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한강 1300리를 걷다 1차. 첫날오후

하늘타리. 2013. 3. 22. 22:53

 

 

3월 16일

 

오전에 차를 탔던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원동삼거리에서 여기 상사미다리까지 걸어온 구간을 예전에는 디디기벌이라 불렀답니다.

 

북에서 불어오는 겨울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 아무리 발걸음을 내 딛어도 계속 제자리걸음이기 때문이지요.

오늘은 차라리 날씨가 덥다고 느껴지는데 바람이 좀 불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니다. 오늘 같은 날. 봄이 어딘가 멀리에서 찾아오는 날.

이때의 바람은 차라리 겨울바람보다 더 매섭게 느껴질 겁니다.

그래서 '2월(음력) 바람에 김칫독 깨진다. 라는 속담이 생긴 거지요.

 

앞에 보이는 건물은 사조보건지소입니다.

동네이름은 상사미. 하사미라면서 왜 보건지소이름은 사조일까요?

 

상사미동, 하사미동은 행정동이 아닙니다.

아까 지나온 원동도 마찬가지고요.

 

옛날하고 아주 먼 옛날에 장생리라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 보다 먼저 삼한시대 이야기부터 해볼까요.

삼한시대에 삼척일대는 진한의 실직국悉直國에 속해 있다가 신라가 접수합니다.

한때 고구려가 이 땅을 점령하기도 했습니다만

신라 지증왕때(서기 505년) 신라가 다시 회복하여 실직주(悉直州)라고 하였지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신문왕5년(685)에 하서주에 속하였고

경덕왕16년(757) 하서주가 명주로 이름이 바뀔 때 이 지역은 삼척군이 되었습니다.

고려시대로 넘어와서 성종 14년(995)에 척주陟州라고 하여 주로 승격되었지만

현종 9년(1018)에 삼척현으로 강등이 되었습니다.

우왕 4년(1378)에 다시 삼척군이 되었습니다.

 

조선초인 태종 13년(1413) 삼척도호부로 승격됩니다.

이때의 삼척 서부지역 북에서 남으로 길다랗게 있는 장생면을

아래쪽을 상장생면으로, 위쪽을 하장생면으로 구분합니다.

그러다가 이름이 상장성면上長省面, 하장성면으로 바뀌고...

삼척이 강릉부 삼척군(1895년), 강원도 삼척군(1896년) 이렇게 바뀌어 갈 때 상장면, 하장면으로 바뀌었지요.

 

1928년대에 상장면 일대, 지금의 태백시지역에서 우리가 스쳐 지나갈 숙암리인근에서

1928년 일본인 지질기사 시라키쿠지가 양질의 석탄이 매장되어 있는 탄층을 발견합니다.

1936년 석탄공사 장성광업소의 본체인 삼척개발주식회사가 창업되고,

경제개발과 연탄의 수요증가로 최대의 탄전지대로 성장하여 한국 석탄산업의 심장부가 되었습니다.

돈이 흐르고 인구가 늘어납니다.

 

1961년 삼척군 상장면이 삼척군 장성읍으로 승격되고,

1963년에 우리가 출발한 창죽리지역에서 태백산 도립공원 앞까지를 포함한 지역을 관할하는 황지출장소가 설치됩니다.

1973년 삼척군 장성읍 황지출장소가 삼척군 황지읍으로 독립 승격되었고

1981년 장성읍과 황지읍을 통합, 태백시가 탄생합니다.

 

옆으로 잠깐 새서 석탄의 역사를 짧게 써볼게요.

우리나라에서의 석탄에 관한 기록은 신라 진평왕시대부터 '땅이 불탔다'라는 기록이 몇 번 나와서

그것을 한국석탄의 기원으로 삼기도 합니다만

석탄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것은 선조23년(1590)이 최초입니다.

평양지에 '성동묘숙본에 석탄소가 있고 고방산등지에 석탄이 있다.

 이는 불이 붙어도 연기가 나지 않으므로 무연탄이라고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 이후 소규모 석탄채굴이 이루어지다가 고종 23년(1895)에 광산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러시아인에게 함북 경원과 종성에 석탄채굴허가를 줍니다.

1904년에 일본인들이 전남 화순 구암탄광, 현재 석공 화순탄돵을 개발합니다.

 

1925년에는 경북 문경탄전이 개발되고

1933년 충남 예산탄광

1936년 강원도 영월탄광과 도계탄광이 개발됩니다.

그리고 1937년에 삼척개발주식회사에 의해 장성탄광이 개발되기 시작합니다.

해방후 일본인 정부 및 일본인 소유광산이 미군정을 거쳐 한국정부로 귀속되자

1950년 대한석탄공사를 설립하고 1955년부터 탄전재건을 시작합니다.

이 덕분으로 1973년 중동전쟁으로 세계석유파동이 일어났을때도 견뎌낼수 있었습니다.만...

1980년대 후반 이후 이런저런 이유로 석탄산업의 사양화가 가속화되어 폐광이 증가하면서

1988년 석탄산업법을 제정 석탄산업을 정리하기 시작합니다.

 

도시가 위축되니 인구가 감소합니다.

적정인구를 유지하기 위해 1995년 삼척군 하장면 중에서

태백시와 인접한 원동리·상사미리·하사미리·조탄리를 사미의 사, 조탄의 조, 그래서 사조동이라는 이름으로

통합하여 태백시에 편입시킵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 태백시 조탄동 사무소가 들어섰지요.

지금은 동사무소가 없습니다.

왜? 1998년 태백시 16개동을 8개동으로 통폐합할 때 삼수동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사조라는 이름은 어느 지역을 의미할 뿐이고

상사미, 하사미, 조탄 등은 법정동으로,

행정동은 삼수동이 되어 동사무소(주민센터)는 삼수동주민센터를 이용해야 합니다.

삼수동으로 편입될 때 이 지역 사람들은 극렬하게 반대 했습니다.

무엇보다 동사무소가 20Km이상 떨어져 있기 때문에 행정사각지대로 전락할 우려 때문이었겠죠.

그런데 그 당시 사조동 주민 총수가 850여명 뿐이 않되었으니 그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후 동사무소 자리에 보건지소가 들어온 것 입니다.

 

 

당으로 갑니다.

 

지금은 밭가운데 덩그러니 있지만

한때는 당집 앞 마당이 넓직하고 주변으로는 숲이 우거졌던 곳입니다.

 

당에 이름도 있습니다.

부정당이라고…….

부정을 타는 당이 아니고 부정을 씻는 당이라는 거지요.

 

옛날 태백산으로 천제 지내러 오는 사람들이 이곳에 이르러 부정不淨을 털고 제사하고 갔기 때문에 부정당이라 한다 하는데요.

이곳 강원도 산간지방은 주민수도 적고 생활도 어렵습니다.

자연조건이 척박할수록 사람들은 자연신에 대한 외경이 커집니다.

그래서 당은 마을 마다 있지만 경비의 문제로 당굿을 하는 곳이 거의 없었습니다.

타 지역에서 마을이 제법 크다고 하는 곳에서는

신령을 섬겨 길흉吉凶을 점치고 굿을 주관하는 무녀巫女를 불러 서낭굿을 행하는 곳이 제법 있습니다.

굿에서 통상 맨 처음으로 행해지는 것이 부정풀이라는 건데…….

소원을 이루고자 신에게 제물을 차려놓고 비는 치성致誠을 할 때

제청祭廳의 불결하고 부정한 것을 깨끗하게 가셔내기 위하여 실시합니다.

그때 이 굿판 둘레에 모인 사람들의 액도 함께 없에 달라고 하게 되지요.

이것은 지금도 무속인들이 하는 굿에 부정거리라는 이름으로 남아있습니다.

아마도 이 지역은 원으로 가는 사람, 태백산으로 가는 사람, 삼척으로 가는 사람,

그리고 오른쪽 계곡 삼밭골을 지나 한내령을 넘어 도계로 가는 사람이 번잡하게 다녔던 곳이라 큰굿이 행해졌던 것 같습니다.

일대의 중심이니까 동사무소도 이 자리로 들어왔겠지요.

