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상주 견훤산성, 장각폭포

하늘타리. 2014. 10. 12. 23:20

문장대 방향으로 향하던 차는

속리산 화북탐방지원센터 올라가는 길 우측 견훤산성 표지판앞에서 멈췄습니다.

 

견훤산성

견훤의 활동무대도 아닌 이곳에 견훤산성이 있습니다.

 

어디더라?
전주 부근에 있는 것 말고 견훤이 쌓았다는 성이 어디에 또 있더라?


강원도 원주 문막에서 후용리가는 길에 견훤산성이 있지요.
건등산과 마주보고 있는 후용리 입구 왼쪽 산에 견훤의 산성인 돌무덤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산성은 궁촌리에서 시작 해 부론까지 이어졌다고 입으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왕건이 올랐다해서 건등산이 된 지금의 건등산에는 왕건의 군대가 진을 쳤다고 하지요.
당시의 격전에서 왕건이 승전했습니다.
그래서 고려의 발상지가 바로 문막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지금 성벽은 무너졌고 성 쌓았던 돌도 40여년전 부근의 수리조합공사 때 날라다 써버렸는데 그

래도 많은 부분 성을 쌓았던 돌들이 그 자리에 있습니다만

한쪽으로 공동묘지가 조성되는지 갈수록 무덤이 난립하며 산이 깍이고 있습니다.

 

상주의 견훤산성 입구에 와서 원주 문막의 견훤산성을 생각합니다.
참으로 뜬금없는 일입니다.

 

산성까지 700미터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만

경사도가 조금 있어서 30분 정도는 가야 합니다.

하지만 30분만 투자하면 일대에서 가장 멋진 조망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산길을 올라갑니다.

 

소나무와 밤나무가 뒤섞인 전형적인 야산의 모습입니다.

 

 

 

 

 

 

 

 

 

 

 

숨이 좀 차다 싶으니 성벽이 눈에 들어옵니다.

 

산성의 한면이 보입니다.

동측 벽입니다.


출입구에 해당하는 동측 벽은 복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각지게 만들어 놓은 것 같은데 기술적으로 자연스럽게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동측 벽을 제외하고는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남쪽 치성 암벽앞에 세워진 안내판

 

상주시 자료입니다.

 

"경북 상주시 장암리의 북쪽에 있는 장바위산 정상부를 에워 싼 테뫼식 산성으로,

견훤이 쌓았다해서 견훤산성이라 불린다.
이 산성 뿐만 아니라 상주지역의 옛 성들이 견훤과 관계지어지는 것은 『

삼국사기』에 견훤과 그의 아버지 아자개가 상주 출신이란 기록 때문이다.
견훤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신라의 장군으로 있다가 이곳에서 군사를 양성하여,

신라 진성여왕 6년(892)에 반기를 들고 신라의 여러 성을 침공하다가

효공왕 4년(900)에 완산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다.
이 산성은 대체로 사각형을 이루고 있는데,

산세와 지형을 따라 암벽은 암벽대로 이용하고,

성벽을 쌓을 필요가 있는 곳에만 성을 쌓았기 때문에

천연절벽과 성벽이 조화를 이룬다.
성의 4모서리에는 굽이지게 곡성을 쌓았는데,

동북쪽과 동남쪽으로 난 2곳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있어 상주쪽을 시원하게 내려다 볼 수 있다.

성벽 둘레는 650m이고, 높이는 7∼15m이며, 너비는 4∼7m이다.
이 산성은 보은의 삼년산성(사적 제235호)과 쌓은 방법이 비슷한데,

정교하게 쌓은 우리나라에서 보기드문 삼국시대 산성의 하나이다. "

 

 

남치성 암벽

 

암벽에 새겨진 글자

 

김해김씨 경파 파조 김목경(金牧卿)의 묘비문입니다.
동측 성벽에 이어진 산기슭에 앉은 묘가 김목경의 묘라고 합니다.


김목경은 고려말 충렬, 충선, 충숙, 충해왕 4대에 걸쳐 벼슬을 하고

정1품급인 삼중대광(三重大匡)에 까지 올랐으며 

조적의 난을 평정하여  김녕군(金寧君)으로 봉해졌습니다.
그 후 충혜왕의 정치가 점점 무단해 지자 이를 바로잡을 것을 수차 충언하였으나 끝내 듣지않아

당시 보령현, 지금의 보은지방으로 낙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그의 기록은 끊어져

어디서 어떻게 사망하고 어디에 묻혔는지는 알길이 없었습니다.

