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절오백 당오백

정방굴 부처님. 정방폭포. 정방사.

하늘타리. 2015. 7. 16. 08:40

 

2006년.
시간만 나면 제주도 구석구석을 헤매고 다니던 때이지요.

 

나는 제주도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선험지식이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으면 자료를 찾아보고,

 자료를 찾게 되면 그 자료에 근거해서 해당지역을 뒤져봅니다.

그렇게 오름을 넘게되고 곶자왈속을 헤메게 되고

한라산 중턱을 가로지르고 해안가 절벽을 타고 넘게 되지요.

 

그때의 나에게 정방폭포는 풍광 그 자체로 나를 매료시켰습니다.
육지에서 손님이 오면 그 사람들과 같이 찾아rk서

동양에서 유일하다는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폭포의 풍광을 즐기곤 했지요.

 

하지만 답사의 대상으로는 생각해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던 2006년 5월에 인터넷에서

 제주도 화산지형의 특징중 어느 한가지 용어를 검색하다가

다음 Tip에서 "화산지형의 특징중 하나로 해안폭포의 형성이 있고

그 해안폭포중 대표적인 것이 정방폭포이다."라는 글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이야기인데 그 뒤로 이어진 글에서

 "정방 폭포에서 서쪽으로 약 300m 떨어진 바닷가에는 큰 동굴이 있는데,

그 안에는 전국에서 제일 크다고 하는 석불좌상이 있어 불교 신자들이 많이 찾고 있다." 라는 글이 있네요.

 

당시 스크랩

 

 

알만한 사람들에게 물어 보았지만 거기 무슨 불상이 있냐고 잘못된 기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곳으로는 갈 수도 없다고 하데요.

 

그렇게 얼마 지난 후 또 다른 기록인 다음브리태니커백과사전에 

 "정방폭포에서 해변을 따라 서쪽으로 300m를 가면 잘 알려지지 않은 해식동굴이 있으며

내부에는 큰 석불좌상이 있다."는 기록을 보았지요.

 

이번에는 찾아가 보아야 겠다.
정방폭포 매표소에 와서 브리태니커 백과 기록을 보여주며 물어 보니 그런것 없다.

그리고 폭포앞 내를 넘어가면 않됩니다.라고 하네요.
혹 떼려다 혹 붙였네요.

 

소낭머리물통에서 동쪽으로 접근합니다.


2008년 사진입니다. 

 

 

 

 

 

 

더 이상은 무리인듯 싶네요.

 

누군가가 또 다른 길로

예전에는 소낭머리에서 지금의 서복전시관사이 계곡으로 내려갈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만

 그 자리가 4.3때 사람을 밀어 떨어뜨린 자리인데

설령 가는 길이 남아 있다해도 원혼들이 나무마다 풀입마다 메여있을 듯해서

 길을 찾아보지 않았습니다.

 

2009년인가 그냥 정방폭포앞을 지나서 굴을 찾아갑니다.
뒤에서 관리인이 소리쳐 부르면

 이 기사에 불교신자들이 많이 찾는다고 해서 가는데 왜 못가게 하느냐고 항변하려고

 프린트물을 준비했는데

아무도 뒤에서 부르거나 못가게하는 사람없어서 도리어 허전 하더군요.

 

해식동굴을 들어갑니다.


커다란 부처님이 대좌없이 앉아 계십니다.

 


무거운 석불을 어디서 옮겨 올 수 없었을테니 여기서 조각을 했겠지요.
투박한 모습이 이름이 알려진 누군가의 솜씨는 아닌듯합니다. 

 

그리고 몸체와 머리의 조각기법이 투박함 속에서도 약간 다릅니다.


몸체는 뒷부부의 암석을 이용해서 여기서 만들었고

머리부분은 어디선가 만들어 와서 접합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중요한게 아닌것 같고

언제, 어느 절집에서 이곳에 불상을 모셨을까?가 궁금해 졌습니다.

 

주변에 물어보니 나만 이상한 놈이 됩니다.

거기 무슨 불상이 있느냐는 것이지요.


