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삼산면, 서도면 지역 제외)
제주역사문화연구소
송장환
시대속의 강화도
강화의 역사는 한반도 역사의 축소판으로도 불리울만큼 선사에서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두 갈래로 갈라진 물가에 있는 고을이라하여 갑비고차(甲比古次)로 불리어 오다가 고구려 때 혈구군(穴口郡)이 설치되었으며 수지현(首知縣)·동음내현(冬音奈縣)·고목근현(高木根縣)이 있었다.
이후 신라의 경덕왕이 해구(海口)라 고쳤으며, 수지현은 수진(首鎭), 동음내현은 강음현(江陰縣), 고목근현은 교동(喬桐)으로 바뀌었다. 그 후 문성왕이 혈구진(穴口鎭)을 설치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 초에는 열구현(冽口縣)이라고 불렀다고 하나 고려사 등의 기록에 의하면 서기 940 고려 태조때 강화현으로 개칭하였다고 하며 그 후 몽골 침입으로 고종 때에 수도를 옮기면서 한때 강도(江都)라 불리었다.
1995 경기도에서 인천광역시로 통합되었다.
역사
선사시대와 고대
구석기 유물인 쌍날찍개 및 신석기시대 토기가 발견 보고된 바 있으며, 청동기시대 대표적 유물인 고인돌 150여기 중 70여점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또한 삼국시대에는 혈구군을 설치했고, 불교의 유입으로 전등사를 비롯한 전통사찰이 창건되기 시작하였다.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에 항쟁하고자 강화로 천도함에 따라 강도(江都)로서의 면모를 강화 고려궁지를 갖추었으며, 국난을 극복하자고 강화 선원사지에서 고려대장경이 제작하였다.
고려시대 임시 수도로서 고려 왕릉(홍릉, 석릉, 곤릉, 가릉, 능내리석실분)이 축조되었으며, 충렬왕 12년(1286년) 문성공 안유가 공자상 봉안한 우리나라 최초의 향교(교동향교)가 있다.
조선시대
국방상 방어기지로서 성·진·보·돈대·포대 등 국방유적이 설치 되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왕실의 피난지로의 역할을 수행하며, 왕실족보 보관을 위한 선원보각과 실록보관을 위한 장사각으로 구성된 정족산 사고(史庫) 및 외규장각, 행궁이 설치되었다
숙종 때에는 12개의 진보와 53개의 돈대가 설치되었고, 강화산성과 강화외성이 개축되었으며, 강화를 중심으로 하곡 정제두 선생의 강화 양명학파의 학풍을 이루게 되고 대규모 간척사업이 진행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개항전후의 강화
수도의 관문에 위치하여 서구의 침략세력이 충돌하는 전장으로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양호 사건을 거치면서 항쟁과 개항의 중심에 있었으며
병인양요로 프랑스군에 의해 왕실의 의궤를 보관하던 외규장각 도서가 약탈되었고 개항 이후 서양종교의 수용과 함께 근대식 학교의 도입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인 통제영학당이 설립되었다
답사예정지
1. 강화읍
- 갑곶돈대
국가>사적
지정번호 : 306
소재지 : 강화군 강화읍 갑룡길 26 (갑곳리)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 지역에 돌이나 흙으로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이다.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외적의 척후 활동을 비롯한 각종 수상한 정황을 살피고 대처한다. 적이 침략할 때는 돈대 안에 비치된 무기로 방어전을 펼친다. 조선시대 강화도 해안에 돌로 쌓은 돈대 53개가 설치됐다. 갑곶돈대는 1679년(숙종 5) 5월에 완성된 48돈대 가운데 하나이다.
48돈대는 황해도·강원도·함경도 승군 8,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262명이 80일 정도 걸려서 쌓았다. 돈대 축조를 기획하고 감독한 이는 병조판서 김석주였고 실무 총괄은 강화유수 윤이제였다. 갑곶돈대는 망해돈대·제승돈대·염주돈대와 함께 제물진의 관할 하에 있었다. 외부에서 강화로 들어오는 관문과 가까워 중요성이 더욱 강조된 돈대이다. 포좌가 있는 본래의 갑곶돈대는 옛 강화대교 입구의 북쪽 언덕에 있었다. 지금 사적으로 지정된 갑곶돈대는 제물진과 강화 외성의 일부이다.
[참고문헌] 육군사관학교, 『강화군 군사유적 지표조사보고서(돈대편)』 육군박물관 유적조사보고 제6집, 1999. 문화재관리국, 『강화전사유적보수정화지』, 문화재관리국, 1978. 강화군·육군박물관, 『강화도의 국방유적』, 2000. 배성수,
「조선 숙종초 강화도 돈대 축조에 관한 연구」, 인하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2.
- 강화통제영학당지
인천>기념물
지정번호 : 기념물49호
소재지 :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 1061번지 외 4필지
통제영 학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로 말해진다. 조선수사해방학당, 총제영학당으로도 불렸다. 병인양요·신미양요·강화도조약을 겪은 조선정부는 해군 지휘관 양성을 목표로 통제영학당을 세웠다. 1893년 2월 기존의 수군편제를 근대식 해군체제로 개편하면서 같은 해 3월 해군사관 및 하사관 양성학교인 통제영학당 설립에 관한 칙령을 공포했다. 5월에 갑곶나루 인근에 교사를 신축하여 10월에 사관생도 50명, 수병 300명을 모집하면서 개교하였다. 영국 해군 대위 콜웰과 하사관 커티스가 교관으로 부임하여 교육하였으나 이듬해 발발한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등의 영향으로 교육이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결국, 1894년 10월에 일본의 압박으로 폐교되었다. 구 강화대교와 신 강화대교 사이에 통제영학당지가 있다.
[참고문헌] 강화군군사편찬위원회, 『신편강화사』, 2003. 강화군·강화문화원, 『총(통)제영학당지 학술조사보고서』, 2007. 문화재청 홈페이지
*갑곶순교성지
*조봉암선생 추모비
^ 조봉암 선생의 일대기
1899년 9월25일 강화군 출생
1913년 강화군청 근무
1919년 서울 상경 경성 YMCA 중학부 입학. 3.1운동 참여.
중국으로 건너가 상하이로 망명. 공산당에 참여
1922년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귀국.
1923년 ~ 1926년 조선공산당 조직 참여
1927년 한국유일독립당 조직(독립운동 단체 조직)
1932년 항일 운동에 연루 징역 7년, 출소 후에도 지하운동함.
1945년 해방직후 건국준비위원회 인천광역시인천부지부를 조직
1948년 재헌 국회의원 당선(인천부 을) → 인천부 갑 곽상훈
1948년 초대 농림부장관(농지개혁법 추진)
1950년 2대 국회의원 당선
1952년 제2대 대통령 선거 무소속 출마
1956년 진보당 창당, 제3대 대통령 후보 출마.
1958년 국가보안법 위반 간첩죄로 체포 2심에서 사형 선고
1999년 ‘죽산 조봉암 선생 명예회복 범민족 추진 준비위원회’ 주최 , 학술대회 개최
2009년 조봉암의 복권 노력과 독립유공자 신청
2010년 대법원 재심 결정(일반인을 국군정보기관에서 수사한 것은 위법)
2011년 간첩 협의에 대해 원심 파기, 무죄선고(1월20일)
한국전쟁을 앞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의 박헌영 외상은 김일성 내각 수상한테 호언장담했다. “조선인민군을 남조선으로 내려보내면 남로당원 20만 명이 호응할 것”이라고. 북한군은 전쟁 발발 나흘 만에 서울을 차지했지만, 박헌영이 장담한 ‘20만 명의 봉기’는 없었다.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의 리더십 덕분은 아니다. 이 대통령은 전쟁 발발 사흘째인 6월27일 새벽 2시 대전으로 피신했다. 그뒤에도 “서울시민은 정부를 믿고 동요하지 말라”는 이 대통령의 연설과 “서울을 사수한다”는 국군의 다짐이 라디오 방송으로 되풀이됐다. 6월28일 이른 새벽 국군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강철교를 폭파했다. 당시 하나뿐인 다리였다. 다리를 건너던 500명 이상이 폭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렇게 한강 이북에서 인민군을 막던 병사들과 시민들을 팽개쳤다.
‘20만 봉기’ 부재의 비밀은 따로 있다. 알짬은 한국전쟁 직전 단행된 농지개혁이다. 역사가 알려주는바, 땅을 가진 농사꾼은 전쟁이나 혁명에 몸을 던지려 하지 않는다. 1945년 말 전체 경지면적의 35%였던 자작지의 비중은 농지개혁 실시 직후인 1951년 말에는 96%로 급증했다(전강수, ‘평등지권과 농지개혁 그리고 조봉암’, <역사비평> 2010년 봄). 지주제가 해체되고, 자작소농 체제가 성립됐다. 유랑하던 농민들은 자기 땅에 뿌리를 내렸다. 이들이 가족의 삶을 가꾸며 꿈을 키울 땅을 버리고, 전쟁의 이념에 목숨을 걸 이유가 있었을까?
농지개혁을 통한 자작소농 체제의 출현은 2차 세계대전 이후 (해방된) 신생국 가운데 대한민국이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동시 달성한 예외적 국가로 발전한 역사를 해명할 열쇳말이다. 클라우스 다이닝거의 연구에 따르면, 토지가 공평하게 분배된 나라일수록 장기 경제성장률이 높다. 식량 증산, 교육 확산을 통한 우수 노동력의 양성, 신흥자본가의 출현이 용이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셋은 자본주의적 공업화의 필수 요소로 불린다. 다이닝거에 따르면 한국은 대만, 일본, 타이 등과 함께 초기 토지분배가 가장 공평한 경우에 해당한다. “토지개혁으로 조그만 땅뙈기를 갖게 된 수많은 자영 농민들의 자발적 중노동과 창의력이, 그 말릴 수 없는 교육열이 오늘날 대한민국 자본주의 경제발전의 기적을 만든 에너지의 원천”이라는 분석(주대환, <대한민국을 사색하다>)은 정곡을 찌른 셈이다. 일제시대를 거치며 신분제가 해체된 데 이어 농지개혁으로 지주제가 무너지자 한국 사회는 사회이동의 용광로가 됐다. ‘다이내믹 코리아’는 이승만과 박정희가 만든 게 아니다.
한국의 농지개혁엔 농민층의 강력한 요구, 북한의 토지개혁(1946년 3월)과 그 영향을 차단하려는 미국의 적극적 역할, (지주세력 중심의) 한민당을 견제하려는 이승만의 정치 전략 등이 두루 작용했다. 하지만 농지개혁의 아버지는 따로 있다. 대한민국의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온갖 난관을 돌파하며 농지개혁을 기획·추진·집행한 조봉암이다.
죽산 조봉암이 누구인가? 조선공산당 간부로 일제에 맞서다, 해방 직후 박헌영의 좌경 노선을 비판하며 사상 전향을 선언했다. 그러곤 대한민국 제도정치에 뛰어들어 중도 노선을 걸었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고, 1956년 5월15일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216만4천여 표를 얻어 이승만(504만6천여 표) 독재에 맞설 정치적 구심으로 떠올랐다. 그로부터 3년 뒤 ‘진보당 사건’을 빌미로 간첩죄로 사형선고를 받아 1959년 7월3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당시 ‘사법살인’이라 불렸다. 그는 2011년 1월20일 대법원의 무죄판결로 복권됐다.
5월20일 한국현대사학회가 출범했다. <동아일보>가 ‘한국 현대사 바로 세우자’는 이름으로 4차례에 걸쳐 기획 기사를 내보내는 등 보수 언론과 정치권의 관심이 뜨겁다. 이 학회는 “대한민국 60년의 발자취를 사실과 진실 그대로 서술”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들이 현대사의 중심에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 부국의 아버지 박정희’를 세우려는 노력의 1%만이라도, 농지개혁으로 대한민국 발전의 초석을 다진 조봉암 연구에 쏟아붓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다려보자.
(어느 신문기사)
-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
인천>기념물
지정번호 : 25
소재지 :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 1053번지
강화읍 갑곶리와 김포시 월곶면을 배로 연결해 주던 곳이다. 이곳은 정묘호란(1627) 당시 인조가 건넜던 나루터이다. 병자호란(1636) 때에도 봉림대군 등이 갑곶나루로 강화에 들어왔다. 청군이 침략해오자 갑곶나루 부근에서 황선신·구원일·강흥업이 적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병인양요(1866) 때에는 프랑스군이 이곳으로 상륙해 강화읍을 장악했다. 처음에는 나루터 시설이 없어서 사람들이 물속으로 수십 걸음 들어가 배를 타고 내려야 하는 불편함을 겪었다. 세종 때에 박신(朴信)이 공사 경비를 부담하고 마을 사람들을 모아 선착장 석축로를 쌓았다. 이후 약 500년간 강화와 뭍을 연결하는 중요한 나루로 쓰였다. 1920년경에 김포 성동리와 강화 용정리 사이에 나루터가 신설되어 옛 나루터는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광복 후 나루터 부근에 자동차를 나르는 도선장(導船場)이 생겨 이용되다가 1970년 강화대교가 건설되면서 두 나루터 모두 폐쇄됐다. 주변의 제방 공사로 인하여 원래의 시설들도 상당 부분 없어지고 말았다.
[참고문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웅진출판, 1997. 문화재청 홈페이지
- 강화전쟁박물관
소재지 : 강화군 해안동로1366 번길 18
강화전쟁 박물관은 천혜의 지정학적 위치를 가지고 있어 역사의 고비 때마다 국방상 요충지역할을 수행하며 외세의 침략을 막아낸 강화의 호국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강화에서 일어났던 전쟁을 주제로 각종 전쟁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연구, 보존, 수집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 강화 갑곶리 탱자나무
국가>천연기념물
지정번호 : 78
소재지 : 강화군 강화읍 동문로 119 (옥림리)
강화전쟁박물관옆
탱자나무는 주로 영·호남지방에 분포한다.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열매와 껍질은 약재로 사용되며 줄기에 가시가 나 있어 울타리용으로 적합하다. 민가에서는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는 벽사(辟邪)의 의미를 담아 탱자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갑곶돈대 안에 있는 갑곶리의 탱자나무는 나이가 약 3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가 4.2m 정도다. 강화가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선이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강화도 해안가에 가시가 날카로운 탱자나무를 심어 적의 침입을 막고자 했다. 나라에서는 탱자나무 종자를 강화에 보내주고 그 생육 상태를 보고받을 만큼 탱자 울타리 조성에 관심을 보였다. 이 탱자나무 역시 방어 울타리용으로 심어졌던 것이 살아남은 것으로 보인다. 강화산성, 강화 외성 등과 함께 갑곶리 탱자나무 역시 나라를 지키기 위한 선조의 노력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강화문화원, 『강화 보호수지』, 2003. 강화군군사편찬위원회, 『신편강화사』, 2003. 문화재청 홈페이지
*사기리 탱자나무 : 천연기념물 79호 화도면 사기리 135-10(이건창생가 버스정류장 건너편 48번 국도변)
- 강화 고려궁지
국가>사적
지정번호 : 133
주요시설 : 명위헌, 이방청, 종각
소재지 :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2 (관청리)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도읍을 개경에서 강화로 옮긴 1232년(고종 19)부터 다시 환도한 1270년(원종 11)까지 38년간 사용되던 고려궁궐터이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최우(崔瑀)가 군대를 동원하여 이곳에 궁궐을 지었다고 한다. 비록 규모는 작았으나 송도 궁궐과 비슷하게 만들고 궁궐의 뒷산 이름도 송악(松岳)이라 하였다고 한다. 강화도에는 정궁(正宮) 이외에도 행궁(行宮)·이궁(離宮)·가궐(假闕) 등 많은 궁궐이 있었는데, 이곳 강화읍 관청리 부근은 정궁이 있었던 터로 추정된다. 정문의 이름은 승평문(昇平門)이었고, 양측에 삼층으로 된 두 개의 대문이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廣化門)이 있었다. 승평문의 위치는 현재보다 100여m 남쪽인 용흥궁 입구 부분에 위치했다고 전한다. 강화의 고려 궁궐은 1270년 송도로 환도할 때에 몽골의 압력으로 모두 허물어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고려 궁궐터에는 강화의 지방 행정관서와 궁궐 건물이 자리를 잡았다. 강화의 궁궐은 행궁과 장녕전, 만녕전, 외규장각 등이 있었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 지금은 강화유수가 업무를 보던 동헌과 유수부의 경력이 업무를 보던 이방청 등 조선시대 유적만 남아있다.
[참고문헌] 문화재관리국, 『강화전사유적보수정화지』문화재관리국, 1978. 한림대박물관, 『강화 조선궁전지(외규장각지)』, 한림대박물관 연구총서 제25집, 2003. 김창현 「고려시대 강화의 궁궐과 관부」,『國史館論叢』106집, 국사편찬위원회, 2005. 강화문화원, 『강화 고려궁지 학술조사보고서』강화군, 2009
- 강화유수부동헌
문화재 구분 : 인천>유형
지정번호 : 유형문화제25호
소재지 :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2 (관청리)
조선시대의 강화유수가 집무를 보던 관아이다. 지방행정을 담당하는 관리인 수령이 집무를 하던 관아 건물을 동헌이라 하였다. 조선 후기 강화에는 개성, 수원, 광주와 함께 특별행정구역인 유수부를 설치하였고 종2품 당상관인 유수를 파견하였는데, 유수가 집무를 보던 중심 건물이 강화유수부동헌이다. 이 유수부동헌이 위치한 곳은 원래 고려 고종 때에 임시수도로 궁궐이 있던 곳이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그 자리에 강화의 행정관서가 자리를 잡았다. 이 건물은 여러 차례에 걸쳐 개축되었다. 조선 1638년(인조 16)에 유수 김신국(金藎國)이 개수하였고, 1769년(영조 45)에 유수 황경원(黃景源)이 현윤관(顯允觀)이라 명명하였다. 현재는 명위헌(明威軒)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당호는 당시의 명필이며 학자였던 백하(白下) 윤순(尹淳, 1680∼1741)의 필적이다. 건물구조는 정면 8칸, 측면 3칸의 익공계(翼工系)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바닥 중앙에는 대청마루가 깔려 있고, 동쪽에 1칸은 바닥을 높인 마루가 있다. 1977년 강화중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의 일환으로 개수되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참고문헌] 한림대박물관, 『강화 조선궁전지(외규장각지)』, 한림대박물관 연구총서 제25집, 2003. 강화군사편찬위원회,『신편 강화사』, 강화군, 200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웅진출판, 1997. 문화재청 홈페이지
- 강화산성
문화재 구분 : 국가>사적
지정번호 : 132
소재지 :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3번지 일원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1232년(고종 19) 강화로 수도를 옮겼을 때 처음 성을 쌓았는데, 그 때는 지금보다 규모가 작았다. 조선 전기에 개축하였는데,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숙종 때 전면적으로 성을 보수하면서 동락천 건너 남산까지 포함시켜 크게 확대하였다. 북산, 남산, 견자산으로 이어진 포곡식 산성으로 둘레가 7,122m이다. 4개의 대문, 4개의 암문(暗門), 2개의 수문(水門)이 있고, 북산과 남산 정상에 관측소이자 지휘소인 북장대, 남장대가 있었다. 장인대(丈人臺)라고도 불린 남장대는 1745년(영조 21) 강화유수 황경원이 세웠는데, 2010년에 복원되었다. 4대문 가운데 북문에는 원래 누각이 없었는데 1783년(정조 7) 강화유수 김노진이 누각을 올려 온전한 형태를 갖췄다고 한다. 남문은 1955년에 문루가 무너졌는데 1975년에 복원했고, 당시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이 ‘江都南門’ 편액을 썼다. 2003년 동문이 새로 세워지면서 모든 성문이 복원됐다. 동문은 망한루(望漢樓), 서문은 첨화루(瞻華樓), 남문은 안파루(晏波樓), 북문은 진송루(鎭松樓)이다. 성의 동쪽 부분은 많이 없어졌으나, 남쪽, 북쪽과 서쪽의 산자락 부분은 비교적 보존상태가 좋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이 들어왔고, 강화도 조약을 맺을 때 일본군이 들어오는 등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었다.
