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한라산 자락

돌문화 답사

하늘타리. 2016. 5. 7. 21:46

5월 6일

고이지부부무덤

아마도 제주의 무덤 중 묘역이 가장 큰 무덤일듯...


고이지부부무덤앞 석물 중

화강암으로 만든 문인석 2기



그리고 무덤조성당시 것으로 추정되는 옛비석


광무연간 개비한 비석



주변 묘역에 연결된 산담이 있어서

그 애틋함에 한 장 꾹


성읍 변여무 무덤으로 가는 길

아무도 들르는 이 없는 로타리 옆 경사지 윗면  효자비, 열녀비, 충혼탑, 애향탑을 돌아봅니다.




변여무무덤으로 갑니다

오늘의 안내자 김유정이 2011년 제민일보에 쓴 변여무무덤에 관한 글을 옮깁니다.


..."제주도 토산재 가운데 주류를 이루고 있는 석재는 기공이 많은 비현정질 현무암이다. 크고 작은 구멍이 많은 현무암 재료의 특성상 현무암 석상에 잔잔한 미소를 구현하기란 여간 쉽지 않은 일이다. 석상은 대체로 3가지 돌로 만들어지는데 현무암 조면암, 다공질 현무암, 붉은 빛이 도는 용암석으로 만들어진다. 붉은 빛이 도는 용암석은 송이석이라고도 부르지만 가볍다는 뜻에서 '속돌'이라고도 한다. 제주의 무덤 석상은 다공질 현무암으로 만든 석상이 제일 많다. 물론 돌하르방, 미륵도 모두 다공질 현무암으로 만들었다. 조면암은 입자가 잘기 때문에 글씨를 새기기에 알맞아 비석을 만드는 재료로 선호했다.


조면암 산지는 서귀포시 산방산과 걸쇠오름이 대표적이다. 산방산 조면암은 서부지역의 대정현 지역과 서북부 지역의 제주목 지역에 비석의 재료를 공급했고, 걸쇠오름은 동부지역의 정의현과 동북부 지역의 제주목에 비석의 재료로 이용되었다. 그 외의 지역은 마을 석공에 따라 다른 데 함덕의 고선흥 석공의 경우 함덕 해안에서 생돌을 캐다가 무덤 석상을 만들기도 했다.

  
 
 ▲ 탐라의 미소, 변여무 무덤의 동자석, 조면암, 18세기. 
 

빙삭 웃는 제주 동자석


다공질 현무암이나 붉은 용암석은 조면암에 비해 섬세한 표현을 할 수 없는 약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주의 미소는 용암석으로 만든 문인석에서 찾을 수 있는데 붉은 색 용암쇄설물에 새겨진 문인석의 미소가 탐라의 미소 가운데 가히 일품이라고 할 수 있다. 통정대부 훈련원 봉사 김공(通政大夫訓練院奉事金公)의 무덤에 세워진 한 쌍의 문인석 가운데 오른쪽의 문인석은 자연석의 결을 이용하여 몸체를 표현했고, 얼굴도 최대한 돌의 결을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미소를 표현하고 있다. 웃는 듯 마는 듯 이 문인석의 미소가 자연스러워서 '빙삭' 웃고 있는 모습이랄까. '빙삭 웃는 웃음'이란 부끄러운 듯, 멋쩍은 듯 살짝 웃는 웃음이라고 할 수 하는데, 빙그레 웃는 웃음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또 기분 좋아서 웃는 웃음을 '해싹'웃는 웃음이라고 한다. '해싹'하게 웃는 것은 어떤 상황이 너무 좋지만 소리를 내지는 않고 활짝 웃는 웃음을 말한다. 제주 문인석이나 동자석에는 이런 '빙삭 웃는 웃음'이 많이 표현되었다. 무덤의 의례 석상이라는 점 때문에 그래도 엄숙하지 못할망정 활짝 웃을 수는 없어서 해삭 웃는 얼굴은 만들지 않았다. 이처럼 웃음도 지역에 따라 다르다고 할 수 있는 데 신라의 미소나 백제의 미소에 비해, 탐라의 미소는 잔잔한 웃음, 수줍은 듯 빙삭 웃는 웃음이 특징이다.   

