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서귀포본당
설립연월일:
1899년 11월 11일(한논공소설립)
1900년 6월 12일 (한논본당 승격)
소 재 지:
제주도 서귀포시 송산동 586번지
주 보 성 인:
성파트리치오 (축일은 3월 17일)
관 할 구 역:
송산동, 정방동전역, 동홍동, 토평동, 상효동, 신시가지일부
주요약사
서귀포 지역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것은 육지에서 세례를 받은 양용항(베드로)가 1894년 4월경 고향 서귀포 색달동 인근에 신앙을 전하면서부터 였다.
그 무렵 8대 조선교구장 뮈텔(Mutel 문덕교) 주교는 제주지역에 복음의 터전을 위해 1899년 5월 프랑스 선교사인 페네(Peynet)주임신부와 보좌인 김원영(아우그스띠노) 신부가 파견하여, 제주본당을 설립하였다. 페네와 김원영 신부는 제주 대로동에 거처를 마련하여 양베드로가 입교시킨 예비신자 신아우구스티노, 윤요셉등에게 세례를 주었다.
뮈텔 주교의 소망대로 두 신부는 제주에 정착했으며, 특히 김원영신부는 초기 전교활동에 거의 전담하여 제주 남쪽 한논을 중심으로 활동, 1900년 5월에 신자 20명 예비자 30년, 1년 뒤에는 신자수 137명 예비자 620명을 기록하였다.
1900년 6월초 페네신부 대신 라크루(lacrouts)신부가 제주에 도착하였고, 1900년의 피정 때 김신부는 라크루 신부와 협의한 끝인 1900년 6월 12일에 한논(서귀포 호근동 194번지)에 한논본당을 설립하였다.
1901년 4월 피정차 상경한 김신부는 인사이동으로 인해 본당에 돌아오지 못하고 1901년 5월 10일 무세(Mousset 문제만 제르마노)신부가 2대 한논 본당 주임으로 입도하였다, 바로 이시기는 신축교안이 한창 진행되던 중이었다.
1901년 5월 발생한 교안으로 제주교회는 큰 시련을 맞이하게, 특히 선교가 활발하였던 한논본당의 신입교우들이 교안의 와중에서 순교하거나 희생을 당해야만 했다.
무세신부는 이 교안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다가 1902년 4월 20일 마산포 본당으로 전출되고, 타케(Taquet 엄택기 에밀리오)신부가 제3대 한논본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셨다.
한논본당의 교인수는 교안 직전까지 137명 이였으나 타케신부 부임 직후 겨우 35명 이였다.
타케(嚴 에밀리오)신부는 1902년 6월 17일 한논을 떠나 홍로(洪爐, 현 서홍동 면형의 집)로 이전하여 "홍로본당"으로 변경되었고, 1915년까지 재임하면서 본당 정착에 노력하였으며, 제주본당의 라크루 신부와 마찬가지로 신축교안의 희생자 매장지와 배상금 문제, 끊이지 않은 교,민사이의 갈등으로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1904년에는 교우수를 101명으로 증가시킬 수 있었다.
嚴타게신부는 식물학자로 왕벚나무등의 제주식물을 세계 식물학계에 보고하였으며 제주도에 감귤나무가 들어오는 것도 주선하였으며, 1916년 5월부터 1922년 9월까지는 본당신부가 없어 목포 산정동 본당으로 전임한 엄타케신부님이 겸하게 되었다.