[참고문헌] 인천시립박물관·강화군, 『강화산성 지표조사보고서』, 인천시립박물관·강화군, 2007. 강화군·육군사관학교, 『강화군 군사유적 지표조사보고서(성곽·봉수편)』, 육군박물관 유적조사보고 제7집, 2000. 문화재관리국, 『강화전사유적보수정화지』, 문화재관리국, 1978. 강화군·육군박물관, 『강화도의 국방유적』, 2000. 강화군·인하대 박물관, 『강화산성 동문지 주변 도로개설구간 문화유적 지표조사 보고서』, 2002. 한울문화재연구원·강화군, 『강화산성 남장대지 유적』, 2011.
*북문
- 김상용순절비
문화재 구분 : 인천>기념물
지정번호 : 기념물35호
소재지 : 강화군 강화읍 강화대로 416 (관청리, 오치과)
조선 인조 때의 문신인 김상용 선생의 충의를 추모하고 기리기 위해 세워놓은 비이다. 김상용(1561∼1637) 선생의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으로 도승지·대사헌·형조판서·우의정을 역임하였다. 비문의 내용은 병자호란 때 김상용 선생이 왕실의 종묘와 빈궁·원손을 수행하여 강화로 피난 온 이후 강화를 수비하던 지휘부의 안일한 전투 준비에 대한 지적과, 강화성이 청에 의해 함락되고 김상용 선생이 손자와 함께 남문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순절하기까지의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비각 안에는 두 개의 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하나는 김상용의 증손인 김창협(金昌協)이 글을 짓고 김창집(金昌集)이 글씨를 써서 1700년(숙종 2)에 세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원래의 비문이 마모되어 1817년(순조 17)에 다시 세운 것이다. 구비와 신비의 내용은 차이가 없으나 후에 세운 비에는 새로 비를 세우게 된 연유와 년도, 찬자와 서자의 이름이 첨부되었다. 신비를 세우면서 구비는 땅에 묻었었는데, 1976년 신비를 현재의 자리로 옮기던 중 파묻혔던 구비가 발견되어 두 비를 함께 세운 것이다.
[참고문헌] 인천사연구소, 『강화충렬사지』, 강화충렬사유림회, 2005. 강화군·강화문화원, 『강화금석문집』, 2006. 문화재청 홈페이지
* 김상용
1561년(명종16) ∼ 1637년(인조15) 조선조 인조때의 문신이며 병자호란때 강화성 남문루에서 순절하여 충신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본관은 안동이며 자는 경택 호는 선원. 풍계. 계옹이며, 서울 출신이다. 돈령부 도정 극효의 아들이며 좌의정 상헌의 형이고 좌의정 정유길의 외손이 된다.
1582년(선조15)에 진사가 되었고, 1590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예문관 검열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강화선원촌:(현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로 피난하였다가 양호체찰사 정철의 종사관이 되어 왜군토벌과 명나라군사 접대에 공을 세움으로써 1598년에 승지로 발탁되었고 그 뒤 왕의 측근에서 전란중의 여러 사무를 보필하면서 성절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1년 대사간이 되었으나 북인의 배척을 받아 정주목사로 출보 이후 지방관으로 전전하다가 1608년(광해군 즉위년) 잠시 한성부윤 도승지를 지낸 뒤 계속 한직에 머물렀다. 1617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이에 반대하여 벼슬을 버리고 원주로 거처를 옮겨 화를 피했다. 인조반정 뒤 판돈령부사에 기용되었고 이어 병조 .예조. 이조의 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정묘호란 때에는 유도대장으로서 서울에서 지냈다.
1630년(인조8) 기로사에 들어가고 1632년 우의정에 발탁되었으나 늙음을 이유로 바로 사퇴하려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있다가 29차례의 사퇴요청에 겨우 허락이 내려졌다. 그러나 1634년에 다시 우의정으로 들어가 이듬해 6월에 영돈령(정일품직)이 되었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인조께서는 전 영의정 윤방에게 명하여 종묘사직을 받들고 늙은 신하들과 먼저 강화로 들어가게 하고 왕도 강화로 피난하려 하였으나 이미 적이 길을 가로막아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1637년 정월 적이 강화에 입성하자 선원선생은 남문에 올라 안쪽에 화약궤를 쌓아놓고 좌정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그의 뒤를 따르고자 하였다. 그는 모두 물러가라고 외쳤지만 서손 수전과 종자 한분이 끝내 물러가지 않았고, 별좌, 권순장 생원 김익겸이 함께 죽겠다고 애원하므로 할 수 없이 묵인하고 선원은 평소에 담배를 피우지 않았지만 갑자기 담뱃대를 가져오라고 하여 불을 당겨 화약궤에 불을 당겨 화약궤에 부치니 그 순간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누각은 산산히 공중으로 날아가 간곳이 없고 문루에 있던 사람은 자취도 찾을 수 없이 되었다.
이에 앞서서 계하에 있던 사람이 상용선생에게 "배를 마련해 두어 급할 때 대비하십시오"하고 권했으나 그는 "전하께서 적에게 포위당해 계시어 안후를 알수 없고 종묘사직과 원손께서 모두 여기 계시니 만약 불행한 일이 있으면 죽을 뿐이요. 어찌 살기를 도모한단 말이요" 하고 응하지 않아 그 뒤에는 아무도 감히 권하지 못했다. 상용선생은 위인이 성실 순후하고 겸손 신중하였으며 겉과 속마음이 한결같았고 덕이 높은 군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일찍이 외할아버지인 좌의정 정유길에게서 고문과 시를 배웠고 성훈화 이이의 문인으로서 황신 이춘영. 이정구. 오윤겸. 신흠 등과 친밀했으며 당색이 다른 정경세와는 도학으로서 사귀었다.
정치적으로 서인에 속하면서 인조초에 서인이 노서. 소서로 갈리자 노서의 영수가 되었다.
시와 글씨에 뛰어났는데 특히 서체는 이왕(이왕:진의 왕의지부자)의 필법을 본뜨고 전은 중체를 겸하였으며 평양의 숭인전비 및 풍덕군수 장인정의 비에 전액을 남기고 있다. 시조로 오륜가5장 훈계자손가 9편이 전한다.
한때 그의 죽음을 놓고 자분이 아니라 실화 때문이라는 이설이 있었으나 박동성. 강석기. 신익성 등의 변호로 정려문이 세워지고 1758년(영조3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강화 충렬사 양주 석실서원.정주 봉명서원. 안변 옥동서원.상주 서산서원 정평 모현사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는 (선원유고) 7권이 전하고 안동 봉정사에 보관되어 있다.
시호는 문충이다.
- 용흥궁
문화재 구분 : 인천>유형
지정번호 : 유형문화제20호
소재지 : 강화군 강화읍 동문안길21번길 16-1 (관청리)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재위 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 정기세가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하였다. 철종은 어렸을 때 이름이 원범(元範)이고, 정조의 아우인 은언군(恩彦君)의 손자이며,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廉氏)이다. 1844년(헌종 10) 회평군(懷平君)의 옥사에 연루되어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어 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부로 살았다. 당시 영조의 혈손으로는 헌종과 원범 두 사람뿐이었다. 1849년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으로 19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용흥궁은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내전은 정면 7칸, 측면 5칸이며, 별전은 정면 6칸, 측면 2칸인 ㄱ자형 집이다. 용흥궁은 창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을 따라 지어져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 든다. 경내에는 철종이 살았던 옛 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웅진출판, 1997. 문화재청 홈페이지
-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문화재 구분 : 국가>사적
지정번호 : 424
소재지 : 강화군 강화읍 관청길27번길 10 (관청리)
1900년에 한옥으로 지어진 대한성공회 성당이다. 대한성공회의 초대 주교인 고요한(Corfe,C.J.)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강화성당은 서유럽의 바실리카(Basilica)양식과 동양의 불교사찰양식을 과감하게 조합시켜 건립하였다는 것이 특징이다. 교회의 내부공간은 바실리카양식을 따랐고, 외관 및 외부공간은 한식 목구조와 기와지붕으로 되어있는 불교사찰의 형태를 따랐다. 성당의 전체적인 건물 배치는 서쪽에 출입문을 두어 서구 형태를 취하면서 전체적으로는 배(船)모양을 본 떠 뱃머리인 서쪽에는 외삼문 및 내삼문과 동종을 배치하고, 중앙에는 성당을 두었다. 후미에는 사제관을 배치하여 특이한 양식을 보여주며 우리나라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 목재는 압록강에서 운반해다가 사용하였으며, 경복궁 공사에 참여했던 대궐 목수가 건축을 맡았다. 입구 계단, 외삼문·내삼문·성당·사제관을 동남향 종축으로 배치한 외부공간의 구성이 불교사찰의 구릉지가람(丘陵地伽藍)과 비슷하며, 성당 앞마당에는 큰 보리수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외삼문, 솟을대문은 팔작지붕으로 담장과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 칸에는 초대 사제(司祭)의 묘비가 서 있다. 내삼문은 평대문에 역시 팔작지붕이고, 서쪽 칸은 종각으로 쓰이고 있으며, 성당은 정면 4칸, 측면 10칸의 바실리카식 평면구성이다. 성당 내외부에는 서양식 장식이 거의 없는 순수한 한식목조건축이면서도 교회기능에 충실한 내부공간을 연출함으로써, 초기 성공회 선교사들의 토착화 의지가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 역사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성당건물이다.
[참고문헌] 문화재청, 『성공회 강화성당 實測調査報告書』, 문화재청, 200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웅진출판, 1997. 『韓國聖公會史槪觀』대한성공회출판부, 1980. 김정신, 「初期 韓國聖堂建築의 土着化에 관한 硏究」,『建築士』173호, 1983.
- 연무당옛터
강화산성 서문 건너편에 있는 연무당은 1876년 강화도조약이 최종 조인된 장소로 이 곳에서 체결된 강화도조약에 의해 우리나라는 부산, 인천, 원산을 일본에게 개항하였다. 고종 7년에 창건된 연무당은 본시 지금의 상 시장 군 농협 자리 서쪽에 있었는데, 비좁아 동소문 밖으로 옮겼다가 내성서문 남쪽에 당을 세우고 그 전면에 조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 연무당은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 곳으로서 우리 민족의 암울했던 과거사를 잊지않기 위해 이 곳에 기적비가 세워져, 민족 자주의식을 드높이 간직해야 한다는 경고를 하고 있다.
[참고문헌] 강화 문화관광 http://tour.ganghwa.incheon.kr
- 강화석수문
문화재 구분 : 인천>유형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30호
소재지 :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883
강화읍의 중심부를 흐르는 동락천 위에 설치한 강화산성의 수문 두 개 가운데 하나로 상수문(上水門)이다. 지금 강화읍의 중심인 강화대로는 동락천을 덮고 그 위에 조성한 도로이다. 1709년(숙종 35)~1711년(숙종 37)에 강화산성을 쌓을 때 세워졌다. 문화재청 자료에 의하면, 전체 길이 18.2m이고 높이는 2.7m, 너비는 4.7m이다. 무지개 모양의 수문이 3개 있다. 1910년까지 갑곶리 동락천 입구의 다리로 사용하다가 1977년 하수문(下水門) 자리로 옮겼던 것을 1993년에 원래의 상수문 자리로 다시 옮겨 복원하였다. 1998년 8월, 집중호우로 석수문 석축 일부가 무너져 정비하였다. 강화산성 서문 옆에 있다. 한편 하수문은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1875년(고종 12) 강화도조약 체결을 위해 강화에 들어온 일본인이 찍은 사진을 통해 당시 하수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상수문처럼 무지개 모양의 홍예가 3개이다.
[참고문헌] 인천시립박물관·강화군, 『강화산성 지표조사보고서』, 인천시립박물관·강화군, 2007. 문화재관리국, 『강화전사유적보수정화지』, 문화재관리국, 1978. 육군박물관, 『강화도의 국방유적』, 강화군·육군박물관, 2000. 인천광역시, 『인천의 문화재』, 2003.
- 강화외성
문화재 구분 : 국가>사적
지정번호 : 452
소재지 : 강화군 강화읍 , 선원면, 불은면, 길상면(강화도 동해안 일대)
고려시대 강화도읍기에 강화의 동쪽 해안에 처음 쌓았던 성이다. 조선 1690년(숙종 16)에 숙종이 허물어진 외성의 축성을 명했고, 1691년(숙종 17)에 공사를 시작하여 1692년(숙종 18)에 여장까지 갖춘 외성이 완성됐다. 숙종 대 완성한 강화 외성의 규모는 숙룡돈대에서 초지돈대까지이다. 대개 삼군문(금위영, 어영청, 훈련도감) 소속 병사들이 동원돼서 쌓았고 일부 구간은 강화유수부가 자체적으로 쌓았다. 숙종 이후 외성이 붕괴되는 등의 이유로 여러 차례에 걸쳐 보강 공사가 벌어진다. 토성(土城)이었던 외성이 부분적으로 석성(石城)이 되고 또 벽돌로 쌓은 전성으로 변화를 겪기도 한다. 강화유수 김시혁이 주관하여 1742년(영조 18)~1744년(영조 20)에 걸쳐 외성을 개축했는데 이때는 흙도 돌도 아닌 벽돌로 성을 쌓은 것이다. 이것이 강화전성(江華?城)이다. 오두돈대 밑으로 전성이 보수 및 복원되었다. 강화전성은 인천시 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됐었으나 강화 외성 전체가 사적 제452호로 승격 지정됨에 따라 그 안에 포함되어 해제되었다.
[참고문헌] 한국문화재보호재단, 『강화외성 지표조사보고서』, 학술조사보고 제192책, 한국문화재보호재단·강화군, 2006. 육군사관학교, 『강화군 군사유적 지표조사보고서(성곽·봉수편)』, 육군박물관 유적조사보고 제7집, 2000. 선문대 고고연구소, 『강화전성 지표조사보고서』, 선문대고고연구소·강화군, 2002. 문화재관리국, 『강화전사유적보수정화지』, 문화재관리국, 1978. 육군박물관, 『강화도의 국방유적』, 강화군·육군박물관, 2000.
- 강화중성
문화재 구분 : 향토유적>강화군 지정
지정번호 : 2호
소재지 : 강화군 강화읍, 선원면 일대:
이 성(성)은 고려 고종 37년 (1250)에 축조한토성이다. 이 중성의 총 길이는 약 6km이며 강화읍 옥림리 옥림고개로부터 시작하여 북산 정상에 이르렀고, 선원면 신정리로부터 창리, 대문고개를 거쳐 남산 정상에 이르렀다.
이 성문에는 7개의 성문을 설치하고 송도를 모방하여 이름을 지었다 한다. 정 동문은 선인문, 동남쪽은 장패문, 남쪽은 태안문, 서남쪽은 광덕문, 서쪽은 선기문, 서북쪽은 선의문, 북쪽은 북창문, 동북쪽은 창희문이라 이름 하였다 한다.
- 청련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지정번호 : 보물 제1787호
소재지 : 강화군 강화읍 고비고개로188번길 112 (국화리, 청련사)
청련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단정하고 우아한 상호, 단아하고 세련된 조형미, 완급 조절이 잘 표현된 옷주름 등에서 세련되고 품격 높은 고려시대 불교미술의 경향을 잘 드러내고 있다. 비록 조성기나 중수기 등 불상제작과 관련된 자료는 남아 있지 않으나, 부드럽고 단아한 이국적인 얼굴, 분명하게 표현한 귀의 상·하각, 당당하고 균형 잡힌 신체, 왼쪽 가슴에서 늘어진 띠 주름과 어깨의 잘게 늘어진 주름 사이로 조그맣게 표현된 주름, 승각기를 돌돌 말아 단단하게 묶은 띠 매듭과 자락, 그리고 양 무릎에 수평으로 표현된 힘 있게 눌러 찍은 듯한 골깊은 주름과 오른 발목을 덮어 내린 넓은 ‘八’자 모양 띠 주름 등의 양식에서 13세기 전반기에 조성된 불상들과 양식적으로 가깝다. 이 불상이 갖고 있는 조형적, 양식적 특성으로 볼 때, 이르면 13세기 전반 늦어도 중반 사이에는 제작되었을 것이다. 특히 이 불상은 타 지역에서 이운해 온 것이 아니라 예전부터 청련사의 주불로 예경되었던 것이라고 하기 때문에, 몽골병란을 피해 개경에서 강화도로 천도한 1232년에서 1270년 사이에 개경의 수준 높은 조각 장인이 조성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불상은 고려 불교미술이 추구했던 우아하고 세련된 아름다움을 선명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조형적, 예술적, 종교적으로도 성숙한 완성도를 보여주는 수준 높은 작품이다.