 

김목경의 아들 김보는 공민왕때 삼중대광문하시중이란 최고 관직에까지 이르렀고

 죽은 후 충간(忠諫)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영천 안장되어 있으나

그 아버지 김목경의 묘는 후손들이 찾지 못하여

광주 두암동 장열사에서 제단을 쌓고 제를 올려왔는데,

1966년에 그 후손이 이곳 견훤산성 내에서 무덤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인근 마을 촌로들이 김정승묘라고 하는 곳에서 김목경의 후손이

三重大匡 金寧君 牧卿之墓 華山 乾坐라는 지석(誌石)을 발견하였다는 것이지요.


600여년 동안 실전되었던 무덤을 촌로들의 구전에서 바로 찾을 수 있었다는게

무슨 영화의 스토리보다 더 드라마틱합니다.

 

그 발견을 기념하여 이 동치성 암벽에 김해김공휘목경지묘라고 묘비문을 쓴것 같은데

이제는 묘소도 새로 정비했고 산 아랫마을에 화산재를 건축하고 신도비도 세웠으니

이 암벽의 글씨는 지워도 될것 같습니다.


아니 지우는게 더 나을듯 합니다.

 

성으로 올라갑니다

 

청화산쪽을 한번 조망해보고...

 

암벽위에 기가막히게 축조된 치성의 벽을 보며 감탄하고

 

동쪽성부터 돌까 하다가

 

문장대가 빨리 보고 싶어 남치성을 지나 시계방향으로 돌아갑니다.

 

 

성벽위에 펼쳐진

구절초 밭을 지나 갑니다.

 

 

성벽넘어로 승무산을 돌아봅니다.

맨 왼쪽 뒤로 보이는 것이 청화산 시루봉이겠지요.
오른쪽은 도장산입니다.

 

청화산, 그 앞으로 길게 있는게 승무산, 그리고 도장산

 

오른쪽에 새롭게 나타난게 청계산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같은 상주에서도 일부는 저 청계산 남쪽 고지군을 잇는 산성을 견훤산성이라고 합니다.

 

상주를 일컫는 또 하나의 이름이 상산(商山)인데,
광해군 9년인 1617년에 이준(李埈)이 편찬한 경상도 상주의 읍지 상산지 (商山誌) 여지편에,
“주(州)의 서쪽 40리에 있다.
옛날 청계산 위에 창사(倉舍)가 있었는데,
1727년(영조 3) 불에 타서 1730년 청계사 옆으로 옮겨 세우고 수구(水口)에 성첩을 쌓았다.
성은 화산과 속리산 사이 지세가 험준한 곳에 있는데 성첩이 완전하고 견고하다.
동쪽에 은성창이 있고, 서쪽에는 화령창과 중모창이 있으니 가히 조령과 추풍령 양쪽의 관방이다.
일명 견훤성이라고 한다.
 둘레는 5,350보(步)인데 중화 5개 면의 인부가 동원되었다.“라고 적혀있습니다.


1830년 작성된 상주구역지도인 '화서면도(化西面圖)'에는
산성 앞에는 청류문(淸流門)이 있었고,

지금의 극락정사(極樂精舍) 자리에는 청계사(淸溪寺)가 있으며,
 그 동남쪽에 견훤창(甄萱倉)이 있습니다.


견훤창은 오전 답사시 남장사주차장 옆에 부러진 영세불망비가 있는 홍종무목사가

1855년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산성의 동쪽 아래에는 견훤의 위패를 모셔 놓고 제사를 지내는 신당이 있어서

몇년전까지는 일년에 두 번 동제사를 지냈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 때 화령장 전투가 벌어진 곳이기도 하며

성 안에 대궐터가 있고 저수지터 1곳과 우물터 3곳이 있습니다.

 

이렇게 상주지역 옛 성들이 견훤과 관계지어지는 것은

‘삼국사기’에 실린 견훤과 그의 아버지 아자개가 가은 출신이란 기록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은은 지금은 문경에 속하지만 당시엔 상주 가은현이었습니다.

 

다시 청화산을 봅니다.

꼭 성이 길로 다시 이어져 청화산 꼭대기까지 오르는 듯 합니다.
사실은 청화산 아래 승무산 자락을 엄청 넓게 굴토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직 보수하지 않은, 스스로 무너지다 멈춘 성벽을 봅니다.

직사각형의 작은 화강암을 잘 다듬어 차곡차곡 쌓아 올렸습니다.

튀어나온 지점에는 지점에는 말굽형의 망대(望臺)를 쌓았습니다.

 

역광이라 눈을 가늘게 뜨고 속리산을 봅니다.

 

성벽옆을 걸어갑니다.

 

 

성문이 있었다면 서문이었겠지요.

 

 

 

 

북측 벽입니다.

 

동측 벽

 

경사가 심해서 성이 무척 높아 집니다.

