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한강 1300리를 걷다 1차. 둘째날 오전

하늘타리. 2013. 3. 23. 22:31

한강걷기의 둘째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목욕재계, 칠보단장을 하고 식사까지 마치고 문을 나섭니다.

건너편 산기슭 구름 속에서 어렵게 어렵게 해가 올라옵니다.

이렇게 어두운 일출을 최근에 본 기억이 없습니다.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이 3월 17일 춘분이 며칠 남지 않았군요.

'증보산림경제'라는 책에 '춘분 무렵 새벽에 날이 어두워 해가 보이지 않는 것이 좋으며,

해가뜰때 정동쪽에 구름기운이 있으면 보리풍년이 들지만

구름이 없이 청명하면 만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라고 쓰여 있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농가월령가 2월령 앞부분이 생각납니다.

'이월은 한창 봄이라 경칩 춘분 절기로다.

초엿샛날 좀생이는 풍년 흉년을 안다 하며

스무 날 맑고 흐림으로 풍년 흉년을 짐작하니

반갑다 봄바람이 변함없이 문을 여니

말랐던 풀뿌리는 싹이 움트기 시작한다.

개구리 우는 곳에 논물이 흐르도다.

산비둘기 소리 나니 버드나무 빛이 새로워라.'

 

 

읊고나니 참으로 건방진 소리를 했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농가월령가'는 정약용의 둘째 아들인 정학유가 지었다 합니다.

한 해 동안 힘써야 할 농사일과

철마다 알아 두어야 할 풍속 및 예의범절 등을 월령체로 기록하였고

다양한 농사 내용과 세시 풍속 등이 광범위하게 포함되어 있습니다...만...

농민들 스스로가 농촌 현실을 사실적으로 드러내어 현장에서 부른 노래가 아니다 보니

거의 모두가 '...로다. ...하라'식으로 기술되어

농민들이 이 노래를 불렀을 것 같지는 않고

단지 문헌상으로만 내려왔을 겁니다.

 

 

회원들이 하나 둘 식사를 마치고 모이기 시작합니다.

 

 

해가 동쪽하늘에 닿아 이제 서쪽하늘까지도 밝아졌습니다.

 

 

'저 높은 동쪽에 닿으면 붉은 해는 노래하리.

저 넓은 서쪽에 닿으면 바다 춤을 추리

울려라. 거친 대지 위로 하늘을 뚫고 쏟아나라

나는야 세상의 왕이로다.

새로운 전설이 되리라

 

천년 잠든 검을 들어라 숨을 다해 일어나라

가슴 아래 불이 꺼지면 나를 쉬게 하라 달려라

바람 저 언덕을 차디찬 주검 순간까지

나는야 세상의 왕이로다.

새로운 전설이 되리라

 

저 높은 동쪽에 닿으면 붉은 해는 노래하리.

저 넓은 서쪽에 닿으면 바다 춤을 추리...'

 

 

라보엠에서 나오는 노래이지요.

 

 

내가 새로운 전설이 되지는 않겠지만

오늘도 새로운 전설을 찾아 물길을 따라갑니다.

 

 

빈들을 걷습니다.

지금은 아직 빈들이지만 다시 충만해질 겁니다.

그래요,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곳,

기쁨으로 다시 채워질 공간.

그곳이 빈들입니다.

 

 

회원들도 지나간 빈들에서 마을을 봅니다.

 

마음은 물과 함께 흘러 갑니다

 

 

 

길 오른쪽으로 중봉계곡으로 가는 표지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 오른쪽으로는 4개의 큰 산이 어깨를 겨루며 앉아있습니다.

청옥산, 두타산, 중봉산, 백병산 등 이지요.

이들은 남북으로 솟아 삼척을 굽어봅니다.

우리가 가는 쪽으로는 고위평탄면이 이어져 있지만,

동쪽으로는 급경사를 이루어 동해바다 가까이에 해안평야를 형성합니다.

 

 

이 중 중봉산은 가장 높은 봉우리가 그 산 영역의 가장 가운데 있다하여 중봉산입니다.

봄에는 풍성한 산야초와 산을 불태우는 철쭉꽃,

여름에는 원시림 사이로 흐르는 열두당골 물,

가을이면 잔잔하게 물들어가는 단풍,

겨울이면 무섭도록 쏟아지는 폭설의 별천지입니다.

 

 

1990년까지 2명의 학생이 있던 갈전초등학교 중봉분교가 있는 중봉계곡은

큰당골, 작은당골, 샛당골 등 12당골로부터 청정계곡수가 합류되어

당곡천이 되어 흐르고

그 물가의 기암괴석은 보는 이의 숨을 멎게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고마운 것은

중봉계곡에서 흘러내려온 당곡천물이 골지천과 합류한다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우리가 따라 흘러온 골지천의 하장천구간이 시작된 광동댐은

전국 광역 상수원 가운데 최악일 것이라고 의심을 받고 있습니다.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지만 누구나 알고있는 그 이유는

농약과 비료를 '퍼붓는' 고랭지 채소밭을 상류지역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국 최대 고랭지 채소단지를 자랑하는 해발 1000m가 넘는 매봉산,

귀네미골 고랭지 배추단지를 포함 삼척시 하장면 번천 등 광동댐 상류지역은

고랭지 채소단지로 빼곡히 뒤덮여 있어 사용되는 농약값만해도 연간 100억 원에,

사용하는 비료도 연간 20kg용량 100만포를 훌쩍 넘는다고 합니다.

