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국립공원 제1호 관문인 구룡분소에 왔습니다.
이곳 구룡분소가 위치한 주천면은 산자수명하여
예부터 수많은 선비들이 모여 글을 읽고 학문을 논하며 후학을 양성했던 곳입니다.
특히 국립공원연구원앞 광장에서 마주치게 되는 원천방 원동향약계 용호사유허사적비와 향약계원들의 성의를 기록한 방명비는
조선조의 중·후 향촌사회에서 사림의 지위를 강화하는데 기여한
향약(鄕約)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합니다.
중종때 조광조 일파가 처음 시행한 향약은 보수세력의 반발을 받아 조광조 일파의 몰락과 함께 폐지되었지요.
그러나 명종·선조 때에 사림이 다시 득세하는 추세에 맞춰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다양한 형태의 향약이 만들어져
군현이나 작은 마을을 단위로 하여 시행되었습니다.
향약의 시행과 병행하여 지방 양반의 명부인 향안(鄕案)을 만들고,
양반의 자치기구인 향회(鄕會)를 조직하여 공론(公論)을 모으고 향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원동향약은 선조 5년(1572년)에 남원도호부 관내 원동, 지금의 주천면 호경리일대에서 되어 설립되어 존속계승된 것으로..
(물론 지금은 기념물로만 계승되지만... )
인조16년(1638년)에 작성한 향약록과
숙종원년(1675년), 영조25년(1745년), 정조(1780년)에 만들어진 표창록등
20여권이 전하고 있습니다.
육모정으로 갑니다.
육모정은 원동향약 관련 유적으로,
향약계원들이 모임을 하던 곳입니다.
보통 정자가 팔각인데 반해 이 정자는 육각정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 육모정(六茅亭)이라 부르는데
계곡건너 용호정과 함께 원동향약 계원들의 모임과 후학 양성소로 쓰였다고 합니다.
원 정자는 정자 바로 옆으로 계곡물이 흘러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곳이었으나
1961년 수해로 유실되었습니다.
그 후 원동계의 향약이 문화재로 지정 되자 육모정을 복원하자는 뜻이 모아져
현재의 위치에 1997년에 복원되었다고 합니다.
문득 창암 이삼만 선생이 쓰셨다는 방장제일동천과 용호석문 마애가 생각납니다.
올라온 길을 따라 다시 내려갑니다.
비석이 하나 보이시지요.
임실·남원·완주·익산·김제 이렇게 다섯곳의 군수를 지내시고
금년 초 9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신 이화익군수의 송덕비입니다.
이분은 남원에 최초로 국악원을 만든 분이셨고
남원 쪽에서 올라가는 지리산도로를 개발하는데 기여를 하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1063년 광한루원 경역 확장 및 정비시에 방장정(方丈亭)을 세울것을 창안하여
도편수 이한봉이 건축하도록 하였습니다.
그의 송덕비 왼쪽 석벽에 방장제일동천方丈 第一洞天이라는 글씨가 있고
오른쪽 석벽에 용호석문龍湖石門이라는 글씨가 있습니다.
이 글씨의 주인공 蒼巖 李三晩선생 (1770-1847)은
圓嶠 李匡師 (1705-1777)를 깊이 흠모하여
東國眞體를 바탕으로 流水體라고도 하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蒼巖體를 완성했습니다.
당대 최고로 추앙받던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원교 이광사의 글씨를 비난하고
원교의 글씨체를 바탕으로 서법을 연마한 김삼만의 글씨에도 모욕적인 평가를 하였지만
제주유배를 마치고 돌아 와서는 제일 먼저 창암 김삼만을 찾았다고 합니다.
긴 유배생활에서 필력과 안목이 깊어 져서 미쳐 모르던 것을 깨우쳤지만
이미 창암은 세상을 떠난 후였지요.
구룡폭포 교룡담에 있는 이종묵 이종학의 방장제일동천이라는 글이 있습니다만
이곳에 천하명필 창암의 글씨인 방장제일동천이라는 원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널리 알리어 지지 않고 있는게 조금 아쉽습니다.
조금 아래로 내려가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 쓴 마애도 만나실수 있습니다.
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이라고 쓰여졌습니다.
누군가가 이어 받아서 관세음보살을 씁니다.
그런데 마지막 살자 쓸 자리가 없어 아래편 옆에다 씁니다.
어떤 형식과 의미가 아닌 오직 진솔한 바램의 표시입니다.
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간절한 바램 이루게 하소서...
다시 돌아 올라오면서 창암의 마애가 쓰여진 석벽 건너편 아래로 흘러가는 옥룡추를 봅니다.
문득 이 옥룡추에 노래 한곡을 부르고는 콩 한알씩을 던져 넣곤하여
그 콩이 서 말이나 되었을 만큼 피나는 노력을 했다는 명창 권삼득이 생각납니다.
용호정으로 넘어가는 다리 앞 바위에
국창 권삼득유적비가 있습니다.
양반의 자제로 태어나 글공부는 않하고 소리만 하니 집에서 쫒겨나서
갈데가 없어 처가마을인 이곳 부근으로 왔지요.
박경리의 『토지』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옛적에 권삼득(權三得)이라는 명창이 있었는디, 그 사람은 상사람이 아녀,
향반(鄕班)의 자제니께로, 그러니께 비가비구머잉.
그 양반이 유시적부텀 허라는 글공부는 하지 않고 창극조에 미치니 부모는 수삼 그걸 버리라 권유혔든 기여.
아 생각혀보더라고? 양반 허는 일이간디?
그래도 듣질 않은게로 가문에 수치라 문중에서 모여갖고 직이기로 의논이 됐던 기여.
그 양반도 죽기로 작정을 허고서 거적을 썼는디 마지막 가는 길에 하나 소청이 있노라 허드랑게.
그게 뭔고 허니 가조 일곡을 부르고 죽겄노라 허는 거 아니겄어?
기왕지사 직이기로 작정은 혔이니 죽는 사람 소원 하나 못 풀어주랴 허락을 허고 모두 빙 둘러서 듣는디
거적 밑에서 새나오는 가조 일곡이 그만 사람으 오만간장을 다 녹이지 않았더라고?
울음바다가 됐당게로.
그래 하도 가긍허여 문중이 다시 의논을 혔지야.
족보에서 활적하고 내쫓기로 혔다이.
참말이제, 장혀. 대장부여.
목심을 버맀이믄 버맀지 창극은 안 버맀인게로.
말이 쉽지. 그런게로 천하의 명창이 된 거 아니더라고?"
완주군 용진면에 가면 권삼득 선생 출생지라는 비가 있지요.
권삼득선생 유적비 뒤에서 옥룡추로 내리꽂히는 용소폭포를 봅니다.
용호정
용호정 아래 암벽에 사람이름 등 여러글씨가 빽빽하게 쓰여 있는데 다가가 보기가 어려울듯하여 멀리서만 봅니다.
국립공원 연구원앞으로 돌아왔습니다.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던 장승과 이야기하다
구룡천이라는 표식옆에서 잠시 쉬다가...
지리산 안내도를 찬찬히 읽은 후...
다시 발길을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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