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강화 갑곶돈대

하늘타리. 2016. 8. 29. 22:23

갑곶돈대
국가>사적
지정번호 : 306
소재지 : (23025)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룡길 26 (갑곳리)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 지역에 돌이나 흙으로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이다.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외적의 척후 활동을 비롯한 각종 수상한 정황을 살피고 대처한다. 적이 침략할 때는 돈대 안에 비치된 무기로 방어전을 펼친다. 조선시대 강화도 해안에 돌로 쌓은 돈대 53개가 설치됐다. 갑곶돈대는 1679년(숙종 5) 5월에 완성된 48돈대 가운데 하나이다.
48돈대는 황해도·강원도·함경도 승군 8,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262명이 80일 정도 걸려서 쌓았다. 돈대 축조를 기획하고 감독한 이는 병조판서 김석주였고 실무 총괄은 강화유수 윤이제였다. 갑곶돈대는 망해돈대·제승돈대·염주돈대와 함께 제물진의 관할 하에 있었다. 외부에서 강화로 들어오는 관문과 가까워 중요성이 더욱 강조된 돈대이다. 포좌가 있는 본래의 갑곶돈대는 옛 강화대교 입구의 북쪽 언덕에 있었다. 지금 사적으로 지정된 갑곶돈대는 제물진과 강화 외성의 일부이다.

[참고문헌] 육군사관학교, 『강화군 군사유적 지표조사보고서(돈대편)』 육군박물관 유적조사보고 제6집, 1999. 문화재관리국, 『강화전사유적보수정화지』, 문화재관리국, 1978. 강화군·육군박물관, 『강화도의 국방유적』, 2000. 배성수,
「조선 숙종초 강화도 돈대 축조에 관한 연구」, 인하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2.


강화전쟁 박물관

강화전쟁 박물관은 천혜의 지정학적 위치를 가지고 있어 역사의 고비 때마다 국방상 요충지역할을 수행하며 외세의 침략을 막아낸 강화의 호국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강화에서 일어났던 전쟁을 주제로 각종 전쟁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연구, 보존, 수집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소재지 : (417-942) 인천관역시 강화군 해안동로1366 번길 18



















































 갑곶리 탱자나무
국가>천연기념물
지정번호 : 78
소재지 : (23022)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동문로 119 (옥림리)


탱자나무는 주로 영·호남지방에 분포한다.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열매와 껍질은 약재로 사용되며 줄기에 가시가 나 있어 울타리용으로 적합하다. 민가에서는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는 벽사(?邪)의 의미를 담아 탱자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갑곶돈대 안에 있는 갑곶리의 탱자나무는 나이가 약 3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가 4.2m 정도다. 강화가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선이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강화도 해안가에 가시가 날카로운 탱자나무를 심어 적의 침입을 막고자 했다. 나라에서는 탱자나무 종자를 강화에 보내주고 그 생육 상태를 보고받을 만큼 탱자 울타리 조성에 관심을 보였다. 이 탱자나무 역시 방어 울타리용으로 심어졌던 것이 살아남은 것으로 보인다. 강화산성, 강화 외성 등과 함께 갑곶리 탱자나무 역시 나라를 지키기 위한 선조의 노력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강화문화원, 『강화 보호수지』, 2003. 강화군군사편찬위원회, 『신편강화사』, 2003. 문화재청 홈페이지






죽산 조봉암


한국전쟁을 앞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박헌영 외상은 김일성 내각 수상한테 호언장담했다. “조선인민군을 남조선으로 내려보내면 남로당원 20만 명이 호응할 것”이라고. 북한군은 전쟁 발발 나흘 만에 서울을 차지했지만, 박헌영이 장담한 ‘20만 명의 봉기’는 없었다.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의 리더십 덕분은 아니다. 이 대통령은 전쟁 발발 사흘째인 6월27일 새벽 2시 대전으로 피신했다. 그뒤에도 “서울시민은 정부를 믿고 동요하지 말라”는 이 대통령의 연설과 “서울을 사수한다”는 국군의 다짐이 라디오 방송으로 되풀이됐다. 6월28일 이른 새벽 국군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철교를 폭파했다. 당시 하나뿐인 다리였다. 다리를 건너던 500명 이상이 폭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렇게 한강 이북에서 인민군을 막던 병사들과 시민들을 팽개쳤다.

‘20만 봉기’ 부재의 비밀은 따로 있다. 알짬은 한국전쟁 직전 단행된 농지개혁이다. 역사가 알려주는바, 땅을 가진 농사꾼은 전쟁이나 혁명에 몸을 던지려 하지 않는다. 1945년 말 전체 경지면적의 35%였던 자작지의 비중은 농지개혁 실시 직후인 1951년 말에는 96%로 급증했다(전강수, ‘평등지권과 농지개혁 그리고 조봉암’, <역사비평> 2010년 봄). 지주제가 해체되고, 자작소농 체제가 성립됐다. 유랑하던 농민들은 자기 땅에 뿌리를 내렸다. 이들이 가족의 삶을 가꾸며 꿈을 키울 땅을 버리고, 전쟁의 이념에 목숨을 걸 이유가 있었을까?

