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을 꽤 오래간만에 다녀 왔습니다.
가장 최근이 손화중 피체제를 찾아왔던 때이고
그 때가 벌서 4년전이니 그만큼 시간이 흘렀다는 것이지요.
그날 참 비가 많이 왔는데...
무장읍성앞에 세워져 있는 동학혁명군의 진격로표시입니다.
무장읍성은 이웃 공음면에서 1894년 무장기포한 동학혁명군이
황토현싸움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고창을 거쳐 이 성을 접수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곳이지요.
무장읍성으로 들어갑니다.
그라고 보니 금년이 향정구역으로의 무장군이 없어진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3월 1일 부·군 통폐합령에 따라
무장군, 흥덕군이 고창군으로 통폐합되었지요.
무장군은 태종 17년인 1417년에 무송현과 장사현이 병합하여 무장진(茂長鎭)으로 개편되면서 만들어졌다가
500여년만에 고창군에 흡수되었습니다.
무송현 당시 치소는 지금의 성송면 하고리 고현마을이라고 하고
장사현의 치소는 지금의 상하면 하장리 하장사마을이라고 합니다.
무장읍성은 읍치를 새로 개설할 때 현사를 겸하던 무장진병마사 김노가
전라도 각 군현의 승려와 백성 2만여 명을 거느리고 같은 해 2월부터 5월에 걸쳐 축조하였다고 합니다. 『
문종실록』에는 읍성의 둘레가 1,470척, 높이 7척, 여장 높이 1척, 여장 471개, 해자 둘레 2,127척, 문은 2개로 옹성이 있으나
성의 규모가 작아 성터를 넓혀야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후 성은 더욱 넓혀 축조되었던 듯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둘레가 2,639척(약 800m)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문인 진무루에 올라 갑니다.
신발을 벋기 싫어서 진무루 안에 신숙주, 이덕형 , 김종직등의 현액시는 생략하고
성벽을 따라 주변을 살펴봅니다.
동헌인 취백당으로 갑니다.
이 동헌건물은 다른 곳의 동헌건물에 비해 대단히 소박합니다.
1565년(조선 명종20년)에 세웠다는 이 건물은
일제 강점기이후 2004년까지 학교 교실로 쓰이는 등 쇠락해져서 새로 고친 것이라고 합니다만...
원래의 동헌 자체 규모가 이처럼 소박했는지...
아니면 원형이 없어서 다시 세운것인지 궁금합니다.
취백당에는 최집의 취백당기 정곤의 아관정기. 우여무, 이덕형, 정홍명의 동헌시, 기준의 동벡정시가 있습니다.
翠白에서의 취는 소나무의 푸른기상을 상징하고 백은 모래처럼 희고 결백한 정조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객사인 松沙之館의 松沙와 같은 뜻으로 쓰인것이지요.
객사로 갑니다.
읍취루를 멀리서 보고
다시 송사지관입니다.
궐패를 모시던 곳 답게 도식적인 건물입니다.
1581년 조선 선조14년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며,
면사무소로 사용하면서 일부 형질을 변경했던 것을 1990년 원형대로 복원하였습니다.
돌을 쌓아 세운 석축위에 본관과 본관보다 지붕이 낮은 좌 ,우익헌이 있습니다
정청에는 ‘송사지관(松沙之館)’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으며,
석축을 오르내리는 돌계단에 호랑이, 구름무늬 등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계단 양옆의 동서쪽 축대 끝에 꽃을 꽂은 그림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 그림를 객사지었을때 같이 그린것이라 하는데
나는 이 돌들은 면사무소로 활용하던 시절에 보수하면서 가져다 끼운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선정비있는 곳으로 갑니다.
16기인가 17기인가 비석이 있습니다.
통상 거사비라고 하면 떠난이를 생각하며 세운다하여 떠난 뒤에 세웠다하고
불망비는 떠나는 무렵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뜻으로 떠날 무렵 세운다하지만
그건 말뜻이 그헣고
통상 떠날 무렵에 세워서 가는 사람이 보고 갈수 있게 한답니다.
그렇다고 모든 읍후들이 떠날때 세워주는 것도 아닙니다.
조선조 500년 동안 이 지역에 수많은 읍후들이 들고 났겠지만
읍지관아속기록에 비를 세웠다는 기록은 34명뿐이 없습니다.
이 중 읍후의 선정비 11기가 이곳에 있습니다.
비석 중 한기가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현감정후권영세불망비입니다.
정권현감을 기리는 비인데
이비는 비몸아래 거북머리가 비틀어져 있습니다.
언젠가 지역신문인 새전북신문에
이 비석은 지방수령에 대한 백성들의 비웃음을 나타내며
일부러 삐딱하게 세웠다는 글이 실린 이후
이곳 안내판에도 거북머리 비틀어 놓은 것은
백성들이 비를 세워 주면서도 미운구석 있어서 그렇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 비석은 처음부터 세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정권현감은 영조 20년인 1744년 당시 전라도 우수사인 박태신(朴泰新)에 의해 파직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파직당한 이유가 지역민들이 금령을 어기고 지역내의 소나무를 베는 것을 잘 통제하지 못하였다는 것이었는데
이 사실이 전라감사(全羅監司) 조영국(趙榮國)을 통해 조정에 보고되었고,
전라도 우수사인 박태신은 직권을 남용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습니다.
당시 정권에 대한 평은 창고를 털어 곤궁하고 병든 백성을 구제하여 편안케 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비는 비 뒷면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그가 떠난 후 46년만인 1789년에 세워진 것입니다.
비 앞면 병기도 빙옥거관(氷玉居官) 금서귀가(琴書歸家)라하여
그의 벼슬살이는 얼음과 옥처럼 깨끗하였고
거문고와 책만 가지고 귀가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정말 일부러 틀어 놨다면 그 당시 일대에서 가장 기가 세었고
현감왕따시키기를 우습게 여기던 무장현 아전들에게
깐깐하게 원칙 그자체로 대했던
정권 현감에 대한 아전들의 못된 농간일 뿐일겁니다.
그런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귀두가 틀어져 있는 것만을 보고 어떤 글을 쓰고
또 그 글이 전파되어 기정사실화되는 현상이 두렵기까지 합니다
동치오년 고종 10년 병인년에 당시 환곡의 폐단을 개정하는 조목을 정해놓은 것을 기록한 비와
정준일현감의 치수공덕을 그리어 세운 비를 봅니다.
그리고 4명의 義士 추모비
참판을 지낸 김영곤을 기려 세운 김영곤(金永坤) 선정 불망비라는 갑신정변 전후로 세워진 철제 선덕비입니다.
다시 동헌으로 갑니다.
동헌 뒤로 갑니다.
동헌 주변 새로이 복원한 읍성을 걸어봅니다.
무장읍성앞 마을길을 보며 이길로 밀려오고 밀려간 동학군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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