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한라산 자락

제주 중문, 하원일대 답사

하늘타리. 2012. 12. 14. 13:25

12월 답사

오늘 답사의 첫코스 법정사로 갑니다.

 1909년 의병 항쟁, 1918년 무오법정사 항쟁, 1919년 조천만세시위 운동, 

1932년 구좌해녀 항쟁을 제주 4대 항일운동이라고 합니다.

그 중 무오법정사 항쟁은 공식적 제주도 자료에 의하면

 "1918년 10월 7일 서귀포시 도순동 산 1번지에 있는 법정사(法井寺)에서

평소 일본 제국의 통치를 반대해온 불교계의 김연일, 방동화 스님 등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법정사 신도와 선도교도, 민간인 등 400여명이 집단으로 무장하여

이틀 동안 조직적으로 일본에 항거한 항일 운동을 일컫는다."고 합니다. 

 이 운동에 대한 현양은 역사학계나 종교단체에서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1994년 10월 서귀포시민 26명이 무오법정사 항일운동 사업 추진위원회를 결성, 자료 조사에 들어갔고,

그 조사를 바탕으로 1995년 8월 15일에는 중문 청년회의소 주관으로 제1회 무오법정사 항일항쟁 기념행사를 가지게 됩니다.

그 다음해 서귀포시민을 중심으로 무오법정사 항일항쟁 성역화 사업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요로에 청원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 결실로 2002년 8월 한라산 1100도로 거린사슴 남쪽 지점에서 당시 있던 조그만 절집 법정사

(항일운동 법정사와는 다릅니다만 당시에는 그곳인지 알았답니다) 입구에 이르는 진입로가 확포장되었습니다.
2003년 11월 제주도 지정 문화재 기념물 제61-1호로 지정되었으며

2004년에는 조그만 절집 법정사를 서귀포 70경에 포함시킵니다.

그러다가 그 절집은 아니다 법정악 가는 길에 있었다더라는 전언에 의해

2007년도에 있었던 자리라고 하는 공터에 현재의 의열사를 새로 짓고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송치 되었던 지사 66인의 영정과 나머지 400인의 위패를 봉안하였습니다.

그 후 해마다 3월1일에 유족회 주관으로,

10월 7일에는 항일 거사를 기준해서 청년회의소 주관으로 무오법정사 항일항쟁 합동 위령제가 올려지고 있습니다.
그후  총 예산 47억원이 투입돼 전망대, 산책로, 관리소, 경비실, 화장실 등이 만들어졌고,

2010년까지 12억원이 더 투자돼 중앙광장과 상징탑 등이 조성되었습니다.


의열사를 지을때 부터

산을 다니고 옛날을 찾던 몇몇사람이

법정사터는 여기가 아니고 지금 운영하는 작은 절집 건너 굿터안에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계속 했습니다만

전혀 받아들이지 않더니 어느날 갑자기 그곳에

무오년에 항일운동을 한 법정사터라고 표식을 해놓고 정비를 했습니다.

 

 

 

 

 

 

 2009년 6월에 찍은 사진입니다.

 

 

 

 

 

돌아갑니다.

당시 잡혀들어갔던 승려들 중 제주 출신들은 훗날 제주도로 다시들어옵니다.
방동화 스님은 1930년 경 제주로 돌아와

하원동 기슭 토굴에서 수행을 하시다 원만사를 개창하셨고

4.3으로  폐허가 되자 지금의 만지샘옆에 천제암를 지으신후 다시 광명사를 개창하였습니다.

광명사는 지금은 그 분의 속가 아드님이신 방진주(수보) 스님께서 주석하고 계십니다.

 

강창규스님도 그무렵 제주로 돌아와

지금의 모슬포오일시장옆에 서산사를 개창하셨으나

 간난신고 어려운 세월을 보내다가 바닷가 바위에서 돌아가신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어디가 운동의 발상지인가도 궁금하고 운동을 주도한 이들의 차후행적도 궁금하지만

 현재 역사학계, 종교학계에서는 이운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가 가장 궁금합니다.


