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제주의 마을

제주시 건입동

하늘타리. 2013. 7. 5. 18:15

6월 11일
건입동을 갑니다.


건입포유지라고 표시한 표석앞입니다.

 

 

표석에 쓴 글을 옮겨봅니다.


"탐라개벽신화에 나오는 건들개터.
설화에 따르면 고을나의 15세손 고후세형제가 처음으로 배를 만들고 신라에 입조,

신라왕으로 부터 국호, 작위, 선물등을 받고 이포구로 귀환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대 탐라때의 교통항으로 추정되며

1897년(광무1)부터 기선이 취항하면서 명실상부한 제주도의 주교통항으로 발전했다."
제주시명의로 제주문화원에서 세운 것입니다

고후삼형제시대 즉 신라시대에 처음으로 배를 만들어 신라에 입조해서

그때야 탐라라는 국호를 받아서 왔다는 이야기가 되지요.
그때부터 교통항노릇을 해왔고

1897년에 기선이 취항하였다고 해석하면 되겠네요.

 

 

건입포는 조선말 산지항(山地港)과 별내항(別乃港)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1890년에 산지∼부산 간 조선 우편 소속 기선이 취항한 것을 시초로 본격적인 해상운송시대가 개막되었습니다.
그 후 일제는 1920년 조선총독부령 41호로 산지항을 지정항으로 고시한데 이어

1927년에 상선을 취항시키기 위하여 1926년에 일정예산(日政豫算) 30만엔을 투자해 서방파제 310m를 건설합니다.

그런데 1928년 대홍수로 산지천 남수각 홍예교와 북성홍문이 무너지며 물길을 바꾸어

산지교를 거쳐 포구로 연결되던 물길이 바로 바다로 넘쳐 '졸락코지'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일제는 일주도로를 기점으로 북쪽에 위치한 제주읍성을 허물어 산지항축항 골재로,

산지포구 남쪽의 금산절벽도 깨어 포구 매립골재로 투입하여 주항구로서 축성을 하였습니다.

 


이런 말이 어떻지 몰라도 출륙금지조치로 숨죽이고 있던 항구가

일제점령간 드디어 꽃을 피우기 시작한 것이지요.

1876년 부산, 1881년 원산, 1883년 인천

이렇게 순차적으로 실시된 일제에 의한 개항은

제주도민들에게는 남다른 의미일겁니다.

 


대한민국의 입장에서의 개항은 일제에 의한 조선침탈의 시작을 알린 사건이지만

제주도민들에게는 250년간 막혔던 새로운 세상과의 연결고리가 됩니다.

 


개항을 전후로 출륙금지가 풀리면서 또다시 제주인들은 고난한 삶의 탈출방법으로 또 다시 섬을 떠납니다.

 

1890년 이전에 이항구는 어떻게 쓰였을까요?

그 전 항구축조 기록으로는 1735년에 김정(金政) 제주목사가 도민을 부역하게해

방파제 80간과 내제(內堤)를 쌓았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왜 쓰지도 않는 항구를 축조한다고 왜 도민을 부역시켰을까?


통상 이야기 하기로 인조 7년(1629년)에 제주인들의 육지로의 이동을 금지하기 위한 출륙금지령이 내려

제주인들은 공무에 해당하는 사람만 육지를 오고갈수 있었고

그 관문도 조천진과 화북포구만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1629년부터 순조말인 1830년대까지 200여년간 제주 사람들은

 ‘출륙금지령’에 묶여 제주에서만 갖혀 살아야 했다고 합니다.

떼배만 섬주위를 돌았다고 하는데 왜 김정목사는 건입포에 방파제를 쌓았을까요?

 


그리고 더 이해가 않되는 것은

조선시대 거상으로 이름을 날렸던 의녀 김만덕의 객주가 있었던 곳이 산지포구 주변이었다고 합니다.
산지포는 제주와 육지부의 문물이 오가는 거점으로서 교역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져 왔던 곳이라

만덕은 이곳에 객주를 차려 일약 거부가 되었으며

도민들이 굶주리자 그동안 모은 재산을 털어 육지에서 양곡을 사들여 구제했다고 합니다.