무덤 석상의 특이한 배치와 올레

서귀포시 소재 원주후인변공지묘(原州後人邊公之墓)의 무덤은 석물들을 갖추고 있다. 묘주의 이름은 여무(汝武), 본관은 원주로 입도시조 변안열(邊安烈)의 9세손이다. 강희(康熙) 경술(庚戌, 1670) 2월 7일에 태어나, 건륭(乾隆) 계유(癸酉, 1753) 2월 21에 사망하였고 같은 해 3월 16일 장례를 지냈다. 비석에는 벼슬이 쓰여 있지 않으나 《原州邊氏訓練公派世譜》에는 벼슬은 가선대부(嘉善大夫) 유향별감(留鄕別監)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 무덤은 다른 무덤과 달리 석상의 배치가 3열이어서 특별하다. 봉분 앞에 먼저 한 쌍의 조면암 동자석을 마주보고 세우고, 다음 열에 용암 쇄설물로 만든 동자석을 세웠다. 또 마지막 열은 산담 가까이에 역시 붉은 빛이 도는 문인석을 다시 한 쌍 세웠다.

1열에 세워진 동자석은 우측 동자석이 높이 49㎝, 넓이 24㎝ , 두께가 15㎝로 키가 작은 편에 속하며, 약간 비스듬하게 세워졌다. 좌측의 동자석은 석질이 촘촘한 조면암으로 만들어져 얼굴 표현이 매우 섬세하다. 손에는 꽃봉오리로 추정되는 기물(器物)을 들었다. 같은 열의 좌측 동자석은 높이 55㎝, 넓이 22㎝ , 두께가 17㎝로 손에는 같은 꽃봉오리를 들었다. 풍상에 의해 코가 아래쪽에서부터 반쯤 훼손돼 있다. 이 조면암 동자석들은 눈을 이중으로 강조해 표현하고 있는데 새긴 솜씨가 매우 숙련되었다. 두 기 모두 머리 모양은 양각댕기다. 선각(線刻)으로 새긴 입은 누운 초생달 모양처럼 미소를 머금은 형상이다. 즉 눈과 입은 잔잔한 웃음, 소위 '빙삭'하게 웃는 표정이 되었다. 이 동자석은 두 손과 기물만을 양각의 선묘로 도드라지게 표현하고 있어 단순한 형태이지만 앙증맞으면서도 깜찍하다.

2열에 세워진 붉은 용암석 동자석 한 쌍 중 벙거지를 쓴 동자석이 있다. 이 벙거지 쓴 동자석은 제주에서 유일무이한 석상이다. 벙거지를 쓴 석상은 무관(武官)을 표현한 것인데, 손에는 작은 방망이를 들었다. 반대편 동자석은 모자는 쓰고 있지 않으며, 손에 든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또 3열에 세워진 문인석 중 우측의 문인석은 부채를 들고 있다. 부채는 중국과 한국 등에 널리 사용되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부채를 들고 다녔으나 고려시대에 접선(摺扇)이 발명돼 대중에 널리 애용되었다. 12세기에 고려를 찾은 한 사신은 고려인들이 한겨울에도 접었다 폈다 하는 부채를 들고 다니는 것을 신기하게 보아 기록하기도 했다. 그래서 중국의 사신들은 고려인으로부터 접선(摺扇)에 그림이나 글씨를 넣은 '고려선(高麗)' 하나를 얻는 것을 귀히 여겼다.  