[참고문헌] 『문화유산을 찾아서』경기도 인천광역시(국보ㆍ보물)(김광호, 혜성출판사, 2013) 문화재청 홈페이지
- 강화 홍릉
문화재 구분 : 국가>사적
지정번호 : 224
소재지 :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 180번지
고려 23대 고종(高宗, 1192~1259)의 무덤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고종이 1259년(고종 46) 6월 임인일에 재상 유경(柳璥)의 집에서 승하하자, 그 해 9월 기미일에 홍릉에 장례 지냈다.’고 하였다. 원래의 홍릉은 높게 쌓은 3단의 축대로 이루어져 제일 아래에 정자각, 2단에는 사람형상의 돌 조각상, 가장 높은 곳에는 왕릉이 배치된 형식이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며, 무덤 주위에는 난간으로 두른 돌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무덤의 네모서리에는 짐승을 조각한 돌이 1개씩 배치되어 있었으나 없어졌고, 현재는 사람 모양의 돌조각 2구가 남아있다. 최근에 난간을 보수하고, 봉토 아랫부분에 능을 보호하는 돌을 설치하였다. 고종은 강종(康宗)의 맏아들로 1212년(강종 1)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어머니는 원덕태후 유씨(元德太后 柳氏)이고, 비는 제21대 희종(熙宗)의 딸인 안혜태후(安惠太后)이다. 46년 간 재위하는 동안 정치적 실권은 무인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대외적으로도 북방민족이 침입하여 어려움이 계속되었다. 1231년에 몽골이 쳐들어오자 당시의 실력자 최우는 이듬해 서울을 강화로 옮겨 몽골과의 전면 장기전을 채택하여 항쟁하였다. 1259년(고종 46)에 태자[후일의 원종]가 몽골에 가서 강화의 뜻을 표시하고, 항쟁을 단념한다는 표시로 강도의 성곽을 헐어버렸다. 그러나 고종은 이 해에 사망함으로써 강화에 묻혔고, 그 능을 홍릉(洪陵)이라 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속수증보 강도지』 강화군사편찬위원회,『신편 강화사』, 강화군, 2003. 문화재청 홈페이지
- 연미정
문화재 구분 : 인천>유형
지정번호 : 유형문화제24호
소재지 :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242
한강과 임진강의 합해진 물줄기가 강화도 동북단고려 고종
에 이르러 서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흐르는데, 이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고 해서 정자 이름을 연미정이라 했다 한다. 언제 처음 지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나 고려 고종이 사립교육기관인 구재(九齋)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공부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 중종 5년(1510) 삼포왜란 때 큰 공을 세운 황형에게 이 정자를 주었다고도 한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조약을 체결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강화십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자리로서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이 정자에 오르면 북으로 개풍군과 파주시, 동으로 김포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옛날에는 서해로부터 서울로 가는 배가 이 정자 밑에 닻을 내려 조류(潮流)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정자는 높다란 주초석(柱礎石) 위에 세워져 있으며,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정자 양쪽에는 수백년 수령의 느티나무 두 그루가 웅장한 자태로 정취를 더해주고 있다. 이곳은 과거에 민간인통제구역이어서 일반인의 출입에 제한이 있었으나, 2008년 민간인통제구역에서 해제되어 현재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탐승하고 있다.
[참고문헌] 국립문화재연구소, 『월곶진지』, 국립문화재연구소, 2010. 강화군사편찬위원회,『신편 강화사』, 강화군, 200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웅진출판 1991. 문화재청 홈페이지
- 윤집택지
문화재 구분 : 향토유적>강화군 지정
지정번호 : 1호
소재지 :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615-1
윤집선생 (1606-1637) 별시 문과에 급제한 뒤 설서, 이조정랑, 부교리에 이어 교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적과의 화의를 반대하여 중국 심양으로 잡혀가 갖은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척화의 소신을 주장하다 피살되었다. 세상에서는 오달재, 홍익한,과 함께 삼학사로 불리우며 후에 영의정에 추증 되었다.
선생이 살던 집의 건물은 없어지고 밭으로 변했으며 대리석으로 된 비석만 전하고 있다. 비석 전면에는 충신고학사 윤집택지라 새겨져 있다.
- 황형 묘
문화재 구분 : 인천>기념물
지정번호 : 기념물 제65호
소재지 :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산72-1
조선 세종 때의 명장 황형 장군의 묘이다. 황형 장군(1459∼1520)은 1480년(성종 11)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으로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중종 때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방어사가 되어 제포(薺浦)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르고 그 공을 인정받아 경상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 뒤 평안도·함경북도의 병마절도사를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장무(莊武)이다. 묘역은 강화읍 월곶리 야산에 있다. 묘역은 상계와 하계로 나누어져 있는데, 상계에는 곡장이 없이 원형 봉분이 조성되어 있고 부부의 묘가 좌·위에 있는 쌍분이다. 봉분 우측에 화강암으로 만든 묘표가 있은데 장방형 대석에 화관석 비두를 갖추고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팔작지붕 형태의 장명등, 한 쌍의 망주석과 문인석이 배치되어 있다. 묘역의 오른편 산 아래에는 신도비와 황형장군의 위패를 모신 장무사(莊武祠)가 있다.
[참고문헌] 강화나들길 가이드북 민족문화대백과
2. 송해면
- 석주권필 유허비
문화재 구분 : 향토유적>강화군 지정
지정번호 : 27호
소재지 : 강화군 송해면 하도리 892
석주 권필(1569 - 1612) 선생은 조선 중기의 탁월한 시인으로서 한때 강화에 많은 유생들을 가르치며 시화를 나눈 인연을 갖고 있다. 선생의 자는 여장, 호는 석주, 본관은 안동, 벽의 아들이다. 과거에 뜻이 없어 시주로 낙을 삼고 가난하게 살다가 문신들의 추천으로 동몽교관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선조 25년 (1592)임진왜란때는 강경한 주전론을 주장했고, 광해군 초 권신 이이첨이 교제를 청했으나 끝내 거절했다. 광해군의 비 유씨 척족들의 방종을 궁유시로 풍자했다고 하여 광해군 4년(1612)친국을 받은 뒤 유배되었다.
귀양길에 올라 동대문 밖에 이르렀을 때 친구들이 주는 술을 폭음하고 이튿날 별세했다. 인조반정 후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고, 유고로는 「석주집」을 남겼다. 유허비는 대리석으로 그 전면에 「석주권선생유허비」라고 새겨져 있다
- 강화 솔정리 고씨가옥
문화재 구분 : 인천>유형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60호
소재지 : 강화군 송해면 강화대로674번길 23-4 (솔정리)
전통적인 한옥에 일본식 건축양식이 도입된 99칸 민가주택으로 1941년 건축되었으며 면적은 322.62㎡이다. 정면과 좌우측 3면에 문을 낸 “ㅁ”자형 반가형 주택으로 규모가 매우 큰 민가이다. 사괴석(벽이나 돌담을 쌓는 데 쓰는 육면체의 돌)으로 담장을 두르고, 정문은 한 칸 소슬대문이다. 안채를 중심으로 사랑채와 행랑채 사이 트인 곳으로 중정을 드나드는 출입구가 있다. 또한 반루 기둥 위에 겹처마를 사용하였고, 행랑채 끝에는 다실을 두어 일본식 구조 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건물 내부에 남자와 여자가 사용하는 복도를 각각 별도로 마련해 놓았다. 전통적인 한옥에 일본식 건축양식을 혼합하여 문화재적 가치가 크다. 2006년 5월 15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60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두산백과사전 문화재청 홈페이지
- 화문석 문화관
위치 : 강화군 송해면 장정양오길 413
강화 화문석의 역사는 고려 중엽부터 가내 수공업으로 발전되어 왔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 강화는 39년 동안 고려의 수도 역할을 하면서 강화로 이주한 왕실과 관료를 위해 최상품의 자리를 만들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왕실로부터 도안을 특이하게 제작하라는 어명을 받고 당시에 백색자리의 생산지인 송해면 양오리의 한충교씨에 의해 화문석 제작에 성공하며 다양한 도안개발과 제조 기술로 오늘에 이르고 있어 전국 유일의 왕골공예품으로 강화군에서만 생산되는 자랑스러운 민족 문화 유산이다.
화문석 문화관은 화문석은 물론 왕골공예품의 변천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상설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다.
- 고려고종사적비
소재지 : 당산리 397번지, 399번지 일대.
강화도 민통선안에 있는 1932년 몽고군과 싸우기 위해 수도를개성에서 강화로 옮길때 고종이 배에서 내린곳이다.
강화군 북단지역은 고려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안보관련 유적이 밀집되어 있으며 민간인 출입이 60여년 이상 통제된 지역으로 북한과의 최단거리가 1.8km 밖에 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도 고려 항몽시기에 강화로 천도했던 승천포와 조선시대 한양을 지키던 월곶돈대, 승룡돈대, 승천포돈대, 천신돈대 등 국방유적이 산재되어 있는 지역이다.
특히, 산이포 마을은 분단 이전 강화에서 가장 번성했던 항구였으며, 그 흔적으로 토지가 도시처럼 세밀하게 분할되어 있어 지적도만으로도 그 당시에 번성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분단의 아픔이 남아 있는 곳이다.
3. 양사면
- 강화평화전망대
위치 : 강화군 양사면 전망대로 797 (양사면)
강화평화전망대는 2006년 말부터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던 양사면 철산리 민통선 북방지역 임야에 지하1층 지상4층 규모로 타 지역에선 전망하기 힘든 이북의 독특한 문화 생태를 아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고 비교할 수 있도록 준공되어 2008년 9월 5일 개관하였다.
지하층과 4층은 군부대 전용시설이며, 1층에는 강화특산품과 북한의 특산물 등을 판매하는 토산품 판매장과 식당, 관리사무실, 통일염원소,휴게실 등이, 2층에는 고성능 망원경과 전쟁의 참상과 흔적을 볼 수 있는 전시실 이, 3층에는 이북의 온 산하가 한눈에 가까이 볼 수 있는 북한땅 전망시설과 흐린 날씨에도 영상을 통해 북한 전경 등을 볼 수 있도록 스크린 시설이 되어 있다.
2층에 위치한 전시실에는 강화의 국방체험과 북한의 도발, 남·북한의 군사력 비교, 통일정책을 볼 수 있는 끝나지 않는 전쟁과 우리는 한민족, 북한으로의 여행을 경험할 수 있는 통일로 가는 길, 끝으로 한국전쟁 당시의 배경과 국내·외 전쟁 발발과정 및 그 이후 생애 잊지 못할 어려움을 겪고 있는 피해상황 등을 영상시설을 통해 볼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으며, 북한땅 조망실에서는 전방으로 약 2.3㎞ 해안가를 건너 흐르는 예성강, 개성공단,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역, 김포 애기봉 전망대와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 일산신시가지, 중립지역인 나들섬 예정지, 북한주민의 생활모습과 선전용 위장마을, 개성공단 탑, 송악산, 각종 장애물 등을 조망할 수 있다.
특히 역사 문화의 고장 강화는 곳곳에 산재한 역사· 문화 유적 등과 일일 관광 테마 코스로 연계하여 타 지역 안보 관광지와 차별화된 관광코스로 개발 다시오고 싶은 관광시설 개발은 물론 관광객 편리를 위해 최상의 서비스로 운영 관리해 나갈 계획을 갖고 있다.
* 규모 : 부지면적 9,975㎡, 연면적 2,277㎡ (지하1층, 지상4층)
- 교산교회
위치 : 강화군 양사면 서사길 296 (교산리, 교산교회)
교산교회는 강화도 최초의 교회이다. 1892년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이며 인천 내리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존스 목사는 몇 차례 강화도에 들어오려고 시도했으나 강화 유수의 거부로 들어올 수 없었다. 이 때 강화도 시루미(지금의 양사면) 출신으로서 인천에 있던 이승환이 예수를 영접하고 인천 내리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
1893년 여름, 존스 목사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는 이승환의 요청으로 강화도 북쪽 해안까지 왔다. 그러나 지역 유지인 유학자 김상임의 반대로 육지에 발을 붙일 수 없었다. 그러자 이승환은 한 밤중에 어머니를 업고 해안 갯벌을 지나 존스 목사가 있는 배로 갔다. 그리하여 존스 목사는 이승환의 어머니에게 선상에서 세례를 베풀 수 있었다. 선상 세례 후, 존스 목사는 전도사와 전도부인을 보내 이승환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도록 하였다. 이것이 강화도 최초의 교회인 교산교회의 시작이었다. 몇 달 후, 유학자 김상임도 개종하여 교산교회의 최초의 전도사가 되었고, 1년 후에는 강화 전체 지역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김상임은 신학을 마치고 목사 후보생이 되었으나 목사안수 한 달을 앞두고 열병환자를 심방한 후 감염되어 55세를 일기로 소천하였다.
교산교회는 강화의 다른 지역 섬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전초기지가 되었으며 그 흐름은 크게 세 줄기로 첫 줄기는 홍의(홍의교회)를 거쳐 강화읍으로 해서 남쪽으로, 둘째 줄기는 고부(고부교회)를 거쳐 중서부로, 셋째 줄기는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섬임 교동으로 연결되어졌다. 이러한 복음 전파의 흐름을 통해 강화는 선교 개시 10년 안에 강화전역에 교회가 설립되는 결과를 얻었으며 현재는 150여개의 교회가 있는 섬이 되었다.
교산교회는 기존 서민층과 가세한 양반층이 어우러진 균형적인 발전이 이루어졌고, 강화지역 지도급 인사들이 연이어 개종하여 강화 전역으로 복음을 확장시키는 초석이 되었다.
교산교회는 시루미(지금의 양사면 교산1리, “교산”은 다리목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두 마을 교항과 증산이 합하여 이루어짐) 공동체의 평민들을 중심으로 만들어 졌지만 양반들까지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된 강화 최초의 교회라는 큰 교회사적인 의미가 있는 곳이다.
4. 하점면
- 강화 장정리 오층석탑
문화재 구분 : 국가>보물
지정번호 : 10
소재지 :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 산 193번지
고려시대에 세워진 5층 석탑으로 발견 당시 무너져 있었으나 1960년 수리하여 다시 세운 것이다. 석탑은 파손된 곳도 많고, 없어진 부재도 많아서 3층 이상의 몸돌과 5층의 지붕돌, 머리장식 부분 등이 모두 사라진 상태이다. 낮은 언덕의 중턱에 위치하고 있는 절터로 그 규모를 알 수가 없지만 석축 주변에서 선문 및 어골문 와편, 막새기와, 청자편, 백자편 등 고려시대 유물이 발견 수습되었다. 탑은 1층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의 네 모서리에는 기둥모양을 새겼다. 탑신부는 1층 몸돌만 두 장의 돌로 짜여있고, 그 이상은 각각 하나의 돌이다. 1층 몸돌의 크기에 비해 2층 몸돌의 크기가 급격히 줄어들어 있다. 지붕돌은 밑면에 1층은 4단, 나머지 층은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추녀 밑은 반듯하다가 네 귀퉁이에서 약간 치켜 올려져 있다. 탑이 무너졌을 때 추녀마루가 깨어져, 치켜 오른 정도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점이 안타깝다. 전체적으로 무거운 느낌을 주며, 각 부분에 두는 장식이 많이 생략되었고, 형식적으로 표현된 부분이 많은 탑이다. 신라석탑의 양식을 이어받아 형태나 체감비율 등에서 변형된 고려시대 석탑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강화군사편찬위원회,『신편 강화사』중 문화와 사상, 강화군, 2003. 김형우·안귀숙·이숙희,『인천의 전통사찰과 불교미술』1,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2011. 문화재청 홈페이지
- 강화 장정리 석조여래입상
문화재 구분 : 국가>보물
지정번호 : 615
소재지 :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 산 122
강화군 봉천산 아래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조불상으로 두꺼운 화강암의 판석에 돋을새김으로 했는데, 현재는 전각을 지어서 그 안에 모시고 있다. 민머리의 정수리 부분에는 상투 모양의 작은 머리(육계)가 솟아 있다. 타원형의 얼굴에는 살이 올라 있는데 눈·코·입의 표현이 다소 둔중해 보인다. 귀는 비사실적으로 길며, 목이 짧아 3줄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가슴까지 내려와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두껍게 표현되어 신체의 굴곡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으며, 좁고 둥글게 처리된 어깨선으로 인해 불상은 어딘지 모르게 움츠러든 모습이다. U자형의 옷주름은 가슴에서부터 흘러내려 무릎 부분까지 표현되었는데 형식적이며 간략하게 처리되었다. 오른손은 허리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고 있고, 왼손은 가슴 앞으로 들어 손가락을 구부리고 있다. 불신의 주위에는 2줄의 도드라진 선으로 몸광배와 머리광배를 구분하고 있다. 2줄 사이에는 드문드문 둥근 구슬을 새겨 넣었으며, 머리광배와 몸광배의 가장자리에는 불꽃무늬를 새겼다. 평판적이고 선으로 조각하는 경향이 두드러진 불상으로 모든 면에서 단순화, 생략화 되는 점은 시대가 내려가는 것을 말해준다. 양감이 있는 얼굴, 짧은 목, 움츠린 어깨, 형식적인 옷주름 등에서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강화군사편찬위원회,『신편 강화사』중 문화와 사상, 강화군, 2003. 김형우·안귀숙·이숙희,『인천의 전통사찰과 불교미술』1,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2011. 문화재청 홈페이지
- 봉천대
문화재 구분 : 인천>기념물
지정번호 : 기념물18호
소재지 : 강화군 하점면 신봉리 산 63번지
봉천산 꼭대기에 설치하여 하늘에 나라의 태평과 백성들의 평안을 빌었던 곳으로, 돌을 쌓아올려 위로 갈수록 좁아드는 사다리꼴 형식을 하고 있다. 『강도지』에 의하면, 고려 때에는 나라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의식을 거행하였던 곳이었으나, 조선시대 중기에 와서는 봉화를 켜두는 봉화대로 사용하였다 한다.
[참고문헌] 강화군사편찬위원회,『신편 강화사』중 문화와 사상, 강화군, 2003. 문화재청 홈페이지
* 봉가지
문화재 구분 : 향토유적>강화군 지정
지정번호 : 25호
소재지 :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420-2
하음 봉씨의 시조인 우가 태어났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는 연못이다. 고려 예종 2년(1107) 봉천산 밑에 사는 한 노파가 연못가로 물을 길러 갔을 때 홀연히 하늘에 구름이 가득 끼고 우레같은 이상한 소리가 나더니 연못에 석함이 떠올라 이를 건져내 열어보니 옥동자가 들어 있었다 한다. 이를 기이하게 여겨 왕에게 바치자 왕은 궁중에서 양육하고 봉우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한다.
봉우는 성장하여 인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위위소랑, 정당문학, 좌복야로 공을 세워 하음 백에 봉해져 이때부터 그 후손들이 이곳에 살며 본관을 하음으로 하여 봉씨 세계를 잊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봉가지는 약 33㎡ 정도의 연못이 시멘트로 보수되어 있어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우며 이 연못가에 후손들이 세운 유적비가 있다. 이 연못은 흙으로 약 1m 정도의 뚝을 쌓고 시멘트로 곽을 짜 놓았으며 수면으로부터의 높이는 약 65cm 이다.