태백지역과 농토면적이 비슷한 삼척시 하장면의 경우

광동댐 상류지역에서 고랭지 농사를 짓고 있으며

이들 고랭지 배추밭은 광동댐과 곧장 연결되는 상류 하천에 놓여 있습니다.

 

 

광동댐 완공 이후 지난 25년간 엄청난 양의 농약과 비료가 고랭지 배추밭에 사용됐고

잔류농약과 비료성분이 눈비에 섞여 그대로 광동댐에 유입되어

자연 생태계는 이미 자정능력을 상실하고 말았을 것입니다만

지자체는 농민들의 눈치를 보느라 상수원 오염에 관심을 두지 못했고

지역 주민들도 상수원 오염에 대해 무관심해

25년간 이 문제가 노출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천만 다행으로 이곳 중봉계곡에서 흘러내려오는 당곡천이

그 탁한 물을 맑게 해줍니다.

 

 

중봉리 마을입구를 지나쳐 중봉리 서낭당 앞을 지납니다.

주변 숲의 상태가 당골이 끊겼음을 말해줍니다.

 

 

미신이라는 개념으로 보아서는 없어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사실 미신인가 아닌가를 판단할 수 있는 이는 자기 자신뿐이 없습니다.

특히 민속의 관점에서 본다면 민속신앙은 어떤 관습의 종교화라고 할까요?

인간이 자연 속에서 생활하면서 느끼는 여러 어려움과 두려움을 극복하고자

그 어떤 보이지 않는 손길의 도움을 필요로 하였고

그것을 희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믿음이겠지요.

 

 

우리 조상들은 집, 부엌, 마당, 마루 등 집 곳곳에 집지킴이 들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새로 집을 지을 때면 쌀을 가득담은 '성주단지'를 만들고,

뒤란이나 장독대엔 해마다 새로 찧은 햇곡식을 항아리에 담고

볏짚으로 덮어 '터줏가리'를 만들며,

부엌엔 조왕신을 위한 물을 떠놓고 빌었습니다.

그리고 평안한 마음으로

돌보아주는 누군가에게 감사하는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마을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이

이런 서낭당 등으로 나타나는 것인데

산신, 성황신, 용신등 생업과 생활환경과 관련하여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유추되는 이에게 감사를,

집단의 안녕과 평안을 빌어 왔지요.

 

 

그렇게 자연적 조건과 사회적 조건의 공간적인 면과

역사적 조건의 시간적인 면이 어우러져 형성되어 온 신앙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그 신앙의 유지 또는 타기를 강요해서는 않 되는 것입니다.

 

 

믿는 이가 있으면 그 신앙은 유지될 것이고,

믿는 이가 없으면 그 신앙의 흔적은 사라질 것입니다.

 

 

내가 삐뚜루 걷는 건지,

세상이 삐뚤어진 건지...

나무를 보니 나는 바로 서 있는데 산과 들이 기울어져 있네요. 

 

천변으로 내려가 자갈밭을 걷습니다.

 

 

 

 

 

 

 

 

유하의 '자갈밭을 걸으며'입니다.

 

 

'자갈밭을 걸어간다.

삶에 대하여 쉼 없이 재잘거리며

 

 

내게도 침묵의 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갈에 비한다면...

 

 

무수한 사람들이 나를 밟고 지나갔다

무수하게 야비한 내가 그들을 밟고 지나갔다

 

 

증오만큼의 참회, 그리고

새가 아니기에 터럭만큼 가벼워지지 않는 상처

 

 

자갈밭을 걸어간다.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우리는 서로에게 자갈이 되어주길 원했다.

 

 

나는 지금, 자갈처럼 단련되려면 아직 멀었다,

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난 알고 있다,

저 단단한 자갈밭을 지나고 또 지나도

자갈의 속마음엔 끝내 당도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상처는 어찌할 수 없이,

해가 지는 쪽으로 기울어감으로

 

 

정작 나의 두려움은

사랑의 틈새에서 서서히 돋아날 굳은 살,

바로 그것인지 모른다.'

 

 

 

 

 

 

 

 

 

 

숯둔골로 갈수 있는 갈전리 미월교가 보입니다.

 

여기서는 물을 건널수 없으니 자갈밭을 따라가는 기쁨을 잠시 접으라 합니다.

 

산자락을 감고 도는 물길을 따라 돌면서 포장도로로 올라옵니다.

 

 

 

 

 

 

 

산속으로 이어지는 어두운 숲길이 나옵니다.

어두운 숲길, 그래서 이길 따라 가면 나오는 마을 터의 예전이름이 뒷골인가 봅니다.

 

 

'........깊이 들어와서가 아니다

내 아직 어두운 숲길에서 헤매는 것은

헤매이다

길을 잃기도 하는 것은

아직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 탓이다

깊은 골짝 지나 산등성이 높은 그곳에

키 낮은 꽃들 기대고 포개지며 엎드려 있으리.

 

 

더 깊이 들어가야 하리

깊은 골짝 지나 솟구치는 산등성이

그 부드러운 잔등을 만날 때까지

높은 데 있어 낮은, 능선의

그 환하디 환한 잔꽃들 만날 때까지....'

 

 

김해자의 '사람숲에서 길을 잃다'

 

 

그 옆 사방댐

얼마나 많은 물이 내려오기에 사방댐을 만들었을까 하고

그 뒤로 가보았습니다.

에게게...

 

 

갈전리 장승부부.

 

 

미월교

저 다리 건너서 만나는 첫 집이 개점휴업상태인 삼베체험장입니다.

 

 

방터마을

 

동네슈퍼

반갑기는 한데 들어가 살 것이 없어요.

그래서 사실 마을 사람들에게 관광객이 반가웁지를 않지요.

