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眞寶面입니다.
진보면은 동쪽은 영양군 석보면과 영덕군 지품면,
서쪽은 안동시 길안면과 임동면,
남쪽은 청송읍과 파천면,
북쪽은 영양군 입암면에 닿아있습니다.
진보는 삼국시대에 현 진보면과 파천면 일부, 그리고 영양군 일부의 영역으로 형성된,
칠파화현(漆巴火縣)과 조람현(助攬顯)의 2개의 현으로 있었는데,
경덕왕(景德王)때 칠파화현은 진보(眞寶)로 개명하여 지금의 의성인 문소군(聞韶郡)의 영현이 되고,
조람현은 진안(眞安)으로 고쳐 지금의 영덕인 야성군(野城郡)의 영현이 되었습니다.
조선조에 칠파화현과 조람현을 합하여 진보현으로 개칭했습니다.
그 후 바로 청송군과 합병했다가
세종 19년(1437)에 다시 분리하여 소재지를 진안에서 현재의 광덕(廣德)인 신한(新漢)으로 이읍하였다가
3년 후 다시 진안으로 환읍하였습니다.
조선조의 진보는 6개 면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해 진보군이 폐지되고
진보군 지역 중 4개면을 청송군에, 2개면을 영양, 영덕에 떼어주고 나서 남은 15개 리로
진보면이 형성되어 청송군에 편입된 후에는
약간의 행정구역 조정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마을사람들이 군청소재지보다 번화하다고 하는...
그러나 타지인이 보기에는 큰 차이없는 면소재지 마을을 지나갑니다.
진보성당을 지나갑니다.
성당입구 불교용품점이 인상깊습니다.
2005년 7월에 본당으로 승격되었습니다.
마을북쪽으로 광덕산이 보입니다.
죽기전에 꼭 한번 가보자는 곳은 나중에 가기로 하고
진보향교로 갑니다.
반변천을 가로지른 광덕교를 넘어갑니다.
반변천을 넘어가 진보 남쪽에 위치한 비봉산을 봅니다.
송만정
송만정은 안동권씨 권준(權晙)이 건립한 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권준은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과 함께 화왕산성 전투에 종군하였고,
그 뒤 판관(判官) 을 지낸 바 있습니다.
가옥의 구조는 정자1동과 주사채 1동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자의 구성이나 주사채의 구성이 이 지방 다른 정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2010년 7월 15일 경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습니다.
향교가는 길에 위치한 퇴락한 옛가옥
그리고 그 오른쪽으로 멀리 보이는 산중턱에 위치한 스산한 건물
소위 말하는 청송감호소이지요.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1년 사회보호법이 시행되면서 청송군 진보면에 청송 제1,2,3보호감호소가 각각 들어섰습니다.
이후 2년 뒤인 1983년 교도소 1곳과 보호감호소 2곳으로 개편됐습니다.
이 과정에서 제1보호감호소는 청송제1교도소로 이름이 바뀌었지요.
이후 1993년 청송 제2교도소가 문을 열었고,
청송 제1보호감호소는 2004년 청송 직업훈련교도소로 변경됐습니다.
희대의 범죄자들이 거쳐 갔거나 수용돼어 있었고
또 형기를 마친 사람을 악질이라고 다시 가두는 비인간적인 행위로 지탄을 받기도 했지요.
이런 저런 이유로 부정적 인식이 강한 곳입니다
지금은 교도소 명칭에서 '청송'이라는 지역명은 빠졌고,
'경북 북부'로 대체됐다고 합니다만 출향인들은 피해를 많이 보았습니다.
다시 퇴락한 옛가옥에 관심을 가져봅니다.
철거하기 직전입니다.
진보향교
진보향교는 낮은 산기슭에 정남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동쪽으로 반변천이 흐릅니다.
진보의병의 산실이었으며, 진보향교의 주도하에 1912년 광덕에 진보공립보통학교를 개교하기도 하였습니다.
문이 잠겨있어 내부를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밖을 한바퀴 돌면서 보이는 모습을 설명하면
전학후묘 형식의 전형적인 향교의 배치를 보이며,
외삼문을 안으로 명륜전이 위치하고 있고,
명륜전 뒤편 양편에 동재와 서재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동재와 서재 뒤편으로 내삼문이 위치하고 있으며,
내삼문을 안으로 대성전이 있습니다.
외삼문, 명륜당, 내삼문, 대성전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으며,
고직사는 향교의 담장 밖 한켠에 독립되어 있습니다.
