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담동 제사 유적(龍潭洞 祭祀 遺蹟)
금동제허리띠장식
유리옥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용담동에 있는 탐라 후기의 제사 유적.
[위치]
용담동 제사 유적은 제주시 앞 해안가에서 한 단 올라온 표고 20m의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날씨가 좋을 때면 관탈도·추자도·해남 반도의 여러 섬 끝머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옛 제주읍성의 서쪽으로 흐르는 한천과 병문천 하류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며, 드넓은 ‘동한드기’ 벌판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기도 하다.
[발굴조사경위 및 결과]
용담동 제사 유적에 대한 발굴 조사는 1993년 제주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실시되었다. 발굴 조사 결과 일정한 집자리나 유구가 확인되지 않았으며, 유물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범위만 확인되었다. 유물이 집중적으로 발견되는 범위는 남북 길이 11.2m, 동서 너비 5.4m 정도였다. 특히, 중심 둑을 경계로 4개의 피트 내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출토유물]
유물은 지표 아래 10~25㎝에서는 장경병·사각편병·중국계 도자기·대호·투공지석(透孔砥石) 등이 출토되었다. 지표 아래 25~35㎝에서는 냇돌과 할석이 적석된 곳이 드러났고, 청동제 유물과 철제 화살촉·파상밀집대호·금동제 허리띠 장식·주름무늬병이 확인되었다. 전체적으로 유물과 잡석군이 뒤섞인 상태로 나타났다.
지표 아래 35~40㎝에서는 잡석이 전혀 없고 유리 구슬과 철제 유물이 확인되었으며, 상층에서 다량 출토된 도기 유물은 극히 소량만 분포하고 있었다. 바닥 부분은 대형 할석이 군데군데 불규칙하게 놓여 있었다.
용담동 제사 유적에서 출토된 그릇은 모두 통일신라 토기인 회색 도기로 병과 항아리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문양은 시문 수법에 따라 그은 무늬와 찍은 무늬·두드림 무늬·돌대 무늬로 나뉜다.
그은 무늬와 두드림 무늬는 회색연질도기, 찍은 무늬는 회청색경질도기에 시문되어 있다. 찍은 무늬는 밀집 원문·이중 권문·국화문·마적문 위주이다. 7세기 중엽 이후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골호 등의 장식 시문으로 유행했던 영락문이나 이중 능형문, 수적문 등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러한 찍은 무늬는 장경병과 단경병에 시문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 문양의 모티브는 7세기경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성행했던 회색 도기의 문양과 동일하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경주 지역에서 벗어난 변방 지역, 특히 한강 유역의 이성산성이나 사당동 요지 등에서 출토된 토기 문양과 동일한 형태이다.
일부 돌대 무늬가 부착된 회색 도기는 어깨 하단에 1~2조의 돌대 턱을 두른 광견상 대호(옹)의 일종이다. 이러한 돌대문 대호는 미륵사지·정림사지 우물지·보령 진죽리·영암 구림리·양주 대모산성 등에서 출토된다. 편년 자료는 미륵사지 출토 ‘대중(大中) 2년(858)’명 대호가 있다. 이러한 대호류는 통일신라 후기에 유행했던 기종으로 파악된다.
[의의와 평가]
용담동 제사 유적은 제주 앞 해안이 훤히 조망되는 주변보다 높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유물은 제기로 많이 쓰이는 장경병 등의 병류와 호류만이 출토되었고, 생활 용기인 발·완·대접·시루·반·동이 등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또한 이 시기에 제주도에서 주거 유적과 패총에서 흔하게 확인되는 적갈색심발형토기, 즉 고내리식 토기가 전혀 공반되지 않는 것이 특이하다. 게다가 주변에서 특정 시설물이 확인되지도 않았다.
이와 유사한 성격의 유적으로는 변산반도 자락에 위치한 부안 죽막동 제사 유적이 있다. 바닷가에 바로 인접한 언덕에 고급 도기와 제사장이 사용했던 각종 장신구들이 깨지거나 폐기된 상태로 출토되었다. 이 용담동 제사 유적에서 출토된 나팔형의 목이 긴 병·금동제 허리띠 장식·유리 구슬 등의 고급 유물은 단순하게 폐기될 수 있는 유물이 아니다. 따라서 특별한 행위, 즉 제사 행위를 행한 후 폐기된 것으로 판단된다.