1927년 5월 제7대 주임 최덕홍 요한신부는 명도회, 소년회, 남녀 친목회등을 구성하여 야학을 운영하였는데 1929년 5월 본당출신인 고군삼 베네딕도 신부(제주도출신 최초 사제)가 서품 받았으나, 김천본당 재임시 일제 총독부에 의해 강제 환속되어, 양인으로 방황, 강원도 정선일원의 성당을 배회하며, 신자들의 눈을 피해 성당의 마당을 쓸어주고 성당문 밖에서 성체조배와 미사참례를 하고 지냈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골롬반외방전교회 소속 제10대 라이언(羅 토마스) 신부는 본당발전을 위해 서귀포의 중심지로 본당을 이전키로 하여 서귀동 586번지(현 위치)에 새부지를 매입하여 그 안에 있는 목조함석집(20평)과 초가집(15평)을 성당과 사제관으로 개조하여 1937년 8월 15일에 본당을 이전, 현재의 "서귀포 본당"의 시대를 시작하였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후 제주도가 전쟁의 전진기지화하여 성당안에 일본군이 진주하여 미사전례를 거행치 못하였으고, 羅 토마스 본당신부, 徐 아오스딩 보좌신부,신자 강성건(아타나시오), 강군평(시몬), 허묵(아우구스티노), 허찬란(임마누엘)신부 할아버지, 고순지(곤첸사), 김남구(멜키오), 당덕윤(요셉)등이 옥고를 치뤘으며, 이기순(서신부님 한국어 선생)은 옥사를 하였다.
광복이후 석방된 羅 토마스 신부는 본국으로 귀국하였다가 1947년 재부임하여 1947년 새 농지개혁법에 따라 본당 소유의 일부 토지를 매각하였고 1950년 한국동란 발발후 잠시동안 옛 홍로본당에서 성신대학의 대신학생의 피난학교를 운영하였다.
1952년 해성유치원을 개원하였으며, 당시 피난온 적십자병원 의사, 간호사와 신자들로 성가대를 조직되었고, 1954년초에 호근공소가 설립되고 김덕제(치릴로) 군종신부와 신자에 의해 축성된 모슬포성당은 모슬포공소로 설정되어 본당 관할로 편입되었다.
1955년에는 7월에서는 석조로 성당(80평, 1998년 6월 현성전 기공전까지 사용) 및 강당겸 유치원(40평)을 완공 축성하였고, 8월에는 성산포 공소가 설립되었으며 이후 본당 산하의 공소설립은 1956년 6월 중문공소, 7월 가나안공소, 8월 남원공소, 1957년 8월 효돈공소가 설립되고, 6월에는 모슬포공소가 본당의 첫 번째 子본당으로 분리설립 되었다. 그리고 1957년 본당 최초의 레지오인 천주의 모후pr을 창단하였다.
1960년 들어 본당 신자수는 처음으로 1,500명을 넘어서게 되어 본당분할을 예견하게 되고, 1962년 제14대 본당주임 로제(廉 요한)신부는 다음해에 새 사제관을 완공하고 1962년 8월 15일에 가나안 공소의 신축 강당을 완공하였다
후임 제15대 아이첼(梁 해롤드)신부는 1964년에 표선 공소를 설립하고 성산포 공소의 강당을 신축하였으며, 1964년 4월에는 효돈 공소를 신축 이전(신효동)하였고 1965년 6월에는 본당 분할을 위해 중앙동의 부지 713평을 매입하였고 1967년 10월 13일자로 해성 유치원을 정식인가 받았다.
1969년 10월 제16대 본당주임 퀸(高 요한)신부는 자신의 거처를 서귀2리로 이전하여 다음해인 1970년 3월에는 성당(60평), 사제관(26.5평), 부속건물(10평)을 완공하여 11월 9일자로 "서귀포중앙 본당"(현 서귀복자 본당)으로 교구로부터 신설 결정받고 아이첼 신부가 초대주임으로 임명되어, 이것이 본당 두번째 분할로, 이 때 호근, 중문, 예래 공소가 지역이 새 본당에 이관되었다.
1971년 7월 제주지역은 광주교구에서 분리되어 제주 지목구로 설정되었고, 1971년 11월 20일 본당 제10대 주임신부이던 라이언 신부가 선종하여, 20여년을 이 지방에서 선교하고 이 지역 신자들의 영성적 아버지로써 신자들과 맺은 정은 그분의 유언에 따라 교회묘지(서홍리 가시머리동산)에 안장되었다.
1972년 8월 허승조(바오로)신부는 남부지구 청년 연합회(서귀포본당, 본당소속 공소[효돈, 남원, 표선, 성산포), 모슬포본당, 복자본당)를 조직하였으며, 1973년 제18대 본당주임 세비지(元요한)신부때 성산포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 분리됨에 따라 표선 공소가 성산포 본당으로 구역분할하여 이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