또 다른 기록에는 富鼎堂이라고 쓰여 있기도 합니다.

마을이 풍족하여 큰 솥으로 음식을 준비한 당이라는 이야기인데

마을이 풍족하면 당굿도 크게 했을 테니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일겁니다.

 

그런데 또 다른 기록에는 여기가 부정당이 아니고 아까 지나온 원동삼거리 앞의 당이 부정당이라고도 합니다만

미동이라고도 하는 원동삼거리마을은 조선말엽부터 생겼다니까 그건 좀 신빙성이 없어요.

 

당집 문을 열고 들어가 봅니다.

 

향로와 술병 그리고 들보위에 꽤 많은 지전들이 고이 접혀 명실에 감겨 걸려 있습니다.

이 마을에 당에 다니는 할머니가 세분 뿐이 없다는데

그 중 어느 할머니가 정월 보름께 자손들을 위한 횡수막이를 하셨나 봅니다.

하나 하나 접으신 그 정성이 마음을 흔듭니다.

 

감응하시어 보살피소서... 

 

하천 건너편으로 밭을 확장하여 그 윗부분을 개간한 것이 보입니다.

 아마도 무를 심겠지요.

배추는 해발 600이 넘어야 제대로 된 고냉지 배추가 될 것이고 무는 조금 낮아도 되니까요.

4월말 5월초부터 시작해서 8월말 9월초에 내다 팔 것입니다만…….

이곳도 다른 대체식물을 더 연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고랭지 무·배추 재배는 단작과 한 작물만 계속 이어서 짓는 연작방식의 대표적인 약탈농업이라서

땅심을 약하게 하는데다 최근 수익성이 악화되면서 재배관리가 소홀해져 병해충이 자주 발생한다고합니다.

그래서 저 아랫부분 예전부터 가꾼 밭에 파랗게 나있는 것은 아마도 녹비작물인 헤어리베치나 호밀일겁니다.

녹비작물은 그 아이들이 꽃피는 시기를 전후해 줄기나 잎을 농경지에 갈아 흙과 함께 넣어주면

땅속에서 서서히 분해돼 퇴비처럼 농작물에 영양분을 공급해 줍니다.

게다가 땅심을 높이고 경사지 밭의 토양유실을 예방해 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산기슭을 따라 흘러내리는 물결을 따라 갑니다.

 

물을 건너 황철골로 들어가는 길

황철나무가 많아서 황철골이라 한다지요.

황철나무는 버드나무과에 속하는 아이인데 버드나무보다는 사시나무에 가깝지요.

백양이라고도 하고 남한에서는 강원도가 자생지입니다.

지난번 오대산에서 한번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아 참, 창경궁에도 제법 밑둥이 굵은 두 그루 있습니다.

새로 나오는 잎이 너무 아름다워서 잎을 떼어 냄새를 맡아보니

취나물과 같은 냄새가 나는데 잎이 진득거려 다시 만지기는 싫더군요.

창경궁에는 쉬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도 있어요.

 

흐르는 물을 따라 내려가니 보가 있습니다. 

보는 洑라고 쓰는데 답畓처럼 중국에는 없는 한국식 한자입니다.

사전적 의미로 논밭에 물을 대기 위하여 자그마하게 둑을 쌓고 흘러가는 물을 잡아 두는 곳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서 하천으로 물은 흘러가지만 그게 내 밭으로 들어와야 그 물이 효과가 있겠지요.

그래서 동네 재력가가 물을 막아 보를 쌓으면

나는 얼마간의 보수세洑水稅를 내고 내 밭까지 보동洑垌을 냅니다.

그럼 이제부터 내밭에는 보에 고여진 물이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오겠지요.

 

보의 특징은 수문이 따로 없다는 겁니다.

물은 보를 채운 후에 그대로 넘치도록 되어있습니다.

사람이 건너뛸 정도의 길이로 약간 보의 높이를 낮추어 물이 그쪽으로 먼저 흐르도록 합니다.

그런데 이 조그마한 보에 댐처럼 수문을 달았네요.

보하고 댐의 차이를 아세요?

댐은 보에 비해 대규모로 만들어지는 구조물입니다.

물을 저장하여 가뭄에 저장해둔 물을 이용할 수 있도록 우선 물이 넘치지 않아야 하며,

댐에 작용하는 수압을 견딜 수 있도록 규모가 커야하고,

홍수 등에 대비해서 사전에 물을 배출할 수 있는 수문 등의 시설을 갖추어야 합니다.

 

전형적인 보의 모습입니다.

 

  

 

 

청밀밭을 질러갑니다.

표준어로는 호밀이라고 합니다.

이 아이는 추위에 엄청 강합니다.

그래서 기후와 토양이 다른 작물을 재배하기에는 상대적으로 부적합한 곳,

겨울밀을 재배하기에는 기온이 너무 낮은 곳인 북부지역에서 겨울 작물로 주로 재배됩니다.

빵을 만드는데 쓰이지만 호밀만 쓰면 빵이 뻑뻑해 밀과 섞어서 쓴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빵 만드는 호밀은 재배하지 않고 사료보조용이나 녹비용으로 사용하는 것만 재배합니다.

그래서 경사지 밭에 심은 호밀은 토양유실을 예방해주기도 하고

이제 무언가를 심기직전에 호밀이 심겨져 있는 상태로 함께 밭을 갈아주면

퇴비처럼 농작물에 영양을 공급하지요.

 

일부는 베어내서 소사료로 씁니다.

소도 요새 사료를 먹이지만 그 특성상 되새김질을 할 수 있도록 무언가 씹을 것을 주어야 하지요.

걸으면서 느끼셨겠지만 경기이남지방에는 물이 흐르면 그 옆으로 논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논을 한곳도 보지 못하셨을 겁니다.

못본게 아니고 없습니다.

그러니 소들한테 줄 볏짚이 나오질 않아요.

사와야지요.

그래서 4월까지는 볏짚을 보조 사료로 소에게 먹이고 호밀을 베어낸 다음에는 베어낸 호밀을 소에게 줍니다.

잘 먹어요. 아니 잘 씹어요.

 

우리는 지금 호밀밭을 걸어가면서 알게 모르게 참 착한 일을 하는 겁니다.

호밀도 보리처럼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이 녹아 들떠있는 이른 봄에는 그루터기를 밟아주어야 뿌리가 잘 내리거든요.

그런데 요새 촌에 사람이 없으니 누가 호밀 밟기를 합니까?

우리니까 해주는 것이지요.

 

4월 달의 호밀밭 사진 한 장 올립니다.

 

문득 '호밀밭의 파수꾼'이라는 소설이 생각납니다.

언뜻 읽으면 꽤 난잡한 책입니다.

어느 고등학생이 기숙학교에서 퇴학당해 집으로 돌아오는 3일간의 이야기인데…….

이 아이는 학교에서 나와 집으로 가기 전에 술집을 전전하기도 하고

창녀를 만나기도 하면서 길거리를 방황합니다.

여기서 어른 세계의 부조리에 혐오를 느끼게 되지요.

그는 어른들의 세계는 위선으로 가득찬 반면

어린이의 세계는 천진난만하고 정직하며 호기심으로 가득찬 세계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유년시절은 아이들이 즐겁게 뛰노는 호밀밭과 같으며

반면에 어른들의 세계는 절벽에서 추락하는 죽음과 동일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요.

하여간 이런 저런 방황 끝에 스스로를 현실세계에서 소외시키면서 집에 돌아옵니다.

그런데 집에서 어린 여동생 피비에게서 그가 원하는 아름다움을 발견한 후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오게 되지요.

그 후 그가 원하는 일이란 단 한 가지

넓은 호밀밭에서 뛰놀고 있는 어린이들이 낭떠러지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해 주는 파수꾼의 역할입니다.

 

이 책은 논쟁도 많고 비난도 많고 찬사도 많으니 한 번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기도 합니다.

1980년 12월 8일 존 레논이 다섯 발의 총알에 맞아 병원에 실려 간 후 결국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존 레논을 쏜 채프먼이라는 사람은 도망가지 않고

경찰이 그를 잡으러 올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책이 호밀밭의 파수꾼입니다.