- 강화 부근리 지석묘(고인돌)
문화재 구분 : 국가>사적
지정번호 : 137호
소재지 :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317번지
지석묘란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만든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지상에 책상처럼 세운 탁자식(북방식)과 큰 돌을 조그만 받침돌로 고이거나 판석만을 놓은 바둑판식(남방식)이 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고인돌이 전국에 걸쳐 분포해 있다. 무게가 수십 톤 이상인 덮개돌을 채석하여 운반하고 무덤에 설치하기까지에는 많은 인력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고인돌은 당시 지배층의 정치권력과 경제력을 상징하는 청동기시대 대표적인 유적이다. 강화군에서 고인돌이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는 지역이 하점면과 양사면으로 이 일대에는 40여 기의 고인돌이 있다. 부근리 일대에는 이밖에도 탁자식 고인돌과 바둑판식 고인돌이 여러 기 남아 있다. 부근리에 있는 고인돌은 아직 발굴조사를 하지 않아 고인돌과 관련된 유물은 어떤 것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인근에 있는 하점면 삼거리 유적에서 탁자식 고인돌 무덤 5기를 발굴하여 돌방[석실(石室)]안에서 민무늬토기 조각, 간돌칼[마제석검(磨製石劍)], 돌가락바퀴[방추차(紡錘車)], 달도끼[환상석부(環狀石斧)] 조각 등이 나온 적이 있고 고인돌 언저리에서 빗살무늬토기들이 여러 점 나온 것이 있다. 따라서 부근리 고인돌에도 삼거리 유적과 비슷한 유물들이 들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강화 부근리 지석묘는 주변의 여러 고인돌과 함께 2000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서울대학교 박물관,『강화지석묘(부근리고인돌) 주변 시굴조사 약보고서』, 서울대학교, 2004. 서울대 인문학연구소, 『강화도 고인돌군 정밀지표조사보고서』, 강화군, 1999. 인하대박물관, 『강화지역의 선사유적·유물』, 인하대학교 박물관, 2000. 이형구,『강화도 고인돌무덤(지석묘)조사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 강화도 부근리 고인돌군
문화재 구분 : 인천>기념물
지정번호 : 44호
소재지 :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317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부근리 고인돌군은 사적 제137호로 지정된 강화부근리 지석묘 주변, 해발 50m 내외의 낮은 구릉과 평지에 모두 16기의 고인돌이 분포하고 있다. 평지에는 사적 제 137호인 강화부근리 지석묘와 탁자식 고인돌의 고임돌로 추정되는 석재 하나가 세워져 있다. 여기서 북동쪽으로 약 300m 떨어진 솔밭에 덮개돌 밑에 고임돌이 없는 고인돌인 개석식 고인돌 3기가 축조되어 있으며, 사적 제 137호의 동쪽 낮은 구릉에는 탁자식 4기와 개석식 고인돌 4기가 분포하고 있다.
[참고문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소, 『강화도 고인돌군 정밀지표조사보고서』, 강화군, 1999. 인하대박물관, 『강화지역의 선사유적·유물』, 인하대학교 박물관, 2000. 문화재청 홈페이지
- 강화역사박물관
위치 :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사적 제137호 강화 부근리 지석묘에 위치한 강화역사박물관은 소중한 역사와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유물을 전시 연구 수집하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선사시대 화살촉에서부터 고려시대 청자, 조선시대 백자, 근현대 목가구 등 선사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조상들이 남긴 소중한 유물을 상설전시 및 기획전시를 통해 관람객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다채로운 체험프로그램 및 문화행사 등을 개최하여 박물관에서 직접 보고 체험하며 조상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2010년 10월 23일에 개관한 강화역사박물관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사적 제137호 강화 부근리 지석묘 앞에 위치하고 있으며 강화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중심으로 선사시대부터 근현대까지 강화도의 역사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전시 보존 연구하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강화는 각 시대마다 해상관문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면서 훌륭한 문화유산을 많이 남기고 있으나 그동안 강화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보관할 데가 없어 외부 기관에서 관리해 오던 실정이었습니다. 앞으로 강화역사박물관은 각지에 흩어져 보관되고 있는 강화 출토 유물과 새로 출토되는 유물을 비롯하여 조상들이 남긴 소중한 유물들을 한자리에 모아 다양한 전시와 교육 문화행사 등을 마련하여 복합문화공간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나갈 것입니다.
*사인비구 제작 동종 중 강화 동종
보물 제11-8호. 본래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의 도로변에 있던 것을 1977년에 현위치로 옮겼다. 이 종은 정상이 반구형이며, 그 중앙에 용뉴(龍紐)가 붙었는데, 용뉴의 형태는 U자를 엎어놓은 모양에 양쪽에 용두가 붙은 쌍룡이다.
따라서 용통(甬筒)이 없는 것이 특색이다. 종견(鐘肩)은 입화식(笠花飾)이 퇴화된 전 같은 변죽을 돌리고 있다. 종신의 중앙에는 굵게 도드라진 두 줄의 횡선대(橫線帶)가 돌려져서 상하로 양분하였고, 윗부분에는 상대와 분리되어서 4개의 유곽(乳廓)이 배치되었다.
유곽대(乳廓帶)는 연주문 같은 둘레 장식이 전혀 없이 보상당초문(寶相唐草文)이 양주(陽鑄)되었고, 유곽 안에는 6판연화로 된 유좌(乳座)에 얕은 반구형인 9개의 유두(乳頭)가 표현되었다.
종신에는 당좌(撞座)가 없고 명문(銘文)만 주조되어 있으며, 하대에는 보상당초문으로 장식되었다. 주조된 명문에 의하면 종의 주조 연대는 1711년(숙종 37)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고려종의 양식에서 퇴화하면서 조선시대 종의 특색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선두포축언시말비
선두포축언시말비 (조선시대, 선두포 제방공사 과정을 기록하여 세운 비석)
*자연사박물관
- 강화 백련사 철조 아미타여래좌상
문화재 구분 : 국가>보물
지정번호 : 994
소재지 : 강화군 하점면 고려산로61번길 270 (부근리)
이 불상은 고려 후기에 유행한 단아한 양식을 따르고 있는 철조불상이다. 갸름한 얼굴, 단정한 눈·코·입, 좁아진 어깨, 손발의 곡선 처리 등은 절제된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옷은 두껍고 주름은 단순한데 왼쪽 팔꿈치 윗부분에는 독특한 모양의 옷주름이 표현되었다. 왼발은 옷 속에 감싸여 있고 오른발이 보이도록 앉은 길상좌(吉祥坐)의 자세이며, 배를 덮고 있는 옷의 띠는 매듭고리와 끈이 좌우로 균형 잡혀있다. 이러한 표현은 청양의 장곡사 불상 등과 비슷한 형식이다. 그러나 큼직하고 대담하게 묘사된 옷 장식이나, 왼쪽 종아리로 내려진 옷자락은 약간 다른 것으로 민천사금동불좌상 등과 매우 비슷한 형식이다. 길상좌 자세에 단아한 모습과 세련된 기법으로 보아 14세기 후반 내지 15세기 초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강화군사편찬위원회,『신편 강화사』중 문화와 사상, 강화군, 2003. 문화재청 홈페이지
- 창후리 포구
위치 : 강화군 하점면.
서쪽으로 서해와 바로 접해 있는 어촌 마을이다. 대부분의 지대가 평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마을 북서쪽에 작은 산이 솟아 있다. 자연마을은 뒷물, 벌말, 샛말 마을이 있다. 뒷물 마을은 뒤우물이 있는 마을이라 해서 뒷물 마을이라 부르며, 벌말 마을은 막촌이라고도 하는데 막집이 있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샛말 마을은 사태말과 욧골 사이에 있는 마을이다.
교동도와 배가 다니던 곳
5. 교동도
- 화개사
분류 : 전통사찰
소재지 : 강화군 교동면 교동남로 229-9 (읍내리)
고려때 창건한 목조건물로서 창건연대를 알 수 없다.
교동면 상용리의 "갈공사"에서 묵고 있던 무학대사, 낙공선사, 지공선사가 이곳 화개사로 공부하러 다니던 곳이라 전한다. 당시에는 조그만 암자였던 것으로 화재로 불상 및 서적이 모두 소실된 것을 후에 다시 건립하였다.
또한 고려시대 목은 이색 선생이 교동을 아주 좋아하여 화개사에 머무르며 수양하고 글을 지었다 하며 화개산을 전국 8대명산중 하나로 꼽았다고 한다.
- 교동읍성
문화재 구분 : 인천>기념물
지정번호 : 기념물23호
소재지 :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577
읍성은 지방행정 관아가 소재한 고을의 방어를 목적으로 축성한 성곽이다. 대개 읍성 안은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과 관리들의 업무 공간이다. 지역 주민들은 성 밖에 거주하며 비상시에 성안으로 들어가 방어전에 임한다. 교동읍성은 교동에 경기수영을 설치한 때인 1629년(인조 7)에 쌓았다. 성의 둘레는 약 779m이고 동·남·북쪽 3곳에 성문을 세웠다. 세 문 모두 옹성을 설치했었다. 각 문에는 문루(門樓)가 세워졌는데 동문은 통삼루(統三樓), 남문은 유량루(庾亮樓), 북문은 공북루(拱北樓)라 하였다. 이 성 안에 삼도수군통어영(三道水軍統禦營)의 본진이 주둔하기도 했다. 1753년(영조 29)에 고쳐 쌓았고, 고종 대에도 성문을 다시 쌓았다고 한다. 동문과 북문은 어느 때 없어졌는지 확실치 않으며, 남문인 유량루는 1921년에 폭풍우로 무너져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 부분만 남아있다. 1975년에 해체 복원했는데 문루는 다시 세우지 않았다.
[참고문헌] 인하대박물관, 『강화 교동읍성 정밀지표조사보고서』, 인하대학교박물관 조사보고 제75책, 강화군청·인하대학교박물관, 2007. 육군사관학교, 『강화군 군사유적 지표조사보고서(성곽·봉수편)』, 육군박물관 유적조사보고 제7집, 2000. 육군박물관, 『강화도의 국방유적』, 강화군·육군박물관, 2000.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1. 문화재청 홈페이지
- 교동부지(喬桐府址)
소재지 : 읍내리 267-1
1395년(태조4년)월곶진(月串鎭)을 설치하여 만호겸지현사(萬戶兼知縣事)를 두었다가 그후 현으로 승격 현감을 두었으며 1629년(인조7년)에는 경기수영(京畿水營)이 월곶진에 이설되고 교동현이 교동부로 승격된 후 설치되었다.
현의 부지에는 객사를 비롯하여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관아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부에는 교련관청을 비롯하여 안해루 등이 있었으며 지금도 돌로 쌓은 계단 20여개가 남아있어 삼도수군통어영을 관장하던 본영의 규모를 엿볼 수 있다. 안해루의 누각 석주 4개중 2개가 현 위치에 있으며, 2개는 교동공립보통학교(현 교동초등학교)의 교문 기둥으로 사용하다 지금은 학교운동장 한 켠에 세워놓았다.
또한 관아에 사용되었을 초석과 석재들이 민가의 울타리로 사용되고 있으며 관청과 객사 터에는 민가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 연산군적거지
문화재 구분 : 향토유적>강화군 지정
지정번호 : 28호
소재지 : 강화군 교동 읍내리 270
즉위 초에는 사창, 상평창, 진제창의 설치, 사가 독서의 부활 「국조보감」 「여지승람」의 간행등 다소의 업적을 이룩했으나 어머니인 폐비 윤씨가 사사된 후 세자시절을 불우하게 보낸 탓으로 이상성격이 형성, 점차 향락과 횡포를 일삼아 많은 실정을 저질렀다.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사림파를 대량 학살 숙청했고 성균관을 유흥장으로 만들어 황음을 일삼는 등 갖은 횡포를 자행했다
연산군은 성종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판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무(尹起畝)의 딸인 폐비 윤씨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지 않아서 공부하기를 권계하는 이가 있었지만,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고 한다. 왕으로 등극하여 사창, 상평창, 진제창의 설치와 사가독서의 부활, ≪동국여지승람≫의 간행 등 국방과 내치면에서 다소의 업적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폐비 윤씨 사건을 계기로 점차 향락과 횡포를 일삼아 많은 실정을 하기도 했다. 만년에는 주색에 빠지고 도리에 어긋나며, 포학한 정치를 극도로 하여, 대신·대간·시종을 거의 다 주살하여 불로 지지고 가슴을 쪼개고 마디마디 끊고 백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리는 형벌까지도 자행했다고 한다. 중종반정이 일어나 폐위되어 교동으로 유배되어 31세에 병으로 죽었다. 연산군의 적거지는 봉소리 신골과 고구리 연산골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어, 종합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조선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어 교동으로 유배되었다가 1506년 11월 죽은 터입니다. 또한 인근에는 부근당이 있는데 이 곳에 연산군과 그 부인 신씨의 화상을 모신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 아래에는 교동부사가 있던 동헌자리가 있는데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위에 누각을 얹고 있었던 돌기둥 두 개가 남아있습니다. 이 동헌자리에 황해, 경기, 충청 통호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 철종잠서소(철종잠저지)
연산군잠저지로 표기되어 있음
교동읍성 문을 좌측에 두고 마을안으로 들어가면 우측에 황룡우물이 있고 조금 더 죄측으로 올라가면 방형돌우물뒤에 안내판이 있다.
- 부근당
소재지 : 읍내리 255
읍내리 교동읍성 북문지 옆 부근당이라는 당집이 있으며 이곳에는 연산군(燕山君1476∼1506)과 그의 부인 신씨의 화상으로 추정되는 탱화가 걸려있다. 《강화사》에는 이곳이 ‘연산군유배지’라 기록되어 있으며, 마을 주민들은 이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이곳에서 폐주가 죽은 섣달에 굿을 하였다고 하며, 부근당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1986년 ‘연산군 적거지’의 표지판이 설치되었다.
《증보문헌비고》에 보면 “도하(都下) 각 관부에 으레 작은 사우(祠宇)를 두고 여기에 지전등을 걸어놓고 부군이라 하여 제사지냈다. 새로 부임한 관원도 반드시 제사를 지냈고 법사에도 그러했다.” 라고 기록되어있다.
원래는 부군[付=붙을 부. 君=임금 군]또는 부근[付=줄 부. 根=뿌리 근]이라 하던 것이 뒤에 부군[府=마을 부 君= 임금 군]으로 변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읍내리의 부근당은 특이하게도 [扶=도울 부. 芹=미나리 근]을 쓰니 관부에 두었던 사우(祠宇)와는 다름을 알 수 있다. 햇 미나리가 나면 제일먼저 임금께 바친다는 뜻으로 헌근지성(獻芹之誠)이라 했으며 헌근(獻芹)이라 하여 “윗사람에게 물건을 선사할 때나 자기의 의견을 적어 마음을 표현할 때”에 겸손하게 이르는 말로서 근(芹)이란 자를 쓰고 있다. 변변치 못한 도움으로 연산의 넋을 위로한다는 선조들의 겸손에 표현으로 부근당(扶芹堂)이라 이름 짓고 연산군을 신(神)으로 모시고 폐주가 죽은 섣달에 당굿을 지냈으며, 섬처녀를 하나씩 골라 등명(燈明)하는 처녀봉공(處女奉供)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부근당 안의 액자에 걸려있는 초상화는 민화적인 그림으로 상단부에는 중첩한 산봉우리에 천연색의 구름이 날고 아래에는 병풍을 둘렀으며 병풍 앞 오른쪽에 붉은 곤룡포에 검은 신을 신은 왕이, 왼쪽에는 초록 저고리 붉은 치마에 초록신을 신은 왕비가 앉아있다. 두 손을 소매 깊숙이 넣고 앞을 응시하는 모습이 어느 평범한 대갓집 금실 좋은 내외간 같은데, 왕비 앞에는 분홍 옷을 입은 하여가 앉아있는 모습을 조그맣게 그려 넣었는데 이를 처녀봉공의 표현이라 말하는 이도 있으니 어쨌든 연산과 관련된 이 당집이 현세대 훨씬 이전부터 이곳에 자리하고 있음은 교동의 얼이 담긴 교동만이 갖는 유일의 문화로 부근당(扶芹堂)인 것이다
- 교동 비석군
소재지 : 읍내리 140
- 교동향교
문화재 구분 : 인천>유형
지정번호 : 유형문화제28호
주요시설 : 대성전, 명륜당, 동무, 서무, 동재 서재, 제기고, 내삼문, 외삼문
소재지 : 강화군 교동면 교동남로 229-49 (읍내리)
향교는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지방 백성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서 국가에서 세운 지방교육기관이다. 고려시대 과거제의 실시와 학교제도의 정비 과정에서 설치되기 시작한 향교는 조선시대 유교 이념의 보급과 중앙집권체제의 정비과정에서 전국적으로 확대 설치되었다. 교육기관이자 교화의 중심지로 시작된 향교는 조선후기 신분제의 변동과 향촌사회의 변화에 따라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향촌 사회 권력 변동의 중심에서 신분상승과 부역을 회피하는 통로로, 양반신분 유지의 수단으로 기능하는 등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교동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에 화개산 북쪽에 지었으나, 조선 영조 17년(1741)에 조호신이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1966년에 수리하였다. 고려 충렬왕 12년(1286)에 안향이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자상을 들여와 모셨다고 전하며, 이후 지방의 각 군현에 성현의 위패를 모시는 문묘를 설치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전답과 노비·전적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현재는 교육적 기능은 없어지고 봄·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奉行)하고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올리고 있으며,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여러 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현재 교육공간인 명륜당과 동재·서재가 있고, 제사공간을 형성하는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다. 이외에도 내삼문·외삼문과 제기고 등이 있다.
[참고문헌]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교동향교지』, 교동향교, 2012. 인천시립박물관, 『교동향교소장자료조사보고』, 인천시립박물관 조사보고 제16집, 인천시립박물관, 2007 강화군사편찬위원회,『신편 강화사』, 강화군, 2003.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웅진출판, 1997. 문화재청 홈페이지
- 사신당지
사신당은 교동면의 관문인 남산포를 내려다보는 언덕인 남산(南山) 위에 있다. 당의 이름인 ‘자신당’은 마을 사람들이 부르는 명칭으로, 본래는 사신당을 의미한다. 6·25전쟁 때 소실된 당집을 1969년에 재건하였다.
강화도는 사신(使臣)과 관련이 깊다. 강화도 앞바다는 서울의 한강과 개성의 예성강, 임진강이 모이는 곳으로 예부터 경제적·군사적 요충지였다. 또 강화도에는 사신이 바람을 기다리며 머무른 사신관(使臣館), 몽고의 사신을 맞이하는 제포궁(梯浦宮), 사신의 숙소인 풍포관(楓浦館)이 있었을 정도로 중국과의 외교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또 중국 사신들이 한반도로 들어오거나 우리나라 사신들이 중국으로 갈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었다.