농지개혁을 통한 자작소농 체제의 출현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해방된) 신생국 가운데 대한민국이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동시 달성한 예외적 국가로 발전한 역사를 해명할 열쇳말이다. 클라우스 다이닝거의 연구에 따르면, 토지가 공평하게 분배된 나라일수록 장기 경제성장률이 높다. 식량 증산, 교육 확산을 통한 우수 노동력의 양성, 신흥자본가의 출현이 용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셋은 자본주의적 공업화의 필수 요소로 불린다. 다이닝거에 따르면 한국은 대만, 일본, 타이 등과 함께 초기 토지분배가 가장 공평한 경우에 해당한다. “토지개혁으로 조그만 땅뙈기를 갖게 된 수많은 자영 농민들의 자발적 중노동과 창의력이, 그 말릴 수 없는 교육열이 오늘날 대한민국 자본주의 경제발전의 기적을 만든 에너지의 원천”이라는 분석(주대환, <대한민국을 사색하다>)은 정곡을 찌른 셈이다. 일제시대를 거치며 신분제가 해체된 데 이어 농지개혁으로 지주제가 무너지자 한국 사회는 사회이동의 용광로가 됐다. ‘다이내믹 코리아’는 이승만과 박정희가 만든 게 아니다.

한국의 농지개혁엔 농민층의 강력한 요구, 북한의 토지개혁(1946년 3월)과 그 영향을 차단하려는 미국의 적극적 역할, (지주세력 중심의) 한민당을 견제하려는 이승만의 정치 전략 등이 두루 작용했다. 하지만 농지개혁의 아버지는 따로 있다. 대한민국의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온갖 난관을 돌파하며 농지개혁을 기획·추진·집행한 조봉암이다.

죽산 조봉암이 누구인가? 조선공산당 간부로 일제에 맞서다, 해방 직후 박헌영의 좌경 노선을 비판하며 사상 전향을 선언했다. 그러곤 대한민국 제도정치에 뛰어들어 중도 노선을 걸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고, 1956년 5월15일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216만4천여 표를 얻어 이승만(504만6천여 표) 독재에 맞설 정치적 구심으로 떠올랐다. 그로부터 3년 뒤 ‘진보당 사건’을 빌미로 간첩죄로 사형선고를 받아 1959년 7월3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당시 ‘사법살인’이라 불렸다. 그는 2011년 1월20일 대법원의 무죄판결로 복권됐다. (한겨레신문 기사 전제)


천주교 갑곶 순교성지




옛 다리 입구 한국전쟁 양민 학살지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
 인천>기념물
지정번호 : 25
소재지 : (417-801)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1053번지

강화읍 갑곶리와 김포시 월곶면을 배로 연결해 주던 곳이다. 이곳은 정묘호란(1627) 당시 인조가 건넜던 나루터이다. 병자호란(1636) 때에도 봉림대군 등이 갑곶나루로 강화에 들어왔다. 청군이 침략해오자 갑곶나루 부근에서 황선신·구원일·강흥업이 적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병인양요(1866) 때에는 프랑스군이 이곳으로 상륙해 강화읍을 장악했다. 처음에는 나루터 시설이 없어서 사람들이 물속으로 수십 걸음 들어가 배를 타고 내려야 하는 불편함을 겪었다. 세종 때에 박신(朴信)이 공사 경비를 부담하고 마을 사람들을 모아 선착장 석축로를 쌓았다. 이후 약 500년간 강화와 뭍을 연결하는 중요한 나루로 쓰였다. 1920년경에 김포 성동리와 강화 용정리 사이에 나루터가 신설되어 옛 나루터는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광복 후 나루터 부근에 자동차를 나르는 도선장(導船場)이 생겨 이용되다가 1970년 강화대교가 건설되면서 두 나루터 모두 폐쇄됐다. 주변의 제방 공사로 인하여 원래의 시설들도 상당 부분 없어지고 말았다.
[참고문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웅진출판, 1997. 문화재청 홈페이지



강화통제영학당지
인천>기념물
지정번호 : 기념물49호
소재지 : (417-801)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 1061번지 외 4필지

통제영 학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로 말해진다. 조선수사해방학당, 총제영학당으로도 불렸다. 병인양요·신미양요·강화도조약을 겪은 조선정부는 해군 지휘관 양성을 목표로 통제영학당을 세웠다. 1893년 2월 기존의 수군편제를 근대식 해군체제로 개편하면서 같은 해 3월 해군사관 및 하사관 양성학교인 통제영학당 설립에 관한 칙령을 공포했다. 5월에 갑곶나루 인근에 교사를 신축하여 10월에 사관생도 50명, 수병 300명을 모집하면서 개교하였다. 영국 해군 대위 콜웰과 하사관 커티스가 교관으로 부임하여 교육하였으나 이듬해 발발한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등의 영향으로 교육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1894년 10월에 일본의 압박으로 폐교되었다. 구 강화대교와 신 강화대교 사이에 통제영학당지가 있다. [참고문헌] 강화군군사편찬위원회, 『신편강화사』, 2003. 강화군·강화문화원, 『총(통)제영학당지 학술조사보고서』, 2007. 문화재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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