작년엔가 누군가와 정방폭포에 왔는데 주변 안내도를 새로 세웠더군요.
그 안내도에 정방굴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잘됐다. 관리직원들이 못가게 하면 안내도에 표시되어 있길래 가도 되는지 알았다라고 대답해야지 하고 생각하고

 한번 더 갔다 왔습니다만...
어떤 정보나 자료를 추가로 획득한 것이 아니니 그 때도 역시 외관만이 보일뿐이지요.

 

불상과 뒷벽의 연결부분의 많은 면이 시멘트를 덧발라 몸체의 형상을 만든것이므로

시멘트사용에 큰돈이 들지 않고 활용성이 많이 개발된

 1960년대 이후에 모셔진 것이겠거니 하고 생각해 봅니다.

아무도 찾지않는 부처님
그냥 바다를 보며 편히 계시겠거니 하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출입을 하게 하는 가 봅니다.
그러니까 답사를 계획했겠지요.


답사팀들이 정방굴로 내려갈때 나는 소정방 폭포 서쪽 소정방굴로 갑니다.


소정방굴을 가본지가 꽤 오래되어서 입니다.

 

소정방폭포와 소정방굴

 

 

 

소정방굴에 들어갔었을까요?

 

소정방에서 다시 정방폭포 주차장으로 왔습니다.
답사팀들 올라오기전에 기다리고 있어야 다음 행선지로 함께 가지요.

 

이왈종미술관을 한바퀴 돌아보고 주차장으로 다시 옵니다.

 

 

 


주차장에서 정방폭포가 한눈에 보이는 유일한 자리입니다.

 


그런데 왜 이 폭포의 이름이 정방正房일까요.

누군가가 불교식 용어라고 하던데...
불교식으로 말한다면 정토의 또다른 표현인 淨方이 되어야지요.


정방正房은 중국 북경지역주변 서민들의 일반주택의 기본적인 형태인

중정을 둘러싼 ㅁ 자 모양의 가옥구조로 되어있는 사합방의 가장 중심인 곳을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이 정방의 가운데 조상의 위폐를 모시기도 하고 최근에는 응접실로 이용하기도 합니다.
정방을 중심으로 좌우에 부모, 자녀등의 방이 나누어 지지요.
사합원식 사합방의 주택구조가 지어지지 않은 우리나라.

 더더욱 제주에서 정방이라는 폭포명은 적합하지 않지요.

 

그래서인지 누군가는 정방正房이 정방正方에서 변형되었을 것이라고 하여

정방正方이라고 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근거는 정방폭포로 떨어지는 동홍천 물줄기가 마지막에 모여서 못을 이루는 곳을

정모시라고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모방方자를 써서 정모시를 정방正方으로 표기하였다는 것이고

폭포이름도 정방正方이었는데 정방正房으로 변형되었다고 하지요.
맞는 이야기일겁니다만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하면

 조선중기 서귀진에 관한 기록에는 正毛淵으로 나오지요.

못 연淵자이니 정모못이라고 해야 겠네요.

이게 정모시로 변형되어 모方자 正方淵(정의군지도 산천조)으로 표기되었고

 이에 따라 형승조에 正方瀑으로 표기되었습니다.

 

여기다 나의 의견을 추가로 입히면

어쩌면 正方이라는 말의 옛뜻이 가운데 지역(대조어가 側方) ,

또는 똑바로 보이는 정면이라는 뜻도 있었으니

이곳이 서귀의 중앙이라하여 正方이라고 이름하였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1899년의 제주지도에서 부터 정방폭포正房瀑布로 표기되기 시작합니다.
이름을 바꿀 필요가 없는 것은 영어문자권 관광객들에게는 어짜피 의미없는 jeongbang이고

요사이 많이 찾아오는 중국인 등 한자문화권 사람들에게는 긍정적 의미의 zhengfang이기 때문에

어쩌면 더 적합할 수 있는 것이지요.

 

답사팀의 보섭님이 정방굴을 갔다가 올라오셨네요.
잘 다녀오셨냐 물으니

저 굴 속의 불상 언제 누가 만든거예요? 그냥 보고만 오니까 답답하네...하십니다..
미안합니다만 나에게도 정보가 없습니다.
저도 볼때마다 답답해서 않따라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방사로 갑니다.

 


서귀포 태고종 사찰의 대표적인 곳입니다.


