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향(文鄕) 영양. 그 중에서 일월면 주곡리(注谷里) 주실마을을 갑니다.
일월면은 영양의 하늘을 받치고 있는 1217.6m의 일월산에서 그 이름을 빌려왔습니다.
산이 높아서 해와 달의 떠오르는 모습을 가장 먼저 바라볼 수 있다고 해서 일월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해옵니다.
주곡리는 본래 영양현에 딸린 주곡부곡(注谷部曲)이 있던 곳으로
1630년 조전(趙佺) 선생이 사화를 피해 이 마을에 처음으로 들어와 정착한 뒤 매한(梅寒)이라 했고,
1700년 무렵 매계(梅溪) 혹은 매곡(梅谷)으로 부르다가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 때에 감복동(甘伏洞)과 법곡동(法谷洞)을 합해 주곡리라 하고 일월면에 들게 되었습니다.
마을의 서쪽으로는 일월산의 갈래인 흥림산(興霖山)이 뻗어 내려 마을의 입구를 막고 있으며
감북골 서편이 영양읍과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흥림산은 허리에 구름이 돌면 언제나 비가 오기 때문에 붙여진 산의 이름입니다.
마을 중앙을 흐르는 장군천(將軍川)을 좌우로
용골ㆍ논골ㆍ성지골ㆍ새미골ㆍ감북골ㆍ앞산골 등의 골짜기가 서로 맞닿아 있어 이루어진 마을이라 하여
물을 끌어대다, 물이 흐르다에 쓰이는 주注자를 이용 주곡리라 하였습니다.
마을사람들이 주실쑤라고 부르는 마을 숲입니다.
도로 좌우에 대부분 100년이 넘은 거목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으며
길 왼쪽으로는 이곳 주실마을 숲이 2008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는 표지가 서 있고
그 옆으로 멀찍이 조지훈시인의 요절한 형 세림의 시비가 보입니다.
도로 우측 주실마을표지석
그 옆 숲속에 조지훈의 시비가 있습니다.
숲과 연해서 장군천이 흐릅니다.
장군천 너머로 월록서당이 보입니다
하지만 장군천을 넘으려면 마을입구 다리를 이용해야 합니다.
다시 도로로 나와 도로를 따라 올라갑니다.
주곡리
주실마을로 들어갑니다.
주실2교
다리를 넘으면서 월록서당일대를 봅니다.
다리 동쪽 장군천..
오른쪽 숲이 조지훈 시비가 있는 시인의 숲입니다.
조지훈 문학관이 보입니다.
주실마을의 자랑이 조지훈입니다만 주인공은 조금 뒤에 만나기로 하고
그가 어렸을때 공부하였다는 월록서당으로 갑니다.
월록서당은 1983년 9월 29일에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17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옥천 조덕린(趙德隣)의 손자 월하 조운도(趙運道, 1718~1796)가 만곡 조술도(趙述道)와 함께
후진양성을 위해 1773년(영조 49년)에 지은 서당이라고 합니다.
일월면 주곡리의 한양조씨(漢陽趙氏), 도곡리의 함양오씨(咸陽吳氏), 가곡리의 야성정씨(野性鄭氏)가 함께 참여해
건축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산서당이 서원으로 승격된 이후 영양군에서는 처음 지어진 서당으로
이 서당에서 많은 학자가 배출되으며,
일월산 아래 서남향으로 위치해 주변의 경치가 수려하고 학문을 연마하기에 좋았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이 잠겨있어 담장위로 여러장의 사진을 찍습니다.
월록서당을 보고 조지훈문학관으로 갑니다.
이 마을의 답사코스로는 이곳에서는 산기슭을 올라 전망대를 가서 마을을 조감해 보고
지훈시공원으로 내려온 후 시감상을 하고
지훈문학관을 돌아보고 옥천종택으로 가는 것으로 산책길 안내도가 그려져 있습니다만
전망대는 생략하고 지훈문학관으로 왔습니다.
지훈문학관은 따로 포스팅합니다.
지훈시공원입니다.
지훈시공원은 지훈문학관과 함께 포스팅하겠습니다
꽤 많은 시비앞을 지나 조지훈의 동상옆을 지납니다.
마을 교회
이렇게 지어진 어떤 심오한 의미가 있겠지만 의미를 모르니 생경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종탑을 앞장세워 다시 찍습니다.
조지훈이 유년시절에 살던집 방우산장입니다.
조지훈은 1920년에 호은종택에서 출생하였으나 부친을 따라 1936년 상경할 때까지 성장기를 이집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2010년 복원한 건물로 문이 잠겨있어 문틈사이로 카메라를 넣어 한장 찍었습니다.
마을길을 걸어가며 마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창주정사를 봅니다.
호은종택입니다.
호은종택이라는 표지석과 경북도 기념물 제78호로 조지훈 생가라는 표석이 있습니다.
영양에 처음 들어온 입향조(入鄕祖) 조전(趙佺)의 둘째 아들 조정형(趙廷珩)이 조선 인조(仁祖) 때 지은 것으로
호리병을 가지고 은거했다는 호은이라는 택호가 무색하게
주실마을의 가장 중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경북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양반가(兩班家)의 모습을 하고 있는 'ㅁ'자형집입니다.
사당
이 건물은 정침(正寢)과 대문채로 나눠 정침은 정면 7칸, 측면 7칸이며
정면의 사랑채는 정자 형식으로 되어 있고
서쪽에는 조지훈의 태실(胎室)이 있습니다.
이 태실에서는 한말 의병장 조승기(趙丞基),
6.25 때 자결한 지훈의 조부 인석(寅錫) 등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한 많은 분들이 태어났다고 합니다.
