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김천시 양천동 하로서원

하늘타리. 2014. 7. 29. 08:43

김천입니다.

산 좋고 물 좋기로 유명한 곳이지요.


조선시대에는 전국 5대  우시장의 하나가 개설되던 곳이며

수많은 명현과 충신, 열사를 배출해 낸 고장입니다.

 

삼한시대에 감로국이 위치하고 있다가 삼국시대에 신라에 의해 정벌되어 감문군이 설치되었습니다.


감문군이 개령현, 김산현, 지례현, 어모현으로 나뉘었다가 다시 개령군으로 개편되었습니다.
고려시대에 김산.지례현을 경산부로, 어모현을 상주목으로 직속하고
조선시대에 김산,어모현을 통합 김산군으로, 지례현을 지례군으로, 개령현을 개령군으로 승격하였습니다.
그후 1914년에 김산군,지례군(증산면 길방리 제외), 개령군과 성주 신곡면을 통합하여 김천군이 되었습니다.
김천군 김천면이 1917년 김천특별면으로 지정되고
1931년에 김천특별면이 김천읍으로 승격됩니다.
1949년에 김천읍이 김천부로 승격되고,

다시 김천시로 승격되면서

김천군은 금릉군으로 개칭하게 되었지요.
1995년에 김천시에서 금릉군을 흡수하여 새로운 김천시가 설치되었습니다.

 

이곳 김천지역에는 향교가 세곳이 남아있습니다.
개령면에 있는 개령향교
지례면에 있는 지례향교
교동에 있는 김산향교가 그것입니다.

 

서원은
양천동에 위치한 평정공 이약동을 제향하는 벽진이씨 문중의 하로서원
조마면 강곡리에 위치한 남와 강설, 기재 강여호, 학암 강석구, 호은 강이하를 제향하는

진주강씨 문중의 자동서원
구성면 상좌원에 위치한 충간공 이승원,1788년에 정양공 이숙기, 문희공 이호민,

문장공 이숙감, 문천공 이후백을 제향하는 연안이씨 문중의 도동서원
부곡동에 위치한 공산 송준필을 향제하고 있는 야성송씨 문중의 원계서원
대덕면 조룡리에 위치한 충의공 백촌 김문기 선생을 주벽으로 하여 5위를 제향하는

김녕 김씨 문중의 섬계서원 등 다섯곳의 서원이 있습니다.

 

하로서원으로 갑니다.

 

김천 중심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만

대중교통으로는 버스를 오래 기다려야 하고 제법 걸어야 할 것 같습니다.

 

거창으로 달려가는 3번국도상 국립농산물 품질관리소 앞에서 버스를 내립니다.

 

하로서원

오른쪽으로 가시오

 

양천초등학교방향으로 터벅 터벅 걸어 갑니다

 

 

 

꽤 큰 공장이었던 한능제사 김천공장.

지금은 가동을 않하는 듯 하네요.

 

이 회사 회장이었던 이 병춘씨는 북청도에서 태어나 김천시 공무원으로 재직하였고

그 후 이 회사를 운영하면서 1974년 만정장학회라는 장학재단을 설립해

40여년 동안 사원자녀, 지역내  불우학생, 재령이씨 종친 등 2000명이상에게 장학금을 지급했고

1979년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땅 2만2천여㎡를 중앙고 건립 부지로 기증하기도 했습니다.

 

 

하로마을 입구 우측으로 몇기의 비석이 보입니다.

 

이약동 신도비, 이약동의 아버지 이덕손 유지비 (李德孫遺址碑),

산천단 유적비(山川壇遺蹟碑), 벽진이씨세거지지비(碧珍李氏世居之址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벽진이씨(碧珍李氏)는

고려개국공신 벽진대장군(碧珍大將軍) 이총언(李悤言)을 시조로 하고 있습니다.
그는 태조왕건을 도와 고려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운 개국원훈(開國元勳)이며
태조 왕건은 이총언에게 "백자천손 대대로 이 마음을 길이 간직하자"는 친서를 보내 "금석(金石)의 교(交)"를 맺었고

이총언의 아들 영을 사위로 삼았습니다.