선도교(그 당시 보천교를 태을교, 선도교라고 불렀습니다) 제주지역 수령이었던 박주석을 비롯하여

강봉환, 김무석, 조계성 등 실질적 핵심분자들이 모두 선도교 신자였고

법정사 주지 김연일을 비롯해

선봉대장 강창규, 좌대장 방동화, 우대장 강민수,  격문을 작성한 정구용 등이 모두 스님이었다고는 하나

강민수,정구용 등은 4년전에 먼저 제주로 들어온  김연일을 따르는 이들이고

김연일은 스스로 곧 불무황제가 될 것이다라는 식으로 불도가 아닌 개인 숭배자를 모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무렵 이 곳 법정사 주변에는 화전민들이 많았습니다.

제주도의 화전은 그 전에도 있었겠지만 조선 말 국영목장을 폐쇄하면서 부터 활성화 됩니다. 

화전개척이 증가하면서 해발 400~600m 일대에는 허리띠 모양의 화전벨트가 탄생합니다.

그런데 없는 사람이 화전을 하는 데 조정에서는 또 세금을 가혹하게 물립니다.

1898년 방성칠의 난은 바로 이 무리한 화전세에 반발해서 일어난 것이지요.
이것은 일제강점기에도 계속되는데

화전에서의 경작기간은 1~3년 정도로 짧고, 땅의 힘을 회복시켜주기 위한 휴경기간은 6~8년 정도로 길었습니다.

따라서 계속 인근을 돌아가며 화전을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 휴경하는 곳까지 계속 세금을 내라고 하자 불만이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김연일이 포섭하여 운동을 일으켰던 것이지요.
그래서 불교계의 항일운동이라는 주장에 대해 동조하지 않는 층이 많습니다.


조성윤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는 지역주민들로부터 수집한 구술자료를 바탕으로

민중들의 참여방식과 특성, 그리고 민중의 종교적 동향을 정리한 후 지역주민들과 법정사항일운동의 관계를 검토했는데,

그는 “당시 법정사 항쟁을 이끌었던 주지 김연일에 대한 주민들의 기억은 대체로 김연일을 승려가 아닌 유생으로 보거나

그가 도술을 부렸다는 식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고 발표한 바 있습니다.


민족불교의 이념은 물론 한국 민족운동의 정신이 구현돼 있음을 규명한 운동이라는 측이 있고

 불교계의 항일운동이라기 보다는 민중운동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는 측이 있고

생활고에 따른 자포자기식 폭동으로 보는 측이 혼재되어 있어

역사적 성격규명이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포장된 길 하나 건너 아래쪽

하원목장

그 남쪽으로 2008년 4월 제막된 하원마을 제주4·3희생자 위령비가 있습니다.

그냥 지나가려 했는데 그래도...

사진 한장 찍습니다.
하원마을 출신인 조명철 선생이 쓴 하원마을 4·3위령비의 비문중 일부를 옮깁니다.
"슬프다! 제주4·3사건의 광풍에 휘둘려 산화한 영령들.

가신지 60여 성상에 이르러서야 님들의 이름을 빗돌에 새겨 그 정을 기리려하니, 가슴 저미는 감회를 가눌길이 없구나.

1945년 조국광복의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좌우이념 대립으로 발발한 제주 4·3사건은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앗아갔을 뿐 아니라 오랜 세월 제주도민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하원마을에서는 군경에 의해, 무장대에 의해 61명이 살해되었고,

무장대의 방화로 1백4동의 가옥이 소실되었다.

입산한 무장대는 1명 뿐이었지만 습격은 잦았다.

4·3사건이 일어나던 1948년 11월10일(음) 1차 습격 시, 거리왓 쌍몰가래 육박전은 처절했다.
그 때 무장대 1명이 생포되어 성난 주민들에 의해 참살된 뒤 5회나 더 습격을 받았다.

습격 뒷날이면 경찰조사로 주민의 고통이 막심했다.

식량을 빼앗긴 사람은 제공자로, 밉보인 사람은 내통자로 낙인 찍혀 끌려가면 돌아올 줄을 몰랐다.