다들 요사채 2층으로 올라가서 스님의 좋은 말씀 듣고 있을때 혼자서 배회합니다.
5~6년전에는 스님을 몇번 뵙고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요.
그래서 오늘은 각종 공덕비가 모여 있는 곳에 가서

 ‘창건화주 김남하선사 기념비(創建化主金南夏禪師紀念碑)와

 ’대공덕시주 홍순오씨 기념비(大功德施主 洪淳五氏 紀念碑)‘ 등 을 찾아

그 비석에 쓰여져 있다는 정방사 연혁을 알아보고 싶었는데...


개가 짖습니다.
자기의 본연을 다하려는 것이지요.
그럼 2층에서 담소를 나누는 분들에게 폐가 될텐데...
자리를 옮깁니다.

 

대웅전을 둘러봅니다.

 

 

이 절은 일제 중엽 당시 제주를 책임지고 있던 장성 백양사의 지원으로

 1935년에 지금의 현재 선돌선원이 있는 부근에서 이자리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당시 이름은 쌍계사 였는데

1934년에 서흥동 지장샘 부근으로 옮겼다가

 1935년에 현 위치로 이전하면서 사찰 이름을 정방사로 바꾸고 ,

전남 장성 백양사 서귀포 포교당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조선총독부 관보(4292호와 4451호)를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방사에 소장된 유기불기 가운데

 ‘昭和七年一月二十日…全南濟州道右面上孝里雙溪寺’라는 명문이 있는 불구가 있습니다.


1932년에 정방사의 전신 쌍계사가 제주도 우면 상효리에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으로

그 불구를 보고는 싶은데 다른 스님들이 출타하셨느지 보이질 않습니다..

 

문득 예전에 이곳 주지스님으로 부터 들은 이야기가 기억납니다.


2009년도의 정방사

 

"정방사는 1930년에 두타사가  쌍계사로 바뀌면서 백양사 서귀포 포교당이 되어 이곳으로 이전되어 올때

절집 등기가 전남 장성 백양사 제주포교당으로 되어 조게종과의 약간의 알륵이 있었는데

 내가 1997년 서울 법륜사주지를 그만두고 이곳으로 내려와

백양사스님들과 오랜 협의 끝에 그 등기를 2006년 ‘한국불교태고종 정방사’로 완전히 바꾸고

명실상부한 태고종단의 사찰로 자리매김했다."고 하셨습니다.

스님한테는 절집등기가 참으로 중요하겠지만

저는 이 두타사라는 절집때문에 참 많이 헷갈립니다.

 

두타사 라는 이름은 임제(林悌)가 1577년 11월 9일 제주에 와서 쓴

『남명소승(南冥小乘)』에 나타납니다.
그 글에 相顧一噓而下從上峰南轉向頭陀寺… 寺在兩溪之間故亦號雙溪庵

“상봉을 따라 내려온 뒤 남쪽으로 돌아 두타사로 향하였다.

… 절은 두 계곡 사이에 있으므로 또한 쌍계암이라고 한다."라고 쓰여있습니다.

 

2004년 제주도에서 발간한 제주불교유적 조사보고서에 보면

그 두타사터가 지금의 선돌선원 법당 서쪽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두타사 터에 남아있는 주춧돌은 16개이다.

건물의 크기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추정된다.

건물은 남쪽을 향하고 있다.

부처를 모셨던 자리[감실]의 초석이 2개가 건물지 내에 남아있는데 두 초석 사이의 폭은 220cm이다.

나머지 터는 현재 법당 건물이 자리하고 있어 확인이 불가능하다."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언제적 두타사를 말하는 건가요?
당시 선돌선원 주지스님 말씀하시길

조사보고서내용은 1930년대 여기있었던 지금의 정방사흔적이지

조선시대 두타사의 유적이 아니라고 합니다.


선돌을 올라오기전에 위치한 선돌 선덕사에서는

 이제는 그런 주장에 초월한 위치가 되었지만

선덕사로 재창건이후 그곳이 조선시대 두타사의 터라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제주불교신문 한기완기지)

 

임제는 1577년 11월 제주에 와서 1578년 2월 한라산을 오릅니다.
제주목 서문을 출발해 도근천 상류인 광령천을 따라 올라가 영실의 존자암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나흘을 묵고 선작지왓을 거쳐 정상을 올랐습니다.
하산은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두타사로 내려갔다고는 해놓고

두타사에서 잠만 잔 기록외에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습니다.
게다가 햇갈리게 쌍계암이라고도 한다고 써놓아

현재까지도 그 위치에 대해 다양한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뒤 두타사 기록은 나오질 않지요.