 

벽진(碧珍)은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지역의 행정구역입니다.
가야연맹의 하나인 벽진가야국(碧珍伽倻國)을 신라가 멸망시키고

벽진군(碧珍郡) 또는 본피현(本彼縣)이라 하다가,

757년(경덕왕16)에 신안현(新安縣)으로 개칭하여 성산군(星山郡)에 속하게 하였고

후에 벽진군으로 개칭하여 치소를 지금의 성주에 두었습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경산부(京山府)로 승격했으며

1018년(현종9)에는 고령군 등을 속군으로 삼는 대읍이 되었습니다.
1308년(충렬왕34)에 성주목으로 승격했으며 1614년(광해군 6) 무렵 신안현으로 개칭되기도 했으나

1895년 지방제도 개정으로 성주군으로 편입된후 성주군 벽진면이 되었습니다

 

이덕손 유지비(遺址碑)를 먼저 봅니다.

 

이약동의 아버지로 호조판서에 증직된 분입니다.

 

남해현령을 마치고 이곳 하로마을로 이거한 이야기 등이 적혀 있습니다.

 

이약동 신도비

 

 

이 약동은 자는 춘보(春甫), 호는 노촌(老村)으로

1441년(세종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451년(문종 1) 증광시 문과에 정과(丁科)로 급제하여

나라일에 종사하게 됩니다.
1470년(성종 1) 10월 김호인(金好仁)의 후임으로 제주목사에 부임하였습니다.

제주목사 재임 중 이속(吏屬)들의 부정과 민폐를 단속하여 근절시켰고,

공물의 수량을 감하고 세공을 감면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었다고 합니다.

한라산신제를 산천단에서 행하게 하여 제주도민들이 산신제를 지내다가 동사(凍死)하는 폐단을 시정하였습니다.

 

1473년(성종 3) 8월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어 제주목사를 그만두고 떠날 때,

제주에서 사용하던 모든 물건을 두고 갔습니다.

이약동이 사용하던 말채찍은 관덕정에 오랫동안 걸려서 청백리의 상징으로 제주도민들로부터 칭송받았다고 합니다.

 

1474년(성종 5)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를 거쳐

1477년(성종 8) 대사헌이 되어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78년(성종 9) 경주부윤이 되었으며,

1486년(성종 17) 전라도관찰사를 지냈습니다.
1487년(성종 18) 한성부좌윤·이조참판 등을 거쳐

1489년(성종 19) 개성부유수 등을 역임하다가

1491년(성종 22)에 지중추부사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습니다.

 

저서로는 『노촌실기(老村實記)』가 있습니다.

 

산천단 유적비

 

유적비의 내용은 꽤 오래전 것인데
안내판을 보면 2009년 11월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지금 이 유적비를 그때 세운 것이라는 건지,

유적비는 예전부터 있었고 안내판만을 그때 세운것이라는 것인지가 명확치를 않습니다.

 

 

 

하로마을입구표석 맞은 편에 하로 서원 안내표석이 참으로 애매하게 위치하고 있고

그 뒤로 조금 궁금한 설치물이 있습니다.

 

하로서원안내문

 

사모 바위 전설이라 적혀 있는 커다란 碑(비)와
그 앞에 두 개의 큰돌이 금줄을 몸에 감고 세워져 있습니다.

 

 

큰 돌중 하나는 관복을 입을 때 갖추어 쓰던 검은 모자 紗帽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사모바위라고 한답니다.

 

원래 이 바위는 고성산 바위절벽끝에 있었다고 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바위절벽에 있었던 이 바위가 영험하여 이 마을에서 많은 과거급제자가 나왔답니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 초기에 이 하로마을에서는 최씨와 이씨가 전성을 이루어 3판서와 6좌랑이 나왔다 합니다.
그러니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의 행차와 고관들의 행차 그리고 그 고관들을 찾는 사람들로 붐벼

김천역의 역졸들은 그 뒷바라지로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고 하네요.
 
역졸 중 한 사람이 하로마을의 번성은 벼슬을 상징하는 사모 바위가 하로마을쪽으로 그 기운을 뻗어서 그렇다는 생각에

사모 바위가 없으면 하로마을의 번성도 사라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편히 지낼 수 있겠다 싶어

사모 바위를 산 아래로  굴러떨어뜨렸다고 합니다.