 

좌우로 폐가가 보입니다. 

 

 

아주 간단히 농촌인구 감소 때문이라고 하지요.

그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경제적 여건에 있습니다.

저임금과 연동된 저곡가 정책으로 농촌의 산업 기반자체가 취약합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농민의 자녀들이 농업을 가업으로 잇고 있지 않습니다.

즉 자녀들은 공부해서 출세하라고 보다 교육조건이 좋은 대처로 보냈습니다.

그렇게 나간 이들이 공부를 마치고 도시인근에서 일자리를 잡고 있으니 마을에 그 아들의 아들이 없습니다.

있는 학교의 학생이 줄고 분교가 되거나 멀리 있는 학교와 통폐합됩니다.

그러니 남아있던 젊은 부모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 다시 대처로 나갑니다.

결국 나이 많은 분들이 많아집니다.

연식에 따라 참 몸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실 겁니다만 하여간 나이에 비례해서 아픈 곳도 많습니다.

그런데 의료시설은 열악합니다.

실제 군 단위 이하 지역에서는 응급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환자를 이송하거나 응급처치 할 수 있는 병원이 거의 없습니다.

호흡곤란 등 위급한 경우에 닥쳐도 손쓸 도리가 없어 숨을 거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간혹 농촌마을에 이주자가 들어옵니다.

간간히 신문이나 방송에 이주성공사례가 발표됩니다.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이주자의 정착이 어렵다는 겁니다.

원주민이 텃세를 부리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동안의 생활의 습속에서 생기는 이질감이 그리 쉽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영농에도 서툽니다.

그렇다고 마을사람들도 자기 일에 바쁘니 도와줄 여력이 없습니다.

설령 도와준다해도 이주자들은 그것을 참견으로 받아들입니다.

결국 정착에 실패하고 더 비참한 처지가 되어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주우려고 도시근교로 다시 흘러들어갑니다.

또다시 빈집이 생기고 폐가가 됩니다.

그럼 폐가는 왜 방치해 둘까요?

방치된 폐가를 보시면 거의가 스레이트지붕입니다.

그래서 땅주인이 철거하려해도 철거비용이 몇 배 이상 들어갑니다.

창고로라도 쓰겠다고 그냥 놔둡니다.

그리고 타지로 떠난 사람들의 집은 주인의 소재 파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연락이 되더라도 놔두세요하면 재산권문제 등으로 손을 대지 못합니다.

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땅은 계속 개간되고 있습니다.

 

땅심이 약해져서 소출이 예전만 못하니 주민들이 기존 밭주변을 확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곳에서 땅을 부치지만 생활의 근거지는 도시 또는 그 근교로 옮긴 사람도 많습니다.

농지를 경작하는 사람들이 출퇴근을 한다는 소리지요.

그곳에서 아침이면 차타고 와서 농사짓고 저녁이면 퇴근하는 겁니다.

그래서 농촌지역에 투자되는 돈들이 농촌 그 자체를 보존하고 보다 생산성 있는 영농이 가능하게 하는데 들어가는 것보다

도로포장, 다리놓기, 커다란 건물짓기 등 세멘트값에 퍼부어집니다.

 

그런데 왔다 갔다 기름값 등 경비에 추가하여

이 밭에서 농사하여 벌어들인 돈은 자기가 사는 곳 주변에서 생활비로 나갑니다.

결국 이 지역에는 남는 게 없는 것이지요.

하여간 그것도 효과는 없지 않아 최근 도시 근교에서는 인구가 조금씩 늘기도 합니다.

대한민국 전체로 보면 쌤쌤인가요?

 

산과 들을 보며 강을 따라가며 자연을 느껴야 하는데 자꾸 생각이 어긋납니다.

이것이 우리 강산의 현실이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만…….

우리 땅 이기 때문일 겁니다.

 

오늘은 우선 아름다운 것만 보기로 하죠.

그래서

그 아름다움에 빠져 사랑을 느끼세요.

사랑을 느끼게 된다면 잘못되어가는 모든 것이 측은하게 느껴질 겁니다.

측은함을 느끼고 그 상황을 함께 고민하게 될 때까지는 일부러라도 아름다운 것만 보세요.

그 아름다움에서 감동을 느끼세요.

그것이 비록 착각일지라도…….

 

세상은 실제로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아름다워질 것이라는 착각 때문에 아름다워진다고 하니까요.

 

도종환의 시 중얼거리며 강물을 따라 나도 흘러갑니다.

 

'누구나 처음에는 맑은 마음으로

산골짝을 나서는 여린 물줄기였지

세월이 흐르고 먼 길을 가다보면

흐린 물줄기 때 묻은 것들과 뒤엉켜 흐르게 되지

그러다 그만 거기 멈춰버린 물들은

그 얼마나 많은가

길을 잃고 방황하는 물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멀리 가는 물 있으니

흐린 물줄기를 만나도 때 묻은 물줄기와 뒤엉켜도

다시 맑아지며

멀리 가는 물 있으니

보아라 보아라 저기 멀리 가는 물을.....'

 

징검다리 

추억이기에 아름다운 징검다리

넘어가 보려 했는데…….

넘어 다니는 이 없으니 징그던 디딤돌 하나가 없어졌는데도 보수가 않되어 있습니다.

둘레를 두리번 거려봤지만 마땅한 돌을 찾지 못합니다.

 

시한수 더 읊고 지나갑니다.

 

'징검다리 아래 물처럼

세월은 태연하게 지나가는데

시간을 부정한 채 지난날만 되돌아보는 아쉬움 ..

산을 옮기고 강을 막지는 못하지만

하늘의 별을 보고 가슴 여는

아름다운 감정으로 살았으면 좋겠다.'

'송년의 시' 윤보영입니다.

 

새삼스러운 사실을 알았습니다. 

 

장승부부는 엉덩이가 민짜입니다.

 그래서 가까이 오지 말라고 그렇게 눈을 부라렸구나.

 

 

다시 멀리 가는 물을 따라 다리로 다가갑니다.

 

 

다리 앞을 지나 또 다른 호밀밭을 밟아 줍니다. 

 

집주인은 부재중입니다... 만.

 문에 자물쇠를 하지 않고 폐농기구함을 기대어 열리지 않게 하였습니다.

돌아오겠다는 표시겠지요.

 

벌통

마을에 양봉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봄이 되면 싱싱한 꿀벌들을 채워넣겠다는데…….

이 통에 들어오실 벌님들이시여 만수무강하소서…….

그리고 많이 채밀하여 웃음꽃 주소서…….

벌들은 꽃이 핀 나무를 찾아가 꿀을 따오고 나무들은 벌의 꽃가루받이 덕에 열매를 맺습니다.

그로 인해 인간이 나무의 열매를 먹고 꿀을 먹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바로 '너살고, 나살고'를 넘어선 '네가 살아야 나도 산다.'는 상생을 가르치는 훌륭한 스승이니

벌님이시여 하고 공손히 불러드려야지요.

 

상촌마을 서낭당이 보입니다.

 그냥 지나가겠습니다.

서낭당 오른쪽 위 벌통을 보며 벌님이시여하고 한 번 더 불러 봅니다.

 

뒷산이 보이시나요.

그 뒷산너머가 백두대간 종주길에 해당되는 해발 960m 구부시령이라는 곳인데…….

저기를 가려면 여기서 조금 더 가서 오른쪽 길따라 외나무골로 들어가

 주욱 산으로 올라가면 됩니다만 오늘 가자는 것은 아니고…….

전설이 재미있습니다.

한문으로 九夫侍嶺이라고 쓰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그 고개마루에 한꺼번에 아홉 남편을 섬긴 아낙네가 살았다고 합니다.

아홉명이면 각각의 남편에게 순번제 일일 동침권을 주었을까요?

아니면 또뽑기를 하였을까요.

임금님이 후궁처소에 드는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자존심 상한 남정네들이 전설을 바꾸었습니다.

만나면 죽고 만나면 죽고 해서 아홉 남편을 모셨다는데서 그 고개이름이 유래되었다고요.