특히 강화도의 서쪽, 교동면의 입구가 되는 남산포는 고려시대부터 중국 사신들이 왕래하던 곳이다. 남산포에 있는 산은 읍내리에서 남쪽을 바라볼 때 보이는 산이라 하여 남산이라 부르며, 높이가 해발 53m이다. 남산 기슭의 읍내리 571번지에는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선(使臣船)들이 배를 움직일 바람을 기다리는 동안 머물렀다는 사신관 터가 있다. 또 바닷가의 바위들을 정으로 쪼아서 만든 층층대가 있다. 이것은 고려 때 송나라 사신들이 사신관에 머물렀다가 떠날 때 배에 오르기 쉽도록 만들어 놓은 사신등선로(使臣登船路)이다. 바로 이 근처에 있던 것이 자신당이다. 송나라 사신들이 임무를 마치고 귀국할 때 뱃길이 무사하기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자신당은 중국을 왕래하는 사신들의 바닷길을 지켜 주는 바다의 수호신 역할을 하다가 고려가 망하면서 사신관이 그 기능을 잃게 되자 의미가 변화하였다. 마을의 안녕과 교동 주민들의 뱃길을 지켜주고 풍어를 기원하는 당으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마을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으며, 다만 읍내리에 거주하는 개인이 고사를 지내고 있다. 이는 자신당에 대한 마을 주민들의 신앙이 마을신앙에서 개인신앙으로 격하(格下)된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는 읍내리에 거주하는 김순자의 시어머니가 자신당을 관리하였고, 시어머니 사망 후 현재는 김순자가 물려받아 돌보고 있다. 김순자는 무속인이 아닌 평범한 마을 주민이다. 자신당에 행해지는 정기적 제의는 김순자가 2~3년에 한 번 정월에 무당을 불러 집안 고사를 지낼 때, 이에 앞서 자신당에 떡과 술 등 음식을 바치며 당 앞에서 고사를 지내는 것이 전부이다. 고사 외에도 비정기적으로 가끔 찾아가 당에 술을 바치기도 한다. 자신당 문은 절대 함부로 열지 않으며, 문을 열어야 할 때에는 그 전에 반드시 목욕을 하여 몸을 정갈히 한다. 김순자 외에도 마을 사람이나 인근 지역의 무당들이 자신당에 들러 창문으로 돈을 밀어 넣고 가는 경우가 있다. 자신당 문이 항상 잠겨 있고 열쇠를 김순자만 가지고 있어 다른 사람들은 당 안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당 내부에는 무신도 1점이 걸려 있다. 이를 ‘자신당 할아버지’라고 부른다. 바닥에는 전에 당집을 관리하던 무당이 사용한 무구(巫具)와 사람들이 당 안으로 넣은 돈이 어지러이 널려 있다. 자신당 입구 오른쪽에는 남터주와 여터주 한 쌍이 있다. 자신당에 들르는 사람들이 당집 안에는 돈을 넣고 이들 터주에게는 음료나 사탕 등을 바친다.
이전에는 풍어를 비는 어부들이 자신당에 들러 돈이나 음식을 바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교동면에서 어업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 풍어를 목적으로 오는 경우가 거의 없다. 다만 사람들이 다녀간 흔적이 꾸준히 있는 것으로 보아 자신당에 대한 마을 주민들의 신앙은 약화되었으나 여전히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출처] 사신당지 [ 使臣堂址 ]|작성자 강화도팔각집
- 삼도수군통어영지
소재지 : 읍내리 571-1
인조 11년(1633년)에 3도(경기,충청,황해)수군 통어영을 교동 남산포 서쪽해안에 설치하여 수군을 훈련하였으며 배가 정박할 시 묶어두었던 계류석이 남아있다.
- 대룡시장
실향민들의 아픈 역사와 피난생활의 애환이 담겨있는 대룡시장
고향의 전통시장 모습
- 고구리 산성지
문화재 구분 : 향토유적>강화군 지정
지정번호 : 30호
소재지 :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 산145
고구리산성(화개산성)은 교동면 고구리 산145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화개산은 산세가 우뚝 솟아 마치 뚜껑을 활짝 벌려 놓은 것과 같다 하여 화개라는 명칭이 붙었다. 교동도에서 가장 높은 고지로서 사방이 완전히 조망되는 관측상 매우 유리한 고지이다. 이 산성은 전체 둘레가 2168m에 이르는 규모가 큰 석성이며, 내성과 외성의 2중구조를 지니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내성은 그 둘레가 1013m로서 화개산의 정상부를 감싸고 있는데, 이곳은 절벽을 자연 성채로 활용하고 있으며, 내성의 일부를 북쪽으로 길게 빼어 긴 용도를 형성하고 있는 것 등이 특징이다. 외성은 전체 둘레가 1155m 정도이며, 외성의 석축은 대부분 무너져 잡석만이 성벽 선을 따라 흩어져 있다.
외성의 성벽이 이처럼 많이 붕괴된 것은 1591년(선조 24)에 지현 이여양이 외성을 철거하여 읍성을 축조하는 데 사용하였고, 또 교동이 수군의 중심지로서 부각되었던 까닭에 육상의 산성은 그 규모에 비하여 전략적으로 크게 중요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737년에 산성을 개축하여 통어영의 신지(信地)로 삼았다는 기사로 미루어 볼 때, 화개산성은 적의 침입시 방어를 위하여 사전에 준비된 병력 집결지였으며, 해상에서 적을 격파하지 못하였을 경우를 대비한 육상 예비 진지의 역할도 겸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산성이 언제 처음 축조되었는가를 알려 주는 기록은 없고 증개축에 관한 기사만이 전해지고 있다. 이에 따르면 1555년(명종 10)에 왜구의 침입을 당하여 지현 최제운이 증축하고 성내에 군량고를 두었으며, 1591년(선조 24)에는 지현 이여양이 외성을 철거하여 읍성을 축조하는 데 사용하였고, 1737년에 다시 개축하고 군창을 두었다.
화개산성은 축성 재료와 규모의 차이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문헌기록을 종합해 볼 때 꽤 규모가 큰 산성이었던 듯하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는 “석성으로서 둘레는 1565보이며 그 내부에 연못과 샘이 각각 1개소씩 있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다른 지리지들에서는 석축의 둘레가 3543척, 높이는 18척인 산성으로 표기하고 있다. 한편, ≪전국유적총람≫은 산성의 둘레를 2km로 표시하고 있어서39) 육군박물관의 실측 결과인 2168m와 가장 유사하다.
- 교동봉수대
문화재 구분 : 향토유적>강화군 지정
지정번호 : 29호
소재지 : 강화군 교동면 고구리 233
화개산봉수는 교동면 대룡리 산233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이 봉수는 화개산 정상 서쪽 봉우리 정상에 위치하며, 향토유적 제29호이다. 남쪽 아래로는 교동읍성과 남산봉수가 한눈에 들어오며, 동남쪽 멀리로는 덕산봉수가, 동쪽으로는 하음산봉수가 조망된다. 화개산성 정상과는 270m 거리에 있다.
화개산봉수는 본도의 덕산봉수에서 연락을 받아 다시 본도의 하음산봉수로 연락을 보내는 역할을 하였으며, 봉수군은 46명이었다.
봉수는 김포 백석산, 통진 수안성산, 강화 진강산, 교동 화개산 봉수까지 이르렀다가 다시 강화 하음산, 강화 송악산, 통진 남산, 김포 북성산, 양천 화개산을 거쳐 서울 남산 제 5봉(烽)으로 연결된다.
- 고목근현지
강화도 교동면 교동동로 293(고구리 286)
명신슈퍼를 왼쪽으로 두고 좌회전하여 진행하면 우측에 표지판이 있다.
- 조선시대 한증막
교동면 고구리 산 233번지
고구리 연산군 유배지 표석 뒤
이 한증막은 조선후기에 축조하여 사용하던 민간 목욕시설로 소나무 가지 등을 이용하여 불을지펴 그열기로 한증을하던 목욕 시설이며 * 교동면에는 이러한 현존하고있는 시설물이 여러개소가 있으며 이는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시설이다.
한증막 규모 둘레 15m 직경 45m 높이 3m .
- 북진나루
교동면 인사리 682-`1
- 선양동마을앞 망향단
교동면 지석리 산 128
6. 내가면
- 적석사
소재지 : 강화군 내가면 고천리 210-3
고구려때 천축국 스님이 고려산에 올라 다섯색의 연꽃이 피어있는 오련지를 발견하고 다섯송이의 연꽃을 날려 그 연꽃이 떨어진 곳에 절을 세웠다 한다. 그 중 붉은 연꽃이 떨어진 곳에 적련사를 세웠는데 그곳이 이 절의 전신이다.
적석사 뒤편 산정상은 낙조봉이라 불리며 이곳에서의 낙조는 강도팔경의 하나로 꼽힐만큼 아름답다.
* 적석사사적비
문화재 구분 : 인천>유형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38호
소재지 : 강화군 내가면 연촌길 181 (고천리)
적석사는 『전등사본말사지』 등의 기록에 의하면 백련사 및 청련사 등과 함께 고구려 416년(장수왕 4)에 창건되었고, 처음에는 적련사(赤蓮寺)였다고 전하고 있다. 적석사를 오르는 길목 오른쪽에 자리한 적석사 사적비는 조선 1714년(숙종 40)에 세워진 것으로 전체 높이가 3m94cm이고 비신의 높이 3m4cm, 너비 69cm이다. 사적비의 재질은 화강암이고, 지붕모양의 뚜껑돌이 얹혀 있으며 비신의 상부에 ‘고려산적석사지비(高麗山積石寺之碑)’라는 비의 제목이 있다. 글씨를 쓴 사람은 조선 후기의 명필인 백하(白下) 윤순(尹淳, 1680~1741)이다. 비문에는 사찰의 중건·중수상황과 고려시대 몽골침입에 대항하여 강화에 도읍을 옮겨 왔을 때의 상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강화군·강화문화원, 『강화금석문집』, 2006. 강화군사편찬위원회,『신편 강화사』중 문화와 사상, 강화군, 2003. 문화재청 홈페이지
- 내가 오상리 고인돌
문화재 구분 : 인천>기념물
지정번호 : 16호
소재지 : 강화군 내가면 오상리 산125-1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지상에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이지역의 고인돌을 2000년 선문대학교 고고연구소에서 발굴하고 현재 인천시 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된 고인돌을 중심으로 주변에 10기의 고인돌을 복원하였다. 이 고인돌의 크기는 길이 335㎝로 큰 편이며, 돌방(石室)은 돌널형태로 바닥은 맨바닥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2000년 발굴 당시 석기류는 간돌칼〔磨製石劍〕, 돌화살촉〔石鏃〕, 바퀴날도끼〔環狀石斧〕, 반달돌칼〔半月形石刀〕, 돌자귀〔石手斧〕, 갈판〔耉石〕등 비교적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토기는 민무늬토기〔無文土器〕와 붉은간토기〔丹塗磨硏土器〕, 그리고 팽이모양토기〔角形土器〕편 등이 출토되었다.
[참고문헌] 선문대고고연구소, 『강화 오상리 지석묘 발굴 및 복원보고서』, 강화군, 2002. 하문식,「오상리 고인돌」,『한국고고학사전』, 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서울대 인문학연구소, 『강화도 고인돌군 정밀지표조사보고서』, 강화군, 1999. 인하대박물관, 『강화지역의 선사유적·유물』, 인하대학교 박물관, 2000. 이형구,『강화도 고인돌무덤(지석묘)조사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2.
- 강화망산봉수
문화재 구분 : 인천>기념물
지정번호 : 시 기념물 제64호
소재지 :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산131
봉수(烽燧)는 횃불인 봉(烽)과 연기인 수(燧)로 변방의 급한 소식을 중앙에 전하는 통신 방법으로 조선시대까지 쓰였다. 밤에는 횃불을 올리고 낮에는 연기를 올려 신호를 보냈다. 대개 봉수는 해발 100m~300m의 너무 높지 않은 산 정상부, 주변 일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에 설치됐다. 망산봉수는 덕산봉수라고도 불린다. 덕산은 해발 240m이다. 조선 초에는 진강산 봉수의 신호를 받아서 별립산 봉수로 전달했고, 조선 후기에는 진강산 봉수의 신호를 받아 교동 화개산 봉수로 전했다. 망산봉수는 사방 8.3m 내외의 정방형 기단에 원형 연대를 갖추고 있었다. 동쪽 기단은 단수가 2단이며 높이가 0.8m이다. 서쪽 기단은 단수가 4단이며 높이가 1.3m이다. 남쪽 기단은 단수가 5단이며 높이가 1m이다. 북쪽 기단은 거의 붕괴됐는데 높이가 0.4m이다. 연대는 지름이 4.5m이고 높이가 3.4m이다. [참고문헌] 한울문화재연구원·강화군, 『강화덕산봉수유적』 강화군, 한울문화재연구원, 2011. 육군사관학교, 『강화군 군사유적 지표조사보고서(성곽·봉수편)』, 육군박물관 유적조사보고 제7집, 2000. 강화군·육군박물관, 『강화도의 국방유적』, 2000. 김주홍, 『경기지역의 봉수 연구』, 상명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0.
- 강화 외포리 곶창굿당
문화재 구분 : 인천>무형
지정번호 : 문형문화재8호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에 전승되는 마을굿으로 ‘고창굿’이라고도 한다. 굿이 벌어지는 상산당(上山堂)에는 득제장군과 장군마누라를 가운데에 두고 양옆으로 성주·제석·별상·산신·군웅·도당할머니·대감·창부의 화분을 그려 모시고 있다. 곶창굿은 대개 3년마다 음력 2월 초에 한다. 정월 보름 안에 마을의 대표와 당주무당이 날을 정하고 상소임·중소임·하소임을 뽑는다. 소임들은 일주일 전부터 금기에 들어가 몸을 정하게 하고 상산당에 매일 옥수(玉水)를 바치는 정성을 들이며 제물을 장만한다. 곶창굿의 순서를 보면 ① 수살굿, ② 돌돌이, ③ 초부정 초가망거리, ④ 제석거리, ⑤ 성주대내림, ⑥ 장군거리, ⑦ 별상거리, ⑧ 성주왕신거리, ⑨ 대감거리, ⑩ 창부거리, ⑪ 선주굿, ⑫ 군웅굿, ⑬ 뒷전으로 굿을 마친 뒤 제관들이 모여 다시 감사의 고사를 지낸다. 서울식 굿을 기본으로 하면서 황해도식과 전통적인 경기도당굿의 순서가 섞여 있는 형태를 보인다. 주로 어업을 하는 정포(井浦)마을과 농사짓는 대정(大井)마을 주민들이 힘을 모아 득제장군을 모시고 마을의 안녕함과 생업의 번창을 위하여 하는 굿이다. 득제장군은 득대장군(得大將軍)이라고도 하는데 문헌상에 나와 있는 장군이 아니어서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다. [참고문헌] 강영경,『강화도 외포리 곶창굿』, 민속원, 2010. 김용국,「강화도 외포리 곶창굿의 현지 연구」, 경기대 박사학위논문, 2006. 강화군사편찬위원회,『신편 강화사』중 문화와 사상, 강화군, 2003.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웅진출판, 1997. 외포리 곶창굿은 어업을 위주로 하는 정포마을과 농업을 위주로 하는 대정마을 주민들이 농사가 잘 되고, 고기를 많이 잡게 해달라는 등의 마을 번영을 기원하는 도당굿의 하나이다.
* 곶창굿은 임경업 장군을 모시는 대표적인 서해안 풍어제이다. 최영 장군처럼 억울하게 죽은 영웅이 무속신이 되었듯이 임장군도 무속신이 되어 복수 하러 중국으로 가면서 연평도에서 조기를 잡아 선원을 배불리 먹였다는 전설과 함께 조기잡이 신으로 모시고 있다.
- 삼별초항쟁비
소재지 :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1993년 6월 1일 강화군민들이 삼별초의 몽골에 대한 항쟁을 기려 세운 비석으로서 강화군 외포리 선착장 오른편의 얕은 산 아래에 있다.
삼별초는 고려 원종이 몽골에 복속하여 개경으로 환도하자 강화도에서 봉기한 군사조직으로, 고려 무인정권 아래에 고종 17년 경에 집정자 최우에 의해 야별초라는 이름으로 조직되었다.
규모가 확장되어 좌별초·우별초·신의군으로 이루어진 삼별초는 고려 원종이 몽골에 복속하여 개경으로 환도하자 강화도에서 봉기하였다.
이들은 1270년 6월 1일 강화도에서 전라남도 진도로 이동하여 항쟁하였으며, 다시 제주도로 거점을 옮겨 여몽연합군에게 무너질 때까지 항전을 지속하였다.
항쟁비는 삼별초가 몽골의 지배에 항거하여 궐기한 유허(遺墟)에 세워졌다.
앞면에는 '삼별초군호국항몽유허비(三別抄軍護國抗蒙遺墟碑)'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비석을 세운 취지가 새겨져 있다.
[출처] 삼별초항쟁비 [三別抄抗爭碑 ] | 네이버 백과사전
- 강화군 외포항 젓갈수산시장
위치 : 강화군 내가면 외포리
강화군 내가면 정포항(외포항)에 위치한 젓갈수산시장에서는 새우젓을 비롯한 각종 젓갈 및 갓잡은 수산물을 판매하고 있다.
특히 강화군 특산물인 새우젓은 임진강과 예성강, 한강이 합류하는 강화도 앞바다에서 생산되어 내륙에서 유입되는 풍부한 영양염류를 섭취하여 감칠맛과 높은 영양가를 가지고 있으며, 옛날에는 한강 마포나루 등으로 공급되어 임금님께 진상 할 정도로 품질이 매우 우수하다.
7. 양도면
- 이건창묘
문화재 구분 : 인천>기념물
지정번호 : 기념물29호
소재지 :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 655-27번지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대문장가였던 영재 이건창(1852∼1898)의 묘소이다. 묘는 단분(單墳)이며 특별한 장식이나 석조물이 없다. 이건창은 어렸을 때부터 강화학파의 학맥을 계승한 이시원으로부터 양명학을 바탕으로 한 충의(忠義)와 문학(文學)을 배웠다. 5살 때 문장을 구사할 만큼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1866년(고종 4) 병인양요가 일어나던 해 15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1874년(고종 11)에는 사신을 수행하여 기록을 맡았던 서장관에 발탁되었다. 그 후 충청도·전라도·경상도·황해도의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관리들의 비행을 파헤치고 민생구휼을 위해 노력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로는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인 강화에 내려와 살다가 4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건창의 성품은 매우 곧아 병인양요 때에 순절한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었으며, 문필은 송대(宋代)의 문장가인 증공(曾鞏)·왕안석(王安石)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정제두(鄭齊斗)가 양명학(陽明學)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의 학풍을 세운 이른바 강화학파(江華學派)의 학문태도를 실천하였다. 한말의 대문장가인 김택영이 뽑은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에 포함 될 정도로 문장에 특출하였다. 저서로는 『명미당집(明美堂集)』·『당의통략』 등이 있다.