 

그래도 1000년의 세월동안 무너지지 않고 있습니다.

 

 

 

 

 

고개를 넘어서니 도장산과 청계산 사이를 달려가는 도로가 눈에 띕니다.

저 지방도로로 나누어 도장산쪽은 문경시, 청계산 쪽은 상주시 입니다.

 

사실 행정구역을 가른다는게 그때 그때의 편의를 위해서인데

그것을 기준으로 지역감정을 가지고 적대하는 것 보면

무어라 말하기 참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상도의 견훤이

전라도에 가서 후백제를 건설했다는게 참 불가사의하게 느껴집니다.

 

김목경의 묘소를 만납니다.

고려말의 어느날 동측 일대 무너진 성벽위 산기슭에 무덤을 쓴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그리고 지석에 三重大匡 金寧君 牧卿之墓 華山 乾坐라고 썼다면 무덤에 묻힌 사람이 누구인가도 알았을텐데

왜 장례를 모신 사람들은 그 후손에게 연락하지 않았을까요.
김목경 사망무렵 그 아들은 삼중대광문하시중이란 최고 관직에까지 이르렀고

그 후손들도 조선초에 많은 요직들을 차지했는데도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600년을 모르다가 어느 한순간 지석을 찾아냈다는게 정말 대단합니다.

 

석물들이 바라보는 방향, 북쪽과

 

남쪽을 봅니다.

 

동문지를 보고

 

우물터를 봅니다.

 

몸을 돌려 온길을 다시 걷습니다.

 

무너진 성벽옆을 걸으며 실패한 영웅 견훤을 생각해 봅니다.

 

견훤은 927년에 팔공산 전투에서 왕건에게 치욕의 패배를 안기면서
“그대는 아직도 내가 탄 말의 머리도 보지 못했고,

나의 털 하나 뽑아보지 못했다." 라고 왕건을 조롱했습니다.


그랬던 견훤이 9년뒤 왕건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늙은 제가 전하에게 몸을 의탁한 것은

전하의 위엄을 빌려 반역한 자식의 목을 베기 위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신령한 군사를 빌려주어 난신적자를 없애주신다면

저는 죽어도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어쩌다가 이렇게 신세가 역전되었을까요?


후백제왕 견훤은 넷째 아들 금강이 지혜가 빼어나다 하여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맏아들로 군무에 경험이 많던 신검(神劒),

그리고 변방에서 도독직을 역임하여 역시 군무에 경험이 많던

두째, 셋째 아들 양검(良劍)·용검(龍劍)은 이에 불만을 품게 되었습니다.


결국 신검은 견훤에게 반발해 두 동생과 함께 난을 일으킵니다.

이때가 935년 견훤의 나이 69세 때입니다.

 

견훤은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어 장사 30명의 감시를 받게 되었으나
금산사를 탈출하여 나주로 도주해 고려로 망명하였습니다.

 

고려사에 의하면 왕건은 도망 나온 10년 연상의 견훤을

그의 고향이 상주임을 감안 ‘상부(尙父)’라 존대하면서,
최고의 관직과 함께 남쪽 궁궐(南宮)을 거처로 제공했다고 하며,
 또 양주(楊州:서울)를 식읍으로 줘 그곳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생활하게 했다고 합니다.

 

견훤은 고려 귀순 1년 뒤에 왕건에게 자신의 왕위를 찬탈한 아들이자

당시 후백제의 왕인 신검을 토벌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수십 년간 자웅을 겨뤄왔던 라이벌 왕건의 무릎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아들을 죽여달라는 아비 견훤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936년 9월 왕건은 10만 7천의 군사(삼국사기), 또는 8만 6천의 군사(고려사)를 이끌고 신검을 치러 출정을 합니다.
이때 견훤이 기병 1만을 이끌었다고 합니다.
한때의 군주가 상대편의 장수가 되어 나타난 것을 본 백제군은 심히 동요했고 결국 패전하고 말았습니다.
자기가 세운 백제의 패전을 직접 목격한 견훤은 며칠 뒤에 황산군에서 죽었습니다.

 

삼국사기는 견훤에게 우호적이지 않습니다.
견훤이 서남지역인 전라·충청에서 전공을 세워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 건

늘 창을 베개 삼아 적과 싸운, ‘침과대적(枕戈待敵)’의 자질 때문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니까 큰 장수급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렇지만 삼국사기 편찬자도 인정한 것은

백제는 삼한의 정통 마한국을 계승한 정통 국가인데,

당나라 때문에 망한 억울함을 씻기 위해 후백제를 건국한다는 분명한 역사의식을 견훤은 지녔다는 것입니다.


