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의주길 제1길 벽제관길

하늘타리. 2014. 5. 1. 18:53

 

경기문화재단과 아도행이 개설한 의주길을 걷습니다.


경기문화재단과 아도행이 개설한 의주길이 옛 의주길은 아닙니다.


길이 없어지기도 하고 마을이 생기기도 하고...

옛길 위로 엄청 넒은 자동차도로가 생기기도 하고...
그래서 옛길과 가장 근접한 길로 새로운 의주길을 연결한 것이지요.

 

 

옛길을 복원하려 최선의 노력을 했다면

꼭 그 길이 아니라도

그 길과 근접한 길을 통해 그 길이 가진 정신과 의미를 함께 나눌수 있으니

그것이 보람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의주대로는 조선시대에 한양과 각지를 연결하는 대소로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도로로서

국가의 특별한 관리를 받았습니다.

당시 천하의 중심이었던 중국의 수도, 연경과 이어지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의주대로를 통해 중국의 사신과 무역상이 조선으로 내왕했고

우리나라의 사신들이 중국 청나라의 수도 연경에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문물의 교류가 있었습니다.

 

 

또한 의주대로는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 때는 후금(後金)군이 침입한 길이었고,

1636년(인조 14년)에는 청태종이 쳐들어와 10만명에 이르는 조선인 포로가 심양으로 끌려간

역사의 아픔을 간직한 길이기도 합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최후의 방어선인 충주의 탄금대전투에서 신립장군이 패하게 되자

선조임금은 1592년 4월 30일 도성을 떠나 의주로 몽진을 하게 되는데

그 길이 또한 의주대로였습니다.

 

 

새로이 개설된 의주길에 대해서는 저도 아쉬움을 많이 느낍니다.

 

 

의주대로에 진입하는 가장 일반적인 도성출입문이었던

돈의문이 있던 자리에서 의주길을 시작하면 어땠을까?
아니면 1896년 경기감영이 수원으로 옮겨질 때까지 경기감영이 있던 자리에서....
아니면 최종적으로 우리측의 연행길을 점검하거나

중국에서 사신이 왔을 때 왕세자가 직접 나가 중국사신을 맞아들이고,

돌아갈 때는 백관이 문 밖에 서서 중국사신을 정중하게 배웅하던 모화관 자리에서 부터...
그것도 아니면 무악재 고개넘어 의주대로의 첫 번째 원(院)이자

중국으로 연행길을 떠나는 사행단에게 전별연을 행하는 곳으로 활용되었던

홍제원자리에서 부터는 의주길이 시작되어야

옛 용도와 기능을 보다 정확히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았을까하고 생각했습니다만...

 

 

이런 저런 이유...아니 아주 간단한 행정구역상 이유로

서울특별시를 넘어 경기도 권역에서부터 의주길을 개설할 수 밖에 없었던 듯 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마음에 걸린 것은

의주길을 다시 찾아 개설하면서

용암사앞에 이르기까지 이상스러이 혜음령길을 회피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고읍마을을 지나 관청령을 넘은 것은 고양향교나 연산군금표비 등 볼거리를 위해서 그랬구나하고 생각되고

관청령을 지나 용미3리에서 다시 마을안으로 들어간 것은 교통의 혼잡을 피해서이겠지만

의주대로는 삼남대로와 달리 홍봉한 등이 편찬한 “문헌비고(文獻備考)”, 

신경준의 “도로고(道路考)”,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大東地志)” 등에 그 경로가 확실히 나타나 있기 때문에

볼거리 위주로 길을 돌렸다는 것이 마음에 영 걸립니다.

 

옛 서울, 한양에서 해남으로 이어지는 삼남대로, 삼남길은 공식적인 명칭이 아니지요.
이 길을 통해 삼남을 오르 내렸기 때문에 통칭 삼남대로라고 불리운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 길이 남아있더라도 저 길이 더 볼거리, 이야기거리가 많으면

개설자가 자의적으로 돌릴 수 있는 여지가 많지만

의주대로는 그래서는 않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국외지기 알지못하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고 어려움이 있어 그랬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개설한 의주길...
옛 의주길의 정신을 계승한 새 의주길을 걷습니다.

 

 

그 길을 걸으면서 엉뚱한 생각을 하다가...

또는 일부러...

알바를 한 경우가 많습니다.

 

1코스, 2코스 그리고 3코스

아, 3코스는 용암사까지의 노정만을 올립니다.

 

의주길

사진으로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