군경과 무장대의 틈에 끼어 어찌할 바를 몰랐던 그 참상을 어찌 말로 다하랴.(이하 생략)"

 

하원공동목장입니다.

중문 공동목장은 2000년도엔가 녹하지악 옆 목장부지전체를 레이크힐즈골프장에 팔아서 지금은 없고요...
하원 공동목장은 한 반쯤 남아 있습니다.

돈네코로 이르는 산록도로 아래 있는 옛 탐라대학자리도 하원공동목장부지에 포함되어 있던 곳이지요.
1995년 탐라대 건립 과정에서 인재양성을 위해 공동목장 부지를 당시감정가격 283억원의 10%로 매각하여

인재양성에 기여한다고 했는데 그게 지금은 허망하게 되어 버렸지요.

그렇다 치고...
백제 무왕 10년(610년)에 탐라에서 준마를 백제에 바치자,

백제에서는 이 말을 당나라에 바치니 당왕은 ‘과하마’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어 고려 현종 16년(1025년)에 목감양마법, 문종 25년 도거(섬에 설치한 목장) 관리를 제정한 후

문종 27년(1073년)부터는 계속 탐라국에서 예물로 말이 진상돼 문·무관에 하사되기도 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몽고군이 주둔하기 전에도 과하마라고 하는 작고 당찬 말을 길러왔던 것 같기도 합니다만.....
제주도 목장의 공식적인 유래는

몽고마 160마리가 1276년 고려 충렬왕 2년에 지금의 성산읍 수산리인 당시 수산평지역에 도입된 것이 처음입니다.
이어 조선세종 11년 1429년 제주출신 고득종의 건의에 따라

마필 사육을 위한 잣성을 축성하고 목마장을 10소장으로 나눴다고 하지요.


몇가지 기록을 보면

이원진편 '탐라지' (1653년 간행)에는 당시 제주목에 마장(馬場)이 7소(所) 38자, 6450필(匹)의 말이 있었고,

정의현에 마장이 3장(場) 17자, 2383필의 말이 있었으며,

대정현에 마장이 1장(場) 3자, 1552필의 말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김석익의 '탐라기년'(1918년 간행)에는 이조 숙종 30년 (1740년) 목사 송정규가 조정에 청하여

목장을 축(築)함에 20소(所) 60둔(屯)을 합하여 10소로 정하였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보아 13세기 후반 원나라의 지배하에서 제주도에 우마가 방목되기 시작한 이래,

17세기의 전반기에는 제주도 전역에 11개의 목마장이, 그 후반기에는 20개의 목마장이 있었다가,

18세기에 이르러서는 축장(築墻)된 목마장이 10개소(산마장 제외)로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중 1, 2, 3, 4, 5, 6소(所)는 제주목에 속하게 하고 7, 8, 9, 10소(所)는 대정·정의 양현에 속하게 하였었다는데,

8소장이 바로 현재의 하원목장을 중심으로 하였다고 합니다. .
제주목마장은 중앙최고 정책기관인 의정부, 병조 및 사복시 지휘감독아래 전라감찰사,

제주목사, 감목관(제주판관·정의 현감·대정 현감 겸임), 마감, 군두, 군부, 목자 등 순으로,

계급적으로 배치돼 운영됐습니다.
말을 직접 사육하는 가장 하위 계급인 목자들은 관리들의 행패로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풀이 없는 초봄이나 겨울이 되면 굶주려 죽는 말이 생겼고,

그러면 목자는 죽은 말 가죽을 벗겨 관가로 가져가서 자연사여부에 대한 판정을 받아야 했습니다.