 

존자암은 등산코스로 계속 기록이 됩니다.
1601년 김상헌, 1609년 김치, 1608년 이증 등의 기록에 존자암은 계속 나타납니다.

 

1702년 이형상목사도 한라산에 오릅니다.
최초의 당일치기 산행기록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존자암기록이 나오는데

"거주하는 스님이 없고 단지 헐린 온돌만 몇 칸 남아있다"는 내용으로 나오지요.
1702년 이전에 존자암도 폐사되었다고 보아야 겠습니다.


사실 이형상목사는 제주의 절을 훼철한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당시의 기록을 찬찬히 읽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의 글 <남원 박물>에 보면
“온 섬 500리에 지금은 사찰이나 불상이나 승니도 없고

또한 염불자도 없으니 불도의 액(厄)이라 말할 수 있다.

.... 해륜사와 만수사를 헐어 관가의 건물을 짓도록 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제주에 와서보니 섬 전체에 제대로 된 절과 승이 없었다

 그래서 불도들에게는 참 않된 일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해륜사와 만수사를 헐었다라는 이야기는

 그 두곳의 절집에서 승려라고 자칭한 이들이 불경 한 줄 제대로 암송치 못하고

 불상앞에서 계속 헛된 주문만을 읊조리고

 절집은 여염 살림집보다 더 속되었다라고 합니다.

 

조선 태종은 1406년에 전국의 선교양종 사찰의 수와 토지, 노비의 수를 제한하고

 각 지방의 비보사찰에 대해서도 제한을 가하였습니다.

제주도에서도 비보사찰인 법화사와 수정사의 노비를 모두 30명으로 줄였읍니다.

그리고 이에 맞추어 제주목사는 국성재를 지내던 존자암에 대한 지원을 중단합니다.


그 후 기록으로만 추적하면 제주의 사찰이 훼철되기 시작한 것은

산지천 동쪽으로 제주성이 뻗어나가던 조선 명종 20년인 1565년 입니다.
그 해 초에 불교 중흥을 꾀하던 보우(虛應普雨) 스님이 제주로 유배와

어도봉에서 변협(卞協)목사에 의해 매를 맞아 죽었고,

다음 목사인 곽흘(郭屹)은 불상과 사찰을 훼철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1702년 이형상의 제주목사 부임전에 이미 절들은 다 폐사되었습니다.
이형상은 제주에 와서 신당은 상당부분 훼철합니다.
동리에 한곳정도만 남겨두었지요.
그런데 이형상이 절까지 태웠다고 지탄을 받는 이유는

 김석익이 1918년 탐라기년을 쓰면서

肅宗壬午二十八年牧使李衡祥撤廣壤堂전焚三邑淫祠佛宇百三十餘所...라고 쓴 이후부터입니다.


사실 김석익은 이형상에 대해 상당히 후한 평가를 내립니다.
이형상이 과감 정직(正直)하여 대국(大局)에 힘썼기로

백성이 그 덕을 간직하여 덕화민비(德化民碑)를 세웠다.고 강조합니다.
여기서 광양당(廣壤堂)을 헐고 삼읍 음사(淫祀)와 절집(佛宇)130여소를 불사르고

 무격(巫覡) 400여명을 장(杖)하여 각각 귀농(歸農)하게 하였다.라는 기록속에서

불우는 이미 속화되어 있던 해륜사와 만수사 2개소뿐이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128개소의 신당에 따르던 심방과 소무들 400여명을 귀농케한 것이지요.


그후 조선조에서 제주도의 불교에 대한 기록은 만날수 없습니다.

