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천길상사를 나와
진천성공회교회가 건물을 그대로 들어서 옮긴것을 깜빡하고
예전에 있던 자리인
삼수초등학교앞 공용주차장까지 걸어서 가며
고개를 둘레둘레 돌리며
눈에 넣은 모습들입니다.
기록은 진천군 홈피를 기본으로 하였습니다.
진천군청
진천군은 고구려(高句麗)시대에 금물노군(今勿奴郡) 일명 만노군(萬弩郡) 이랗였으며
(일설에는 수지(首知) 신지(新知)라 하였다고한다)
신라(新羅)때에는 흑양군(黑壤郡)이라 고치고 그후 황양군(黃壤郡)이라 하였다.
고려(高麗)초에 이르러 강주(降州)라 한 후 다시 진주(鎭州)라 개칭하고
성종(成宗)때 자사(刺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에 이르러 이를 파(罷 )하였으며
현종(顯宗)때에는 청주(淸州)에 속하였다.
고종(高宗)때에 와서 창의현(彰義縣)이라 바꾸고 현령을 두었다가
원종 (元宗)때에 의령(義寧)이라 하고 군사(軍事)를 두었다가
조선(朝鮮)때 와서 상산(常山)이라 고치고 그후 진천 감무(監務)로 바꾸었다.
조선(朝鮮) 태종(太宗) 13년(1413) 계사년(癸巳年)에 진천으로 개명, 현감을 두었다가
그후 연산군(燕山君) 11년(1505) 을축년(乙丑年)에 일시 경기도에 이속되었다가
중종 (中宗)초에 다시 충청도에 환원,
고종(高宗) 32년(1895) 5월 26일 칙령 98호로 현감을 두었던 것을 군수를 두게하였다.
진천 상산초등학교
1905년 10월 28일 사립 보통상산학교를 창설하였다.
1911년 10월 2일 진천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였다.
1945년 4월 1일 진천상산국민학교로 개칭하였고,
1996년 3월 1일 진천상산초등학교로 개칭하였다.
이호신 장학비
이호신(李鎬臣) 선생은 육영사업에 헌신적인 독지를 한 분으로
이원면 중산리 (梨月面 中山里)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열심히 노력하여 자수성가로 토지 천 석지기의 부농을 만들었다.
선생은 이 재산으로 많은 사회사업을 하신 중에도 교육사업,
특히 1940년 상산국민학교(常山國民學校)가 현재 삼수국민학교 터에 있을 때
협소한 부지와 노후된 교실로 많은 어려움을 겪는 것을 알고
토지 500석지기(당시 소한마리 2원일때 5만 7천원)을 쾌히 희사(喜捨)하여
6,900평의 부지와 신축교사(2동건물 14교실 및 부속건물)를 마련하고 현재의 위치로 이전토록 하였다.
또한 선생은 진천 소방대 사무소를 지어주는 등 크고 작은 사회사업에 노력하였다.
1942년 선생이 돌아가시자 생전에 쌓은 공적을 기리어 교육장으로 신계리(新 溪里)에 안장(安葬)하였으며,
교문안 좌측에 1941. 3 정병조(鄭丙朝)가 글을 지어 쓴 화강암 장학비와
91.5×58.5㎝ 높이 21.5㎝의 오석으로 된 장학비가 세워져 있다.
100년전 정문
진천읍 사무소
진천군 7개 읍ㆍ면의 하나로 본래 진천군의 남쪽에 있으므로 남변면이라 하여 15개리를 관할하다가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12개리를 관할하였는데
1917년에 진천면으로 되고
1930년 3월 1일 명암리와 사송리를 백곡면에 태락리를 문백면에 넘겨주고 덕산면의 삼덕리를 편입하여 16개리가 되었음.
1973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이영남 현충비
이영남(李英南)장군은 본관)이 양성(陽城)으로 덕산면 기전리(德山面 璣田里)에서 태어났다.
선조(宣祖) 17년(1584)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조 25년(1592), 장흥부사(長興府使)로 있을 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
옥포(玉浦)에서는 원균(元均)을 도와 왜적(倭敵)과 싸워 전공(戰功)을 세웠으며,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때에는, 가리포첨사(加里浦僉使) 겸 조방장(助防長)으로 제수받아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 장군(李舜臣 將軍) 휘하에서 진도대첩(珍島大捷)의 큰 공을 세웠다.
선조31년(1598) 11월 18일 노량진해전(鷺梁津海戰)에서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전사(戰死) 하자
패하여 달아나는 왜적(倭敵)을 추격(追擊)하다가
안악군수(安岳郡守) 방덕룡(方德龍)등 과 함께 33세의 나이로 전사(戰死)하였다.
광해군 3년(1621) 병조참판(兵曹參判)이 추증(追贈)되었고,
다시 숙종 때 병조판서로 추증 되었다.
묘소(墓所)는 덕산면 기전리 갈현산(德山面 璣田里 葛峴山)에, 장군이 사랑하던 말의 무덤과 함께 있고
1938년 10월 9일, 오석으로 순국(殉國) 385주년 기념 사적비(史蹟碑)를 세웠으며,
진천군 유도회(儒道會) 발기로 1960년 7월 19일 삼수초등학교앞에
높이 198cm, 폭 72cm, 두께 44cm의 오석(烏石)으로 현충비(顯忠碑)를 세웠다.
진천 삼수초등학교
1930년에 창설된 학교이지만 학교홈피에는 1943년 창설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이병화 장학비
이 장학비는 이병화(李秉華) 공이 진천 삼수국민학교(三秀國民學校)전신인 신명심상소학교 (新明尋常小學敎) 설립을 도와
후진 교육에 크게 공헌한 업적을 기리기 위한 장학비이다.
신명소학교는 1930년 성공회(聖公會)신부 임인재(任寅宰)가 창설한 사립학교로
막대한 경비의 필요 때문에 폐지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이자,
이를 애석히 여겨 소화 13년(1938) 이병화옹은 아들 윤섭(允燮)과 상의하여
전답(田畓) 3만 50여평(당시 소한마리 2원일때 2만 원 상당) 100석지기를 희사하므로써
신명심상소학교가 사학(私學)으로서의 정식인가를 받아
진천의 인재(人材)양성에 기틀을 마련한 장학공적(奬學功 績)을 영구히 잊지 않게 하기 위하 여
1941년 당시 신명학교(新明學敎) 남상익(南相翊) 후원 회장이 학부형들과 상의해서 장학 비를 세웠다.
장학비는 삼수국민학교 정문 우측에 3단의 기단석(基壇石 높이 105㎝)위에
비신(碑身)과 비두(碑頭)가 1석(石)으로 비신 후면에 공적이 기록되어 있다
중앙시장
그리고 기웃기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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