옹녀인가?

여인의 처지가 극과 극으로 바뀌네요.

그래서 또 만들어진 이야기

아홉 구비가 있는 고개라는 뜻으로 구부시령 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가리골 가는 길 

 가리골로 들어가면 오던 방향 되짚어서 서창 앞에 있다해서 앞산이라고 하는 면산,

면산은 가뭄과 한해 등으로 굶어 죽을 지경에 빠졌을 때

서창의 식량을 내주어 주변 사람이 기근을 면했다하여 면산입니다.

그 면산을 지나고 서창 뒤에 있다해서 뒷산이라는 노봉산을 거치고 가덕산으로 내려가

우리가 지나온 미동초등학교로 갈 수가 있습니다.

돌아갈 일 없으니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닌데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꽤 험한 산인데도 계절이 맞으면 산채 따는 여자분 들을 간간히 볼 수 있습니다.

당연히 주변에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하다가 느닷없이 맞닥뜨리니

그쪽도 놀라고 나도 놀라고 그러다 상대가 소리라도 지르면 당황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뭘 어떡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왜 소리를 지르나.

남자라는 죄하나로 도망치듯 산길을 올라갑니다.

 

그 옆 옛 하사미분교를 봅니다.

 미동초등학교의 분교로 있다가 '09년 폐교되어 지금은 생명의 강 학교라는 대안학교로 운영 중입니다.

이걸 대안학교라 해야 하나 아니면 종교단체의 영성수련원이라고 해야 하나 조금 헷갈립니다만…….

일단 대안학교라 하지요.

이 학교는 통일 세대를 위한 기독교 지도자 육성을 표방하여 예수원에서 몇 년 전 세운 학교입니다.

처음에는 학생 수 9명, 교사 3명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학생수가 15명쯤 된다고 하던데

고등학생 또래가 다니는 대안학교치고는 그 목표가 너무 거창한 듯싶습니다.

 

학교정문 전면에 있는 하사미1리 표지석

 왼쪽 뒤로 보이는 다리를 넘어 왼쪽으로 가세요.

또 다른 다리 앞을 지나면서 그 다리를 건넌 사람으로서는 주욱 가는 길로 산으로 올라가면 구부시령이 나옵니다.

그냥 다리 앞을 지나 주욱 가시면 예수원으로 갈 수 있습니다.

 

예전 하사미분교가 있었을 때 문방구를 하던 곳입니다.

 추억의 군것질거리들, 아폴로, 쫀득이, 맥주사탕 같은 것도 팔았겠지요.

남자도 나쁜 남자가 더 매력적이듯이 식품도 불량식품이 더 맛있어보여요.

 

아까 그 다리.

이름이 외나무골교

 

아까 그 다리.

이름이 외나무골교

이 다리가 놓였던 자리에 예전에는 제가 이미지컷으로 올린 아래 사진과 비슷했을 외나무다리가 있었답니다.

 

그래서 외나무다리건너는 외나무골

이제 멋진 다리 하나 새로 놓고 외나무골교

나이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지 최무룡이 부른 외나무다리라는 노래가 생각납니다.

같은 제목으로 만들어 아주 히트를 친 영화도 있었다는데

강보에 쌓여 영화보진 않았을 테니 기억에 없습니다.

 

'복사꽃 능금꽃이 피는 내 고향

만나면 즐거웁던 외나무다리

그리운 내 사랑아 지금은 어데

새파란 가슴속에 간직한 꿈을

못 잊을 세월 속에 날려 보내리

 

어여쁜 눈썹달이 뜨는 내 고향

둘이서 속삭이던 외나무다리

헤어진 그 날 밤아 추억은 어데

싸늘한 별빛 속에 숨은 그 님을

괴로운 세월 속에 어이 잊으리.'

 

이 노래는 작사가가 영덕을 찾았다가 주민들의 애환과 정서를 느껴 만든 노래라고 하는데

영덕 어디에 있던 외나무다리인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 흔적조차도 없는데 영덕에서는 2010년 가을인가에 삼각주공원이라는 곳에 덜렁 노래비를 만들었지요.

그리고 어딘가에 외나무다리를 만든다고 했는데 만들었는지 여부는 들은바 없습니다.

 

영주 무섬마을에 한번 가보세요.

참 멋있는 외나무다리가 있고 그 다리를 건너서 만나는 마을에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원을 보여드려야 되는데 그곳까지 갈수는 없고

당긴다고 당겼는데 계곡사이에 건물 한구텅이가 보입니다.

 

친절을 베풀어서 옛 사진 한 장 더 올립니다. 

왜?

예수원에 대해서는 조금 더 아시면 좋을듯해서입니다.

대천덕신부님에 대해서는 한번쯤 다 들어 보셨을 겁니다.

성공회신부님이라고들 알고 계신데 지금의 성공회대학교인 聖미가엘 신학원 학장을 하셔서 그리 알고 계실 겁니다만

초교파 복음교회에 속하신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겁니다.

 

원 이름은 Reuben Archer Torrey 입니다.

선교사의 아들로 1918년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과 한국에서 성장기를 보냈으며

1935년 미국으로 돌아가서는 남침례신학교와 프린스턴신학교를 다니는 성령 세례를 믿는 신학생으로

철공과 선박원이 되어 노동 운동을 했습니다.

1946년 사제서품을 받은 후 미국에서 목회활동을 하다

1957년에 한국으로 와 성공회 미가엘신학원 원장으로 부임하여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신학원 재건립에 앞장섭니다.

1960년 학교가 안정되자 신학원장 자리를 내어놓고

흙과 하나님을 섬기며 정직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뜻을 같이한

형제 4명, 자매 4명과, 그들의 자녀 등 총 12명과 함께

하늘 가까운 그래서 하느님과 가까운 태백의 산골짜기를 찾아와 공동체 생활시설인 예수원을 설립하여

성경적인 토지 제도의 회복을 외치며

노동이 기도요 기도가 노동이라는 신념하에

'내일 주님이 다시 오실 것처럼 살고, 천년 후에 주님이 오실 것처럼 일' 하시던...

대한민국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려 무지 노력하신 사회개혁가이십니다.

2002년 돌아가셨고 지금은 그의 아들 대영복(벤 토리)이 예수원을 이끌어 나갑니다.

 

세상모든 것에 좌절하셨을 때 이곳 예수원에 가보세요.

숙식비도 받지 않고 그저 기도와 노동으로 자기 자신을 정화시키면 됩니다.

노동도 자기 수준에 맞는 것을 택할 수 있으며 그나마 싫으시면 않하셔도 됩니다.

단 하루 세 번 기도에는 참가하셔야 됩니다.

무언가 새로운 희망을 얻으셨다면 문을 나설 때 작은 성금을 기탁하셔도 되고요.

내 노동이 값어치 있었다 생각하시면 조용히 문 닫고 나오시면 됩니다.

 

나, 가보았냐고요?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백두대간 피재에서 댓재로 가던 길,

일행중 한명이 너무 힘들어 해서 덕항산에서 예수원으로 내려와 무사마을에서 차타고 돌아온 적은 있습니다만

그 안에 들어가 피정해 본적은 없습니다.

나는 인생에 그리 큰 기대가 없으니 크게 좌절할 일도 없습니다만

인생의 큰 기대를 걸고 살던 지인이

무언가에 좌절하고 괴로워 하다가 한 사흘 다녀오더니 그렇게 말하더군요. 

 

대천덕 신부님의 기도문 중 일부입니다.

 

'아픔을 주는 사람과 함께 아파하고

회개하지 않는 영혼을 위하여 회개하고

다른 이들의 죄와 강퍅한 마음의 어려움을 함께 져주고

그들을 비판하는 마음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죄를 생각할 때 슬퍼하는 마음을 주시고

당신을 생각할 때는 기쁨과 평안이 가득하게 하소서!

 

좌절하거나, 무거운 짐을 질 때, 배반당할 때,

다른 사람의 반대를 받을 때, 오래 참으며 견디게 하소서!'

 

 

 

둘레둘레 고개를 돌리며 걸어오다 무사마을로 들어가는 무사교를 만납니다. 