 

 

가게 뒤편 오른쪽에 삿갓처럼 생겼다하여 삿갓송이라 이름 붙은 소나무가 있는데

당숲을 들렀다 가야지하다가 잊어버렸습니다.

 

 

갈전리 당숲입니다.

 

 

당 주변에 오래된 나무 3그루가 보이는데 갈참나무, 느릅나무 ,  음나무입니다.

 

 

 

 

느릅나무는 198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 국가에서 관리를 해 왔습니다만

세 나무 중 상태가 가장 좋지 않습니다.

당 왼쪽로 보이는 느릅나무의 주 가지는 잘라져

옆 가지에서 나온 나무가 主를 이루고 있습니다.

수령樹齡은 400여년이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 20.5m,

가슴높이의 줄기둘레 3.73m라고 합니다.

 

 

갈전리마을에서는 정월대보름날 이 느릅나무 앞에서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서낭고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곳 나무중 느릅나무만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2012년 10월부터 마을 당숲을 함께 묶어 기념물로 지정하였습니다.

 

 

이곳 서낭고사도 이제는 어떤 신앙적의례가 아니고

문화재청에서 천연기념물, 명승과 관련한 민속행사 61건에 지원하는

총 1억 4천만 원의 예산 중 1/n로 민속행사차원에서 시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출발한 검룡소도 명승 73호로 이에 해당되어

음력 6월에 한강 발원제를 지낼 때 지원을 받습니다.

 

 

최근에 고사를 지낸 당이라 하여 들어가 보려 했습니다만

문이 잠겨져 있습니다.

주변에 토우가 하나 떨어져 있기에 가져올까하고 망설이다가

동티날까봐 문 옆에 기대 세워두고 사진만 한 장 찍고 자리를 떠납니다.

 

동무봉.

 

길을 건너 갈전분교 좌측 길로 들어가 왜가리도래지로 갑니다.

 

길을 잘못 들었네요.

서낭당 오기 전에 좌측으로 들어가

마을사람들이 오솔교라 부르는 다리를 넘어

삼굿 터와 선화당을 지나야 되는 것을...

여기서는 물을 건널 수 없어서

물 건너편에서 건너편 소나무 숲속 나뭇가지위에 모여 있는 왜가리들을 봅니다.

 

갈전분교.

20011년 2월에 마지막 졸업생 3명을 배출했습니다.

그리고 한명 남은 학생은 광동리 하장초등학교로 옮겨갔지요.

그 학생이 4학년이었으니까 이번에 졸업을 했겠네요.

 

 

1943년 5월1일 개교해 1990년대까지는 추동·중봉 등 2개 분교를 관리하던 갈전초교는

1999년에 하장초교 갈전분교가 됐고,

그로부터 11년6개월 만에 68년의 역사를 마감했습니다.

 

 

지금은 강원도 장애인 평생교육연수원으로 쓰인다는데

건물표면 상단에서 부터 페인트가 벗겨지고 있습니다.

 

 

한쪽에 버려져 쓰러져 있는 분교표지판

'사라진다.'는 것...

추억이 만들어진 그 '공간'이 잊혀진다는 것이지요.

'잊혀진다.'는 것...

시간이 지나면서 행복했던 시절은 어느새 희미한 추억이 되고,

그렇게 서서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멀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기억 속에는 남아 있다고 위로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멀어진 것들에 대한 우울감이 잠시,

아주 잠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다시 구머리마을로 넘어가는 다리로 갑니다.

 

 

왜가리 번식지를 가려고요.

 

 

왜가리는 우리나라의 백로과 조류 중에서 제일 큰 새로,

우리나라 전 지역에 걸쳐 번식하는 여름새입니다.

우수, 경칩때 찾아와서 말복이 지나면 떠나간다고 이야기하지요.

주로 하천이나 연못가 소나무 또는 은행나무 등이 밀집한 곳에서 많이 살지요.

이곳 왜가리번식지는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제법 많은 아이들이 잊지 않고 찾아옵니다.

 

 

왜가리를 찾아가려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본대와 너무 멀리 떨어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 아이들이 나를 그리 반기지 않을 듯 합니다.

 

 

다리 위에서 멀리서만 보고 ...

 

가야 할 방향도 멀리서 보고

마을로 들어갑니다.

 

 

농촌전통테마마을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2억 원의 예산으로 건립했다는

'전통삼베체험 전시관'에 왔습니다.

삼베제작도구 일체와 삼 재배 및 제조과정 사진,

삼굿모형 재현 등의 전시시설을 설치한 곳입니다.

 

 

그런데 문이 잠겨져 있고

주변 어디에도 현 상태에 대해 물어볼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 문을 열어둘수는 없을 겁니다.

 

 

이곳 갈전리는 허목의 척주지에 '갈전(葛田)과 삼(蔘:지금의 상사미)은

산중에서 가장 좋은 마을로서 장수자가 많고 마포(麻布)의 생산이 많다'라고 쓰여 있듯이 삼베로 소문난 마을입니다.

조선시대에 가장 알아주던 삼베가 바로 안동포와 강포였습니다.

안동포는 안동삼베를 말하는 것이고 강포는 삼척삼베를 말하는 것이지요.

옛날에는 강포를 더쳐주던 시절도 있었다고 합니다.

삼척에서 강포를 많이 내는 곳으로는 미로면 고천리와 노곡면 상반천, 하반천리

그리고 이곳 하장면 갈전리를 꼽습니다.