말이 자연사한 것으로 확인되면 가죽만을 받았지만,

통상 말의 죽음을 목자의 책임으로 돌려 말 값을 물어내게 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목자는 말 값을 물려고 재산을 팔아야 했고,

심지어 처자식을 파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목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그렇게 아 여기가 목마장 중 8소장이 있던 곳이구나라고 쓱 둘러보고 지나갈 곳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목마장은 구한말의 공마제도 폐지에 따라 군유지, 사유지, 마을공동목장으로 등재되어

일제 강점 말기에는 116개 마을 공동목장이 조성되기도 했습니다만

농기계와 교통수단의 발달에 따라 말의 용도가 점차 줄어들어

제주마보다 한우와 육우를 더 많이 사육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 공동목장이 지금은 아주 골치가 아픕니다.
많은 곳의 마을 목장들은 넓은 곳에 조성된 초지와 조망등으로 인해

제주도 개발초기부터 골프장 등 위락시설로 팔렸고 현재 60개의 마을공동목장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이중 2개의 마을공동목장은 이미 중국자본에 팔렸고

3-4개의 다른 지역 마을공동목장이 또한 개발계획을 타진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마을공동목장은 말 그대로 마을 주민들이 공동으로 이를 활용, 마을발전과 마을을 유지하는데 쓰려고 한 땅인데

마을사람들은 어쩔 수 없지 않느냐하며 매수자찾기에만 골몰합니다.

이곳 하원공동목장도 이제는 기르는 마소가 별로 없다고 합니다.
한때는 이 목장안에서 기르는 소가 2~300마리를 훌쩍 넘긴 시절도 있어

관리사를 비를 피하는 피우사가 아니라 살림집규모로 지어 사용하기도 했으나

2004년 9월 11일 갑자기  400㎜ 이상 폭우가 쏟아진 날 방목중이던 소떼 중 70여마리가 폐사내지는 실종되어

3억원이상의 피해를 본 후 부터는 대다수의 주민이 소를 입식하지 않았고

관리를 맡겠다는 사람도 없어서 목장은 개점휴업상태입니다.

그 당시에도 소를 200여마리 기르고 있었는데

오전 6~7시 사이 갑자기 쏟아지는 비에 소들이 숲이 우거진 하천변으로 숨어들었다가

갑자기 불어난 물에 휩쓸려서 80여마리가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다

바위에 부딪혀 변을 당하여 겨우 9마리만을 구조할 수 있었다 합니다.

옆 동네 위미리지역 공동목장은 이미 중국 부동산업자에 팔려

관광리조트와 팬션 등을 건설한다는 계획하에 사전 환경영향평가 심의를 진행중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곳도 원매자가 나선다면 당장 처분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또 하나의 흉물이 들어서겠지요.

 

법화사를 갔지요.

법화사에 대해서는 작년 말인가 아니 재작년 말이구나 길게 써놓은 글이 있으니 생략하고...

그리고 우리도 절집 그 자체 때문에 간것이 아니고 점마청과 과원이 있던 자리를 확인하러 간 것이지요.
통상 그 인근 사람들은 점마청터라고 하면 그 자리에서 약 5~600미터 서남방 하원교회주변 귤밭일대를 일컫고 있습니다만

과거엔 점검하는 곳 몰아온 말을 대기시키는 곳 해서 그 규모가 컸을테니 이곳까지 포함되었겠지요.
우리가 서있던 곳 바로 앞 삼나무 뒤로 농로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부터 하원초등학교앞을 거쳐 월평마을 머흐내(머내)까지의 약 4Km의 거리가 바로 옛이름 몰질입니다.
법화사에서 월평마을 해안가를 연결하는 이 길을 주민들은 ‘몰질(말길)’ 이라 부릅니다.
정조 16년 삼읍지를 참조하면 ‘팔소장은 하원동위 주위 35리, 동서 15리, 남북 10리에

27명의 군두목자가 말 362필을 사육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하잣성이 바로 법화사위에 있었습니다.
그 팔소장에 가까이 점마청이 있었을 것이고 그 점마청에서 점마를 마친말은 바로 대포포구로 이동합니다.
대포포구로 가던 중에 목자들이 긴장을 풀고 숨을 고르며 말을 한번 더 점검합니다.
그래서 현재 하원초등학교 동남쪽 200m 지점에 있는 동산에 ‘목자동산’이라는 이름이 남아있습니다.

