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 남장사를 갑니다.
남장사아래 대형차 주차장에서 타고온 버스를 내립니다.
남장동과 연원동간 임도 표시판이 보이네요.
요도를 살펴봅니다.
여기가 절집에서는 노악산이라고 하는 노음산 동남쪽이고 산 서쪽에는 북장사가 있습니다.
남장사, 북장사 모두 갑장사(甲長寺) ㆍ 승장사(勝長寺) 등과 더불어 상주지역 4장사(四長寺) 중 하나입니다.
써놓고 보니 승장사는 없어진 절이군요.
이 중 지금 우리가 가는 남장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범패(梵唄) 보급지이며,
영남의 명승지로서 경관이 빼어나 경상북도의 팔경(八景)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경상북도 까지는 아닌가?
상주팔경인가?
경북팔경이 맞을겁니다.
경북팔경 중 제 1경이 진남교반이지요.
요도를 보며 그 임도를 머리로 걸어 연원동에 도착하면
그 아래쪽 북천 위에 임란전적지가 있지요.
오늘 걷기 계획에는 없지만 참으로 기가막히는 역사의 현장입니다.
공식적으로 말하면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중앙군이 왜군의 주력부대와 싸운
우리나라 최초의 격전지로 900여명이 순국한 곳이지요.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여 북상하자
이를 막기 위해 급파된 조선 중앙군 순변사 이일 외 60여명과
상주판관 권길, 호장 박걸 등이 소집한 장정 800여명 총 900여명의 조선군이
소서행정이 이끄는 17,000여명의 왜군과 4월 25일 이곳에서 격전하여 모두 죽었습니다.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여 12일동안 국토를 유린하며 북상할 때도 우리 조정은 속수무책당하기만 했다는 이야기가 되고..
외부의 위협에 아무런 대비도 없는 조정이 뭘그리 국민에게 당당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네요.
그러니 선조가 몽진할때 몽진 길 인근 마을 사람들이 돌을 던졌다는 이야기가 실감이 납니다.
요도에는 표시되지 않았지만 그 아래로 조금만 더 가면
1702년 송준길을 배향하기 위해 건립되어 1705년 사액을 받은 흥암서원이 있습니다.
송준길은 송시열과 같은 시기에 활동했고 그 와 같은 은진 송씨이지만
효종이 승하한 후 왕대비의 상복입는 문제로 송시열과 윤선도 등의 공격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 났지요.
죽은지 30여년 뒤에 서원이 세워졌으며
1716년에 숙종의 글씨를 받아 어필각을 세웠고 영조때 문묘에 배향되었습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손을 타지 않은 서원중 한곳입니다.
이곳 상주에는 10개 정도의 서원이 있는데 서원철폐령이 빗겨간 서원이 한곳 더 있습니다.
모동면 백화산 자락에 황희를 배향하는 옥동서원입니다.
옥동서원이 위치한 수봉리는 황희의 둘째아들 황보신이 상주로 내려와 정착한 이래로
장수황씨의 집성촌을 이룬곳입니다.
인근 신덕리에 후손 황효헌 형제가 영당을 건립하여 세운 백화서당을
후에 전식을 배향하며 영남사람들이 소를 올리자
조정에서 옥동서원으로 사액하였으니
서원건립배경이 이해가 갑니다만
송준길을 배향하는 흥암서원이 왜 이곳에 있는지는 이해가 안갑니다.
송준길은 충청도 사람으로 이이, 김장생으로 내려오는 서인세력의 중추였고
이곳 상주는 이황, 김성일로 내려오는 남인세력의 본고장이었는데
어떻게 가장 적대적인 세력의 본고장에서 서원이 만들어져 배향되었는지가 참으로 궁금합니다.
이 고장 태생 우봉 정경세의 사위라는 것 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조금 어렵습니다.
90명이 내리느라고 시간이 많이 걸리다 보니 요도한장 보며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회원들이 멋스럽게 펼쳐진 길을 따라 올라갑니다.
길이 막히니 참을성없는 나는 계곡을 따라 올라갑니다.
윗쪽 남장사에서 아래쪽 청소년 야영장으로 이르는 계곡입니다.