 

옛날에 무사가 살았다고 하네요.

무사가 왜 여기살았었을까요?

그런데 우리 옛 말에 지금 개념의 무사라는 말은 없습니다.

고구려 신라 백제 삼국시대를 이야기 할 때 고구려의 개마무사라는 말이 나옵니다.

鎧馬, 갑옷을 입힌 말에 탄 武士, 무장한 병사, 기병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통일신라이후로는 무사라는 말과 개념이 없었습니다.

무사가 아니고 무인, 병정 이런 식으로 쓰인 것이지요.

지금 우리가 듣고 있고 알고 있는 무사는 중국의 검객을 오해하거나 일본식 개념입니다.

무사는 일본 나라시대 말기 당시 천황의 권위가 추락하자

귀족세력인 영주들이 그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부하들을 무장시키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노비와 같은 신분이었는데

이후 영주들의 권력 투쟁이 계속되고 격렬해지자 이들의 신분도 점차 상승하여

주요한 사회 집단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때에는 이들이 일본 사회의 중요한 통치계층이 되어

법령으로 무사의 신분을 士農工商의 우두머리로 하였습니다.

맨 위에는 우두머리인 영주가 있고, 그 밑에는 무사,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그 아래 있습니다.

게다가 일본은 중국, 일본과 달리 무슨 과거시험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영주 밑에서 충성을 다하는 무사가 되어 그 영주가 발탁하면 관리가 되는 것입니다.

영주는 무사가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게 되면, 그의 가족들에게 무사 계급을 세습시키고 돌봐 줍니다.

그러니 이 종복문화가 일본인의 심성속에 꽉 들어차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은 심성도 착하고 부드럽지만 조직의 논리에서 한발도 비켜나지 않는 것이,

비켜 날 수도 없는 것이 바로 일본인입니다.

자꾸 글이 옆으로 새려고 하는데 여기서 멈추고…….

 

여기 무사마을은 무쇠골의 변음입니다.

예전에 골짜기 안에서 무쇠를 만드는 철석(鐵石)을 캐내었던 관계로 무쇠골이라 하였습니다.

무쇠골이 변해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무사골武士谷이 된 것이지요.

무쇠골에서 캔 쇳돌은 가리골 어귀의 학교 부근 점터로 옮겨와 점부리를 해서 무쇠로 만들었습니다.

 

다리 지나 왼편에 하사미 풋고추 마을이라는 입간판이 있었지요.

지나오신 그리고 지나갈 길가에 관수시설이 포함된 천장개폐식 비가림하우스는 전부 풋고추를 재배하던 곳입니다.

최근 몇 년간 태백시에서는 이 지역일대 대체작물로 풋고추를 선정해서

육묘관리와 농자재 등 꽤 많은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듬벙돌탑

 

그리고 배고픈 다리 

 

이쪽이 온전하여 건널 수 있나 하고 봤더니 건너편은 꺼져 있습니다. 

 배고픈 정도를 넘어선 거지요.

예전 어릴 때 하천을 넘는 배고픈 다리가 꽤 많았지요.

그때는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했는데 물을 필요이상으로 가두지 않으려는 옛사람들의 뜻이었습니다만

고무신신을 때는 발이 젖어도 큰 상관없었지만

운동화와 구두를 신으면서 물이 넘칠 때는 무용지물인 다리가 되었지요.

 

그렇게 없어지다 보니 이름도 없어졌고요

한문을 쓰면 유식하다고 하는 풍조로 인해 기록에는 세월교, 그리고 잠수교로만 남아있어요.

 

김계인 시 '배고픈 다리"입니다.

 

'...배고픈 다리건너 보리밥집에

푸짐한 산나물 싱싱한 겉절이

보리밥 한그릇 뚝딱 먹고

막걸리 한 사발 주욱 들이켠다

배부른 아우성에 신바람 났건만

배고픈 다리는 영원히 영원히 배가 고파야 하는가...'

 

엄청 뜸하게 다니는 노선버스가 다가옵니다.

텅텅 비어있는 내부를 보자 갑자기 손을 번쩍 들고 싶은 충동이 나네요.

그런데 역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서 어쩌려고요.

아마도 여느 때처럼 혼자, 또는 몇몇이 가는 길이었다면

저 버스를 타고 종착점까지 갔다가 부근 어딘가로 발길을 옮기었을 겁니다.

한손으로 다른 쪽 손을 꾸욱 누릅니다.

 

귀네미마을입구입니다. 

 

인간사 새옹지마.

광동마을, 숙암마을 그리고 조탄마을 사이 계곡으로 댐이 들어섭니다.

광동 윗마을사람들과 숙암 아랫마을 사람들은 살던 터를 내어놓아야 하고

조탄마을사람들은 밭 갈아먹던 들을 내놓아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짐을 쌉니다.

그런데 갈 곳이 없습니다.

행정에서 하늘아래 귀네미,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로 가는 소귀 닮은 구불구불한 고갯길 넘어가는 귀네미로 간다면 집단이주를 시켜주겠답니다.

그것만이라도 감지덕지해 하며 37가구가 들어갑니다.

그들은 나무를 베어내고 산을 개간해 이것저것을 심어 봅니다.

그러나 소출이 별로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실의에 빠진 가구들이 하나 둘 마을을 떠납니다.

28가구가 남았습니다.

 

매봉산처럼 배추를 가꾸기 시작합니다.

피눈물 흘리며 맨손으로 일군 배추밭에서 드디어 보람을 얻습니다.

정감록에 무릉도원 우이牛耳마을이라 하여 이 귀네미마을이 나오는데

과거 조선조 말엽부터 이상향을 찾던 사람들이 이주하여 살다가 책을 원망하며 떠나가곤 하였는데

정감록이 허황된 책이 아니었던가 봅니다.

지금은 강릉 안반데기, 태백 매봉산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고냉지 배추밭으로 꼽힙니다.

 

안반데기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매봉산 배추밭에는 사람이 살지 않지요.

강릉이나 태백에 거주합니다.

그래서 배추 파종기와 수확기에 삼수령에서 매봉산 배추밭길까지에는 병목현상이 생겨날 정도입니다.

여기 귀네미마을은 아직까지는 배추밭 아랫부분 마을에 거주 합니다만

아마도 이곳도 머지않아 출퇴근 식으로 바뀔 것입니다.

 

해돋이가 그렇게 아름답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박이일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누구 한명이 이곳에서 해돋이 하는 것이 한번 방송을 탔다고 해서

최근에는 관광객들이 제법 오고 있답니다.

당연히 나도 쭐레쭐레 누군가 궁뎅이 따라 가 봤습니다.

 

해 뜨는 시간은 아니었고 오후 한때의 귀네미마을과 배추밭입니다. 

 사진 찍은 지점에서 뒤로 돌면 당연히 대이리로 갈수 있고

국내최대규모라는 풍력단지를 보며 덕항산으로 갈수도 있고

환선굴, 대금굴, 관음굴로 갈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귀네미마을 입구만을 지나칩니다.

 

멀리 조탄마을과 그 넘어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 보입니다.

하, 저 길은 산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하늘로 가는 길같다하고 고개를 돌리는데...

 

어, 길옆으로 꽃밭이 있습니다. 

 

복수초

 수복강령의 복수초

이른 봄에 노랗게 피어나는 꽃이 기쁨을 준다고 해서 복수초라고 합니다.

이 아이들은 아직 추운 계절에 피어나기 때문에 곤충들이 추워서 잘 안올까봐

꽃이 해를 쫓아 움직이면서 해와 직각이 되게 합니다.

그렇게 태양빛을 받아 안쪽을 따뜻하게 함으로서

변온동물인 곤충들이 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날아와 쉬면서 자연스럽게 수분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거지요.

 

미안합니다.

누군가에게 인지는 모르지만 사과드리겠습니다.

걸어오면서 어쩌면 황량한 풍경에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을 중얼거렸습니다.

이 말은 호나라땅에는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같지 않다라는 이야기이지요.

당나라 동방규가 흉노족 오랑캐들에게 보내진 한나라 원제의 후궁 왕소군의 처지를 노래한 시의 한 구절입니다.