조선의 벼슬아치들은 복두를 쓰고 부채를 든 경우가 없으며, 오히려 갓을 쓰고 부채를 들고 다니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부채는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기 때문에 더운 여름날 벼슬아치들이 손에 들고 다니는 생활소품이기도 하지만, 또 신분을 과시하기 위한 기물로서 부채에 화려한 노리개(扇錘)를 달기도 했다. 무속에서는 부채를 풍운조화의 바람을 일으키는 신령한 기물로 인식하기도 한다.

좌측의 문인석은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는 빈손이다. 목이 부러진 채 몸체 위에 올려놓은  상태로 산담에 기대어 서 있다. 변여무의 무덤 석상은 용암석으로 만든 동자석과 문인석은 조면암 동자석과는 달리 매우 고졸하게 만들어졌으며, 솜씨로 보아 두 명의 석공이 만들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한 무덤에 석질이 다른 동자석 넷에 문인석 2기가 있는 무덤은 매우 보기 드문 경우다. 대개 무덤 석상의 배치는 비석 1기, 동자석 2기, 문인석 2기, 망주석 2기 아니면, 비석 1기, 동자석 2기, 망주석 2기거나 비석 1기에 문인석 2기 망주석 2기를 배치하는 것이 다반사다. 

변여무 무덤의 왼쪽(묘주의 입장에서는 오른쪽)에는 신문이라고도 부르는 올레가 있다. 음택으로서 산담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집터의 울타리와 같은 셈이다. 올레는 지역이나 사람에 따라 신문, 올레-도, 시문, 도(道, 途)라고도 한다. 원래 올레는 삶의 영역에서 말하면 큰길에서 집안으로 들어가는 골목을 말하는데 정확히 마당 바로 직전까지이다. 올레는 직선으로 내기보다는 휘어지게 곡선으로 만든다. 휘어진 올레의 역할은 집안으로 들어오는 바깥사람들의 거동을 집안에서 미리 살피고자 했다. 올레에 들어오는 바깥사람은 미리 인기척을 내 집안으로 가고 있다는 신호를 보낸다. 또 올레는 초가에 맞받아치는 센 바람을 약하게 줄이려고 기능적으로 만들었다. 올레의 돌담 높이는 집터의 방향과 골목의 길이에 따라 높낮이를 고려하여 쌓았다. 그리고 올레는 집집마다 독립적으로 자기 영역을 표시하기 위한 것인데 친인척이 같은 올레인 경우가 많았다. 올레는 '은 올레(같은 올레)'와 의미가 같은 '올레(한 올레)', 그리고 '올레(다른 올레)' 로 구분되는 데 올레로 이웃의 소속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올레는 큰길에서 올레로 들어가는 곳에 '올레(턱)'이라는 경계석을 땅에 묻어 올레와 큰길을 구분한다. 그 올레를 지나면 다시 마당 입구에 '마당(턱)'이라는 경계석을 땅에 박아  마당의 영역임을 표시한다. 이런 올레의 원리가 적용된 것이 산담이다. 제주인들은 영혼의 세계에도 삶의 영역과 같이 올레의 구조를 산담에 적용했다. 영혼의 세계 또한 삶의 세계를 그대로 옮겨놓았다는 것은 망자를 살아있을 때처럼 섬기라는 유교적인 생사관(生死觀)에 기인한 것이며, 이것은 제주사람들의 생사일여(生死一如) 관념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


글중에서 동감할 수 없는 것이

"2열에 세워진 붉은 용암석 동자석 한 쌍 중 벙거지를 쓴 동자석이 있다. 이 벙거지 쓴 동자석은 제주에서 유일무이한 석상이다. 벙거지를 쓴 석상은 무관(武官)을 표현한 것인데, 손에는 작은 방망이를 들었다."라는 글인데 무인을 상징하는 동자석이 있다는 것도 동의하기 어렵지만 무인을 상징한다고 한 이유가 단지 벙거지를 써서 그렇게 본다라는 것은 약간 억지스럽기까지 합니다.