 

과원도 지금 생각해 보니 아마 그 자리에서 멀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찾아간 부인의 비문 음기말미에 남편의 무덤은 과원모루 건작이라 했으니

과원모루는 이분의 남편무덤 남쪽이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분 남편무덤이 어딘지를 모르니 좀 그렇습니다만....
그런데 제가 현장에서 비문에 남편또는 부인의 무덤 위치를 별도로 표시하는 것은 꽤멀리 떨어져 있을때 표시한다고 했는데

이게 육지부에서 적용되는 것이지 제주에서는 그리 멀지 않아도 같은 지경이 아니면 표시한다는 것을 깜박했습니다.
육지부는 마을이 거의 씨족단위로 구성되고 마을 뒤에 선산이 있습니다.

그래서 타지에 나가 살다가도 돌아가셨을 경우 선산으로 돌아와 묻히게 되지요.

그래서 부득이 하게 타지에 묘역을 쓰게 될경우 그 위치를 명시합니다만

제주에서는 선산이라는 개념이 근래 들어와서 가족묘지개념으로 들어왔고

묘지가 거주지 인근지역, 그리고 돈과 권세가 있는 사람은 오름 높은 곳에 묘역을 잡다보니

그리 멀지않아도 같은 지경이 아닐 경우에는 그 배우자나 존속의 묘역위치를 쓰게됩니다.
그럼 이 부근에 있을수도 있겠다고 하여 다시 비문의 음기를 찬찬히 읽습니다.

法華畓西酉作之原公墓法華果院旨乾作
부인의 무덤은 법화사논 서쪽을 지나 서쪽(같은 서쪽이지만 酉는 무덤자리가 동을 향해있다는 뜻)평지에 있고

남편의 무덤은 법화과원 북쪽 구릉(표준말:경사진곳)에 있다.


그럼 다시 법화과원은 어디냐?
머릿속을 짜내어 두가지에 대한 기억을 찾아냅니다.
먼저 이원진의 '탐라지 과원조(果園條)'의 기록..

그 글에 제주 전체에 분포한 과원의 이름과 귤나무의 품종별 그루 숫자가 상세히 기록되어있습니다.
그중 대정현 과원이 어디어디냐?

고둔과원, 동천과원, 병악과원, 별과원, 암림과원 그리고 법화과원이 있습니다.
다시 법화과원이 어디냐?
법화사가 있던 곳 서쪽이다.
또 하나의 기억
지금의 법화사요사채가 있는 곳 뒤에 서북쪽 경사진 등성이를 마을사람들이 무어라 부르냐?
과원몰리
아이구 바보야 몰리나 모루나 산등성이마루를 일컫는 제주어 아니냐?
아 그렇구나!
그 책에 기록된 제주전체 과원이 37개나 되다보니 깜박했습니다.

그리고 어디갔나?
아 볼목당으로 갔구나

그냥 마음이 않좋은 곳이지요.


중문동 본향당입니다.
이곳 중문은 본향당이 두곳입니다.
한곳은 이곳, 한곳은 다람쥐궤당이지요.

이곳은 해신계의 용왕국 말젯딸애기를 당신으로 모시는 곳입니다.
중문우회도로를 교차하는 회수진입로를 만들때도 이곳을 피했을 만큼 마을사람들이 아끼는 당으로

넋들임과 치병을 기원하던 곳입니다.
그렇게 영험이 좋다 하여 대포동사람들도 이당을 다녔습니다.

그 후 대포마을 어느 할머니가 불목당의 궷돌 하나를 등에 져서 코등이모루로 옮겨가 마을 본향을 따로 설립했으므로

대포본향당을 코등이모루본향당 또는 불목당이라고도 합니다.


이당의 원래이름은 굴묵당이었습니다.

그런데 중문단지 개발무렵 어느날 갑자기 굴묵나무가 다 패여 없어져 그 동생뻘인 푸조나무(검폭낭)와 새덕이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바위위에 있던 제단을 치우고 검폭낭과 바위사이에 제단을 만들었고

한 5년전쯤에는 서더럭터멍이라는 곳에 있던 요드렛당을 바위 좌측 (보아서는 우측)으로 모셔왔습니다.


그런데 몇몇 광신도들이 와서 바위면에 주예수의 이름을 욕되이 써 놨습니다.