그 때문인지 시간이 흘러갈수록 마을은 쇠락해져가고 과거급제자가 나오지 않았다 합니다.


그래서 하로마을 사람들은 산 밑에 떨어진 사모 바위를 하로 마을 입구로 옮겨놓고,

매년 정월이면 제사를 지낸다고 하지요.

지금도 금줄이 처져 있는 것을 보니 지금도 성히 여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금줄이 처져 있는 또 하나의 큰 돌은 할미 바위라고 합니다.
사모바위를 전통 혼례식에서 신랑이 쓰는 紗帽로 보고

그 짝으로 신부를 상징하는 할미바위를 가져다놓았습니다.

 

그 옆으로 돌을 쌓아 단을 세운 성황단이 있는데 제단을 뒤쪽으로 돌려 놓았습니다.

 

 

 

성황단을 한바퀴 돌아보고 양천동의 자연마을 중 하나인 하로마을로 들어갑니다.

 

양천동은 일제초기 양곡(陽谷)과 노천(蘆川)에서 한 자씩 딴 이름이지요.

현재 양촌동을 관할하는 행정동은 양금동 입니다.

양천동과 황금동에서 한자씩 따왔지요.

 

이곳 하로마을은 그 이름을 당나라의 여지시랑 하지장(賀知章)이 늙어 벼슬에서 물러날 때,

왕이 감호일곡(甘湖一曲)을 준데서 연유하여 하지장의 옛 일에서 따다가 하로라 했다고 합니다.

또 일설에는 고려 말엽에 금산 안렴사였던 화순최씨 원지(元之)가

고려가 망하자 이곳 고성산 아래에 있는 구암사(耉岩寺)에 숨어 살면서

그의 세 아들과 손자들이 높은 관직에 오르자

최원지를 하례받은 노인이라 하여 하로라고 존칭한 데서 마을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도 합니다.

 

김천에는 예로 부터 자두가 유명하다고 했는데 이곳은 복숭아가 많이 있군요

 

 

 

 

 

하로서원입니다.

 

이곳 하로서원은  이약동선생을 모신 곳입니다.

 

이약동 선생은 처음에는 점필재 김종직, 매계 조위, 동대 최석문, 남정 김시창 등 5현과 함께 경렴서원에 모셔졌는데

경렴서원은 고종 때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됐습니다.

훼철된 경렴서원을 복원코자 제향되었던 타문과 숙의한 바 뜻이 일치하지 않아

1984년 지역 유림과 벽진 이씨 문중에서 지금 자리에 하로서원을 중건하고

청백사(淸白祠)를 지어 이약동 선생을 모셨습니다.

 


문이 잠겨있어서...

결국 이곳도 다른 곳처럼 담위로 보이는 모습만을 찍고 가겠구나 했는데 ...
옆에 붙어 있는 서원을 관리하는 가옥의 문이 열려져 있고

서원으로 통하는 문도 열려져 있습니다.

문이 열려있으니 그 문으로 들어서서 서원으로 들어섭니다.

 

경내의 건물로는 청백사(淸白祠)·노촌당(老村堂)·동재·서재·비각 등이

동서로 병렬형식에 따라 배치되어 있습니다.
서원은 강학 공간과 제향 공간이 일자(一字)로 배치된 형태이며

강학 공간은 강당, 동재, 서재 3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강당은 노수당, 동재는 염수료念脩寮, 서재는 필유당입니다.

현판 이름은 문중에서 합의해 결정했다고 합니다.

노수당에는 ‘노촌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제향 공간은 사당, 외문, 내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당은 청백사(淸白祠), 내문은 숙경문(肅敬門), 외문은 영사문(永思門)입니다.
강학 공간에서 사당으로 연결되는 문은 여재문입니다.

 

 

 

 

 

 

 

 

 

 

 

 

서원을 한바퀴 돌아보고 나와 서원을 관리하는 분을 혹시 만날수 있을까 하여 동네를 돌아 보며 시간을 보냅니다.

 

무엇을 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지요.

 

 

 

 

 

 

 

 

하지만 한참이 지나가도 관리사주인은 오시지 않습니다.

터벅터벅 마을길을 걸어나갑니다.

 

 

 

 

 

버스에서 내린곳으로 돌아갑니다.

무언가 엄청 미진하게 하로마을 답사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