맑은 바람이 복잡했던 머리와 마음의 고단함을 씻어냅니다.
연화교를 넘어갑니다.
일주문
노악산남장사(露岳山南長寺)라는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이 편액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이은에게 서법을 가르친 해강 김규진의 글씨라고 합니다.
"癸亥"년에 썼다고 적혀있는데 여기서 "癸亥"년은 1923년입니다.
그의 글은 해인사와 개심사에도 남아 있습니다.
일주문은 도 문화재 자료 제 442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후대에 누군가 글씨를 새긴 '신라창건남장사'라는 글이 기둥에 있고
반대편 기둥에도 무슨 글씨가 있는데 산림이라는 글자 외에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세워진 기둥의 용두와 천정 속 학이 인상적입니다.
안내문을 옮겨봅니다.
"일주문의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일주문 현판에 의하면 19세기 말 이전이라 추측된다.
이 건물의 양식은 일자형에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당초에는 자연석으로 낮게 쌓은 기단축대였으나
후대에 장대석으로 디딤돌 쌓기를 하였고,
원기둥에 심방목(心枋木)을 받친 주삼포에 3량가구를 걸고 겹처마에 팔작합각 지붕을 한 건물로 금단청을 하였다.
이 건물의 특색은 둥구리 기둥 앞뒤로 방주(方柱)를 붙여 세우고 다시 또 활주(活柱)를 고여서 중앙을 받치고 있는데
그 주두(柱頭)가 용모양을 하는 등 표현히 사실적이다.
전체적으로 건축 외형에서 균형감과 볼륨감이 있으며
다포계 건축수법도 매우 짜임새를 갖추고 있고,
특히 구조적인 면을 고려한 까치발의 조각기법이 특이하다.
남장사 일주문은 조선 후기 건축수법과 조각기법이 잘 보존되어 있어 건축 및 조각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일주문을 지나니 건탑대공덕주송덕비가 있습니다
극락보전 앞 삼층탑을 세워준 화주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인데요.
이 새롭게 세워진 탑속에 부처님 진신사리 4과와 칠보류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신라 말 최치원이 지은 쌍계사 진감국사비에 따르면
당나라에서 돌아온 진감국사가 상주 노악산 장백사(남장사의 옛이름)에서 선을 가르치니
배우는 이가 구름처럼 모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진감국사는 중국 종남산에서 범패를 배워 830년인 57세때 귀국하여 이곳에 머물면서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한 불교음악 범패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보급하였다고 합니다.
이 범패는 판소리, 가곡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성악곡중의 하나이지요.
그 후 고려 때 각원국사가 이 절에 주석하면서 남장사라 이름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사명대사가 보광전에서 수련하면서 선교통합의 도량으로 이름났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절집이 소실되었고,
1636년에 정수선사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렀는데
1978년 7월 영산전 보수공사시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 4과와 칠보류 등을 봉안 했다는 기록과 함께
사리4과 및 칠보류가 발견 되었습니다.
그 때 발견한 사리와 칠보류를 새로운 탑을 건립하면서 봉안한 것이지요.
도안교.
차안에서 피안으로 넘어가는 다리입니다.
피안의 언덕 어딘가에 극락정토의 땅이 있다는데 사실 넘어가야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어떤 깨달음을 통해 내마음이 바뀌지 않는 한 말이지요.
하지만 이 다리를 건너갔다 다시 건너올때 만큼이라도
이런 저런 번뇌에서 해탈하여 있기를 바라며 다리를 넘으며 계곡을 내려다 봅니다.
다리를 넘어 만나는 느티나무
나무의 나이가 400년이 넘었다고 합니다.
상주시에 의해 보호수로 지정되었습니다.
문득 떠오르는 시 한 수.
"두 팔로 안을 만큼 큰 나무도
털끝만한 싹에서 자랐다는 노자 64장 守微편의 구절을 읽다가
나는 문득 머리끝이 쭈뼛해졌다.