후대의 기록이긴 하나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槎錄)』에는 ‘·····시탐라왕적전유속(是耽羅王積田遺俗)’이라 하여 탐라국주가 주관하는 농경과 관련된 의례 행위가 있었음을 전한다. 또한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일본서기(日本書紀)』·『당회요(唐會要)』 등의 문헌에 나타나는 탐라국의 활발한 조공 외교 관련 기록도 보인다. 용담동 제사 유적은 이러한 중대사와 관련하여 배를 떠나 보낼 때마다 원거리 항해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 행위가 이곳에서 이루어졌을 시사하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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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인들은 육지부와는 다른 그들만의 제사의례를 해왔다” [제주역 30選] <27> 용담동 제사유적
통과의례라는 게 있다. 프랑스 인류학자인 아르놀트 반 헤네프가 지난 1909년 만들어낸 용어이다. 통과의례는 인간이면 누구나 겪는 보편적인 삶에서 치러지는 중요한 의식을 일컫는다. 태어나고 성장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들어 있다. 쉽게 말하면 태어나서 100일만에 치르는 백일을 비롯, 돌, 결혼, 장례 등이 모두 통과의례이다.
인간들은 이런 의례를 왜 할까. 한상복이 펴낸 <문화인류학개론>을 들여다보면 의례는 신의 호의를 얻고자 하거나, 속죄를 할 경우, 참가자들의 일체감을 형성할 때 치른다고 한다.
특히 제사의식은 집단 구성원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제사는 인류가 ‘생각’이라는 틀을 갖추면서 있어왔다고 본다. 그걸 표출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예전이나 지금이나 제사는 어느 장소에서든 진행됐고, 진행되고 있다.
초기철기시대에 들어서면 그런 제사유적은 성역화된 장소로 변신을 한다. 정치적 우두머리인 족장이 있다면, 제사장은 전문적인 직위로서 신성한 장소인 제사유적을 관리하게 된다. 삼한시대의 ‘소도’에서보듯 죄인들이 이곳으로 도망을 오면 잡아가지 못한다. 그만큼 신성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용담동 제사유적. 언덕에 위치해 있어 멀리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온다.
제사유적은 의례를 치르는 전용공간으로 사람이 사는 곳에 위치해 있지는 않다. 흔히 외곽에 위치해 있다. 제주에서도 그런 공간이 있다. 지난 1991년 발굴된 &lsqu용담동 제사유적’이다. 유적의 시기는 출토된 유물을 들여다보면 통일신라시대임을 알게 된다.
용담동 제사유적은 해안가의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다. 해안과의 거리는 300m 가량이며, 이 지점에서는 확 트인 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제주도 이외의 다른 지역의 제사유적이 언덕에 위치한다는 점과 일맥상통한다.
여기에서 나오는 유물의 대부분은 토기(도기)이다. 그것도 제주에서 만들어지지 않는 회색도기류다. 목이 긴 항아리와 병류가 이 유적에서 다량으로 발굴됐다. 특히 목이 긴 ‘장경병’은 20여점이 출토됐다. 이렇게 장경병이 한꺼번에 출토된 곳은 우리나라에서도 흔치 않다.
용담동 유적을 제사유적으로 판단하는 이유는 제주에서 만들어지지 않는 도기류들만 나오기 때문이다. 제주에서 쓰이던 토기와 함께 출토되지 않고, 이 유적에서는 도요지와 건물터 등도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례를 치르던 장소로 판단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용담동 제사유적에서 나온 항아리. 제주에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통일신라로부터 수입해서 썼다.
용담동 제사유적에서 나온 항아리 조각. 한 번 제사에 쓴 걸 다시 쓰지 않는 '금기 의식'이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서 나오는 그릇들은 파괴돼 있다. 그릇을 깨는 건 유물이 가진 본래의 기능을 부정하는 것이며, 의례에 사용된 물건을 다시 사용하지 않는다는 ‘금기 의식’도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용담동 제사유적의 주체는 누구였을까. 이에 대한 답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추론을 해본다면 탐라국 지배층과의 관계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용담동은 고·양·부 삼성이 웅거를 튼 제주시 중심부의 외곽으로, 이들 지배세력들이 여기에서 진행된 의식에 참석했을 가능성이 많다.