 

근대에 들어와서 제주불교는 중흥의 시기를 맞습니다
개항기 제주도 출신으로서 불가에 귀의한 승려는 1892년 출가한 강창규,

1894년 출가한 김석윤이 있는데,

이 중 김석윤은 승려이면서 제주 유림의 일원이었고,

제주의병 항쟁을 이끈 항일 운동의 주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안봉려관의 등장으로 관음사가 창건되고 옛 기록에 나오는 절터에서 몇개의 절을 재창건합니다.


1918년 법정사(法井寺) 항일 운동이 일어납니다.
법정사 항일 운동 이후에는 친일 성향으로 기울어져

친일 성향의 제주불교협회가 제주불교를 대표하게 됩니다.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제주불교연맹을 조직하는 등

자주적 활동을 시도하고자 하는 노력이 일어났습니다.
1930년대 제주불교는 1908년(또는 1912년) 관음사 창건 이후 가장 왕성한 활동의 시기를 맞이하여

 1945년 말에 사찰 수는 82개 소로 조사되었습니다.

 

그러나 제주 4·3 사건이 발발하고

이로 인해 산간 지역이나 인가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던 대부분의 사찰은

 소각되거나 파괴되어 폐사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관음사와 법화사를 비롯한 제주도 내 주요 사찰들이

거의 모두 불태워지거나 철거당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주불교의 핵심 승려들 대부분이 희생당하게 됩니다.

1940년대 제주불교를 이끌던 이일선과 이세진은 수장당하였고,

근대 제주불교 활동의 중심이었던 오이화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이외에 원문상과 이성봉을 비롯한 여러 승려들이 총살당하였습니다.


있던 절도 없어지고

남아있는 절이라도 승려가 없어

재가 신도들이 모여 몇가지 아는 염불만을 반복하는 다시 무속에 습합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1950년에 육지에서는 큰 불행인 한국전쟁이 발발합니다.
제주도에 많은 종교인들이 피난을 오게 됩니다.
제대로 수행을 하신 육지 승려들이 제주의 절집에서 시무하게됩니다.
이때부터 불교의 중흥이 이루어 집니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와서

 1700년 이전에 기록에서 사라진 두타사가 1930년대에 다시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호적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조선시대 두타사라고도 하고 쌍계암이라고도 한 절이 있던 곳에

1930년대에 누군가 두타사라는 절집을 세웠고

 바로 쌍계사로 이름을 바꾸었고

 당시 제주도지역을 관장하던 백양사의 제주포교당 중 한곳으로 운용하다가

김남하선사가 재창건하면서 정방폭포옆으로 오면서 정방사로 아름을 바꾸었다,

그리고 1997년 주지로 부임한 일혜스님이

 2006년 백양사와의 관계를 말끔히 정리해

제주 태고종절집의 기둥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땅땅땅...

 

그런데 무언가 허전합니다.
이곳 정방사에 오면 꼭 보고 가야할 것이 있습니다.

 

이절 어딘가에 석조로 조성된 과거칠불중 세번째 부처인 비사부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예전에는 대웅전에 있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질 않습니다.


마침 절집 스님 중 한분이 시내에서 볼일을 마치고 돌아오십니다.

비사부불 어디모셔져 있나요.
대답하시는데 비시부불이 아니고 비바시불인데 요사채 2층에 모셔져 있습니다.

 

요사채 2층으로 올라갑니다.
아직 주지스님과 답사팀들이 환담을 나누고 있습니다.
사실 환담은 아니고 스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이지요.
뒷자리에 슬그머니 엉덩이를 놓습니다.

 

조금있자니 가장 듣고 싶었던 이야기 과거불을 친견하라고 허락해 주십니다.

사진 빵빵

 

 

이 불상은 절집에서는 비바시불이라고 합니다.
비바시불이라면
과거칠불인 비바시불(毘婆尸佛), 시기불(尸棄佛), 비사부불(毘舍浮佛),

구류손불(拘留孫佛),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 가섭불(迦葉佛),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 가운데

과거장엄겁 세부처님 중 첫번째이십니다.

현재현겁 네분은 구류손불(拘留孫佛),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

 가섭불(迦葉佛),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이시지요.


이 부처님상은 2005년 10월에 정방사소재 석조여래좌상이라는 이름으로

 도 유형문화재 2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설명문에는 과거칠불중 세 번째 부처인 비사부불(毘舍孚佛)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과거칠불상은 탱화애서는 많이 볼 수 있으나

석조로 조성된 불상은 드물다고 합니다.