-- 감동은 대개
이렇게 오는 것이다
그래서 숲으로 들어가
평소 아침 산책길에 자주 만나던
늙은 느릅나무 영감님 앞으로 다가갔다
느릅은 푸른 머리채를 풀어서
바람에 빗질하고 있었다 .
고목의 어릴 적 일들을 물어보아도
묵묵부답
다람쥐가 혼자 열매를 까먹다가
제풀에 화들짝 놀라 달아난 그 자리에는
실낱처럼 파리한 싹이 하나
가느다란 목을 땅 위로 쏘옥
내밀고 있는 참이었다
(이동순·시인의 늙은 나무를 보다)"
범종루입니다.
사천왕문이 없는 이 절집은 범종루의 아래층이 사천왕문의 역할을 합니다.
문이 열려 있어 두분의 사천왕만 보입니다만
문을 닫으면 네분의 사천왕이 허락벋지 않은 삿된 것들의 접근을 막습니다.
범종루를 지나니 극락보전이 보입니다.
이 절집의 최초 본전은 무량전으로 불렸던 지금의 보광전입니다.
1610년에 극락보전을 짓고 이곳을 본전으로 하면서 무량전을 보광전으로 편액하였습니다.
원래의 극락보전 건물은 1635년에 불탔고
지금 건물을 새로 지어 1776년과 1856년에 중수했다고 합니다.
비교적 너른 평면 위에 깊숙한 맞배지붕이 위엄을 갖추고 있어
조선 중기 건물의 장중함을 나타내 보입니다.
바라보는 방향 극락보전 좌측에는 부처님 진신사리 4과 및 칠보류를 봉안한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우측에는 향로전
서당학동들이 습자중인 글씨들을 뽐내듯이 이런 저런 글씨들을 주렁주렁 걸어둔 것을 보고 한번 씩 웃어줍니다
극락보전입니다.
어칸 사분합문에 있는 꽃창살이 아주 아름답습니다
극락보전 안에는 건칠아미타불좌상의 좌우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있습니다.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은 보물 제 1635호,2010년 지정되어 있으며
이 불상은 복장에서 발견된 조성 원문에 따르면,
순치 2년 그러니까 조선 인조 23년인 1645년에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화재청 설명에 의하면
이 불상은 17세기 전반기의 특징을 정확히 반영하고 있는데,
즉 양감이 강조된 방향의 큼직한 얼굴, 당당한 어깨,
넓고 안정된 무릎, 강직한 입이 느껴지는 선묘를 추구하여
건장하면서도 평담한 형태미를 보여주는,
17세기 대표적인 조각승 청헌의 작품과 양식적으로 흡사하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장과 포벽에는 많은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하나씩 살펴보려면 하루해가 모자랍니다.
먼저 범패와 관련된 벽화를 상단에서 볼수 있고요
하단 좌측에 비쩍 마른 노인이 잉어같은 고기 등에 타고 물살을 가르는 그림은 '이백기경상천(李白騎鯨上天)’으로
술과 달을 너무 좋아하여 강에 뜬 달을 잡으려하다가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는 이백을 그린 그림입니다.
벽화에서의 이백은 기마자세로 고래의 등 위에 서서 목적지를 응시하고 남루한 행색에 초췌한 얼굴이며
고래는 잉어에 가깝고 이백임을 증명하기 위해 발밑엔 술병을 아주 해학적으로 그렸습니다.
그외에도 혜가가 달마대사에게 제자로 받아주기를 청하는 모습 등
꽤 많은 고사를 그린 그림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남장사 설법전(說法殿)
설법전 아래를 통해서 계단을 올라서면 보광전이 나옵니다.
보광전 앞에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여 몸을 왼쪽으로 틀어 나한교 앞으로 갑니다.
이 나한교라고 이름한 철사다리를 올라가면 영산전이 있고
1790년에 그려졌다는 16존상 탱화와
나옹화상이 조성했다고 전하는 옥으로 된 십육나한상이 있습니다.
막상 올라가려다가 이곳 남장사 다음 일행의 행처가 북장사인데
남장사 관음선원을 가서 산을 넘어갈 것인지
아니면 다시 아래로 내려가서 차를 타고 갈것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일행을 놓치면 곤란하겠다 싶어
다시 설법전 아래로 돌아옵니다.