제주도신당조사(2009)에도

‘불목당’은 원래 굴무기낭이 많이 때문에 ‘굴묵당’으로 부르던 것이 ‘불목당’을 거쳐 ‘불목당’이 된 것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빈짓동산당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데 그곳은 패쓰 했네요.
시간나면 한번 가보세요.
토산본향인 동의본향일뤠한집을 모시는 토산에서 가지갈라온 당입니다.
바위에 신혈(굴)이 있는 곳인데 과수원안에 당까지 이르는 당올레가 아름다운..

아니 지금은 모르니까 아름다웠던 곳입니다.

 

다시 천제연폭포둘레길입니다.

만지샘

아무리 가물어도 샘이 마르는 일이 없어서

예전에 일대 주민들이 집안 제사와 마을제사시에는 이곳물을 길어다 떡과 밥을 하였었습니다.

, 하지만 2003년도 음용가능 검사때 부터 먹는물로 부적합하다하여

절집 생활용수로만 사용하다가

2009년도 잠시 절집이 비었을때 방치되었고 2010년 3월에 절집에는 새로운 부처님을 모셨지만

이곳은 비가림시설등을 철거하여 일반 하천 하구가 되었습니다.

 

2009년의 모습

 

2010년 초의 모습

 

그리고 아래사진은 길거너편 베린내 섯오름 기슭 광명사에 모셔진 본존불

 

본존불 좌우 작은 불상이 방동화스님이 바랑에 넣어 다니며 모시던 불상이라합니다.

 

 

방동화스님이 은거 수행하던 원만사 토굴

강창규스님의 사체가 발견된 곳에 세워져 있는

동일리 해안의 비석

 

또 다른 사진 하나 : 법정사 항일운동시 격문을 작성한 정구룡의 이름이 포함된 삼일운동 기념비

그의 고향 인근인 내연산 보경사 가는 길에 있습니다

 

 

도수로를 개설할 때 가장 힘들었다는,...

 그래서 화포에 쓰는 폭약을 써서 바위길을 내었다는 화폭목입니다.

오늘은 화폭목도수로에 물이 흐르지 않습니다.

화폭목의 2009년, 2010년도 사진입니다.

 

그 때도 물이 없었지요.

그때 관계자에게 물어봤습니다.

지난번 올땐 물이 많이 흐르더니 오늘은 물한방울 없네요라고 했더니

대답이 화폭목으로 흐르는 물은 바로 위 급수장에서 틀고 잠그고 한답니다.

 

그건 그렇고 채구석 대단한 인물이지요.
소설가 현기영의 ‘변방에 우짖는 새’ 에서도 아주 멋지게 등장하는 인물로 대정군수를 두번이나 지냈지요.
1895년(고종 32년) 1월에 대정군수로 처음 임용되었는데

재직직후 강유석(姜瑜奭)과 송계홍(宋啓弘) 등이 난을 일으켜 제주도 경무청(警務廳)을 파괴하자,

전 부사 김윤병(金潤柄)과 함께 관군을 인솔하여 이를 토벌하고 난을 진압하였지요.

 그후 1898년(광무 2년) 2월에는 방성칠난이 일어납니다.

그는 이때 난민에게 붙들려 크게 부상을 당합니다.

그리고 난이 진정된 후에는 이 난의 원인을 제공했다하여 그당시 제주 목사였던 이병휘(李東輝)와 함께 면직되고

조정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습니다.

다시 기사회생하여 1899년(광무 3년) 8월 신재호(愼哉祜)의 후임으로 다시 대정군수로 부임하였습니다.

1901년(광무 4년)에는 제주민란이 일어났고 난이 진정된후 군수직에서 파면되고

그 뒤 3년간의 금고생활(禁錮生活)을 하게 됩니다.

금고에서 풀린 후 중문으로 옮겨와 살면서 1906년 이곳에서 수로를 여는 일을 주창합니다.

이태옥.이재하와 함께 자금을 마련하여 1908년 1차개간에 성공한 후 많은 돈이 들어오자 

1912년 제주금융조합을 설립 1916년까지 2차에 걸쳐 조합장을 지냈지요.
그 아들중 5남인 채몽인(蔡夢印)이 애경유지를 창업했고 작고후 부인 장영신이 애경그룹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채구석의 손자 채형석(蔡亨錫)은 30세 때 최연소사장으로 취임, 소득세 최고액 납부자로 널리 알려졌으며,

지금은 애경그룹의 총괄부회장으로 제주항공을 지휘하고 있습니다.