이곳과 전남 벌교 용연사에 있는 구류손불이 유이하다고 하지요.
그래서 그 형체로 구분하기가 어려운데

이 석조여래좌상에서 55×42cm 장방형 한지에 묵서(墨書)되어 발견된 조성발원문의 앞면에

‘七 중 三’이라 적혀 있고,

후면에 ‘時維」康熙四十一歲次壬午年五月二十日畢功 全羅左道 順天北嶺桐裡山大興寺緣化比丘等」發願文」

第三毗舍浮佛 大施主 尹士奉 兩主…碩德名現 畵員 守日 比丘」

腹藏施主 金氏…’라고 적혀있어 

일곱 번째 가운데 세 번째 비사부불이라는 것과

1702년에 전남 순천 북령 동리산 대흥사에 봉안하기 위하여

수일스님이 제작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나오는 대흥사가 어딘지 알수가 없습니다.


순천 북령 동리산이라고 하면 지금의 곡성 봉두산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신라시대에 선풍을 일으킨 구산선문 중 동리산문의 종찰인 태안사가 있는 곳입니다.


태안사현판  

 

태안사에는 보물만해도 다섯점이 있습니다.
그중 신라말기에 태안사 2대조사로 계시다 입적하신 광자대사의 사리를 모신 광자대사탑비를 보여드립니다.


이 사진에서 보듯이

고려말까지 스님의 사리를 모셨던 부도는 이렇듯 탑비의 형태입니다.
지금의 계란세운듯한 부도탐은 조선조부터 등장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제주 존자암의 사리탑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히 조선조에 조성된 것이고

 발타라존자가 모셔온 부처님사리를 모셨다는 것은 조금 이야기가 않되는 것일겁니다.

 

그것은 그렇고

이곳 동리산에 대흥사라고 하는 절이 있었던 기록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주도의 김보균재가법사는 정방사 부처님이 이운되어 온곳이  해남 대흥사라고 기록하였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만

조선시대에 해남 대흥사는 대둔사라고 불리었습니다.

그리고 해남 두륜산은 순천 북령이 아니고 남서령이지요.


여수 흥국사에 가면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동종이 있습니다.
몸체에는 연곽대(蓮廓帶)와 보살상(菩薩像) 및

왕실(王室)의 안녕을 기원하는 전패(殿牌)가 마련되어 있는

아주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종입니다.
이 동종도 순천 동리산 대흥사에서 이운해 온 종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점을 고려하면 동리산 대흥사가 꽤나 많은 법보를 가지고 있었던 절집이었을텐데..

그 대흥사를 알아내지 못하여 지식의 부족을 또 다시 느낍니다.

 

관음사도 비구니 안봉려관(安逢麗觀)이 처음에는 법정암이라하다가

승려 영봉(靈峰)과 도월거사(道月居士)의 도움으로 1912년에 창건했을때

불상과 탱화는 용화사(龍華寺)와 광산사(匡山寺)에서 옮겨 왔다고 합니다.


하여간 1930년대 지금의 정방사의 전신 쌍계사 창건시

전라도 순천인근 어느절에서 가져온 비사부불에는

복장유물로 과거 사찰에서 아침에 주로 독송했던 진언인 '대불정수능엄경신주’가 있습니다.


복장물은 50cm×31cm 크기에 12행(行)의 인본다라니(印本陀羅尼) 51매로,

인쇄된 내용은 대불정수능엄경신주(大佛頂首楞嚴經神呪), 보엽진언(寶齒眞言),

오륜종자(五輪種子), 진심종자(眞心種子),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 등이라고 합니다. 

황초복자에 싸여 있는 높이 6.5cm, 지름 3cm의 원통형 후령통(候鈴筒)에 담겨 있었는데

묶여 있는 황초복자 위에 붉은 글씨로 ‘봉(封)’과 ‘남(南)’자가 쓰여 있습니다.


참고로 복장유물 최초 개봉시의 후령통의 사진을 올립니다.


그리고 그날 스님이 보여주신 그 내용물인 능엄경신주입니다.

 

정방사를 나섭니다.
정모시쉼터에서 잠시 쉬었습니다.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