[참고문헌] 강화군사편찬위원회,『신편 강화사』, 강화군, 2003.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웅진출판, 1997. 문화재청 홈페이지
- 정제두 묘
문화재 구분 : 인천>기념물
지정번호 : 기념물56호
소재지 :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산 65
조선 후기 학자이자 강화학의 태두인 정제두(1649~1736)의 묘이다. 정제두의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이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정몽주의 후손으로 우의정 유성(維城)의 손자이고, 진사 상징(尙徵)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한산 이씨로 호조판서 기조(基祚)의 딸이다. 서울에서 출생하여 24세에 과거 공부를 그만 두고 양명학 연구에만 전념하였다. 61세에 선조들의 무덤이 있는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하곡(霞谷) 마을로 옮겨와 살았다. 아들 후일(厚一)을 비롯하여 이광명(李匡明), 신대우(申大羽), 심육(沈?), 윤순(尹淳), 이광사(李匡師) 등이 그의 문인으로 학풍을 이었다. 그가 속한 소론의 가학으로서 학파를 형성하여 강화도를 중심으로 계승되어 강화학파라 불리게 되었다. 양명학을 중심으로 한 강화학파는 정제두를 시작으로 한말 이건창, 이건승을 이어 박은식과 정인보에게로 그 학통이 계승되었다. 묘역은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62-5 길 바로 옆에 있다. 아버지 상징 묘역 바로 뒤편 위에 있다. 묘역은 완만한 경사지에 사성이 없이 용미만이 길게 되어 있고, 그 앞에 원형봉분이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다. 하계부분에는 좌우에 민무늬로 된 상단에 띠를 2개 두른 망주석과 금관조복에 양관을 한 문인석이 있다. 신대우(申大羽)가 글을 짓고, 서영보(徐榮輔)가 글씨를 쓴 묘비가 있다.
[참고문헌] 강화군사편찬위원회,『신편 강화사』, 강화군, 2003. 강화군·강화문화원, 『강화금석문집』, 2006.
- 김취려묘
문화재 구분 : 인천>문화재자료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25호
소재지 :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산71
고려 후기의 장군 김취려의 묘이다. 그는 고려 후기 예부시랑을 지낸 김부(金富)의 아들로 본관은 언양이며, 음서(蔭敍)를 통해서 정위(正尉)에 임명되었다. 그후 1219년에는 몽골군과 동진국과 힘을 합쳐 강동성에 웅거한 거란군을 격퇴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1232년에는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다. 사람됨이 정직하고 검소하였으며, 아랫사람을 바르게 다스려 누구도 그를 속이지 못하였다고 한다. 고종 21년(1234) 강화에서 사망하였다. 김취려 묘지석에는 ‘공은 갑오년(고종 21, 1234) 2월 14일에 미미한 병세를 보이다가 21일에 갑자기 돌아가시니 향년 63세이다. 천자(天子)께서는 몹시 슬퍼하며 조문하고 부의를 내리셨다. 공은 복야(僕射) 조언통(趙彦通)의 따님을 부인으로 맞아들여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시고 뒷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7월 12일에 진강산(鎭江山) 대곡동(大谷洞) 서쪽 기슭에 예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묘지석이 발견된 곳에 강화군과 언양김씨 종친회에서 묘소를 새롭게 정비하였다. 묘역에는 원형의 봉분 앞에 망주석 한 쌍과 상석이 갖추어져 있으며, 하단 부분에 묘역을 정비하고 종친회에서 건립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 고려사절요 강화군사편찬위원회,『신편 강화사』, 강화군, 2003.
- 강화 가릉
문화재 구분 : 국가>사적
지정번호 : 370
소재지 :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고려 제24대 원종의 비 순경태후 김씨(順敬太后 金氏)의 무덤이다. 순경태후는 최씨 무인집권자 최우의 사위인 김약선의 딸로서 1235년(고종 22) 원종이 태자가 되자 태자비인 경목현비가 되었으며, 다음해에 충렬왕을 낳고 사망하였다. 1262년(원종 3) 정순왕후로 추대되고 아들인 충렬왕이 즉위(1274)하여 순경태후로 높여졌다. 가릉은 강화에 있는 왕릉과는 달리 지상식 석실 구조를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석실의 전면에는 유리벽을 설치하여 내부를 볼 수 있도록 되어있다. 일반적으로 봉분 뒤에는 반달 모양으로 두둑하게 토성(土城)을 둘러쌓거나 돌담을 쌓은 곡장이 있으나 가릉에는 사성(莎城), 곡장(曲墻)이 없이 약간 경사진 평지에 봉분을 쌓아 올린 형태이다. 묘역은 3단의 장대석단을 설치한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왕릉의 형태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봉분이 붕괴되고 석조물은 파괴된 채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4년 보수하였고, 2004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한 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봉분 주변에는 현재 한 쌍의 석수가 있고 봉분 앞에는 석인상 한 쌍이 남아 있을 뿐 석물들이 파괴 또는 유실되어 당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참고문헌] 국립문화재연구소,『江華 高麗王陵-嘉陵·坤陵·陵內里石室墳』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고려사(高麗史)』,『고려사절요』,『신증동국여지승람』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웅진출판, 1997. 강화군사편찬위원회,『신편 강화사』, 강화군, 2003. 문화재청 홈페이지
- 능내리석실분
문화재 구분 : 인천>기념물
지정번호 : 기념물28호
소재지 :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산16-1번지
강화 능내리 석실분은 고려시대의 왕릉급 무덤이다. 무덤 앞 양편에는 망주석으로 추정되는 사각 석주가 남아 있으며, 사각 석주의 3면에는 내용을 알 수 없는 문양이 양각되어 있다. 고려시대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진 이 고분은 과거 도굴로 인하여 석실이 노출되어 있어 보존·정비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됨에 따라 이를 위한 발굴을 2006년 말에서 2007년 초에 이르기까지 실시하게 되었다. 석실 내부는 화강암을 잘 다듬어 축조되었으며, 봉분구조물과 석실, 건물지가 양호하게 남아 있어 고려시대 지배계급 묘제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로 확인되었다. 출토유물로는 청자편, 각종 금은제장식 파편, 유리그릇편·구슬류, 상부원보(祥符元寶) 1점, 은제못, 금박장식 관재 등 소량이지만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특히 봉황머리를 나타낸 은제장식편의 경우 문양이 있는 곳에만 도금처리하여 장식적 효과가 뛰어나도록 한 것이 특징적이다. 봉황문양은 전통적으로 왕비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대몽항쟁기 강화에서 사망하였으나 능이 확인되지 않은 희종의 왕비인 성평왕후나 고종의 왕비인 안혜태후의 묘로 추정하고 있다.
[참고문헌] 국립문화재연구소,『江華 高麗王陵-嘉陵·坤陵·陵內里石室墳』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웅진출판, 1997.
- 강화 곤릉
문화재 구분 : 국가>사적
지정번호 : 371
소재지 :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 75
고려 제22대 강종의 비 원덕태후 유씨(元德太后 柳氏)의 무덤이다. 원덕태후는 종실 신안후(信安候) 성(珹)의 딸로 왕실 동성을 피하기 위하여 유씨라 하였으나 누구의 성을 따랐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유씨는 1212년(강종 1)에 왕비로 봉해졌고 연덕궁주(延德宮主)라 하였으며, 고려 23대 고종의 어머니이다. 이후 원덕태후로 추존되었고, 1253년 정강(靖康)의 시호가 더해졌다. 곤릉은 전체적으로 3단으로 되어 있다. 봉분과 석축, 곡장(曲墻)은 붕괴되고 석조물은 없어진 채 폐허가 된 것을 1974년 보수, 정화하였다. 본래 묘역은 고려 후기의 왕실 묘제를 따라 문·무인석의 석조물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현재는 묘표만 남아 있다. 상단에는 곡장이 파괴되어 없어졌고 그를 대신해서 봉분 뒤에 반달 모양으로 두둑하게 토담을 둘러쌓아 놓았고 그 안에 원형 봉분이 있다. 봉분하단 전면에는 둘레돌이 일부 복원되어 있다. 2단 중앙에는 작은 묘표가 있는데, 묘표에는 ‘고려원덕태후곤릉(高麗元德太后坤陵)’이라 새겨져 있다. 일반적으로 2단에는 석인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곤릉에는 석물이 모두 유실되어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며 하단에는 정자각이 위치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자리가 정비되어 있다. 2004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하였고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참고문헌] 국립문화재연구소,『江華 高麗王陵-嘉陵·坤陵·陵內里石室墳』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고려사(高麗史)』,『고려사절요』,『신증동국여지승람』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웅진출판, 1997. 강화군사편찬위원회,『신편 강화사』, 강화군, 2003. 문화재청 홈페이지
- 강화 석릉
문화재 구분 : 국가>사적
지정번호 : 369
소재지 :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 182번지
고려 21대 희종(熙宗, 재위 1204∼1237)의 무덤이다. 『고려사』에 의하면 ‘1237년(고종 24) 8월에 희종이 57세로 법천정사(法天精舍)에서 승하하자 낙진궁(樂眞宮)으로 옮겨졌으며, 10월에 덕정산(德政山) 남쪽 석릉에 장례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희종은 1204년에 신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최충헌이 권력을 남용하자 1211년 내시 왕준명(王濬明) 등과 함께 최충헌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였다. 이로 인해 최충헌에 의해 폐위당하여 강화로 쫓겨났다가 이어 용유도로, 교동도로 옮겨졌다가 1219년 귀양에서 풀려나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1227년 복위의 음모가 있다는 무고로 다시 강화로 쫓겨났다가 교동으로 옮겨졌고, 법천정사에서 죽었다. 묘역의 하단에는 정자각이 위치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흔적을 확인할 수 없으며, 2단에 1기의 석인상, 봉분 옆에 1기의 석인상이 남아있다. 특히 석릉은 강화에 있는 다른 왕릉과는 달리 봉분 뒤편에 곡장을 두른 것이 특징이다. 조선 현종 때 강화유수 조복양이 강화의 고려 왕릉을 확인하고 보수하였으며, 매년 능참봉을 파견하여 관리하였다고 한다. 1895년 이후 관리가 소홀해졌고 일제 강점기 때에 도굴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4년 보수 정화하였다. 2002년에는 남한에 있는 고려왕릉 최초로 발굴하여 유구를 확인하였고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발굴 당시 청자편을 비롯하여 관장식용 금속류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속수증보 강도지』 국립문화재연구소,『고려석릉』, 국립문화재연구소, 2003. 강화군사편찬위원회,『신편 강화사』, 강화군, 2003. 문화재청 홈페이지
8. 선원면
- 철종외가
문화재 구분 : 인천>문화재자료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8호
소재지 : 강화군 선원면 철종외가길 46-1 (냉정리, 철종외가)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재위 1849∼1863)의 외숙인 염보길(廉輔吉)이 살던 집이다. 1853년(철종 4)에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에게 명하여 지은 이 건물은 원래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로 두고 H자형 배치를 취하고 있었으나, 행랑채 일부가 헐려 지금은 ㄷ자 모양의 몸채만 남아 있다. 사랑채와 안채가 一자형으로 연결되어 있고 안채와 사랑채의 공간을 작은 담장으로 간단히 분리하였다. 당시 일반 사대부 집의 웅장한 규모와는 다르게 규모는 작으나 예스럽고 우아한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건물이다. 후원에는 염씨 집안의 묘가 있다. 철종은 정조의 아우인 은언군(恩彦君)의 손자이며,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아들로 어머니는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廉氏)이다. 1849년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으로 19세의 나이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참고문헌] 강화군사편찬위원회,『신편 강화사』, 강화군, 200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웅진출판, 1997. 문화재청 홈페이지
- 철종외가묘
문화재 구분 : 향토유적>강화군 지정
지정번호 : 7호
소재지 : 강화군 선원면 냉정리 산70-46
철종외가 묘는 철종외가에서 좌측으로 약 500m 정도 떨어진 길 바로 옆에 있다. 묘역에는 염성화(廉星華)·염덕석(廉德碩)·염상임(廉尙任)의 묘역이 있다. 철종 외가는 1859년(철종 10)에 강화유수 조충식(趙忠植)이 왕실의 위신을 세운다는 의미에서 철종 외숙 3인의 묘역을 정화하고 비석을 세웠다. 이에 철종의 외가 5대의 벼슬을 추증하고, 냉정리에 전답 10여 정보를 하사하였다고 한다.
정면에서 보았을 때 제일 우측에 성화의 묘역이 있고, 가운데 덕석, 좌측에 상임의 묘역이 있다. 묘역은 전체적으로 이중활개를 하였다. 묘역의 형태상을 보면 먼저 성화의 묘역을 조성한 뒷편 그 좌측의 빈 공간에 덕석과 상임의 묘역을 정비한 것으로 보인다. 즉, 계체석이 일자의 형태를 하지 않고 ‘ㄱ’자나 ‘ㄴ’자 형태로 연이어 있다. 활개 역시 성화의 묘역에서 연이은 흔적이 보인다.
3기 모두 공통적으로 묘표 음기에 ‘용담‘이란 글씨가 움푹하게 파져서 새로 새겨 놓은 흔적이 보인다. 그것은 파평 염씨가 용담 염씨를 가칭하여 철종의 외가라고 속이기 위하여 글씨를 ‘파령’이라고 새긴 것을 새로 정비한 것이라고 한다.
- 충렬사
문화재 구분 : 인천>유형
지정번호 : 유형문화제21호
주요시설 : 사당, 수직방, 전사청, 비각, 외삼문
소재지 : 강화군 선원면 충렬사로 232 (선행리)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에 위치한 충렬사는 김상용 선생을 비롯한 병자호란과 신미양요 때 나라를 지키다 순절한 충신 28명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이다. 1641년(인조 19)에 건립하여 현충사(顯忠祠)라 부르다가 1658년(효종 9)에 국왕으로부터 충렬사란 이름을 받아 강화유수 허휘가 충렬사로 이름을 바꿨다. 김상용은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실의 신주를 받들고 빈궁·원손을 수행해 강화도에 피난했다가 이듬 해 성이 함락되자 성의 남문루(南門樓)에 있던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순절하였다. 충렬사를 건립할 당시에는 모두 7명을 배향하였으나, 이후 황선신과 강흥업이 추향되어 9명의 위패가 모셔졌고 그 후 충렬사 비기가 건립되었다. 이후 신미양요 당시 미군에 맞서 싸운 충신까지 배향하여 현재 모두 28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충렬사는 교육공간인 명륜당(明倫堂)과 동·서재는 없어지고, 현존 건물로는 한식목조 맞배지붕으로 된 14평의 사당(祠堂)과, 16평의 수직방(守直房), 14평의 전사청(典祀廳), 비각(碑閣), 외삼문(外三門) 등이 있으며, 1977년에 보수 정화하여 현재에 이른 것이다. [참고문헌] 인천사연구소, 『강화충렬사지』, 강화충렬사유림회, 2005. 강화군사편찬위원회,『신편 강화사』, 강화군, 2003. 강화군·강화문화원, 『강화금석문집』, 2006.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웅진출판, 1997. 문화재청 홈페이지
- 강화 선원사지
문화재 구분 : 국가>사적
지정번호 : 259
소재지 : 강화군 선원면 와말길106번길 23 (지산리)
선원사지는 1976년 동국대학교 강화도학술조사단이 강화도 일원에 대한 지표조사에서 처음 발견하였다. 발견 당시 이곳에서 몇 개의 주춧돌을 비롯하여 보상화무늬 전돌, 범자(梵字) 새긴 기와, 지붕에 얹었던 잡상들을 확인하고, 선원면 도감마을, 도감산에 있는 사지이므로 학술적·역사적으로 가치가 있어 지역의 연원을 기초하여 1977년에 사적 제259호로 지정되었다. 1996년부터 4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건물터, 축대와 연화문 기와, 금동탄생불, 청동나한상 등이 출토되어 사찰과 관련된 유적으로 규명되고 있다. 독립된 건물지 21개소와 부속 행랑지 7개소가 확인되었으며, 건물들은 북고남저의 지형 위에 동서로 긴 4개의 층단을 두고 빼곡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부 대형건물지(기단길이 38m)에는 삼존불을 지탱한 것으로 보이는 불단 유구가 확인되었다. 건물지가 집중되어 있는 중심구역으로 남북길이 180m, 동서너비 180m정도이다. 출토유물은 자기류, 기와류, 소형 청동탄생불, 금동나한상, 탄화된 사경편 등이 있다. 자기류(총 2,300여점)는 12세기 후반∼1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청자편이 대부분(94%)이고, 막새기와류는 연화문, 범자문, 귀목문이 대부분이고 ‘박씨(朴氏)·유씨(劉氏)’명(銘) 막새도 있고, 취두편은 모두 21개가 수습되었다. 고려시대 문인인 최해(崔瀣)의 문집인 『졸고천백(拙藁千百)』에는 선원사가 송광사와 함께 고려의 2대 선찰로 손꼽을 수 있다고 하였다.
[참고문헌] 동국대학교 박물관, 『강화선원사지발굴조사보고서』, 강화군, 2003 인천시립박물관, 『강화의 절터』, 인천시립박물관 조사보고 제22집, 2009. 강화군사편찬위원회,『신편 강화사』중 문화와 사상, 강화군, 2003. 김형우·안귀숙·이숙희,『인천의 전통사찰과 불교미술』1,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2011. 『선원면지』증보판, 선원면지 편찬위원회, 2004.
9. 불은면
- 강화전성江華塼城
인천광역시 시도기념물 제20호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오두리 563
인천 강화군 불은면 오두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성. 길이 270m, 높이 0.9∼1.2m.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0호(오두돈대 밑 강화전성은 인천시 기념물 제20호로 지정됐었으나 강화 외성 전체가 사적 제452호로 승격 지정됨에 따라 그 안에 포함되어 해제되었다. )이 성은 강화도에 축조된 고려 외성 중의 하나로 밑 부분은 돌로 쌓고 윗부분은 벽돌로 쌓았다.
원래 이 성은 1231년(고종 18)에서 1270년(원종 11) 사이에 토성으로 축조되었다고 하며, 조선시대에 들어와 1742년(영조 18)에 강화유수 김시연(金時?)이 벽돌을 구워 이 성을 개축할 것을 왕에게 청하여 허락을 받아 이듬해 공사를 시작하여 1743∼1744년간에 완공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아래쪽은 돌로 쌓고 위쪽은 벽돌로 쌓았는데, 벽돌은 강회붙임으로 연결하고 어긋매김 공법으로 축조하여 허물어짐을 방지하였다. 원래 전체 높이 약 4m에 약 10리에 해당하는 부분은 벽돌로 개축하고 나머지 부분은 삼군문(三軍門)에서 축조하였는데, 현재는 약 270m 가량만이 군데군데 허물어진 채 남아 있다.