 

봄인데…….

걸어오면서 꽃 한 송이를 못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는데 이렇게 복수초를 보여주시네요.

감사합니다.

 

다리를 건너려는데 앞쪽 산기슭을 파고 있습니다. 

무슨 공사를 하는 것일까요?

 

흉측하게 깎여져 나가는 모습에 고개를 뒤로 돌립니다.

하지만

사람 사는 곳에 개발이 없을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합니다만...

꼭 필요한 시설 그리고 꼭 필요한 만큼의 개발이길 바랍니다.

 

 

이렇게 필요한 만큼만……. 필요한 정도로…….

 

조탄마을이 보입니다. 

 

마을앞으로 물이 흐르는데 그 물로 인해 슬픈 마을입니다.

 

물건너 너른 들도 한때는 슬픔이자 기쁨이었으나

지금은 하천구역으로 지정되어 바라 보기만 할 뿐입니다. 

 

장승과 솟대를 만납니다. 

 

 

솟대 수만큼 한도 많고 솟대 수만큼 바램도 많은 마을입니다.

 

  

 

 

장승과 솟대

그리고 흐르는 물과 그 너머 뜰과 산을  찍고 또 찍습니다. 

  

  

 

 

한때는 제법 큰 들을 가지고 있던 마을인데 경작을 하던 마을 아래쪽 들판이 다 댐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남아있는 천변지역은 때때로 물이 넘치니 무언가를 심을 수도 없습니다.

게다가 천변은 개발행위가 제한되어 임의로 어떤 시설을 할 수가 없습니다

 

조탄租呑이라는 이름을 이해하려면 정전법井田法부터 알아야 합니다.

고려시대의 토지법규중 하나로,

토지를 우물정자식으로 9등분해 8곳은 주민이 각기 나눠 경작하고 1곳은 주민들이 공동경작하도록 하여

그 공동경작지에서 나온 작물을 세금으로 납부하였습니다.

 그런데 공동경작지 옆을 흐르는 물이 평소에는 건천이었다가 장마철에는 물이 넘쳐

세금낼 곡식을 삼켜버렸다하여 마을이름이 조탄租呑이었는데

이제는 아예 광동댐이 그 들의 반 이상을 삼켜버렸습니다.

지금은 마을이름을 租呑에서 助誕으로 바꾸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휴식을 마치고 출발하는데 나는 마을 안으로 들어갑니다.

 

 

 

도릉정이라는 정자가 있습니다. 

오래전 이 마을에 있었다는 도릉사란 절과 관련이 있는 이름이지요.

지금은 폐교된 이곳에 있던 학교이름도 도릉분교이었습니다.

절 옆에 삼층석탑이 있었다는데 실체는 아는 사람이 없고

이마을 어느 집안에 과거부터 전해 내려온 '도릉장'이란 칠언절구 시 형식의 글에 나와 있다고 합니다.

 

폐가 뒤로 전나무가 보입니다. 

500년 가까이 된, 기록으로는 470년 된  이 나무를 보려고 마을 안을 들어왔습니다.

 

옆으로 돌아 폐쇄된 교회 앞을 지납니다.

무슨 마음으로 당산목 앞에 교회를 지었을까요?

오만인지, 오기인지, 결국 마을사람에게 배척당해 문을 닫았습니다.

 

전나무보다 먼저 당집이 보입니다.

절이 있던 마을이라서인지 이 당은 중서낭이라하고

삼월 삼짇날 제를 올리는데 제를 올릴 때 육고기를 전혀 쓰지 않습니다.

 

그 옆으로 서있는 전나무

 

높이가 40m가 넘어 사진기에 한번에 들어오질 않습니다.

 

더 이상 뒤로 갈 곳이 없어 아랫부분을 당집과 함께 찍고 내려옵니다. 

 

당집 주변에서 평안히 살고 있는 집

 겨울이 다 지났는데도 땔감이 한가득 남아있습니다.

 

오래된 기와.

 

'도릉장'이라는 칠언절구가 물려 내려온다는 그 오래된 집안인가 봅니다.

마을회관 부근에서 이 짐에 대해 어른들에게 몇 마디 여쭙는데 고기구워먹고 가라고 자꾸 발길을 잡습니다.

먹고 싶은 생각 꿀떡같은데 일행하고 꽤 떨어졌을 겁니다.

 

물뜰 농장공원이라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井田이라는 한자를 우리말로 우물 뜰이라고 했습니다.

쓰여있기를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광동댐이 인근에 있음에도 그 물을 쓸 수 없어 물이 귀한 마을주민들이

선조들의 아픈 기억을 기리면서 살기 좋은 마을로 거듭나자하고 마을이름을 바꾸고 농장공원으로 조성'했답니다.

쉬어가라고 쓰여있는데 쉴 시간이 없네요.

 

지구렁이고개길로 올라갑니다. 

지구렁이를 넘어갈까하다가 ....

 

 옆 숲길로 들어갑니다. 

 본대를 따라 가려면 이 길로 가면 않됩니다.

지구렁이재를 넘어가야지요.

 

다음지도 하나 캡처해서 설명합니다

 

지구렁이는 40년 전까지도 동해·삼척 주민들이 댓재를 넘어와 숙암리를 거쳐 정선을 가고 오던 길목이었습니다.

예전에 광동댐이 생기기전에 이 지구렁이재를 건너 물을 오른쪽으로 끼고 광동리로 넘어 다녔고

숙댕이라고도 하는 숙암리 사람들은 지금 지도에 광동호라고 적혀진 위 오른쪽 35번 국도표시옆에서

댐 건너 아래쪽 산기슭에 보이는 길로 넘어 다녔습니다.

그래서 60년대까지 오가는 이들로 메워지던 주막집이 있던 번창한 마을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서너 가구정도 남아 텃밭에서 배추·곰취를 재배하며 살아갑니다.

 

지도에서 보는 지각산.

뿔이 솟아있다하여 지각산인데 일대의 사람은 찌걱산이라 합니다.

찌걱산은 암산이고 물 건너에서 길다랗게 암산을 파고든 고갯등이 숫산이랍니다.

댐으로 길이 없어지기전에는,

그래서 새 길이 뚫리기 전에 숙암리로 가려면 찌걱산 쪽으로 걸어 다녔는데,

젊건 늙건 남자·여자가 함께 갔다 하면 반드시 사단이 났답니다.

그러다 조탄과 광동을 잇는 새 길이 뚫리면서

숫산인 고갯등 뿌리부분이 잘린 후에는 주변 마을에서 바람나는 일이 사라졌다고 하네요.

찌걱산 정상은 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급경사이고 수직 동굴이 산재해 있어 꽤나 위험합니다.

 

나는 어디로 갔느냐고요?

지구렁이재로 가기직전 옛길을 따라 내려갑니다.

 

 

그렇게 물을 만나...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보를 이용 물을 넘어

 

 

 

 

 

 

 

 

 

숫산이 구부러진 지역까지 갔습니다.

 

그곳에서 지꺽산으로 달려가는 고갯등을 바라보다

 

다시 돌아 나갑니다.

 

 

 

국도를 이용, 댓재에서 부터 흘러 오른쪽으로 유입되는 온 번천을 넘어 왔지요.

 

그리고 숙암리 고분군을 가보려 했는데…….

속으로만 생각하고 그냥 지나쳐 왔습니다.

 

숙암리고분군은 길에서 한 1km정도뿐이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광동댐 북쪽 야산 구릉 중턱에 한 4~50기의 무덤이 있는데 봉토의 대부분은 원상태를 잃고 있으며,

유구遺構는 도굴당하여 내부가 노출된 것이 많습니다.

뭐라 뭐라 설명하면서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는데

보아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가볼까하다가

그때 전문가해설에도 몰랐는데 지금 혼자 보면 더 모를 것이다.

그러니까 시간 허비하지 말고 가자.

 

에이, 지구랭이 넘어가며 옛날 금방아가 어디 있었을까나 살펴볼 걸…….

지구랭이에는 예전에 금방아가 있었답니다.

금으로 만든 방아가 아니고 금을 빻는 방아를 말합니다.