3열의 석상 중 마지막 열 산담 가까이에 있는 동자석입니다.

문인석이라 해설 하는데 문인석이 무인석보다 무덤에서 더 멀리 있을 수 없지요.

그리고 이 무덤의 주인은 말 그대로 향리에서만 큰기침하던 분으로 중앙 정가에서 높은 벼슬을 한 것도 아닌데 문인석, 무인석이 무덤앞에 설치될리도 없지요.

그냥 후손들이 무덤을 가꾸는 충정에서 한줄, 두줄, 세줄 이렇게 석물을 가져다 배치한 것일겁니다.


참고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에서 설명하는 유향별감의역할과  기능를 옮깁니다


"유향 별감(留鄕別監)은 유향소라는 향청(鄕廳)의 한 벼슬아치로 좌수(座首) 다음의 직책입니다.

유향소(留鄕所)는 조선 초기에 악질 향리(鄕吏)를 규찰하고 향풍을 바로잡기 위해 지방의 품관(品官)들이 조직한 자치 기구입니다. 향사당(鄕射堂), 풍헌당(風憲堂), 집헌당(執憲堂), 유향청(留鄕廳), 향소청(鄕所廳), 향당(鄕堂) 등으로도 불립니다.


유향 품관은 비록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이나 좌수(座首)·별감(別監)이 될 수 있는 자격을 향안(鄕案)에 등재된 인물만으로 국한하는 등 폐쇄적인 성격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초기의 향촌 질서 확립 및 향풍 진작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유향 소품관은 처음에는 부 이상 5인, 군 4인, 현 3인이었다가 성종 때는 부 4인, 군 3인, 현 2인이었습니다. 후기에 와서 현은 1인을 늘려 3인이었으며, 좌수 1인, 별감 2인의 3인을 삼향소(三鄕所)라고 했습니다. 유향소·삼향소는 모두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 동시에 청사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서문으로 왔습니다.

북쪽에 있는 돌하르방 두기


남쪽에 있는 두기는 원래의 좌대를 버리고 문쪽으로 옮겨 갔습니다.





하도리


안내자는 하도리 밭담으로 안내하고 설명하는데 나는 우뭇가사리 채취작업이 한창인 바닷가를 멀리서 지켜보고 서있습니다.





가까이 가면 걸리적거린다고 한소리 듣겠지요.


우뭇가사리 등 홍조류의 해초로

우무를 만들지요

만들어진 우무를 동결탈수하거나 압착 탈수하여 건조시킨게 한천이고요.


우무는 실 모양으로 가늘게 썰어 콩국에 띄워 여름철에 시원하게 흡입합니다.

이것은 또한 소화가 되지 않으므로 변비를 막는 완제제로도 이용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음식에 관한 옛기록 어디에도 우무에 관한 기록은 없습니다.

조선시대에도 먹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일본에서는 나라시대때 부터 기록이 있다 하지요.

아마도 강점기에 널리 퍼졌을 겁니다.


하여간 최근에는 큰 돈이 되는 것으로 일년에 4번 날을 잡아 채취한다고 하는데

오늘이 금년도 첫번째 채취일일겁니다.

토끼섬쪽을 바라보다 하도리를 떠납니다.



어등포에 차가 섭니다.

안내자는 광해군에 대해 설명합니다.

요사이의 트랜드가 광해군의 재평가이지요.

그렇다치고 나는 원담을 봅니다.




돌아오는 길

낙선동에 한번 더 차가 섭니다.


한장 꾹

오늘의 마지막 사진입니다.





'제주이야기 > 한라산 자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무덤  (0) 2016.05.16
어느 찻집 마당  (0) 2016.05.15
3월 28일 밤의 장전리  (0) 2016.03.29
용담동 제사유적 (답사참고자료 예전기사인용)  (0) 2016.02.13
용담동 사진 몇장  (0) 2016.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