겸손히 머리를 숙여 보광전 앞으로 옵니다.
강요된 겸손이지요.
절집도 그렇고 사당, 향교, 서원등의 건물은 일부러 문의 높이를 낮추어 짓습니다.
머리를 세우면 꽝하고 부딪치게 해서 의도에 관계없이 고개를 숙이고 출입하게 합니다.
유가나 불가 모두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심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지요.
게다가 향교나 문묘등에 가면 계단의 폭을 좁게 만들어
앞을 보고 걷지못하고 몸을 한쪽으로 틀어 올라가고 내려오게 합니다.
한심하게도 속이야 어떻든 겉모습에서 나타나는 겸양과 예의를 보고 흐믓해합니다.
부처님의 밝은 진리를 세상에 널리 비춘다는 보광전입니다.
파초가 심어져 있네요.
수와 진의 노래가 생각납니다.
불꽃처럼 살아야해.....
전각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철불좌상과 목각탱(보물 제 922호)의 안내판을 봅니다.
보물 990호와 922호라는데 안내판이 다 벗겨져도 관심이 없습니다.
철불좌상과 그 뒤 목각탱을 봅니다.
철불좌상은 금칠이 되어 철불임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문화재청 설명을 옮깁니다.
"철불좌상은 보물 제 990호로 보광전의 목조 불단에 모셔져 있는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다.
현재 불상 뒤 원광인 광배(光背)가 없고 불신(佛身)만 남아 있다.
크기는 불상 높이 133Cm, 머리 높이 34Cm, 어깨 폭 58Cm, 무릎 폭 103Cm 이다.
나선형 머리카락의 머리 위에는 큼직한 살상투가 있고 백호가 표시되어 있다.
얼굴은 눈ㆍ코ㆍ입 각 부분이 모두 잘 정제되어 있는데, 눈은 반쯤 감은 형태이다.
특히 어깨에 닿을 듯한 긴 귀와 목에 돌려진 삼도(三道)와 원만한 상호와 잘 조화되어 위엄있고 자비스러운 인상을 자아낸다.
이 불상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철불의 다양한 양식을 보여 주는 뛰어난 작품이라 하겠다."
"목각탱은 보물 제 922호로 조선후기에 새겨진 것으로
주존인 철조 비로자나불 뒷벽의 후불탱으로 모셔져 있으며,
아미타극락회상의 도상을 나무로 조각해 금분을 입힌 것이다.
불상의 뒷벽은 종이나 비단에 그린 탱화가 아닌 목각탱으로
장엄한 방식은 조선 후기에 나타난 특히한 한 형식으로 생각되며
전국적으로 6점이 조사되어 있는 정도로 드문 예에 속한다.
조성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28년 개금한 기록이 있으며,
전체 구성이나 조각 수법 등이 대승사의 목각탱과 매우 유사하다. 재료는 전단향나무이다."
보광전을 나와 파초를 보니 열매가 맺혀 있네요.
법구경 이양품에
"파초는 열매를 맺으면 곧 죽고
대나무와 갈대도 또한 열매 맺고는 죽는다.
거허는 새끼를 배면 반드시 죽고
사람은 탐하다가 스스로 망한다.
옳지 않은 짓을 항상 행하면
어리석음을 면하지 못함을 알라.
착한 법은 날마다 줄어들어서
줄기도 마르고 뿌리도 상하리라."는 게송이 있습니다.
그래서 절집에서의 파초는 반면교사로서의 교훈을 주는 부정적 의미라고 합니다만
그렇다면 대나무와 갈대, 노새, 사람 모두 부정적 의미가 된다는 말이되니 그것은 아닐것입니다.
파초도 그렇고 대나무와 갈대는 꽃이 피고 나면 그 식물체는 죽고,
그대신 옆에 새로운 순이 생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거허는 말과 당나귀의 잡종생산인 노새 또는 버새를 이야기하는데 당연히 생식능력이 없지요.