- 강화 광성보
문화재 구분 : 국가>사적
지정번호 : 227
소재지 :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
강화의 해안 경계 부대인 12진보 가운데 하나로, 1658년(효종 9)에 설치됐다. 화도돈대·오두돈대·광성돈대와 1874년(고종 11)에 축조된 오두정포대를 관할하였다.
1745년(영조 21)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어 안해루(按海樓)라 하였다. 이곳은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초지진과 덕진진을 거쳐 광성보에 이른 미군은 상륙하기 전에 포격으로 광성보를 초토화했다. 이미 병인양요 때 광성보에 근무한 바 있던 어재연이 포격을 피할 안전한 장소에 군사들을 숨겼다가 상륙하는 미군에 맞서 싸웠다.
조선군은 물러서지 않고 분전했으나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했다. 병사들 대부분이 전사했다. 미군은 광성보 전투 후 소득 없이 물러갔다. 미군의 처지에서 볼 때 신미양요는 전투에서 승리하고 전쟁에서 패배한 사건이었다. 광성보 안에는 광성돈대, 어재연·어재순 형제의 충절을 기리는 쌍충비각, 이름을 알 수 없는 전사 장병들을 모신 신미순의총, 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있다.
[참고문헌] 육군사관학교, 『강화군 군사유적 지표조사보고서(돈대편)』 육군박물관 유적조사보고 제6집, 1999. 문화재관리국, 『강화전사유적보수정화지』, 문화재관리국, 1978. 육군박물관, 『강화도의 국방유적』, 강화군·육군박물관, 2000.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웅진출판, 1997. 이민웅, 「18세기 강화도 수비체제의 강화」, 『한국사론』34, 1995.
* 용두돈대
- 쌍충비각
문화재 구분 : 향토유적>강화군 지정
지정번호 : 10호
소재지 :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산12번지
쌍충비는 광성보 경내에 2기가 있다. 1871년 신미양요 때 광성보전투에서 순절한 중군 어재연 외 59명의 순절비이다. 1기는 강화군민이 건립한 <광성파수순절비(廣城把守殉節碑)>로 비의 규모는 폭 62cm, 높이 168cm, 두께 25cm의 양면비로 1873년에 건립한 것이다.
다른 1기는 어재연과 어재순순절비인데 폭이 58cm, 높이 177cm, 두께 26.5cm의 양면비로 역시 1873년에 건립했다. 고종 때부터 제사를 지내왔으며, 1970년부터는 어재연의 후손인 어윤원이 제형을 올려 충절의 유업을 추모하고 있다.
- 강화 덕진진
문화재 구분 : 국가>사적
지정번호 : 226
소재지 : (417-831) 인천 강화군 불은면
원래 덕포진이 강화에 있었는데 1666년(현종 7)에 통진(지금 김포시 대곶면)으로 옮겼다. 그 자리에 덕진진이 설치됐다.
덕진진은 손돌목돈대와 덕진돈대를 관할했다. 숙종 대에 이곳에 덕진정사라는 행궁을 지었다. 이후 행궁이 읍내에 새로 건립되면서 덕진정사는 폐지됐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양헌수의 군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했다.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포격전을 벌인 곳이다. 1976년 성곽과 돈대를 고치고 남장포대도 고쳐 쌓았으며 문의 누각도 다시 세웠고, 당시의 대포를 복원하여 설치하였다.
지금 덕진진에는 문루인 공조루(拱潮樓), 남장포대, 덕진돈대 그리고 대원군이 세운 해문방수비(海門防守碑)가 있다. 해문방수비에는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라고 새겨졌다. ‘바다의 문을 막고 지켜서, 다른 나라의 배가 지나가지 못하도록 하라.’는 의미이다.
[참고문헌] 육군사관학교, 『강화군 군사유적 지표조사보고서(돈대편)』 육군박물관 유적조사보고 제6집, 1999. 문화재관리국, 『강화전사유적보수정화지』, 문화재관리국, 1978. 육군박물관, 『강화도의 국방유적』, 강화군·육군박물관, 2000. 강화군·강화문화원, 『강화금석문집』, 2006. 이민웅, 「18세기 강화도 수비체제의 강화」, 『한국사론』34, 1995.
- 경고비
문화재 구분 : 향토유적>강화군 지정
지정번호 : 9호
소재지 :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6
덕진진 경내에 1기가 있다. 이 비는 1867년에 대원군의 명으로 강화 덕진 첨사가 건립한 것으로 경고비(警告碑)라고도 부른다. 비의 규모는 높이가 147cm, 폭이 54.5cm, 두께가 28cm의 단면비이다.
비면에는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라고 새겨져 있는데 당시 쇄국정책의 일면을 살펴 볼 수 있다.
- 허유전묘
문화재 구분 : 인천>기념물
지정번호 : 기념물26호
소재지 : 강화군 불은면 강화동로549번길 88 (두운리)
고려 후기 충숙왕 때의 명신 허유전의 묘이다. 허유전은 1243년(고종 30) 출생했으며, 1274년 원종때 과거 문과에 급제하였다. 1309년(충렬왕 34) 전라도안찰사를 거쳐, 밀직사사에 올라 지공거(과거시험을 주관하는 관직)가 되어 여러 인물을 선발하는 일을 맡았다. 충숙왕 때 정승의 자리에 올랐으며 1323년(충숙왕 10) 81세의 나이에 원나라에 귀양 가 있던 충선왕을 고려로 모셔오기 위해 원나라로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 묘는 도굴된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1985년 후손 허관구(許官九)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1988년 발굴 과정에서 고려청자 잔 여러 조각, 고려 토기조각 수십 점, 얇은 청동 조각 여러 점, 나무관에 사용한 쇠못 한 점, 11∼12세기에 만들어진 중국 송·금대의 엽전 19개가 나왔으며, 유골인 엉치뼈도 출토되었다. 이 외에도 많은 부장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도굴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참고문헌] 강화군사편찬위원회,『신편 강화사』, 강화군, 200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웅진출판, 1997. 高麗史, 高麗史節要 인천의 문화재(인천광역시, 1995) 문화재청 홈페이지
10. 화도면
-마니산
소재지 : 강화군 화도면 마니산로 675번길 18
마니산은 해발472.1m의 높이로 세 봉우리가 나란히 서있어 먼곳에서 보면 그 모양이 아름답고 웅장한 명산으로 참성단은 그 중간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올라서서 보면 남쪽으로 서해의 여러섬이 보이고 맑은날에는 북쪽으로 개성의 송악산이 보입니다. 마니산 정상의 참성단은 고려사나 신동국여지승람에는 단군이 천제를 올리던 곳이라 전하고 있는데 경주의 첨성대처럼 기초는 하늘을 상징하여 둥글게 쌓고 단은 땅을 상징하여 네모로 쌓아 하원상방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단군은 북한의 묘향산에서 출현하여 그후 평양에 도읍하여 국호를 조선이라 불렀고 다음에 기자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산신이 되었다라고만 되어있어 마니산과 참성단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지 않으나 여지승람에는 단군이 평양에 도읍한 후 황해도에 있는 구월산에 옮겨 산신이된후에 이 마니산에서 지냈다는 기록이 나와있습니다.
- 강화참성단
문화재 구분 : 국가>사적
지정번호 : 136
소재지 : 강화군 화도면 흥왕리 산 42-1번지
마니산 정상에 있으며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린 제단이라고 전해온다. 고려 원종 11년(1270)에 보수했으며, 조선 인조 17년(1639)과 숙종 26년(1700)에도 고쳐 쌓았다. 여러 번 고쳐서 쌓았기 때문에 최초의 모습은 찾아보기는 어렵다. 제단은 자연석으로 둥글게 쌓은 하단(下壇)과 네모반듯하게 쌓은 상단(上壇)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둥근 하단은 하늘, 네모난 상단은 땅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경주의 첨성대와 비슷하다. 고려와 조선왕조는 때때로 이곳에서 도교식 제사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단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참성단을 단군시대의 종교와 관련시켜 이해하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일제강점기에 단군을 숭배하는 대종교(大倧敎)가 생기고 난 이후에는 민족의 성지로서 주목받게 되었다. 지금도 해마다 개천절에 제천행사가 거행되며, 전국체전의 성화는 이곳에서 태양열을 이용하여 붙이고 있다. 참성단이 과연 단군의 제천단인지는 단정할 수 없으나, 고려시대에 국가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던 만큼 제전(祭田)이 지급된 것은 물론이다. 고려 원종은 참성단의 의례를 직접 주재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강화군, 『마니산 참성단 정밀실측조사보고서』, 강화군, 2004. 강화군사편찬위원회,『신편 강화사』중 문화와 사상, 강화군, 2003. 동아시아고대학회,『개천대제학술회의』, 강화문화원, 2010. 한국역사민속학회, 『2012 강화 참성단 학술회의』,강화문화원,2012. 문화재청 홈페이지
- 강화 참성단 소사나무
문화재 구분 : 국가>천연기념물
지정번호 : 502
소재지 : 강화군 화도면 문산리 산55 참성단 내
소사나무는 잎이 작고 줄기가 고목의 모습을 가져 예부터 분재 소재로 사랑을 받아온 대표적인 전통나무이다. 이 나무는 전형적인 관목 모습에 나무갓이 단정하고 균형 잡혀 있으며 참성단의 돌단 위에 단독으로 서 있기 때문에 한층 돋보인다.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신단수를 연상하게 한다. 규모와 아름다움에서 우리나라 소사나무를 대표한다. 수령은 약 150년이고, 나무의 높이가 3.5m, 둘레가 1.7m 정도이다. 1717년(숙종 43)에 강화유수 최석항이 무너진 참성단을 다시 쌓게 했는데, 그때 심은 것이 아닐까 하는 추정이 있다.
[참고문헌] 강화군, 『마니산 참성단 정밀실측조사보고서』, 강화군, 2004. 강화문화원, 『강화 보호수지』, 2003. 문화재청 홈페이지
- 참성단중수비
문화재 구분 : 인천>문화재자료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13호
소재지 : 강화군 화도면 해안남로1826번길 14 (흥왕리)
참성단을 새로이 보수한 후 그 내용을 기록해 놓은 것으로, 가파른 바위 윗면을 손질하여 그 위에 비문을 새겼다. 마니산 꼭대기에 자리잡은 참성단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조선 숙종 때 강화유수를 지내던 최석항(崔錫恒, 1654~1724)이 관내를 순찰하며 마니산에 올랐다가 이곳이 무너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당시 전등사 총섭이었던 승려 신묵에게 명하여 새로이 고쳐 짓도록 하였다. 최석항은 ‘참성단은 단군이 돌을 쌓아 단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하던 곳’이라며 ‘수천 년이 지나도록 후손들이 우러러보며 공경할 곳이니 고쳐서 완전하게 하는 일을 어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적었다. 비는 조선 숙종 43년(1717) 5월에 마련해 놓은 것으로, 비문에는 ‘참성단’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연, 참성단에 대한 선조들의 뜻 등에 관한 기록들이 함께 적혀 있다.
[참고문헌] 강화군사편찬위원회,『신편 강화사』중 문화와 사상, 강화군, 2003. 문화재청 홈페이지
- 천제암궁지
문화재 구분 : 인천>기념물
지정번호 : 기념물24호
소재지 : 강화군 화도면 문산리 산 64-1번지
천제암궁지는 참성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쓰던 제기와 제물을 준비하던 재궁(齋宮)터다.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미 고려 때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때 목은 이색(李穡)이 지은 ‘마니산행’ 시가 있으며, 조선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곳에 머물며 하늘에 제를 지냈다고 전하고 있다. 지체가 높은 사람이나 왕의 경우 참성단까지 오르기가 힘들었으므로 이곳에서 제사를 모시기도 하였을 것이다. 천제암궁터는 삼단의 석축으로 되어 있으며, 넓이는 약 70평 정도로 부근에는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는 표시인 금표와 우물들이 남아 있으며 건물지도 발견된다. 『여지도서』등 옛 문헌에는 ‘천재암(天齋庵)’이나 ‘천재궁(天齋宮)’으로 표기되어 있다.
[참고문헌] 강화군사편찬위원회,『신편 강화사』중 문화와 사상, 강화군, 2003. 『국역 병와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 문화재청 홈페이지
- 장화리일몰조망지
소재지 : 강화군 화도면 장화리 해변
강화의 서쪽 해변은 일몰로 유명하다.
붉은 노을로 물든 서해의 섬들과 바다를 바라보노라면 그 따스함에 마음속까지 물든다고 한다.
저무는 해는 하루의 갈무리이자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이다. 자그마한 섬을 뒤덮을 만큼 그케 떨어지는 일몰은 바다와 갯벌을 가르고 가슴까지 다가와 얼굴과 마음을 물들인다. 해는 바다로 떨어지고 그 위로 기러기가 무리지어 나는 광경을 상상해보자. 장화리로 오면 그 상상이 이루어진다
-강화갯벌센터
소재지 : 화군 화도면 해안남로 2293-37 (여차리, 강화갯벌센타)
주요시설 : 지하1층 : 갯벌 및 철새 연구실, 다목적 영상실, 기획전시홀, 화장실, 대청마루, 휴게마당 1층 : 실험실, 도서/인터넷/자료실, 로비, 밀물/썰물 수족관, 에코샵, 안내실(매표소), 화장실, 전시실, 오감전시, 관찰테크 2층 : 옥상정원, 상징전시, 전망대(망원경), 오감전시, 디오라마전시
강화도 남단의 갯벌은 세계 4대 갯벌중의 하나로서 천연기념물 제419호로 지정되었으며 그 크기가 여의도의 52.7배에 달한다.
강화군에서는 여차리 갯벌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자연친화적인 통나무 갯벌센터를 2005년에 설립하여 밀물 썰물의 드나듦을 알 수 있는 수족관 및 저어새 모형의 전시관을 설치하고 2층은 전망대 디오라마 전시실을 마련하였다. 또한, 강화갯벌센터에 방문하면 갯벌과 생물, 갯벌의 중요성 등 재미있는 갯벌이야기와 더불어 농게의 힘자랑, 염생식물 관찰, 저어새 관찰 등이 가능하여 갯벌을 체계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교육의 장소가 될 것이다.
-고려이궁지
소재지 : 강화군 화도면 흥왕리 404-1
이 궁지는 옛 고려시대 사찰인 흥왕사 인근에 자리잡고 있다. 고려 고종 46년(1259) 풍수 도참가 백승현의 진언에 의하여 건립 되었다고 전한다. 이 궁은 왕이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던 별궁으로서 역대 고려 왕조는 특히 풍수지리설에 의하여 많은 이궁을 건립 하였다고 전한다.
건물은 멸실되고 페허화 되어 터만 남아 있으며 현재는 축대 일부와 주초석이 남아있다.
- 동막유원지(동막해변)
소재지 : 강화군 화도면 동막리 7번지 일대
강화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동막이다.
동막해변은 백사장과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둘러쌓여 천혜의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강화남단에 펼쳐진 갯벌은 무려 1천8백만평이며 물이 빠지면 직선 4km까지 갯벌로 변한다. 검은 개흙을 뒤집어 쓰고 기어가는 칠게,가무락,쌀무늬고둥,갯지렁이가 이곳에 살고 있다.
밀물 시에는 해수욕을 썰물 시에는 갯벌에 사는 여러 가지 생물들을 관찰할 수 있다. 가족단위의 여름휴양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인근 분오리돈대에 오르면 강화의 남단갯벌이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인천국제공항도 보인다.
- 강화 정수사 법당
문화재 구분 : 국가>보물
지정번호 : 161
소재지 : 강화군 화도면 해안남로1258번길 142 (사기리)
신라 639년(선덕여왕 8) 회정선사가 세워 정수사(淨修寺)라고 했다. 조선시대 세종때 함허대사가 다시 지었는데, 건물 서쪽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이름을 정수사(淨水寺)라 고쳤다고 한다. 이 법당은 석가모니 불상을 모신 대웅보전으로, 1957년 보수공사 때 1689(숙종 15)에 적은 상량문이 발견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세종 5년(1423)에 새로 고쳐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건물 양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장대석으로 바른층쌓기 한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두리 기둥을 세워 기둥윗몸을 창방(昌枋)으로 결구하고, 기둥 위에만 공포(?包)를 올린 주심포식 건물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4칸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고, 지붕 무게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앞뒷면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앞면 퇴칸이 후대에 다시 설치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앞쪽 창호의 가운데 문은 어여쁜 꽃병에 연꽃과 모란을 꽂은 모습의 화려한 조각을 새겨 뛰어난 솜씨를 엿보게 한다. 이 창살문의 창호 조각은 소박하면서도 깊이 있는 아름다움이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참고문헌] 강화군사편찬위원회,『신편 강화사』중 문화와 사상, 강화군, 2003. 문화재청 홈페이지
- 함허대사부도
문화재 구분 : 향토유적>강화군 지정
지정번호 : 19호
소재지 : 강화군 화도면 해안남로1258번길 142 (사기리)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함허대사가 정수사에서 입적하자 그의 수도처 였던 뒷산 중턱에 현 부도를 봉안한 것이라 한다. 부도의 구성은 기단 위에 탑신이 놓이고 그 위에 옥개석을 얹어 정상에 상륜을 장식하고 그 기본형은 팔각 원당형을 따르면서 사각의 단순한 변형을 가미 하였다.
기단부는 상, 하대로 형성 되었으며 각 면에는 아무런 조식도 없다. 부재는 화강암이며 전체 높이는 164cm이다.