 

 

그래서인지 일대에서 인구가 가장 많았습니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자마자 이곳에 일본인이 헌병파견소를 두었고

하장면 사무소를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면사무소는 1914년 광동리로 옮겨갔습니다만

그래도 마을은 번창하여 당시 리민의 수가 660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의 한 서너 배되나요.

 

 

보통 음력 3월 보름께 삼씨를 부려 오뉴월에 김을 매고,

7,8월에 2m이상 자란 삼을 베어

본격적인 무더위 속에 삼을 찌고 삼껍질을 벗겨 말립니다.

잿물에 이겨 담금질을 끝내면 누렇던 삼실은 하얗게 변합니다.

그 삼실을 북안에 넣고 베틀에 앉아 삼베를 짭니다.

 

 

이 마을에는 아직도 전통적 방법에 의해 삼굿을 하는 삼굿터도 있습니다.

삼굿은 삼의 껍질을 벗기기 위하여 삼을 찌는 구덩이나 솥을 뜻하는 것으로

땅 구덩이 안에 불을 지펴 돌이나 숱을 뜨겁게 한 후

물을 부어 그 증기로 익히는 것입니다.

 

 

삼굿터

 

 

옛날에는 삼베가 생활에 꼭 필요한 옷이었지만 지금은 대부분 수의로 나가지요.

그러다 보니 이제는 일품만 많이 들고 소득도 별로인데다

재배조차 까다로운 대마농사를 꺼려하고 있습니다.

전통으로만 남은 것입니다.

그 전통을 재현해 보는 관광상품을 만들었는데

찾아오는 이 없으니 그나마의 명맥도 곧 끊어질 겁니다.

 

 

지은 지 얼마 않된듯한 교회가 보입니다.

예전교회자리에 다시 세웠나?

교회이름이 다릅니다.

하늘풍경장로교회

 

 

그 옆으로 옛교회의 흔적이 있습니다.

종루

 

 

파란 지붕집이 예전 갈전교회가 쓰던 성전과 사택입니다.

 

2005년인가에 45년 된 교회라고 당시 목사님이 말씀하시던데...

교회가 부흥되어 새성전과 새 이름을 가졌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

그 당시 신도들이 노인 몇 분이 전부이셨거든요.

 

 

몸을 뒤로 돌려 천변 갈대밭을 걸어갑니다.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썩어서 동아 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을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오냐. 오냐, 오냐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박목월의 '이별가'입니다.

 

 

 

 

다시 한 번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갈전리 피암터널이 보입니다.

 

 

포장도로로 올라서서 칡골로 가는 산길 못미쳐 자리한 휴게소에서 잠시 머뭅니다.

 

 

 

 

소두리쪽에서 다리를 넘어오는 회원들이 보입니다.

 

 

터널을 걸어서는 못 지나는 것으로 알고

이곳 휴게소 앞에서 차량을 이용 터널을 지나가려 합니다.

 

 

피암터널인데요.

인마와 차량이 돌을 피할 수 있도록 만든 터널이라서

당연히 차도 옆으로 구분을 지어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덕분에 2~3키로 편히 갑니다.

 

 

이왕 차를 탄 김에 조금 더 가지,

터널을 나서자마자 내리라고 합니다.

야박하기는...

 

 

왼쪽으로 선당산으로 갈 수 있는 배고픈 다리가 있습니다.

 

 

 

토산교를 넘습니다.

 

 

 

 

 

토산교를 넘어 오른쪽 뚝방으로 갑니다.

 

 

 

 

 

 

 

 

 

 

 

 

 

 

 

 

 

 

갈밭을 헤쳐 자갈밭으로 내려갑니다.

 

 

 

 

 

하천 좌우로 덩그러이 교각만이 남아 있습니다.

다리의 흔적일까요?

도수관로의 흔적일까요?

 

 

다리만 남은 다리

어째 말이 되나요?

시한수 지어볼까요?

시를 지을 재주는 없고 시한 수 읊어 봅니다.

 

 

'그 집,

그 집 뒤란에 오래된 항아리

시간이 고여 찰랑거리고

산새들 내려와 목을 축이고

보름달 머물다 노란 알 하나 낳고 갔었다

달의 행로를 따라 고샅길 생겨나고

그 길 쫓아 1톤 트럭 한 대 거슬러 올라와 봄을 하역하고 간 후,

곳곳에 피어나던 꽃

마당에, 뒤뜰에, 외양간에, 부엌에, 뒷간에, 지붕에, 안방에, 바람벽에,

그 집 빼곡이 채우고,

읍내 가는 먼지 많은 길로 나섰다가

차마 다리 건너지 못하고 강뚝 서성이다 시들었었다

 

 

그 다리,

꽃잎은 강물에 실려 마을을 돌아, 폐교를 돌아

손금 위로 흘러 드는데

밤마다 건너는 교각만 남은 다리

수시로 헛딛어 무릎팍 깨지는 교각만 남은 다리

강물 뚝!뚝! 흘리며 돌아오는 새벽 그 건너엔

꽃들이 주인인 집 한 채 있고

그 집 뒤란, 오래된 그 항아리 노란 알 하나 여전히 품고 있다.'

 

 

'오래된 항아리'라는 최을원의 시입니다.

 

 

물결 따라 흘러가다가...

 

 

다시 다리만 남은 다리를 뒤돌아보고

 

 

다시 흘러갑니다.

 

 

 

 

 

또 다리가 보입니다.

정선군 임계로 넘어가는 다리입니다.

 

 

이름은 멋있지요 은치교.

다리이름은 이따 설명하기로 하고

 

 

다리를 넘지 않고 왼쪽으로 주욱 가는 길 한 곁에 서 있는 토산리 서낭당을 갑니다.