직지사를 비롯한 몇곳의 절에서 파초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조대왕필파초도(正祖大王筆芭蕉圖),
심사정의 패초추묘(敗蕉秋猫), 김홍도의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에서 볼 수 있듯이
옛 화가들이나 선비들의 작품에 파초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끊임없이 새잎이 돋아나는 스스로 힘쓰고 쉬지 않는다는 것을 높이 샀기 때문일 것입니다.
중국 북송의 장재(張載)는 파초시(芭蕉詩)에서
"파초의 심에서 잎이 온전히 펼쳐지니 말려진 새심이 그 뒤를 따른다.
새로운 심으로 새롭게 배우니 새로운 지식이 생겨난다
.(芭蕉心盡展新枝, 新卷新心暗已隨. 願學新心養新德, 旋隨新葉起新知)’고 하였습니다.
파초는 새로운 세상을 향해 정진하는 육신이며 마음인 것이지요.
보광전과 교남강당 사이로 금륜전이 보입니다.
교남강당이라는 영남을 대표하는 강당이라는 이름을 걸고 남장사의 종무소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금륜전으로 다가갑니다.
산신각이라는 현판이 같이 걸려 있습니다.
금륜전은 치성광여래를 모신 법당이니 칠성전을 말하며
독성탱과 산신탱을 좌우에 모시고 있으니 삼성각입니다.
진영각
접근금지라는 표식이 있어 빠꾸합니다.
남장사의 부속암자인 관음선원으로 갑니다.
남장사 부도군
사찰 부도군을 볼때마다 느끼는 이 극명한 모순
육신이라는 것,
지수화풍(地水火風) 네가지요소에 의하여 만들어 졌다가 인연이 닿면 흩어져 버리니
원래의 자리인 지수화풍으로 돌려 놓는다고 화장을 해놓고
그 삶의 흔적인 사리를 수습해서 다시 이를 기리는 부도를 만들어 놓는 것...
이해가 않가요.
관음선원 해탈문입니다.
해탈을 위한 정진을 할 각오가 없으면 들어오지 마라
그래서 한쪽에 한인물입
즉 한가한자는 들어오지말라고 쓰여 있네요.
어떻게 할까요
한가해서 찾아왔습니다만 돌아갈수 없으니 들어갑니다.
관음전앞 파초
정진을 상징하니 선원에는 아주 잘 어울립니다.
관음선원목각탱에 대한 설명을 봅니다.
관세음보살을 뵙습니다.
사진을 잘못찍어서 관세음보살 뒤 목각탱사진은 문화재청 자료로 대신합니다.
이 후불탱이 관음상 뒤에 있습니다.
현장에서 보았을때는 금박을 한 듯이 보였습니다.
절집에서 가장 친숙하게 느껴지는 보살이 관음보살이지요.
관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고통을 해소해 주신다는 분입니다.
그래서 손과 눈이 천개나 되는 천수천안(天手天眼)관음,
중생의 고통을 두루 살펴볼 수 있도록 얼굴이 11개나 있는 십일면관음 등이 있습니다.
관음전을 뒤돌아보며 문을 나섭니다.
산길을 따라 내려오다 보광전 옆 금강문을 다시 만납니다.
이 쪽에서 모니 금란방이라는 글씨가 편액처럼 써있습니다.
금란방이란 절에 불사(佛事)가 있을 때 잡인의 출입을 막기 위하여 써붙이는 방문(榜文)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통상 잡상인 출입금지등의 글씨를 써서 내걸지요.
그런데 여기는 금강문이름이 금란방입니다.
이리 들어오지 말라는 소리인가 본데...
노음산 산행을 마치고 내려가는 등산객들에게 쓸데없이 들락거리지 말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 같네요.
나는 관음선원에 다녀오는길이니 쓸데없는 출입이 아니라고 하며 정말 쓸데없이 들어가 봅니다.
일행들은 이 문 옆에 포장된 길로 다 내려갔는데 공연히 다시 들어간 것이지요
장독대 앞을 지나고 석탑 옆을 지납니다.
범종루와 일주문을 지납니다.
그렇게 주차장 앞 관광안내판까지 내려 왔습니다.
계곡을 넘어가 차에서 내려 처음 만났던 임도 표지판을 다시 만납니다.
