서 꾹꾹 눌러봅니다.




충재박물관입니다.

이 박물관이 지어지기 이전에도 유물각을 만들어 조상들이 전해준 유품을 보관해 왔습니다.


청암정을 둘러보고 나와서 들르겠습니다



문을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작은 3칸 건물이 바로 서재인 ‘충재’(冲齋)입니다.



그 옆에 있는 바위 위에 지은 정자가 청암정입니다.

커다랗고 널찍한 거북바위 위에 올려지은 丁자형 건물인 청암정은 휴식을 위한 것으로써

6칸으로 트인 마루 옆에 2칸짜리 마루방을 만들고

건물을 빙 둘러서 연못을 함께 조성하였습니다.


1526년에 지었다고 합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 청암정의 경치를 두고

“정자는 못 복판 큰 돌 위에 있어 섬과 같으며, 사방은 냇물이 고리처럼 둘러 제법 아늑한 경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청암정에는 충재의 친필 글씨말고도

퇴계 이황, 번암 채제공, 미수 허목 등 조선 중후기 명필들의 글씨로 새긴 현판이 여럿 걸려 있습니다.



그중 ‘靑巖水石’이란 현판은 미수 허목의 글씨인데,

옆에는 “미수가 임술년 4월에 글씨를 써서 보냈다.

그때 나이 88세로 심부름꾼이 떠나기도 전에 아프기 시작하였는데

그 달 하순에 세상을 떠나, 오호, 이것이 그의 마지막 절필이다” 하며

 글씨의 내력과 허목을 기리는 안타까운 마음이 적혀 있습니다.


23년 연하인 퇴계 이황은 그의 나이 65세에 이곳 청암정에 와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공이 깊은 뜻을 품었는데
좋고 나쁜 운수가 번개처럼 지나가버렸네.
지금 정자가 기이한 바위 위에 서 있는데
못에서 피고 있는 연꽃은 옛모습일세.
가득하게 보이는 연하(煙霞)는 본래의 즐거움이요
뜰에 자란 아름다운 난초가 남긴 바람이 향기로워
나같이 못난 사람으로 공의 거둬줌을 힘입어서
흰머리 날리며 글을 읽으니 그 회포 한이 없어라.


청암정을 나와 박물관으로 들어갑니다.


유품을 말리느라고 상당히 많은 부분을 내어 놓아 내부에서는 몇가지 뿐이 없습니다.


또 있다하더라도 후레쉬를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많이 찍지는 않았을 겁니다만

보관되어 있는 유물을 몇가지 언급한다면

예문관 검열로 있을 때의 『한원일기』(翰苑日記)와

1518년 부승지와 도승지를 할 때의 『승선일기』(承宣日記) 등

일기 7책을 일괄해서 ‘충재일기’라 하는데,

보물 제26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또 권벌이 중종에게서 하사받아 지니던 『근사록』(近思錄)은

고려시대인 1370년에 간행된 것이어서 보물 제26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또 권벌이 중종에게서 받은 책을 비롯해 15종 184책의 전적은 보물 제896호이며,

중종이 권벌에게 내린 교서와

이 집안에서 자식들한테 재산을 나누어줄 때 기록해놓은 「분재기」(分財記)와 「호적단자」,

1690년(숙종 16)에 그린 「책례도감계병」(冊禮都監稧屛) 등

고문서 15종 274점은 보물 제901호에,

충재와 퇴계, 미수 등의 서첩과 글씨 8종 14점 등은 일괄해서 보물 제90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박물관을 나와  돌다리를 건너 석천정사로 갑니다.



돌에 새겨진 이런 저런 글을 읽으며 가다




 문득 뒤돌아서 마을을 보면

 닭이 알을 품은 형국의 길지라고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게 됩니다.




휘몰아 감기는 물줄기속 바위에  비룡폭이라고 쓴 각자가 있고


지주암이라는 마애도 있습니다.


지주암은 황하의 중류에 있는 기둥모양의 돌을 일컫습니다.

격류속에서 우뚝 솟아 움직이지 않는 모습이 선비의 지조를 연상시킨다하여 자주  쓰입니다만

이정도 물살에는 어울리지 않을 듯 합니다.


그 앞으로 석천정사(石泉精舍)의 문이 있습니다.


석천정사는 충재의 큰아들 청암 권동보(靑巖 權東輔)가 1535년에 지은 정자로서,

권벌이 동문 밖에 쌓았다는 대(臺) 위에 지은 건물입니다.

정자라고는 하지만 전체 34칸의 큰 건물로,

학문과 수양을 목적으로 지었기 때문에 ‘정사’(精舍)로 이름 붙였습니다.


개울가로 익랑이 면해 있어

 마루의 창문을 열면 그대로 개울의 풍광이 가슴속으로 쏟아져 들어오니 선경이 따로 없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건물 뒤편 큰 바위의 한 면에는 ‘石泉亭’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고도 합니다.

내부는 들어가 볼 수가 없어 내성천 천변으로 내려가 이런 저런 편액을 찍어봅니다.


내를 가로지르는 이 하얀 넓은 바위에 백석량이라고 이름을 붙여 놓았습니다.


같은 곳을 몇장 더 찍습니다.




청하동천


‘靑霞洞天’은 충재의 5세손인 권두응의 글씨로

‘신선이 사는 마을’이라는 뜻입니다.
주사를 입힌 것은 서생들을 괴롭히는 도깨비를 쫒아내려는 뜻이라고 합니다.


광복직후 좌익세력에게 희생당한 봉화지역 우익인사들 160여명의 위령을 위한 기념비



청암정과 석천계곡 안내판 앞으로 옵니다.

통상 이곳으로 진입을 해서

계곡을 따라가다 석천정사를 만나고

다시 달실마을로 가서 청암정을 들르는게 보편적인 관람순서이지요.


멀지 않은 곳 삼계서원을 카메라에 담으며 버스에 오릅니다.

삼계서원(三溪書院)은 충재를 모신 곳으로

 1588년에 이곳 삼계리에 세워졌고 1660년(현종 1)에 사액서원이 되었는데

 1897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폐되었습니다.
1960년경, 일설에는 1951년에 다시 세웠는데

권벌의 위패가 봉안된 사우인 충정사와 강당인 정일당이 있습니디만

시멘트건물로 세워지고 관리가 조금 부실한듯 하였는데

현재 전면적인 개보수중이라고 합니다.


다시 올것을 기약하며 충재 권벌의 유적지를 떠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