문이 잠겨있습니다.

 

 

은치교 다리위에서 하천을 따라 내려온 길을 되돌아봅니다.

왼쪽에 보이는 봉우리 넘어 이 길과 연결되는 고개가 은고개입니다.

은광이 있었던 곳이지요.

 

 

이 일대에는 낙천樂川 , 은치銀峙 , 중봉中峰에 광산이 있었습니다.

1990년대 말에 폐광이 되었는데

낙천, 중봉에 비해 이곳 은치에서는

광산 활동 중에 발생한 다량의 폐광재 및 갱내수 등에 의해 토양오염이 심화되어 있고

 이대로 방치할 경우

휴·폐금속 광산의 갱구에서 유출되는 중금속을 다량 함유한 갱내수에 의해 주변 하천을 오염시켜

생태계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한참 요란했는데

지금은 조용한 것을 보니 무언가 해결을 한 것인지,

세월이 지나서 잠잠해진 것인지 궁금합니다.

 

 

세율마을

 

은광이 한참일 때 장터거리가 있던 곳입니다.

 

 

무언가 이상해서 다시 뒤돌아보았더니

표지목에 아직도 골지3리 1반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마을사람들은 문래리라는 새로운 이름보다는 골지리가 아직 더 익숙한가 봅니다.

문래리라는 이름으로 마을이름을 바꾼 것은 문래산 기슭이라는 뜻도 되는데

문래산 정상의 행정구역은 옆 동네 고양리입니다.

그래서 주민들이 골지리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는가 모르겠습니다.

 

 

일부에서는 골지라는 이름이 일정시대때 붙여진 것이다

그러니 그 이름을 쓰면 않된다.

마을이름도 바꿨으니 하천이름도 다른 것으로 바꾸어야 된다고 이야기 합니다.

일견 수긍되기도 하지만 조금 차분하게 검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 때까지 이 일대 마을의 이름은 한문으로 고계리高溪里, 고기원高基員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골개 또는 골지라고 불러왔지요.

골개는 고계의 된발음이고

골지는 이곳 사투리로 골짜기를 일컫는 말입니다.

고기원이라는 것도 높은 터에 있는 약간의 들을 이야기하지요.

사실 고계라는 말의 뜻이 높은 곳에 있는 계곡 즉 골짜기라는 의미입니다.

마을이 긴 골짜기 안에 있어 골지마을이라고 불렀고

그 앞을 흐르는 내를 골지내라고 불렀던 것이지요.

 

 

이것을 강릉군에 속하던 임계면이

1906년(고종 43)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정선군에 이관되면서

지역사투리로 골지마을이라 하는 것을 한자어 골지리骨只里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일대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던 이 마을 앞을 지나는 내를

골지천이라고 명명한 것이지요.

설령 일정 초기에 했다하더라도

아무리 일본인이라고 이 마을과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 나쁜 의미로 이름을 붙였을까요?

 

 

그리고 예전에는 골骨이라는 글자에 나쁜 뜻은 전혀 없었습니다.

골骨자는 뼈의 모습을 본떠 만든 글자 아래에 고기 육肉/月자가 들어 있습니다.

뼈도 몸의 일부이기 때문에 고기 육肉/月자를 넣은 것이지요.

사람의 몸을 의미하는 체體를 보시면 골骨 + 풍豊입니다.

살과 뼈가 충분해야 몸體를 이룬다는 의미입니다.

골육骨肉은 뼈와 살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피붙이들을 상징하는 단어이고

신라 육두품 중에 제일 위에 위치한 것이 성골, 진골 등 골품이고

그 아래가 6두품, 4두품의 두품입니다.

 

 

그래서 골骨 그 자체는 귀한 것이고

부정적으로 표현될 때는 부서진 뼈, 알(歺/歹)을 사용합니다.

죽을 사死, 따라 죽을 순殉, 죽을 수殊, 죽을 운殞, 위태로울 태殆, 잔인할 잔殘, 재앙 앙殃 등 과 같이

죽음이나 위험에 관련되는 글자에 부서진 뼈 알(歺/歹자가 들어갑니다.

그런데 근대화과정에서 누군가의 말장난으로 골이 비었네, 골로 갔네 등의 말을 만들어 내어

골자에 나쁜 뉘앙스가 들어가서 그 의미가 왜곡된 것입니다.

 

 

이름을 바꾸는 것이야 주민들이 결정할 일이고

이미 몇 년 전 이름을 바꾸었으니 더 할 말은 없습니다만

무조건 비분강개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리고 2009년 11월에 마을이름을 문래리로 바꾸었으면

문래1, 2, 3리 표지판도 바꾸어야지

그건 또 그냥 두는 이유를 모르겠네요.

 

 

쓸데없는 생각 떨쳐버리고 다시 골지천을 따라 걷습니다.

 

 

 

 

'물처럼 가자

우리 살아가는 삶의 길 물처럼 흘러서 가자

 

 

함께 갈 땐 함께 가고 따로 갈 땐 따로 가자

산다는 것은 아무리 가까운 사이여도

끝가지 함께 갈 수는 없는 것

 

 

가다보면 헤어질 때도 있고

가다보면 만날 때도 있는 것

 

 

흐르는 물처럼 가자

우리 살아가는 삶의 길 흘러가는 물처럼 가자

 

 

함께 갈 땐 너와 내가 따로 없는

하나로 흘러 가고

 

 

갈림길일 땐 미움없는 그리움으로

각자의 길을 가자

 

 

흐르는 물처럼 가자

 

 

헤어졌다가도

다시 만나면 완전히 하나로 섞여서 가는

 

 

너와 나 그리하여

우리는 흘러가는 저 물처럼 가자'

 

 

누구 시인지는 모릅니다.