숙댕이에서 캔 광석을 이곳으로 옮겨와 물레방아로 빻은 뒤

물속에 수은을 넣어 금가루를 빨아들이게 하는 방식으로 금을 채취했다고 하는데

그 금방아 중 일부는 60년대까지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다른 생각에 빠져 걸어가다가 ...

 

수문을 지나칠뻔 했습니다.

 

빠꾸

 

빠꾸...

광동댐 표지석을 보고

 

또 빠꾸...

팔각정 2층 전망대로 올라갑니다.

그렇게 올라온 전망대치고는 전망이 없습니다.

 

광동댐 전망대인데 물이 않보이고 찌걱대는 찌걱산 봉우리만 보이네요.

 

하장고추와 배를 소개하는 커다란 안내판 밑으로 하장면 광동리로 가는 방향표시가 있습니다.

누구를 골탕 먹이려는 건지, 무관심한 건지,

댐 방향으로 화살표가 그려져 있습니다.

 

저 철문을 열고 들어가 물위를 걸어 건너편 댐위로 가라는 표시가 아니라면

옛길에 세워진 표시를 그대로 쓴 것입니다.

 

방향표시판을 다시 봅니다.

 

수문을 지나

 

큰길을 따라가지 않고 좌회전합니다.

 

수문앞을 지나며 수문과 댐을 바라보고 제법 크구나하고 생각을 합니다.

길을 따라 오며 위에서 보다 보니 그리 큰 댐 인것을 몰랐는데 아래에서 위로 보니 제법 큰 댐입니다.

 

1988년 준공되었고 용수대비 유효용량 800만 톤까지의 물을 저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댐에서 2009년 초에 물부족현상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서울시민들에게 공급되어야 하는 물이 위에서 부터 말랐다고

4대강 사업의 필요성이 더 강조되었지요.

 

한쪽에서는 '속초, 강릉, 동해, 횡성의 댐들은 여유가 있는데 유독 광동댐에만 물이 마른것이 좀 석연치 않다.

미리미리 물을 가두어 갈수기 물 부족에 대비해야 하는데

그냥 물을 다 흘려버려놓고 지금 물 부족을 이야기 하는 것은 무슨 저의가 있다'고 합니다.

 

하여간 물이 부족하니 댐 밑바닥 얼음을 깨어 사수를 채취한다. 어쩐다. 요란을 떠는데

다행히 취수제한선에 도달하기전 큰비가 내려 상황은 해결되었습니다.

급한 상황은 넘겼지만 논쟁은 계속됩니다.

 

당시 한강 수자원연구소장이던 1985년 설계책임자가 강원포럼에 글을 발표합니다.

제목은 '광동댐 물 부족 이해 안된다'입니다.

글의 요지는 '태백에 인구가 12만 명일 때 설계한 것이기 때문에

일대에 하루 7만 톤을 안전하게 공급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그런데 지금은 태백시 인구 5만 명뿐이 않되기 때문에

일대에 하루 필요량이 5만2,000톤에 불과하여

과잉설계를 했다는 비난을 받을까 우려했다.

그런데 물이 부족하다니 이해가 안 된다.

그리고 식수 전용댐은 홍수로 인해 넘치는 량 즉, 홍수기 제한수위로서

유효용량 800만 톤이 확보되는 해발 672m 수위의 만수위를 초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오직 필요량만을 위해 물을 소비토록 되어 있다.

설사 홍수기에 만수를 채웠더라도 이후에는 넘치는 양만 방류해야지 그 이상 물을 버려서는 안 된다.

그런데 2008년 7월25일 이후부터 물을 계속 방류해

저수지를 절반도 않되는 668m도 안 되게 비운 이유를 모르겠다.' 고 했습니다.

즉 댐의 본연의 기능인 가뭄을 대비한 물 보유를 전혀 않했다는 것이지요.

 

그는 이어쓰기를 '환경부의 목표 누수율은 12∼15%이고 현재 전국 평균 누수율은 13%이다.

그런데 태백은 46%로서 100을 공급하면 46을 버리다니

돈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해당기관의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현재 5.2만 톤을 공급하면 2.4만 톤은 땅속에 버리는 셈이니,

전국 평균 정도로만 누수를 차단할 경우 4만 톤만 공급하면 충분하다.

관로교체를 통한 누수 차단은 언젠가는 반드시 시행해야 할 일이며

어느 조치보다도 가장 먼저 시행해야 할 일이다.'라고 했습니다.

 

판단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사실 참여정부때부터 민간위탁이라는 이름으로 부분적인 수도 민영화가 추진되었고

MB정권초기 본격적인 수도민영화와 4대강 살리기라는 사업을 시작하려다가 저항에 부딪히자

4대강 살리기등의 사업이 꼭 필요하다고 예로 든 것이 이 광동댐 갈수사태입니다.

 

만약 어떤 작위가 있었다면 너무 무섭고 잔인합니다.

 

지금도 수자원공사측에서는 갈전리까지 취수 펌프장과 관로 등을 설치할 계획입니다.

쉽게 말해서 '30년 빈도의 가뭄이 발생하면 저수량이 줄어 물이 부족할 것이다.

때문에 부족량을 보충할 예비시설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건물과 교량은 30년 아니 300년만의 지진과 강풍과 해일 등에도 대비해야 하지만

물은 지금의 규정대로 10년 주기를 기준으로 해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추석 때와 설날에 차가 밀린다고 전국의 모든 도로를 다 10차선이상으로 만들 수는 없듯이

30년 만에 찾아오는 가뭄에는 요새 기상예측도 정확한데 사전에 물을 댐에 보충하고

물부족때는 아껴 쓰고해서 그 시기를 견뎌야지 무조건 돈 들여서 한다는데 왜 반대냐 하면 않되지요.

 

주민들은 보조취수시설이 들어서면 농업 용수부족과 환경오염 등의 피해를 우려하고 있습니다.

사실 환경오염보다

댐 아래로 흘러가는 물이 다 관로를 통해 보조취수시설로 들어가니 평소에도 물을 쓰지 못하게 됩니다.

옆에서는 물이 흐르는데 그 물을 못 쓰고 하늘만 바라본다?

웃기는 이야기 아닙니까?

 

차라리 거기에 들어갈 천문학적인 돈의 일부로

태백권역의 46%에 달하는 상수도 누수율을 해결하고

가뭄에 대비한 철저한 댐관리를 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장면의 면소재지인 광동리의 다운타운을 걷습니다.

하장면은 1995년 삼척군과 삼척시가 통합되어 만들어진 지금의 삼척시의 2개읍 6개면 4개동 중

가장 서북쪽에 있습니다.

광동리는 하장면의 가장 아래쪽에 있습니다.

 

아니구나. 숙암리가 광동댐 오른쪽에 있으니 아래쪽에서 두번째인가?

 

원래는 우리가 내일 지나갈 갈전리에 면사무소가 있었습니다만

1914년에 면사무소가 옮겨왔습니다.

산골짜기가 조금 넓어 평지마을이라 하여 넓골,

한자어로 광동廣洞이라 하였답니다. 광동굴이라는 석굴이 있는데,

이곳에 개를 넣어두었더니 추동리에 있는 석굴로 빠져나왔다 하여

개내골犬出谷이라 한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하장 초등학교

 

학교건물이 제법 큽니다.

 

1936년 6월 30일 하장 공립보통학교로 개교하였습니다.

학교운동장을 가로지르는 학생에게 물어봤습니다.

전교생이 몇 명이니?

아주 또랑또랑한 눈동자로 아주 친절하게 대답합니다.

잘 모르겠는데요.

일대 모든 분교들을 폐합하다보니 학생이 많아서 모르는 건지...

갑자기 물어보니 마땅히 대답할 말이 생각 않나 모르는 건지...

내 말을 못알아들었다는건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광동마을안 다리를 넘어 충혼탑으로 갑니다.

1972년에 건립하여 한국전쟁 중 전사한 군인, 경찰 등 66명의 영령과

그 이후 순직한 30여명에 대한 위령을 하고 있습니다.