- 강화 사기리 탱자나무
문화재 구분 : 국가>천연기념물
지정번호 : 79
소재지 :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 135-10
탱자나무는 주로 영·호남지방에 분포한다. 열매와 껍질은 약재로 사용되며 줄기에 가시가 나 있어 울타리용으로 적합하다. 민가에서는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는 벽사(?邪)의 의미를 담아 탱자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강화 사기리 탱자나무의 나이는 약 400살로 추정되며, 높이가 3.8m 정도이다. 여러 갈래로 뻗은 가지가 이채롭다. 그러나 서쪽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 탓인지, 생육상태가 좋지 않다. 이건창 생가 맞은편에 있다. 강화가 탱자나무가 자랄 수 있는 북쪽 한계선이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강화도 해안가에 가시가 날카로운 탱자나무를 심어 적의 침입을 막고자 했다. 나라에서는 탱자나무 종자를 강화에 보내주고 그 생육 상태를 보고받을 만큼 탱자울타리 조성에 관심을 보였다. 이 탱자나무 역시 방어 울타리용으로 심어졌던 것이 살아남은 것으로 보인다. 강화산성, 강화외성 등과 함께 사기리 탱자나무 역시 나라를 지키기 위한 선조의 노력을 보여준다. 한편 사기리 탱자나무는 이건창의 선조인 이광명의 어머니가 아들과 함께 강화도에 왔을 때 심은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참고문헌] 강화문화원, 『강화 보호수지』, 2003. 강화군군사편찬위원회, 『신편강화사』, 2003. 문화재청 홈페이지
- 이건창생가
문화재 구분 : 인천>기념물
지정번호 : 기념물30호
소재지 : 강화군 화도면 해안남로1114번길 6 (사기리, 영재이건창선생생가)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대문장가였던 영재 이건창(1852∼1898)이 살았던 집이다. 이 건물이 지어진 시기는 확실치 않지만 기둥이나 보 등의 치목수법(治木手法)으로 볼 때 1백여 년이 된 것으로 판단되며, 자연석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삼량(三樑) 가구로 몸 전체를 짠 전형적인 한옥의 구조로 되어있다. 안채는 ‘ㄱ’자형이며 대청을 중심으로 안방과 건넌방이 좌우에 있고, 안방 앞으로 부엌을 내는 등 경기도 지방의 일반적인 살림집 모습을 하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1996년에 대대적으로 보수·재정비하였다. 이건창은 어렸을 때부터 강화학파의 학맥을 계승한 할아버지로부터 양명학을 바탕으로 공부를 하였다. 1866년(고종 4) 병인양요가 일어나던 해 15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1874(고종 11)에는 사신을 수행하며 기록을 맡았던 서장관에 발탁되었다. 그 후 충청도·전라도·경상도·황해도의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관리들의 비행을 파헤치고 민생구휼을 위해 노력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로는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인 강화에 내려와 살다가 4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건물 바로 옆에는 이광명(李匡明), 이시원(李是遠) 등 선조들의 묘소가 있다.
[참고문헌] 강화군사편찬위원회,『신편 강화사』, 강화군, 2003. 강화군·강화문화원, 『강화금석문집』, 2006. 문화재청 홈페이지
11. 길상면
- 강화 삼랑성
문화재 구분 : 국가>사적
지정번호 : 130
소재지 :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1
단군의 세 아들이 성을 쌓았다고 해서 삼랑성(三郞城)이라고 부른다. 마니산 참성단과 더불어 단군과 연관된 이야기가 기록으로 전해지는 귀한 역사 유적이다.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 단군의 세 아들이 삼랑성을 쌓은 것으로 전해진다는 기록이 있다.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하는데 성의 둘레는 대략 2,300m이다. 축성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거친 할석(割石)을 사용한 삼국시대의 축성 기법이 드러나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쌓은 성으로 추정한다. 1739년(영조 15)에 중수하면서, 남문에 문루를 건립하고 종해루(宗海樓)라 하였고, 1764년(영조 40) 다시 성을 중수하였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양헌수 부대가 동문과 남문으로 공격해오던 프랑스군을 물리친 승전지이다. 삼랑성 안에는 삼국시대에 창건된 전등사가 있다. 고려 대몽항쟁기에 성 안에 가궐(假闕)을 지었는데 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선시대 후반 정족산 사고를 짓고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족보인 선원록 등을 봉안했으며, 군사 시설로 정족진을 설치했었다.
[참고문헌] 이형구·노태천, 『백제논총』제5집, 백제문화개발연구원, 1996 강화군, 『강화 삼랑성 여장 조사보고서』, 강화군, 2005. 육군박물관, 『강화군 군사유적 지표조사보고서(성곽·봉수편)』, 육군박물관 유적조사보고 제7집, 2000. 육군박물관, 『강화도의 국방유적』, 강화군·육군박물관, 2000.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웅진출판, 1997. 강화군군사편찬위원회, 『신편강화사』, 2003
-전등사
주요시설 : 대웅보전, 약사전, 향로전, 명부전, 삼신각, 대조루, 적설당, 종무소, 범종, 정족산 사고
소재지 :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 (온수리, 전등사)
단군왕검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을 간직한 삼랑성내에 아늑히 자리잡고 있는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에 아도화상이 처음 창건하고 진종사(眞宗寺)라 이름 지었다. 그후 고려 충렬왕비 정화궁주가 이 절에 귀한 옥등을 시주했다해서 전할전, 등불등자(傳燈寺)를 써서 전등사로 개명한 사찰이다.
이절의 입구에 있는 대조루 밑을 지나들어가면 정면에 보물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웅보전이 자리잡고 있다. 대웅전 안에는 1544년 정수사에서 판각되어 옮겨진 법화경 목판104매가 보전되고 있다.
명부전 맞은편 왼쪽 언덕을 약100m 오르면 조선 왕실의 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산 사고터가 복원되어 있다. 강화에는 마니산에 사고를 설치하였다가 1660년 이곳 전등사 경내로 옮겨 1678년이래 실록 및 서적을 보관하였고 그후 정족산 사고가 복원되었다.
경내에 있는 보물제393호 범종은 중국종으로 중국 하남성의 숭명사에서 북송시대(1097), 고려 숙종2년에 주조된것으로 우리나라 종과는 달리 종머리에 음관이 없고 용머리 주위에는 아름다운 16개의 연잎이 둘려 있는것을 볼수 있으며 견대와 요대사이에는 8괘가 둘려있어 특이함을 나타내고 있다.
1866년 병인양요때는 승군 50명이 전투에 참가 하기도한 호국 불교의 사찰로 당시 조선수비대장이던 양헌수 장군 승전비가 전등사 동문 입구에 세워져 있다.
* 강화 전등사 대웅전
문화재 구분 : 국가>보물
지정번호 : 178
* 강화 전등사 약사전
문화재 구분 : 국가>보물
지정번호 : 179
* 전등사 철종
문화재 구분 : 국가>보물
지정번호 : 393
* 강화 전등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문화재 구분 : 국가>보물
지정번호 : 보물 제1785호
* 강화 전등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문화재 구분 : 국가>보물
지정번호 : 보물 제1786호
* 전등사대웅보전후불탱
문화재 구분 : 인천>문화재자료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21호
*전등사 강설당 아미타불탱
문화재 구분 : 인천>문화재자료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22호
* 전등사 대조루
문화재 구분 : 인천>문화재자료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7호
- 강화정족산성진지
문화재 구분 : 인천>기념물
지정번호 : 66호
소재지 :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44
정족산성진은 정족산 사고를 수호할 목적으로 조선중기 이후 설치된 국방시설이다. 1907년 방화로 전체 소실되어 평탄지로 있던 곳을 2008년 발굴조사하여 11개소의 건물지를 포함 대규모 유구가 발굴되었다. 1870년대 이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정족산성진」 지도에 표현되어 있는 내사, 진사, 포량고 등의 건물지와 담장시설, 문지 등을 대부분 확인하였다. 발굴된 일부 건물지의 경우 정족산성진 설치 이전인 1784년(정조 8년)에 건립된 정족창과 관련된 건물지로 파악된다.
- 강화정족산사고지
문화재 구분 : 인천>기념물
지정번호 : 67호
소재지 :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639:
정족산사고는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의 족보인 선원보략을 보관하기 위해 지었던 조선후기 사고 중 하나이다. 실록은 조선전기에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하여 충주, 전주, 성주에 나누어 보관하였는데 임진왜란으로 전주사고에 보관하고 있던 것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불타 없어졌다. 1606년에 다시 만들어춘추관, 태백산, 묘향산, 강화마니산, 오대산에 사고를 짓고 보관하였다. 그러나 인조 때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으로 춘추관본이 불타 없어졌고 그후 정족산, 태백산, 적상산, 오대산에 보관하게 되었다. 정족산 사고는 1653년(효종 4)마니산사고에 화재가 일어남으로써 건립이 추진되었다. 1660(현종 1)정족산성이 완성되고 실록을 성내의 사고로 옮기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때 장사각과 함께 선원각이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정족산가궐지
문화재 구분 : 향토유적>강화군 지정
지정번호 : 11호
소재지 :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8
고려 고종 46년(1259) 풍수도참가 백승현의 진언에 의하여 고종이 건립 했던 가궐터이다. 당시 백승현이 낭장으로 재임시 고종이 적당한 가궐지를 문의하자 삼랑성 및 신니동에 가궐을 짓도록 하고 마니산 참성단에 제사하면 친조 문제가 해결되고 주변국의 대국들이 조공 할 것이라고 건의 하자, 왕은 대장군 조문주, 국자제주 김구, 장군 송송례에게 가궐을 짓도록 명하여 완성 하였다 한다.
당시 가궐의 건물은 몽고병이 침입해 왔을 때 소실 되었다 하며 당시에는 이 가궐에서 왕이 거쳐하지 않을 때에도 평상시의 생활처럼 금침을 깔고 의복을 놓아두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 선원보각지
문화재 구분 : 향토유적>강화군 지정
지정번호 : 12호
소재지 : 강화군 길상면 길상로304번길 48 (온수리)
전등사의 산내암자인 극락암 뒤쪽으로 약 50m정도 올라가면 예전 전등사의 부속시설이었던 선원보각 및 장사각이 옛터에 복원되어 있다. 선원보각은 조선 왕실의 계보와 족보를 보관하던 곳이었으며, 장사각 역시 ≪조선왕조실록≫ 등 나라의 귀중한 사서를 보관하던 건물이었다.
≪전등본말사지≫에 의하면 본래 묘향산에 있던 선원보각과 장사각을 1660년(현종 1) 이곳으로 이전했다고 하는데, 이 때부터 전등사에서 줄곧 이 건물을 관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08년(순종 2) 소실될 위기도 있었으나 다행스럽게도 절의 창환(昌煥)·영함(永咸) 두 스님에 의해 보존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듬해 국가의 명으로 선원보각이 철폐되고 서적들은 한양으로 옮겨졌고 그 뒤로 건물들은 퇴락하였다. 계단석 일부와 축대석 정도만 남아 있었으나 1999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 양헌수승전비
문화재 구분 : 인천>기념물
지정번호 : 기념물36호
소재지 :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 42번지
이 비는 양헌수 장군이 병인양요 때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물리친 공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강화군민들이 1873년(고종 10)에 세운 것으로 정족산성 동문 가까이 있다. 화강암으로 건립된 비의 총 높이는 181cm, 비신(碑身)의 높이는 163cm, 폭은 60cm, 두께는 27cm이며 단층 1칸의 비각 내에 안치되어 있다. 비 앞면에는 ‘순무천총양공헌수승전비(巡撫千摠梁公憲洙勝戰碑)’라고 음각되어 있고, 비 뒷면에는 장군의 공적이 수록되어 있다. 양헌수(1816~1888)는 1848년(헌종 14)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1865년(고종 2)에는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강화도 탈환의 임무를 맡아 5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강화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그곳으로 쳐들어오는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화력이 절대적으로 열세임에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양헌수의 뛰어난 전략 때문이기도 하다. 정족산성 전투 패배로 사기를 잃은 프랑스군은 곧바로 강화도에서 철수하게 된다. [참고문헌] 강화군·강화문화원, 『강화금석문집』, 2006.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웅진출판, 1997. 문화재청 홈페이지
- 강화 온수리성공회 성당
문화재 구분 : 인천>유형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52호
소재지 : 강화군 길상면 온수길38번길 14 (온수리)
이 성공회성당은 1906년 영국인 주교 조마가(Mark N. Trollope)가 지은 우리나라의 초기 서양 기독교 교회양식의 건물이다. 대한성공회는 16세기 종교개혁 때 분리된 영국성공회의 한국교구로, 예배와 풍습은 가톨릭과 다르나 교리와 관행은 가톨릭적인 교회이다. 대한성공회의 역사는 1889년 코프가 초대 한국 주교로 영국에서 서품을 받음으로써 시작되었다. 대한성공회에서는 강화성공회 성당을 먼저 건립하였고, 이어 온수리 성공회성당이 건립되었다. 온수리 성당은 정면 3칸, 측면 9칸의 팔작집이다. 지붕의 정면과 후면의 합각부 위, 용마루 양끝에는 십자가가 장식되어 있어서, 이곳이 전통양식의 건물구조를 한 기독교 계열의 건물임을 알 수 있게 한다. 내부에는 전면에 내진을 설치하여 예배의 집례 시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고, 그 앞으로는 의자를 내어 신도들이 앉을 수 있도록 배치하였다. 내부의 중앙에는 모두 14개의 방형고주를 설치하여 지붕의 하중을 분산시키고 있다. 성당 건물의 우측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솟을삼문 형식의 종루가 있는데, 원래의 정문으로 생각된다. 종루의 양쪽 칸에는 조그마한 공간을 두어 창고로 사용하고 있으며, 중앙 칸은 2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층은 문의 역할을 하는 공간이지만 문을 달지는 않았다. 상층은 종루로서 서양식 종이 걸려있으며 줄이 아래층으로 드리어 있어서 종을 칠 수 있도록 하였다. 성당의 앞쪽으로 3기의 비석이 있는데, 1기는 터너의 기념비이고 나머지 2기는 모두 조마가 주교의 영세기념비이다.
[참고문헌] 강화군사편찬위원회,『신편 강화사』, 강화군, 200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웅진출판, 1997. 문화재청 홈페이지
- 강화 온수리성공회 사제관
문화재 구분 : 인천>유형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41호
소재지 : 강화군 길상면 온수길38번길 14 (온수리)
강화온수리성공회사제관은 이 성당 신부들의 생활공간이다. 이 사제관은 우리나라에 성공회가 처음으로 전파되기 시작할 때, 초대 선교사 고요한(Corfe,C.J.) 주교와 함께 영국으로부터 내한한 조마가 신부가 1896년 강화에 부임하여 선교를 하면서 2년 후인 1898년에 건축한 건물이다. 초기 선교 당시의 소박하고 순수한 토착미를 엿볼 수 있는 건축 양식이 그대로 살아 있다. 사제관은 성당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1933년 원형 그대로 중수하였다고 전한다. 원래 ‘一’자형의 대문과 ‘ㄷ’자형의 안채 공간이 종으로 배치되어 ‘ㅁ’자형을 이루고 있었으나, 현재는 대문이 없어지고 그 흔적으로 계단과 주초 자리만 남아 있다. 대한성공회의 역사는 1889년 고요한이 초대 한국 주교로 영국에서 서품을 받음으로써 시작되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한 사람의 신자도 없었고, 한국인에게 처음 세례를 베푼 것은 주교 축성이 있은 지 7년 뒤인 1896년 6월 13일 강화에서였다. 이 사제관은 외국인이 한국전통주거문화 속에 어떻게 적응하여 왔는가를 짐작하게 할 수 있는 주거공간으로, 또 건축수법이나 치목형식에서 완전히 한국적인 것만이 아니라 영국인들의 주문을 어떤 방식으로 소화하여 기술적인 적용을 하였는가를 드러내는 건축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강화군사편찬위원회,『신편 강화사』, 강화군, 200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웅진출판, 1997. 문화재청 홈페이지
- 이규보묘
문화재 구분 : 인천>기념물
지정번호 : 기념물15호
소재지 : 강화군 길상면 까치골길 72-17 (길직리 산 32-2)
고려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1168∼1241) 선생의 무덤이다. 고려의 무신정권 하에서 태어나 무신정권에 적극 협력했던 문인의 한 사람으로, 1191년(명종 19)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 최충헌(崔忠獻)에게 발탁되어,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랑평장사에 올랐다.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에 실려 있는 「동명왕편」을 비롯한 2천여 수의 시와 산문은 대다수의 작품들이 문학적,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특히 「동명왕편」은 초기 고구려사 연구와 우리 민족의 자주 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자료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또한 몽골군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해서 대장경을 만들 때 민족수호의 충정이 담긴 「대장경각판군신기고문(大藏經刻板君臣祈告文)」을 지었다. 현재 묘역에는 상석과 장명등(長明燈:무덤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으며, 좌우에는 문인석·무인석·망주석과 석양(石羊) 한 쌍씩이 세워져 있다. 봉분 하단은 둘레돌이 둘러쳐 있으며 1967년 후손들이 묘역을 정화하고, 묘역의 오른편에 재실(齋室)과 왼편의 유영각(遺影閣)을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묘 주변의 석물 중 문무석은 매우 고졸하여 당시 유풍을 알 수 있는 귀한 조각이며, 석양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는 고려시기의 조각으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강화군사편찬위원회,『신편 강화사』, 강화군, 2003. 강화군·강화문화원, 『강화금석문집』, 2006. 문화재청 홈페이지
-강화 초지진
문화재 구분 : 국가>사적
지정번호 : 225
소재지 : 강화군 길상면 해안동로 58 (초지리)
강화의 해안 경계 부대인 12진보 가운데 하나이다.
병자호란 이후 서해안 수비체제가 강화도 중심으로 개편되면서 경기 서남부 해안의 진(鎭)들이 강화도와 강화도 근처로 옮겨오게 된다. 1653년(효종 4)에 남양의 영종진이 인천부 자연도로 옮겨왔다. 영종진이 자연도에 자리 잡으면서 섬의 이름도 영종도로 바뀌게 된다. 영종진을 남양에서 자연도로 옮긴 것은 자연도가 해상에서 강화도로 진입하는 길목이라는 중요성 때문이다. 이제 영종도는 강화도를 지키는 1차 방어선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초지진은 1656년(효종 7)에 안산에서 옮겨왔다. 초지진에서 초지돈대·장자평돈대·섬암돈대를 맡아 지휘했다.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 미군과 충돌했던 격전지이다. 1875년(고종 12) 일본 운요호 사건 때 상륙을 시도하는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당시 초지진을 지키던 조선군은 일본군을 격퇴했다. 패퇴한 일본군은 철수하면서 영종도를 해코지했다. 이후 초지진은 허물어졌고, 초지진이 관할했던 초지돈대만 남았다.
정비된 초지돈대 안에는 대포가 전시돼 있다. 돈대 옆 소나무에는 신미양요 혹은 운요호 사건 때 포탄 맞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참고문헌] 육군사관학교, 『강화군 군사유적 지표조사보고서(돈대편)』 육군박물관 유적조사보고 제6집, 1999. 문화재관리국, 『강화전사유적보수정화지』, 문화재관리국, 1978. 육군박물관, 『강화도의 국방유적』, 강화군·육군박물관, 2000.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웅진출판, 1997. 송양섭, 「17세기 강화도 방어체제의 확립과 진무영의 창설」, 『한국사학보』13,
2002. 이민웅, 「18세기 강화도 수비체제의 강화」, 『한국사론』34, 1995.
- 초지대교
위치 :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 , 김포시 대곶면 약암리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와 김포시 대곶면 약암리를 잇는 다리로 1996년 인천광역시에서 착공하여 2001년 8월 완공한 다리이다. 길이 720m에 왕복 4차선이며 섬과 내륙을 잇는 연륙교라는 특성에 따라 교량부에 900mm의 상수도관과 300mm의 도시가스관이 함께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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