견훤은 당시 아무도 꿈꾸지 못했던 삼한 통합이라는 희망의 깃발을 맨 먼저 세운 영웅 군주였습니다.

 

신검은 어떨까요?


왕위 찬탈자라고 지탄받고 결국 백제 패망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단순한 권력욕때문에 견훤에게 반발했을까요?
너무 억울하고 분하지 않았을까요?
평생을 아비밑에서 모진 풍상을 견뎌 냈는데 이제 어느정도 안정이 되니

배다른 막내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려는 아비를 보며 억울함에 치를 떨지 않았을까요?


문득 조선초 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이 오버랩됩니다.
단지 조선은 외부세력이 없었고

후백제에게는 위협적인 외부세력이 존재했다는 차이뿐이지요.

 

다시 삼국사기 편찬자의 평가를 옮깁니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신라의 백성으로 신라의 벼슬을 하던 견훤이

신라 말의 위태로움을 기회로 삼아 서라벌을 쳐서

군신을 짐승이나 잡초 대하듯 죽인 천하의 원악(元惡)이요 대죄(大罪)라 비난하고,

그가 결국 아들 신검에게 쫓겨난 것도 자업자득의 결과이며

궁예와 마찬가지로 "태조를 위해 백성을 몰아다 주었을 뿐"이라며 조소하고 있습니다.

 

사랑도 사업도 전쟁도 승리는 모든 것을 용서하나 패배는 모든 것을 부정합니다.

 

노래 한곡 부르며 성곽길을 걷습니다.

 

The Winner Takes It All

"...

The winner takes it all
The loser has to fall
It`s simple and it`s plain
Why should I complain
...

 

승자는 모든 걸 다 가져 갑니다
패자는 쓰러져야 하고
아주 간단하고 평범한 이치지요
불평해서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부르는 입장에서는 참 서글픈 노래입니다.

 

서측 성문 밖으로 나와 망대를 보고,

망대를 넘어 속리산을 봅니다.

 

속리산
"도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는데 사람은 도를 멀리하는구나,
산은 사람을 떠나지 않는데 사람이 산을 떠나는구나."
(道不遠人 人遠道, 山非離俗 俗離山)’
고운 최치원의 시 한 수가 속리산을 또 다시 보게 합니다.


천황봉에서 동으로 내린 큰 줄기는 피앗재(避禍峙)를 넘어 형제봉이 되고,
북으로 갈령을 넘어 옥녀봉.도장산으로 반원을 그리며,
천황봉에서 서편으로 뻗은 줄기는 입석.경업.신선.문장 등 여러 대를 깎아 세우고

관음봉을 뒤로 받치고, 북으로 밤티재(栗峙)를 넘어 백악산을 세우고....

 

 

저 망대에 서있던 병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시간이 맞지 않아 속리산은 역광속입니다만...

 

그러니 다시 오라고

 

아니 직접 이리로 오라고 나를 부릅니다.

 

 

 

부신 눈을 거두어 옆을 봅니다.

 

아쉬워 다시 고개를 돌리며 실눈을 뜹니다.

 

견훤산성 동측벽을 보며 또 탄복합니다.

 

안내문의 글처럼 산세와 지형대로 자연 암벽을 그대로 이용하고,

성벽을 쌓을 필요가 있는 곳에만 성을 쌓았기 때문에 천연 절벽과 성벽이 조화를 이룹니다.

 

같은 자리를 찍고 찍고 또 찍습니다.

 

 

 

 

 

흐드러진 구절초에 천년전으로 뛰어 갔던 마음을 다스리고

 

동측 성을 한번 더 찍고 견훤산성을 내려갑니다.

 

동치성 아래 암벽도 다시 한번 찍습니다.

 

견훤산성을 내려와 다시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

 

장각폭포입니다.

 

 

 

 

 

속리산 자락 사모봉에서 흘러내린 물길이 폭포를 이루고 있는데,

 

6m 높이의 폭포가

 금란정 정자와 함께 멋진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폭포 아래에는 짙은 물색을 띠는 깊은 소(沼)가 있어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도 많았는데
물이 그리 깊지 않으니 사람도 없고 정취가 예전만 못한 듯 합니다.

 

아닌가요?
오늘 하루 눈이 호강하여 다른때 보다 평가가 엄격해 진 것일 겁니다.

 

90명의 회원들이 맥주와 음료수를 나눠마시고

웃으며 악수하고 헤어집니다.

버스 한대는 전주로 버스 한대는 서울로... 

 

먼산한번 쳐다보고 속리산 자락을 떠나갑니다.

저 산...

뭐땜시인지는 모르지만 심한 스트레스로

원형탈모가 생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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