예전에 불교인드라망에서 캡처한 건데 지은이를 알아보지 않았습니다.

 

 

 

 

마을로 나와 걷다가 데롱데롱 옥수수 한 컷 찍고

 

 

무언가 건졌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다시 물가로 갑니다.

 

 

 

 

멀리 피암터널을 보고 포장도로로 나섭니다.

 

 

문래피암터널 전방 500미터

 

 

 

터널입구 이마에는 낙천피암터널이라고 쓰여 있네요.

낙천리는 한참 가야하는데...

 

 

낙석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피암터널

문래피암터널 역시 밖으로 창이 나있습니다.

다른 곳의 피임터널과의 차이라면 창문까지 달아두었다는 것이지요.

 

 

문득 강촌역이 생각납니다.

경춘선 복선전철이 개통되어

강촌역이 예전자리에서 2km 정도를 더 들어간 곳으로 옮겨졌습니다...만..

예전에는 역사에서 계단으로 내려오면

낙석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피암터널속에 단선 레일이 깔리고

그 옆으로 승강장이 자리 잡고 있었지요.

그 어스레한 어둠속으로 기차가 들어오는 모습이 참 기가 막혔는데...

그리고 낙서들과 그 낙서 위를 덮어 그렸던 그라피티들...

 

 

그 낭만과 운치가 있던 기차가 정차했던 터널을

강촌역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없애버리고

레일을 들어내고 흙으로 메워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 한곳 추억이 생성되었던 장소가 현실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까만 눈망울의 그녀

잊은지 오래인데

눈내리는 강촌역은 끊어진

추억의 연줄을 되감게 한다

시간 저편의

아픔이 시리다."

 

김종익의 '눈내리는 강촌역' 뒷부분입니다.

 

 

강촌역에서 이런 생각을 하던 그런 시절이 있었지요.

 

 

 

 

서쪽으로 음지말로 들어가는 다리가 보입니다.

서쪽마을이 통상 양지마을이지요.

동쪽에서 해가 떠서 아침 일찍부터 햇살이 뿌리니까 당연히 서쪽마을이 양지마을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동쪽 산이 높아서 해가 마음껏 게으름을 피우고 나타납니다.

그리고 해가 나타나자마자 서쪽 산으로 뚝 떨어집니다.

그러니 마을이름이 음지말입니다.

 

 

길건너편으로는 석둔골입니다.

큰 돌무더기가 골짜기를 둘러 진을 친 것 같다하여 석둔골입니다.

 

 

다리 뒤로 바라보이는 산이 바로 높이 1,081미터의 문래산입니다.

 

 

나란히 서있는 비각 두 곳

어머니와 아들의 비각입니다.

 

 

먼저 어머니의 비각을 먼저 보지요.

 

열부숙부인강릉최씨지려

 

다음은 아들의 비

 

효자통정대부승정원동부승지강룽함공재환지려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강릉최씨는 함병태라는 사람의 부인이고

함재환은 함병태와 강릉최씨의 아들입니다.

 

 

집안 살림이 워낙 가난한데

아버지 함병태는 매일같이 방탕생활로 허송세월만 보내고 있었으나

아들 재환은 어려운 가정형편에서도 쌀과 술이 떨어지지 않도록 준비하여

정성껏 봉양하였고 모친(열녀 강릉최씨)과 길쌈일을 하며

아버지가 진 빚을 갚기 위하여 굶는 일이 일수였다고 합니다.

그는 어머니와 의논하여 아버지의 방탕한 생활을 방지하여 달라고

절에 찾아가 불공을 드리니 아버지는 아들의 성의에 감탄하여 개과천선하였으나

곧 병환으로 병석에 눕게 되었답니다.

그는 부친의 병환을 고치려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혹한에 입산하여

산신령께 치성을 드리고 약을 구해왔으나

부친은 그의 정성도 보람 없이 세상을 떠나버리고 말았다고 하네요.

그 후 그는 양지바른 곳에 묘를 쓰고

비가 오나 눈이오나 3년 동안 묘소를 찾아가 재배 하였으며

이러한 생활을 계속하다가 1930년 50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 후 문중에서 함병태의 부인과 아들 재환의 열녀비와 효자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이게 어떻게 생각하면 두 분을 선양하는 것 보다

함병태라는 사람을 두고두고 욕먹이는 것 아닐까요?

한남자의 허랑방탕한 생활로

그에 딸린 모든 이들이 간난신고속에 살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문중에서 결정했다면서

같은 문중 사람인 함병태는 어찌 이리 나쁜 사람을 만듭니까?

 

 

이 비각을 세우면서 무엇을 도모하고자 하였을까요?

애비와 남편이 어떤 사람이던 간에

너희는 효와 열을 다 바쳐야 한다는 이야기일까요.

그 이야기를 듣는 문중 젊은이들이 그것을 수긍할까요?

 

 

아주 고리타분한 공자가 말했습니다.

君君臣臣父父子子라고

논어의 안연顔淵편에 수록된 내용으로

제나라 경공이 정치에 대하여 묻자 공자가 답하기를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고 답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앞에서 부터 우선순위를 두어 이렇게 해석합니다.

임금이 임금다워야 신하가 신하답다.

애비가 애비다워야 자식이 자식답다. 라고요.

그래서 맹자가 말한 '임금이 임금답지 않다면 마땅히 권좌에서 끌어내려야 한다.' 와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위정자들은 이렇게 해석하지요

임금이 임금답지 않아도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애비가 애비답지 않아도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고

후자에게 일방적인 희생과 복종만을 강요합니다.