호은종택에 사는 조씨를 가르켜 칼날 같은 남인(南人) 집안이라 하여 검남(劍南)이라 불렀었다 합니다.
그래서 그 체통을 지키기 위해 재물을 빌리지 않고(財不借),
남의 문장이나 학문을 빌리지 않고(文不借),
사람을 빌리지 않는(人不借)다는 삼불차(三不借)의 가훈(家訓)을 철저히 지켜 내려왔다고 합니다.
호은종택앞에서 앞산을 바라봅니다.
그냥 볼 뿐이지 풍수로 해석하는 능력이 나에게는 없습니다.
가 보아야 할 몇 곳.
꼭 방문하라고 안내합니다.
마을안으로 깊숙히 들어갑니다.
옥천종택입니다.
옥천 조덕린의 고택이지요.
조덕린은 자가 택인(宅仁)이고 호가 옥천(玉川)으로 조군의 아들입니다.
어려서부터 숙부에게 가학을 전수받고 문과에 급제하였습니다.
1725년(영조 1)에 당쟁의 폐해를 논하는 10여조의 소를 올렸다가 종성에 유배되었다가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하게 되자 유배에서 풀려 홍문관응교에 제수되었으나, 곧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1736년 노론의 탄핵을 받고 제주로 유배 가던 중 강진에서 죽었습니다.
안내문에 의하면 이 집의 구조는 살림채인 정침(正寢)과 글을 읽는 별당(別堂)인 초당(草堂)과 가묘(家廟)인 사당(祠堂)으로 구성돼있고,
살림채는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분포돼있는 'ㅁ자'형 뜰집의 전형적인 구성을 보이는데
다만 안방이 동쪽에 오고 사랑방이 서쪽으로 배치된 점만이 다르다고 하며
집의 평면구성에 좌우가 바뀐 이 같은 형식은 18세기부터 안방과 부엌이 서쪽으로 배치되는 평면구성으로 통일되는 특징을 가지는데,
이 살림집은 지붕을 박공(朴工)으로 처리하는 등 상당히 오래된 건축기법을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초당은 전형적인 서당의 평면구성을 보이고 있으며,
사당은 18세기말 건물로서 일반적인 형식에 속하며,
경북 북부지방의 폐쇄적인 'ㅁ자형 뜰집'의 민가(民家) 형식을 잘 갖추고 있습니다.
문안으로 들어섭니다.
왼쪽 담쪽에 국사창사공생가(國士滄斯公生家)라고 쓰인 비석이 있습니다.
조덕린은 한때 왕세자 교육을 담당한 관청에서 벼슬을 했다고 합니다.
공부를 하던 초당(草堂)이 있고 그 오른쪽으로 살림채가 있습니다.
살림채 오른쪽 뒤로 사당이 위치합니다.
담밖에 있는 작은 우물
이 마을에서 유일한 우물입니다.
이 마을이 배의 형국이라 여기저기 물을 파면 배에 구멍을 뚫는 것과 같다는 이치로 인해
마을의 모든 식수는 모두 이곳에서 가져다 먹었습니다.
사실 마을앞에 사시사철 맑은 물이 흐르는 장군천이 흐르니
설겆이, 빨래, 목욕 등에 필요한 생활용수는 걱정이 없는 마을이기도 합니다.
현재도 식수는 50리 떨어진 곳에서 파이프를 연결하여 가호별로 식수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초당과 살림채를 뒤돌아 보고
어떤 좋은 풍수의 기운이 혹시나 느껴질까 싶어 다시 한번 대문 너머 앞산을 봅니다.
창주정사(滄洲精舍)로 갑니다.
창주정사는 조덕린이 문생들을 가르치던 곳입니다.
건물 이마에는 滄洲精舍라는 현판을 붙였는데 이는 조덕린의 유묵을 집자하여 새긴 것이라 합니다.
정면 4칸의 건물에 좌우로 방을 넣고, 가운데 두 칸은 마루로 되어 있습니다.
마루의 벽에는 림산서당(霖山書堂)과 창주재(滄洲齋) 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임산서당은 마을 서쪽에 있는 흥림산의 이름을 딴 것이고 창주재는 창주정사에서 딴 것이겠지요.
창주정사는 송나라 주희(朱熹)가 만년에 복건성 건양서남에 거처하며 창주정사(滄洲精舍)를 지었는데
아마도 여기에서 유래된듯 우리나라 꽤 많은 지역에 창주정사가 있습니다.
마루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국한문 혼용의 “滄洲精舍 移建에 즈음하여”가 있습니다.
滄洲精舍記는 고종조에 목릉참봉을 지낸 聞韶 金岱鎭이 썼고,
滄洲精舍雜詠幷序는 지은 이가 精舍老人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주곡마을을 나서며 장군천을 건너갑니다.
뒤돌아서 마을을 한번 더 보고
들러보지 못한 곳, 만곡정사를 봅니다.
만곡정사는 향토유적문화재 제341호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 정조 때의 유학자 조술도(趙述道, 1729~1803)가 후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1790년 영양 원당리 선유굴 위에 건립한 강정(江亭)을
문하생들이 주곡동으로 옮겨 미운정(媚雲亭)이라 했고,
그 뒤 현 위치로 옮겨 만곡정사(晩谷精舍)라 한다고 합니다.
주실마을 관람을 끝내고 보는 주실마을 관람안내도
지훈의 시
다시 안내판
다시 시
환영인사를 환송인사로 받아들입니다.
조지훈의 민들레꽃을 읊어 봅니다.
사랑한다는 말 이 한마디는
내 이세상 온전히 떠난뒤에 남을 것
잊어버린다.
못잊어 차라리 별이 되어도
아 얼마나한 위로이야
그대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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