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의 한 복판에 외로운 섬이 하나 떠 있습니다.
선릉과 정릉이 있는 삼릉공원입니다.
삼릉공원이라고 불리었었는데
조선왕릉들이 유네스코세계유산이 된 후 다시 선,정릉이라고 불리우고 있습니다.
선릉(宣陵)은 성종과 성종의 세번째 부인으로 중종의 생모인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입니다.
왕과 왕비의 무덤이 같은 능역 안에 있되 언덕을 달리하는
이른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입니다.
정릉(靖陵)은 정현왕후 윤씨 소생으로 성종의 차남인 중종의 무덤입니다.
중종은 경기도 고양의 서삼릉에 묻혔으나
제2계비인 문정왕후가 자신의 사후에 함께 묻히길 원해서 1562년 이곳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나 풍수상의 문제로 정작 문정왕후는 지금의 노원구에 있는 태릉에 묻혀있습니다.
선정릉 입구를 들어서 서북쪽으로 보이는 것이 성종의 무덤이고,
왕후의 능은 건너편 동북쪽의 숲 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산책로를 따라가면 중종의 무덤으로 이어집니다.
선릉과 정릉은 임진왜란 때 파헤쳐져 재궁이 전부 불타 버렸기 때문에,
선릉과 정릉의 세 능상 안에는 시신이 없습니다.
세 능상은 보수하면서 새로 만들어 올린 의복만 묻혀있는 빈무덤이지요.
빈무덤사이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져 있는 산책로를 걷습니다.
피나무옆을 지나면서 성종과 중종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성종은 1457년 의경세자(뒷날 덕종으로 추존)와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태어난 지 두 달도 못되어 아버지 의경세자가 죽는 바람에 성종은 할아버지인 세조의 손에 의해 키워졌다.
세조는 일찍이 손자의 뛰어난 천품을 알아보고 그에 대한 총애가 남달랐다고 한다.
세조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성종은 세조 7년(1461) 다섯 살이 되던 해에 자산군에 봉해졌고
1467년에는 한명회의 딸(뒷날의 공혜왕후)과 가례를 올린다.
세조 14년(1468)에는 자을산군으로 다시 봉해지고
이듬해 11월 숙부인 예종이 승하하면서 13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그후 성인이 되는 7년 동안 세조의 비 정혜왕후의 섭정을 받았다.
비록 수렴청정으로 불안하게 출발하였지만 성종은 치세에 능한 왕이었다.
그 예로 성종은 권신과 사림세력을 조화롭게 운용하여 국가권력의 균형을 이루었으며,
유교사상을 더욱 정착시켜 왕도정치의 기초를 완성함으로써 조선 개국 이래 가장 평화로운 시대를 열었다.
‘成宗’이라는 묘호 역시 모든 기초를 완성시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또한 이 시기에는 정책적으로 편찬사업을 육성하여 세조 때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이 1485년에 완성되었고,
『동국여지승람』·『동국통감』·『삼국사절요』·『동문선』·『악학궤범』 등 다양한 서적이 간행되기도 했다.
이런 성종이었지만 장수까지 누리지는 못해 1494년 창덕궁 대조전에서 38세로 승하했다.
생전에 그는 정비 공혜왕후(恭惠王后, 1456~1474)를 비롯해 12명의 부인과 16남 12녀의 자녀를 두었다.
성종의 제2계비 정현왕후 윤씨(1462~1530)는
정비인 공혜왕후 한씨, 폐비 윤씨(?~1482, 연산군의 생모)에 이은 성종의 세번째 부인이자 중종의 생모이다.
우의정 윤호의 딸로 성종 4년(1473) 숙의에 봉해졌으며,
1479년 윤씨가 폐출되면서 이듬해 왕비에 책봉되었다.
이후 1497년 자순대비에 봉해졌으며 소생으로는 중종과 신숙공주가 있다.
중종 25년(1530) 68세를 일기로 경복궁에서 승하하여 성종의 동쪽에 묻혔다.
성종 19년(1488)에 태어난 중종은 정현왕후 윤씨 소생으로 성종의 차남이다.
성종 25년(1494) 진성대군에 봉해졌다가,
1506년 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면서 왕위에 오른다.
중종은 신진 사림세력들을 등용하여
훈구파의 세력 팽창을 막고 권력의 균형을 이루면서
새로운 왕도정치와 이상정치를 실현하고자 했으나
기묘사화(1519) 등 각종 옥사로 이어지는 당파싸움의 벽을 넘지 못하고 말았다.
중종은 원래 1499년 진성대군의 신분으로 신수근의 딸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와 혼인했다.
그런데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후 왕비 신씨가 연산군의 비 신씨의 외질녀라는 이유로
반정을 주도했던 공신들의 압력이 가해지자 폐위시키고 말았다.
1544년 57세로 승하한 중종은 38년 2개월 동안 왕위에 머물렀으며
장경왕후 윤씨(인종의 생모), 문정왕후 윤씨(명종의 생모) 등 두 명의 왕후와 7명의 후궁을 두어 9남 11녀의 자녀를 보았다."
쉬나무 옆을 지나면서 능에 대해 알아봅니다.
"성종의 능이 다른 능과 다른 점은,
대개의 능은 정자각이 봉분으로 오르는 경사진 언덕 중앙에 있는 것과 달리, 측면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동원이강릉에서 볼 수 있는 배치이다.
능의 상설(象設) 형식은 다른 능과 비슷하다.
다만 “능은 석실이 유해무익하니 석실과 사대석(莎臺石)인 병석(屛石)을 쓰지 말라”는 세조의 유교(遺敎)에 따라
석실은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나 병풍석(屛風石)은 설치돼 있다.
세조와 예종의 능에도 없는 병풍석을 설치한 것은 무척 예외적인 일이다.
석물 중에는 장명등(長明燈)이 심하게 마모되었고 고석의 귀면상(鬼面像)이 힘을 잃은 모습이다.
정현왕후의 능은 석물이 같으나 병풍석이 없다.
중종의 능인 정릉은 1544년에 중종이 죽자
경기도 고양군 원당읍 원당리에 소재한
서삼릉 가운데 성종 제1계비 장경왕후의 능인 희릉(禧陵)과 동원이강으로 하였으나,
1562년(명종 17) 문정왕후가 지금의 위치로 능을 옮겼다.
재궁을 옮기면서 지대가 낮은 이곳에 거액을 들여 보토를 하였으나
매년 여름이면 강물이 능의 앞까지 들어오고 재실의 절반이 침수되는 상태여서
다시 능을 옮기자는 논의까지 있게 되었다.
문정왕후는 중종과 함께 안장되기 위하여 역사하였으나
결국 현재의 태릉에 단릉으로 치장하게 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조선 왕릉 가운데 왕의 무덤이 홀로 남아 있는 곳은 이곳 정릉과
강원도 영월에 위치한 단종의 장릉(莊陵),
경기도 구리에 위치한 태조의 건원릉(健元陵)뿐이다."
여기저기 공사중인 숲길을 걷습니다.
공사판 가림막에 쓰인 사진을 옮김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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