노음산 정상을 봅니다.
여기서 버스를 타고 이제 북장사로 가려니하고 생각했는데 회원들이 전부 밑으로 내려갑니다.
어디 가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이 밑으로 걸어 내려갔으니 따라가야되지 않냐고 나를 이상한 듯이 쳐다봅니다.
맞아요.
인솔자가 앞서 내려 갔으니 따라 가야지요.
어디를 어떻게 가려는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일단은 둘러보아야 할 곳이 있습니다.
남장사 주차장 옆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옛 관리들의 선정비 2기가 있습니다.
아마도 그 예전 시절 이 절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그 오고가는 길에 비석거리가 형성되어 있었나 봅니다만
이제는 누가 눈길주기 어려운 한 구석에 두기만 남아 있습니다.
게다가 한기는 비신이 부러져 있습니다.
부러진채 기대어 있는 불망비는 1852년에서 1855년가지 재임한 홍종무 목사의 것입니다.
약간 떨어진 곳에 빈 비좌가 있지만 흠이 비신과 맞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 비좌도 유실된 다른 비석의 것이겠지요.
앞에 ‘목사홍후종무영세불망비(牧使洪候種武永世不忘碑)’라고 비명이 새겨져 있습니다.
홍종무목사의 비는 낙동중학교 내에도 1기가 있습니다.
온전하게 서있는 비는 1818년에서 1819년까지 재임한 목사 심능술(沈能述)의 비입니다.
앞면은 목사심후능술영세불망비라고 쓰여있고
뒷면에는 남장사· 금룡사(金龍寺) · 용흥사(龍興寺) 화상(和尙)
성상즉위십구년무인(聖上卽位十九年戊寅)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심능술 목사의 비를 승려들이 주가 되어 세운 이유는
심목사가 선공감 부정으로 있다가 부임했으나, 관아에서 병으로 순직했기 때문일겁니다.
길을 따라 내려가다 저수지옆으로 갑니다.
제실저수지라고도 하고 남장지라고도 합니다.
물위에 비추이는 산과 숲의 반영에 계절이 이름을 조금 아쉬워 합니다.
내려가다 보면 저수지끝부분 건너편에 석장승한기가 있습니다.
자연석을 그대로 살려 다듬었으며 부리부리하면서도 한쪽으로 치켜 올라간 왕방울 눈,
코주부를 연상시키는 뭉툭한 코, 송곳니가 양쪽으로 삐져나온 입으로 애써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장승은 마을입구나 사찰입구에 세워 잡귀와 액운의 출입을 막고 사찰내의 재산과 경계를 표시하는 민간신앙물로,
마을에서는 수호신의 기능을 겸하기도 합니다.
이 돌장승은 길 건너편 윗쪽에 있다가 1968년 저수지 공사로 인해 현재의 자리로 옮겨놓았다고 합니다.
가슴에는 한가닥의 수염이 있으며 그 밑에 ‘하원주장군(下元周將軍)’이라는 글귀를 새겨 놓았습니다.
한기의 장승이 또 있었다는 이야기인 듯 합니다.
부안읍성과 남원 실상사 등에서 보듯이 통상 상원장군과 하원장군 둘이 있지요..
부안의 장승은 할머니, 할아버지로 불리는데
그 형상이 실제로 두 볼이 처진 할아버지와 앞니가 빠진 할머니 상을 하고 있습니다.
할아버지 몸체에 상원당장군, 할머니 몸체에 하원주장군이라 쓰여있지요.
이 장승의 제작년도는 장승 앞면에 ‘임진 9월입’이라는 기록과
조선 철종 7년(1856)에 지은 남장사 극락보전 현판의 기록으로 미루어
조선 순조 32년(1832)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상주산악회에서 세운 노음산 등산안내도입니다.
통상 이곳 석장승옆이 들머리인듯 합니다.
옥녀봉을 넘고 정상까지의 암릉길 직전에 북장사갈림길이 나옵니다.
여기서 옥녀봉으로 가서 정상을 넘어
남장사의 부속암자인 중궁암을 둘러 남장사로 오는 것이 일반적인 등산경로입니다.