아마 문중어르신들도 함병태와 그 부인과 그 아들의 예를 들어

애비가 애비답지 않아도, 남편이 남편답지 못해도...

이 사람들의 본을 받아 남편 또는 애비를 잘 모셔라 하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아마도 역효과일 것입니다.

 

 

그리고 1930년이라면 일제강점기라 정려를 내리고 증직을 줄 기관도 없었을 뿐 아니라

그때는 승정원이라는 게 이미 없어진지 오래입니다.

과공비례와 과유불급이라는 단어가 자꾸 생각이 납니다.

 

 

두 비각을 다시 보고 몸을 돌립니다.

 

 

사인남승렬자선불망비

말 그대로 경지를 내어주는 자선을 베푼 이에게 대한

아주 소박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아마도 내어준 땅에서 뿌리를 내린 사람들의 집이겠거니 하고

한 장 찍어 봅니다.

 

 

다리는 아까 보았지만 표지목은 지금 지나네요.

음지마을 표지목.

 

 

오른쪽 멀리 오래된 노간주나무가 보입니다.

 

 

천주교 임계 본당 문래 공소입니다.

 

 

성모님 앞에 섰습니다.

'하늘의 모후시요, 천사의 주모시요, 하례하나이다.

당신께서는 뿌리 되시며, 문이 되심을 찬송하오니,

참 빛이 당신께로 말미암아 세상에 발하나이다.

 

영광스러운 동정녀시여,

모든 이 중에 아름다우시니 즐거움을 누리소서.

지극히 고우신 이여 구하오니,

저희가 하례하는 노래를 들으시어,

저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 빌어주소서.'

 

 

성모찬송 중 한가지의 일부

대략 이시기에 맞을듯해서...

 

 

공소를 나와 마을 뒷산을 오릅니다.

 

 

320년 된 노간주나무

60년대까지 우리나라의 많은 산은 붉은 산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나마 남아있는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조차 모두 긁어다

땔감으로 써버리는 바람에 토양자체도 척박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그래서 비가 좀 많이 오면 산에서 바로 밀려 내려오는 물이 하천을 넘치게 하여

귀떼기만한 농토마저 넘치는 물이 쓸어가 버렸지요.

이때 짜잔하며 등장한 것이 아카시나무와 노간주 그리고 리기다입니다.

 

 

노간주나무는 척박하고 메마른 땅에서도 잘 자랍니다.

그래서 한때 우리 땅 붉은 산에 꽤 많이 심었고

우리 땅 녹화에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특히 산촌에서는 땔감과 연장 자루용으로 써왔으며

탄력이 좋아 잘 부러지지 않고 잘 구부러져

소코에 거는 뚜레용으로 매우 유익하게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은 극양수라서

주변에 나무가 많아져 그늘이 드리우면 잘 자라지 못하기 때문에

나무가 많아진 지금은 거의 볼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평균수명이 200년 정도이기 때문에

이렇게 오래된 노간주나무는 정말 보기 어렵습니다.

 

 

두송실이라고도 하는 이 나무 열매로 드라이진을 만들지요.

단맛이 없고 쌉쌀하니 한 모금 넘기기에는 딱 좋습니다.

아니면 탐카린스나 진토닉을 만들어 드셔도 좋고요.

나처럼 술 많이 못 먹는 사람에게 한두 잔으로 딱인 술이지요.

 

 

술꾼도 아닌데 어떻게 나무이야기가 술이야기로 갔습니다.

 

 

문래리 서낭당입니다.

 

이 일대는 서낭당에 모시는 신위를 꼭 절집에서 삼존불 모시듯 배치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성황신을 본존으로 토지지신과 여역지신을 좌우에 모십니다.

 

癘域之神은 아마 癘疫之神을 잘 못쓴 것으로 보입니다.

癘는 유행병 려 또는 문둥병 라라고 읽어야 하는데 통상 여로 발음하지요,

그래서 여역이라 하면 염병, 창질 등을 뜻합니다.

그런데 무슨 신이야. 쫒아 내야할 대상이구만.

하지만 이 여역은 힘이 쎄서 쫒아낸다고 나가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서 잘 달래서 우리한테는 해꼬지하지말라고 부탁하고 또 부탁하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마을전체의 안녕을 책임져 주는 성황신이나

땅에서 소출이 많게 해주는 토지신과는 많이 다르지만

아이를 기르는 입장에서는 잘 모시고 달래야 할 존재입니다.

 

 

다시 마을로 내려와서

 

 

임계초등학교 문래분교장으로 들어갑니다.

 

 

우리가 지나온 태백 미동초교 하사미분교장과 같이

2009년 2월 마지막 졸업생을 내고 폐교되었습니다.

1939년 7월 10일 개교한 이래 배출한 학생 수는 1,944명이랍니다.

 

 

그해 겨울 폐교된 학교운동장에서 문래리로 새 출발을 기원하며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게시판에 남아있는 다 지나간 공고문들

 

 

폐교안내문

 

 

이순신장군

찾아오는 아이들도 없는 이곳에서 무엇하고 보내시나요?

그러고 보니 이순신장군님도 버림받았네요.

 

 

이순신장군, 세종대왕, 이승복어린이, 그리고 글 읽는 모자 또는 소녀상의 공통점이

학교와 함께 버려진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기증자의 바램도 함께 사그라져 간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허망할 따름이지요.

 

 

이하석의 시 '폐교'입니다.