이 공로로 만덕은 임금을 알현하고 금강산을 구경하는 특전을 누리기도 했지요.

그런데 그 시기가 이해가 않가는 겁니다,

돈을 번 시기가 1790년대 전후이고,

도민을 구휼한 시기가 1792년부터 4년간의 흉년이 들은 이후니까 1796~7년이라는 이야기인데

출륙금지령에 의하여 그 때 산지포구는 들락거리는 사람이 없는데 누굴 상대로 돈을 벌었나요?

 

어떻게 생각해보면 출륙금지령은 인조 7년인 1629년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인조실록에 의하면 조종 때부터 내려온 법을 제대로 시행한다하여

인조 임금 이전부터 시행됐음을 알려줍니다.

1434년인 세종 16년에 이미 실록에

"말 도살자는 육지로 보내고 다른 자는 출륙을 금지한다. 출륙자는 고발하도록 한다"는 글귀가 쓰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초부터 출륙금지는 시행되었으나 인조때부터 강하게 준수되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전 시기처럼 형식적으로 제도가 운용되어

지정된 항구가 아닌 산지항이 흥청거렸다고 보아야 돌것같습니다.

그렇지만 특산물 진상과 방위 전략상 주요 거점인 제주의 인구 감소를 막기 위해서는

여인의 출륙금지는 철저히 지켜졌다고 보아야 겠지요.

그러니 김만덕을 육지로 부르기 위해 별도의 조치가 내려졌겠지요.

 

나름 전문가라는 사람에게 물어보면 현상을 회피하는 대답만하고...

저도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킵니다만

이쪽은 전공이 아니니 섵부른 의견을 내지도 못하고 그냥 답답할 뿐입니다.

 

그러던 차에 최근 한라일보에 누군가의 연재물이 있는데...

일제강점기 이 부근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기억에 바탕한 그림을 중심으로

산지천일대의 원풍경에 대한 글이 서술되고 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게하는 부분도 많고

갸우뚱하게 되는 부분도 많아 현지를 다시 한번 걸어보고 싶어 졌습니다.

 

산지에 살던 일본사람의 눈에 비친 모습을 그린 그림을 주제로 해서 글이 쓰여 졌으니

일본사람이 살던 집부터 찾아가봐야 겠다는 생각에

주정공장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사택으로 쓰인 집 중

일본가옥의 원형을 유지한 채 남아있는 집을 먼저 찾아가 봅니다. 

 

아무런 관리를 않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으니 외부가 이제는 엉망입니다.

 


내부도 엉망일겁니다....만...

기록에 의하면 일본식 주택에서 흔히 보는 다다미(疊)와 가미다나(神壇.장식공간)를 설치한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고,

벽면도 일식주택에서 사용된 비늘판벽으로 돼있다고 하며

그 당시 다다미는 거실용도로 사용하고 있고,

가미다나는 장식이 놓여있다고 했습니다.

 

 

옛 동문이 있었다고 하는 부분으로 갑니다.

 

 


이곳에서 부터는 빙글빙글 돌면서 내가 궁금한것을 정리 해 나갈 예정입니다.

정리는 내머리속으로 할테니 이제부터는 그림만 보시지요.

 

 

 

 

 

 

 

 

 

 

 

 

 

 

 

 

 

 

 

 

 

 

 

 

 

 

 

 

 

 

 

 

 

북성홍문터 표석까지를 돌아 보는 것으로 건입동 답사는 마칩니다.

놀겸 쉴겸 금산 수원지 안으로 들어갑니다. 

 

 

 

 

 

 

 

 

 

 

 

 

 

 

 

 

 

 

 

 

 

 

 

 

 

 

 

 

금산 수원지에서 많은 시간 보내고

건입동 동네 박물관에서 커피한잔 마십니다.

 그렇게 발걸음을 멈춥니다.

 

Edvard Grieg    Lyric Pieces (6) Book 8 Op. 65 no 6 Wedding day at Troldhau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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