옥녀봉과 정상사이 북장사갈림길에서 노음산 서쪽의 북장사로 가다보면
수미굴이라는 굴이 있습니다.
그곳에 아래는 가늘고 위로 갈수록 굵어지는 돌기둥이 있어 마치 하늘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라하여
북장사쪽에서는 이산을 천주산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래서 절집 현판이 천주산 북장사입니다.
북장사에는 파랑새 전설이 있지요.
북장사에는 보물 제 1278호로 지정되어 있는 영산회 괘불이 있습니다.
조선 중기 어느날 당나라 승려가 찾아와 괘불을 그리겠다고 하면서
3일 동안 어떠한 사람의 출입도 금하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사흘째 되는 날 아침 한 승려가 궁금해서 엿보니
파랑새가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이를 본 승려가 놀라 외치는 소리에 파랑새는 홀연히 날아갔다고 합니다.
결국 그림은 미완성인 상태로 지금도 한쪽 손이 없는 것 처럼 보입니다.
그 다음으로 생각나는 것이 높이가 2m가 넘는 극락보전 3존불과
금장되어 있는 극락보전 치미입니다.
이렇게 길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보아 점심시간이 애매하여 북장사는 가지 않을 예정인듯합니다.
시간 나시면 나중에 한번 다녀오시지요.
하지만 절집에 새로지은 건물이 많아 전반적으로 조화가 않된 듯 보이기도 하다는 것을 감안하시고요.
마을입구로 걸어내려가는 길 좌우 모두 감나무입니다.
몇백년의 나이를 먹었다는 느티나무 보호수도 감나무들 속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있습니다.
느티나무 만한 감나무
뻥
상주는 원래 三白의 고장이라 하여 흰 쌀, 누에고치 그리고 곶감이 유명한 곳입니다.
누에고치는 한물 갔으니 다른 것으로 대치되었겠지만
곶감의 경우는 전국 곶감의 60%를 생산한다고 합니다.
상주 감은 '둥시’로 ‘둥글게 생긴 감’이라는 뜻인데
산봉우리처럼 둥글고 소담스럽게 생겼다 해서 ‘봉옥’
또는 곶감을 깎으면 분이 많이 난다고 하여 ‘분시’라고도 합니다.
둥시는 탄닌 함량이 많고 물기가 적어 그냥 먹으면 단감에 비해 맛이 떨어진다고 하나
곶감 재료로는 최적이라고 합니다.
곶감이 되면 떫은 맛은 없어지고 당도가 원래 당도의 두 배까지 증가한다고 하네요.
느닷없이 나타난 커다란 호박
맛은 어떨까요.
곶감건조의 일등공신 송풍기
그런데 곶감걸이에 걸려 있는 곶감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팔려나가고 없다는 이야기인듯 하네요.
길 좌우로 가지를 지탱못하는 감나무들이 줄을 섰습니다.
회원들 대다수가 이길을 내려오며 떨어진 감 들중 그중 온전한 것을 찾아 주으며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굳이 북장사 간다고 했다고 짧은 시간 잠시 들르는 것 보다
대다수의 회원들 즐거운 일을 해주는 것이 어쩌면 운영진으로는 더 효율적이겠지요.
그렇게 생각하자구요.
여주를 보고
다육이들을 보고
동네를 둘러보며
룰루랄라 노래하며 내려옵니다.
뒤돌아본 노음산
국수봉일까요....
차가 주차되어 있는 감청공장공터에옆 둠벙돌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머리쪽에는 거욱이 서있고 고추가 꽤 높이 달려있네요.
이 돌탑은 여성을 상징하는 항아리 형태인데 그 옆에 따로 고추를 만들어 세워놨습니다.
우리 회원중 누가 떨어뜨린 것은 아닐테지요.
우산처럼 만들어진 돌 조형물에 곶감이라고 쓰여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감청이 담겨져 있을 고무항아리입니다.
빠지면 나오는데 3박 4일 걸리겠습니다.
12시가 넘었습니다.
밥먹으러 갑니다.
어쩌면 용유계곡에서 다시 만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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