 

 

'어둠 속 높이 선 이순신은 전신이 파랗다

온통 바다 아래 잠긴 듯하다

폐교 운동장 침범하는 학교 앞 새로 핀 유흥가 불빛 때문인가

어떤 밤엔 빨갛게 달라오를 때도 있다

 

 

운동장 안 넘보는 건 취한 불빛뿐만 아니다

누가 애완하다 버린 짐승들조차 동네 떠나지 않고

그의 어둠 뒤지며 노략질한다

밤의 폐교 안은 내란으로 내몰린 바다처럼 들떠 있다

 

 

아이들 소리 하나하나 풍선처럼 떠올라 사라진 하늘엔

별들만 왁자지껄하니, 은비늘 쌤통 뾰루지들 돋아 있다.'

 

 

문래산을 보며 문래분교장을 나섭니다.

1939년 개교 때부터 문래산 앞에 있다고 문래산의 이름을 따서 학교이름을 지었는데

마을이름은 문래가 되었는데 학교는 문을 닫았습니다.

 

 

양지마을 표지석을 지납니다.

 

 

산기슭을 따라 흐르는 하천 옆으로 가려고

임계면 내에서 답작지대로는 제일 넓다는 하동들판을 지나갑니다.

 

 

 

 

뚝방길을 걸으며 건너편을 보니

어느 봉우리 바로 밑이 깎여나가고 있습니다.

그 뒤 산마루금의 평균 높이가 1000미터 정도니까

저 곳은 800에서 900의 높이가 될 텐데

무엇을 하느라 저렇게 처절하게 깎아내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은 산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은 모든 날짐승, 들짐승을 키우고 건사해줍니다.

그리고 내리는 비를 붙잡아 끊임없이 물을 제공해줍니다.

그 물로 우리는 농사를 짓고, 식수를 제공받고, 전기를 만들고 등등

우리에게 필요한 거의 대부분을 얻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를 살게 해주는 산을 필요한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그 필요이상의 욕심으로

야금야금, 아니 송두리째 갈아먹고 있지요.

 

 

도로변으로 개량감자저장고가 보입니다.

 

19세기 중국 만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설과

영국 상선을 타고 온 네덜란드 선교사가 들여왔다는 설이 분분한 감자.

이 땅에 들어오자마자 굶주린 백성의 허기를 면해주었던 참으로 고마운 작물입니다.

특히 이곳 강원도사람들에게는 한때 주식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현재도 전국 최고의 감자 주산지는 역시 강원도로,

전체 재배면적의 약 30%, 생산량에 있어서도 약 40%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걸어오는 동안 주변지역이 고랭지 무, 배추로 큰돈을 벌고 있다하여

깜빡 감자생각을 잊고 있었습니다.

감자는 봄 감자와 가을 감자, 여름 감자, 겨울 감자가 있다고 합니다.

지역별 기후여건에 따라 조금씩 파종 및 수확시기가 다른 거지요.

여름감자는 4월에 파종 7월에 수확하는 강원도감자를 말하고

겨울감자는 1월경 파종 4월에 수확하는 제주도감자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다른 작목들에 비해 생산비가 많이 들고

게다가 가격은 다운되어 채산성이 맞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확후 바로 출하하지 않고

수확한 감자를 포대에 담아 저온저장고로 옮겼다가

가격 변동추이에 맞춰 출하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소농, 고령농, 가족농 등은 저장수단이 없어

수확즉시 산지수집상에 출하해 제값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에

이곳 임계면일대에서는 마을단위로 공동저장고를 만들어 활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수확후 저장까지의 절차도 쉬운 것은 아니지요.

감자는 수확때 상하는 경우가 많고

상한 것을 성한 것과 함께 보관하면 싱싱한 것들도 못쓰게 되기 때문에

세심한 전처리가 필요합니다.

저장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온도와 습도일 텐데

그건 저장고를 운영하는 사람이 가장 잘 맞추겠지요.

 

 

물길이 문래산과 또 다른 1000고지를 넘어

자후산으로 넘어가는 산자락을 감아 흐릅니다.

 

 

내 마음도 무심하게 함께 흐르려 했는데

건너편 봉우리아래 절개지모습에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칼바위를 보고 마음을 돌리고

 

 

 

잠시 잊었던 이깔나무를 다시 만납니다.

이 화은의 '이깔나무의 바깥에 들다'입니다.

 

 

'이깔나무로 바닥을 깔고

이깔나무로 벽을 세우고

이깔나무 지붕을 얹은 집에서

책을 읽고 라면을 먹고 잠을 자네

나는 이깔나무의 내면이 된 것이었는데

이깔나무의 속을 모르겠네

이깔나무의 공복에 대해

이깔나무의 쓸쓸함에 대해

이깔나무의 박장대소를 이해하지 못하네

 

 

나는 이깔나무의 바깥에 있었던 거네

제 속에

크고 따뜻한 바깥 하나를 키우고 있는 줄

깜깜 몰랐던 거네 그대여

우리가 함께 책을 읽고

라면을 먹고 잠을 자고도 잠깐씩 쓸쓸했던 까닭이

저 바깥,

우리가 틈틈이 키워 온

따뜻하고 광활한 바깥때문이었다는 걸'

 

 

 

문래리 갈버덩말 입구.

계곡 안쪽 나무 없이 억센 풀만이 우거진 거친들,

버덩을 갈아먹는 마을이라고 갈버덩말이라 합니다.

 

 

용산리 용동마을이 보이는 곳에서 버스를 탑니다.

밥 먹으러 가려고요.

둘째 날 오전의 걷기를 마칩니다.

 

 

아리아 몇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