향교로 가며 스쳐 지나쳤던 옛가옥에 가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왜 옛집은 이사를 가거나 보수 또는 철거를 위해 집을 비울때
그동안 손때 묻었던 각종 살림살이와 집기들을 내팽개치고 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버려두고 간 이부자리와 세간 옷등은 다시 활용할 수도 없는 것이고
다 쓰레기가 되는데
이런것들이 그대로 내부에 남겨진채로 폐가 또는 폐허가 되어 갑니다.
광덕에서 세장으로 가는길을 따라 귀암정을 갈까 하다가 돌아나갑니다.
이 부근 마을은 안동권씨 동성마을입니다.
귀암 권덕조(權德操)가 벼슬을 버리고 남쪽의 고향으로 돌아와 정착한 곳에
후일 그 옛 집터에 귀암사(歸巖祠)를 세우고 뜻있는 선비들이 향사(享祀)를 받들어왔지요.
흥선대원군의 서원 훼철령 때문에 없어져 그 후 후손들이 정자를 다시 세웠고,
현판은 옛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곳 진보는 이황으로 대표되는 진보이씨의 관향입니다.
진보 이곳에 退溪 李滉을 배향하여 1602(선조 35)년 세워져,
1630년(인조 8)에 賜額받은 서원인 鳳覽書院이 이촌리에 세워져 있었답니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으나 다시 세우지는 않았다는 것이 생각나서
서원도 후손이 이 지역에 살고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 다시 세워지거나 역사속에 뭍혀버리는가가 결정된다 생각하니
안동권씨도 진보이씨도 아닌 내가
굳이
귀암정을 찾아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보 이씨의 시조 이석(李碩)은 누대로 진보현에 토착해 온 호족의 후예로
고려 충렬왕 때 진보현의 아전으로 있다가 생원시에 합격했고,
그의 맏아들 자수(子修)가 홍건적의 난 때 전공을 크게 세워 안사공신으로 송안군에 봉해졌으므로
그 공으로 인하여 시조 석(碩)은 봉익대부로 밀직사에 증직되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이석을 시조로 받들고,
선조의 본향지인 진보를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면서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시켰습니다.
지금은 진보보다는 안동부근에 많이 사신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보이씨라고 표기하면 누군가에게 한소리를 들을 것 같습니다.
진보이씨들은 관향을 진보라고 하지 않고 진성이라고 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타인의 입장에서 이리저리 말할 것은 아니겠습니다.
청포도라는 시를 쓴 시인 육사 이활을 다시 한번 떠올려 봅니다.
반변천을 건너며 좌우로 두리번 두리번 거립니다.
반변천은 낙동강의 동쪽 원류입니다.
일월산 북쪽에서 발원해 영양의 장군천과 청기천의 지류를 품은 뒤
이곳을 거쳐 임하댐과 안동의 낙동강으로 109.4km 거리의 긴 여정길을 가고 있습니다.
면소재지로 나왔습니다.
진보에서 활동했던 의병부대인 진보의진을 결성한 방산(舫山) 허훈(虛薰)의 종가를 가려고 했습니다.
1896년 4월 진보의진을 결성한 방산 허훈은 왕산 허위(許爲)의 형으로 퇴계학파를 계승한 성리학자입니다.
그는 진보 흥구실(현, 영양군 흥구리)에 거주하던 중 창의의 기치를 걸었습니다.
아우 허환을 김도현(金道鉉)에게 보내 진보의진으로 초청하였고,
이에 응한 김도현은 진보에 들어와 장차 안동의병에 참여하게 됩니다.
적원일기(赤猿日記)에 따르면 진보의진은 창의 후 어천, 남면, 화마리 등지로 진영을 옮기며
안동, 청송, 영양, 의성 등 주변 의진과 사통을 교환하며 협조체제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진보면 괴정리에 허훈 대장의 종가가 위치하고 있다는데 시외버스 시간이 애매합니다.
아쉬움 남기고 시외버스터미널로 갑니다.
버스를 기다리며 들고나는 버스 사진을 찍다가 어느 기사에게 욕한사발 푸지게 들었습니다.
왜 사진 찍느냐?
기사분 찍은게 아니고 버스와 그 주변을 찍었다.
하여간 찍지마라. 기분나쁘다.
미안하다고 해야죠. 객지에서 다툼이 일어봐야 내편은 없으니까요.
버스에 타서 창밖으로 보이는 풍광들을 보며 아무 거리김없이 꾹꾹 누릅니다.
그렇게 영덕까지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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