제사행위는 어떤 형식으로 이뤄졌을까. 수입된 도기류를 제사의례에 사용했다는 점은 통일신라의 정신체제도 일부 수용했을 가능성을 읽게 만든다. 탐라가 신라와 국교관계를 맺은 건 통일 직후이다. 서기 676년 신라가 당나라 세력을 쫓아내고 권력을 장악했고, 탐라국은 684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예기(禮記)>엔 ‘죽은 자에게 산 자의 그릇을 쓰는 것은 마치 순장을 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제사를 할 때는 실제 사용하던 그릇을 쓰지 않았다. 신라는 당연히 중국의 영향을 받아 그렇게 했을테고, 탐라 역시 신라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용담동 제사유적에서 나타나는 도기류는 생활에서 쓰지 않은 것들로, 이런 도기류를 제사행위에 사용했다는 건 신라에서 행하는 의례를 어느 정도 수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용담동에서 지내던 제사의례가 신라의 양식을 그대로 담은 것 같지는 않다. 탐라는 비록 신라의 영향권에 속해 있었지만 나름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의 ‘숙종실록’을 들여다보면 제주에서 행해지는 제사의 특수성을 읽을 수 있다. ‘숙종실록’은 이형상 목사가 파괴한 ‘풍운뇌우단’을 중앙조정에서 다시 복원하도록 했다는 글이 있다. 이형상 목사는 극단적인 성리학 중심사고를 지닌 학자로 ‘당 오백, 절 오백’으로 불리던 제주의 특수성을 무시하고, 문화파괴를 자행한 인물이다. ‘숙종실록’을 한 번 들여다본다.
“제주에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을 세우라고 명했다. 이보다 앞서 제주에는 고을을 창설한 초기부터 풍운뇌우단이 있어 제사를 올렸다. 목사 이형상이 그걸 없앴는데, 해마다 섬에는 가물고 병마가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제주도 사람들은 그 단을 없애서 탈이 났다면서 목사 정동후에게 다시 설치해 줄 것을 호소했다. 목사 정동후는 조정에 그 사실을 알렸고, 예조에서 다시 세울 걸 허락했다. 그 해부터 서울에서 향축을 내려 보내 제사하게 했다.”<숙종실록 64권, 숙종 45년(1719)>
숙종실록에 보이는 ‘풍우뇌우단’은 고을이 만들어진 초기부터 있었다고 한다. 고을이라면 탐라국이 만들어질 당시의 제주를 일컫는다. 그런 점에서 제주도는 탐라시대부터 그들만의 제사의례를 해온 것으로 보인다. 그건 하늘에 비는 것일 수도 있고, 바다를 향해 고하는 것일 수도 있다.
<김형훈 기자 / 미디어제주>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 대규모 취락의 조성은 급격한 인구증가를 초래하였고 더불어 지역 내 정치조직의 결성과 함 께 불평등사회로 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대외교류 시스템을 통한 다양한 외부의 선 진문물의 도입은 동시에 탐라정치체(耽羅政治體)의 출현을 초래하는 동인이 되었다. 한편 탐라시대 전기의 거점 마을로 알려진 용담동 취락은 당시 수장층의 무덤인 철기부장묘 와 함께 원도심의 주변에 조영되고 있다. 또한 탐라시대 후기에 들어서는 국가의 중요한 제 사를 지내던 장소가 용담동 해안변에서 확인되고 마을의 중심이 삼도동과 일도동에 집중되 는 점을 보면 원도심 일대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따라서 원도심을 비롯한 그 주 변 일대가 탐라시대의 중심권역이었음을 미루어 짐작케 한다. 탐라시대는 대체로 기원후 3∼6세기까지를 전기, 7∼10세기까지를 후기로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용담동과 오라동 일대에는 외도동식 주거지와 석조우물을 바탕으로 형성된 대 규모 취락이 조성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취락의 형성은 앞서 살펴본 산지항 출토 위세품을 수입하고 유통했던 주민들이 축 조한 마을이라는 것을 쉽게 추정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산지천과 한천에 이르는 포 구를 거쳐 직접적인 대외교류가 이루어졌 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용담동 일대에 는 청동기시대 이후 지속적으로 마을이 조성되고 있는데 원도심 주변에서 확인되 는 대규모 거점취락은 용담동이 유일하다. 하지만 원도심 일대에는 동시기 취락이 뚜렷치 않아 구체적인 언급이 어려운 실 정이다. 앞서 살펴본 점을 감안하면 결국 철기시 대 원도심 일대의 대규모 취락은 용담동 을 중심으로 조성되었으며 탐라시대 전기에 접어들어서도 취락의 중심이 변화되지 않는 것으로 볼 때 철기 시대 지역집단이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하면서 탐라의 정치체 혹은 정치집단으로 성장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탐라정치체 혹은 정치세력이 대외교류와 관련한 거점취락은 결국 원 도심 주변의 용담동 일대에 조성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용담동취락을 중심으로 원도심의 주변취락까지 아우르는 대규모 취락으로 확대되고 있다. 따라서 철기시대 이후 탐 라시대 전기까지 용담동 일대가 중심취락에 해당하며 원도심지역까지 취락이 확대되는 것으 로 여겨진다.
김경주 원도심 일대 탐라의 흔적(일부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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