 

오른쪽 한곁에 무심한 듯 서있는

무후사 열위 위령비가 더욱 마음을 짠하게 하는 군요.

 

다시 다리를 넘어오며 본 배추와 고추벽화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 고혈곡으로 가면 꽤 넓은 면적의 배추단지가 있습니다.

 

효자각

 

 

효자 함재호비라고 쓰여 있는데 비문을 나중에 확대해서 자세히 봐야 겠습니다.

언젠가, 언젠가가 아니고

지난번 지리산 둘레길 어느 구간을 다녀와서 쓴 후기에 정약용의 글을 인용 하면서

나는 유난히 효자각, 열녀비에 대해 부정적이라고 쓴 기억이 납니다.

간혹 열녀비에서는 그 슬픔에 울컥할 때도 있는데

효자비는 그 과장된 기록에 고개 돌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옆으로 광동마을 당이 있습니다.

 

그리고 금옥각

 

 

금옥첨원불망비

 

효자각이나 열녀각에서 그 비문에 적혀있는 구구절절한 스토리를 읽으면 되듯이

이 비석도 비문 또는 안내문을 읽으면 되지요.

그런데 금옥, 진신, 첨원이라는 글이 나와 이해하기 어려울 겁니다.

금옥은 당시 이 근방 8개마을 유지들이 모여서 설립한 계이름이고

진신은 고위관료를 이야기 합니다.

첨원은 여러분 이라는 뜻이지요.

 

쉽게 말하면 일대의 기름종이와 고위관료,

고위관료라 해봐야 향리를 말하는 것이고 기름종이라 해봐야 토호를 말하는 것이지만...

하여간 그 사람들이 마을에 돈을 내어 마을의 어려움을 많이 없에 주었다는 이야기고

그것을 기념하여 그 회원들이 1870년에 세웠는데

그 비석이 없어졌거나 훼손되어 1984년에 다시 세웠답니다.

 

같은 이름의 금옥각이 우리 숙소 옆 마을 역둔리에 있습니다.

그곳 금옥각은 역둔분교가 있는 원래의 자리에서 몇 번 이동하여 지금의 자리에 있습니다만

그 비각 안에 2기의 철제불망비鐵製不忘碑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헌종 3년(1837) 극심한 한발과 홍수의 피해로 주민들이 기근에 시달리자

삼척부사 이규헌이 이 지역을 순방하고 역둔창易屯倉의 양곡을 풀어 구휼하여

 그게 고맙다고 그 다음해에 영세불망비를 세웠고

또 그 다음해에는 기름종이 여러분인 금옥첨원이 자기네가 그 비석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스스로 영세불망비를 세웠습니다.

그곳도 금옥계원들이 비각을 세워 비각이름이 금옥각입니다.

 

비문의 내용은 별게 아니지만 비신과 비갓碑蓋을 한 몸의 쇠로 주조하였고,

글씨와 문양은 앞면에만 돋을 새김한 형태가 특이하여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광동리 마을입구를 한 번 더 보고

또 발길을 옮깁니다.

숲뒤산입니다.

해발 1000m가 넘는데 그럴듯한 이름도 없이 그냥 숲뒤산으로 불리웁니다.

 

이 산 계곡에 광동굴이 있습니다.

아까 충혼탑을 가려고 건넜던 마을안다리를 건너 쭈욱 가면 이 계곡이 나오는데

산 정상으로 올라가면 물푸레나무가 엄청 많이 있습니다.

 

걷는 길 우측으로 금년 봄에 무언가를 심으려고 준비한 밭을 봅니다.

생각 밖으로 돌이 별로 없네요.

 

하장 중, 고등학교입니다.

 

1969년에 황지중학교 하장분교로 개교하고 한학기지나 하장 중학교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1985년에 하장고등학교가 개교했지요.

금년 중학교입학생이 10명입니다.

 

학교정문에서 보이는 숲뒤산 기슭을 다시 보는데

천변의 얼음괴가 꼭 나비처럼 보입니다.

 

보기는 숲안마을 장승을 보고 장승앞쪽 냇물건너 있는 양지촌으로 들어갑니다.

 

 

입춘맞이 가족대항 윷놀이가 진행 중입니다.

한소리들을까봐 몰래찍었더니 흔들렸습니다.

흥겨움에 흔들린 것으로 하지요.

 

흥겨움에 노래 한곡...

 

'윷 나와라 모 나와라

신나는 윷놀이에

온 가족이 모두 모여

웃음 꽃 피어난다.

 

윷가락을 저 높이 던져 보자

모가 나야 이길 텐데

얼쑤 좋다!

또 모가 나왔구나.

 

덩실 덩실 춤을 추자

윷 나와라 모 나와라

 

신나는 윷놀이에

온 가족이 흥에 겨워

어깨 춤 절로 난다.'

 

 

이 지역은 마루를 기준으로 좌우벽면에 장작을 쌓고

측면 또는 후면에 걸개 등을 만들어 농기구를 걸어놓거든요.

그런데 측면 벽에다 장작을 가득 쌓아 놨더니

농기계 걸 곳이 없어 농기구를 장작에 기대어 놨습니다.

 

비각이 보입니다.

 

 

 

전체준이라는 분의 효자비입니다.

 

 

출천지효, 효감동천, 천포유미, 특사관작

하늘이 난 효자로 그 효성이 하늘까지 움직여 하늘에서 그 미쁨을 표창하고 까지는 좋은데

결국 가선대부라는 증직을 받은 게 제일 대단한 것이네요.

 

숲길을 걸어

 

 

 

 

밭으로 나옵니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하천에 어도가 아니고 어류채집망을 만들어 놨습니다.

물을 따라 내려오는 물고기는 다 잡히겠습니다.

 

아닌가... 오물거름시설인가?

오물거르는 시설이라고 생각하렵니다.

물에 따라 떠내려 오던 오물들을 치우려고 설치했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멀리  멍애산이 아련하게 다가옵니다.

 

 

홀리듯 끌려가며 언제인지 모르게 양지교를 넘습니다

 

영화가 시작되듯이 주변 불이 꺼집니다.

 

흑백화면이 떠 있습니다.

 

안가본 산

 

'내 책장에 꽂혀진 아직 안 읽은 책들을

한 권 뽑아 천천히 읽어가듯이

안 가본 산을 물어물어 찾아가 오르는 것은

어디 놀라운 풍경이 있는가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떤 아름다운 계곡을 따라 마냥 흘러가고픈 마음 때문이 아니라

산길에 무리 지어 핀 작은 꽃들 행여 다칠까 봐

이리저리 발을 옮겨 딛는 조심스러운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누대 갈참나무 솔가지 흔드는 산바람 소리 또는

그 어떤 향기로운 내음에

내가 문득 새롭게 눈뜨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성깔을 지닌 어떤 바위벼랑 하고 힘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새삼 높은 데서 먼 산줄기 포개져 일렁이는 것을 보며

세상을 다시 보듬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직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사랑의 속살을 찾아서

거기 가지런히 꽂혀진 안 읽은 책들을 차분하게 펼치듯

이렇게 낯선 적요 속으로 들어가 안기는 일이

나에게는 가슴 설레는 공부가 되기 때문이다'

 

이성부의 시입니다.

 

미혹에서 깨어나 고개를 돌립니다.

주변 사람들이 대람전이라고 하는 곳인데

경지가 꽤 넓고 농로도 잘 갖추어져 있습니다.

 

집이 별로 없는데 이 너른 밭을 누가 다 건사할까?

이런 걱정 걸어오면서 처음 해 봅니다.

 

오늘 오후 걷기의 종착역이 보입니다.

저기 도로표지판 옆의 커브를 돌아가면 우리의 숙소가 보일 겁니다.

 

막상 더 걸을 곳이 많이 남지 않았다고 하니 공연히 아쉬워서 뒤만 보고 갑니다.

 

 

 

조금 천천히 다가가며

한 장,

 

한 장,

 

또 한 장을 찍고

카메라를 배낭에 넣습니다.

 

한강걷기 1차의 1일차 기행을 마칩니다.

Franck Pourcel. 

 

 

 

La Mer 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