 

채구석에 대한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2005년 02월에 제주일보에 실려있던 중문수로에 관한 이야기를 보면
이 수로는 2차에 걸쳐 공사를 했다고 합니다.
1차 수로공사는 1905년부터 3년간(1907~1908년설도 있음) 지역민의 노력으로 건설됐다고 합니다.

부지와 공사비는 시공자인 채구석, 이태옥.이재하 세사람 외에 답주(沓主)들이 소유면적의 반을 갹출했다고 합니다.
2차 공사는 1917년에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개척한 농경지에서 60여년간 쌀 농사를 짓다가

중문관광단지 개발용지로 수용돼 1971년 국가로 소유권이 이전됐습니다.
채구석의 공적비가 천제연 폭포 입구(1957년)와 천제연 3단폭포(2003년)에 세워져 있습니다.

 

천제연 매표소입구와 3단폭포옆 기념비사진입니다.

 

 

그리고 계단식논의 흔적

 

선임교가 보이는 곳을 지나면서 생각나는 1980년초 지역 신문에 실렸던 기사하나

 

"선녀다리가 위치해 있는 곳에 전신당인 본향당이 있었고

성천포에는 개당, 돈짓당이라고 하는 해신당이 있었다.

1980년대 초 선녀다리 공사 중 본향당을 포크레인으로 철거하자

이튿날에는 선녀다리 공사장이 무너져서 11명이 죽고 말았다."

이 전신당은 배린내개당으로 옮겨 모셔져 있습니다.

 

그리고 어디를 갔나?

아 비석군입니다.

꽤 많은 비석이 열을 맞추어 세워져 있습니다.
한 때는 이 비석들의 앞길이 마을에서 가장 큰 길이라서 이곳에 비석을 모아두었습니다만

이제는 길도 끊기고 인적도 끊겨 있습니다.

몇개의 비석에 대해서
먼저 맨뒤 우측 '處士任道寬之妻節行孺人梁氏之閭'와 處士姜應祿之妻孝烈孺人李氏之碑'
양씨부인과 이씨부인 모두 남편이 병이 걸려 죽자 따라 죽은 분들입니다.
양씨부인은 영조17년(1741)에 정표되었다고 하고 .

윤씨부인은 순조5년(1805) 대정현에서 완문을 내려 복호하였고 순조22년(1822)에는 어사가 조정에 알려 정표하였다고 합니다만,

  정표를 받으면 정려를 세웁니다.

문중 또는 향리에서 정려문을 만들고 정려각을 세우고 그 안에 비석를 세웁니다

(내부에 편액만을 걸고 비석을 안세우는 수도 있습니다. 전주 이홍발지려참조).

그런데 정려문이나 정려각을 세우지 못할 경우에는 비석에다 비보다 상위개념인 여를 꼭 표기합니다.

그런데 나라에서의 정려를 받은 것이 아니고 지방관아의 표창을 받은 경우는 비라고 새기지요.

문달민 문정복의 비에는 여라고 쓰여 있지만 강인호의 비에는 효자강인홍비라고 쓰여 있는 이유가

강인홍은 조정이 아닌 지방관아에서 표창을 받아 복호(세금등이 면제)된 경우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이씨부인의 경우에도 순조 5년 지방관아에서 표창을 하며 복호를 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조정에서 정표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고...

또 효열이라는 글에 상당한 의아심을 갖고 있습니다.

아주 무식하게 설명하면...

 남편이 죽었다. 그래서 남편을 따라 목숨을 끊었다. 그러면 열녀,절부입니다.

다른 경우 남편이 죽었다. 그런데 시부모를 봉양할 사람이 없거나 제사를 차릴 사람이 없다 .그런데 따라 죽었다.

이겄은 열이 아닙니다.

시부모가 돌아가실때까지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돌아가신 후 시부모와 남편의 제사를 모셨다. 그러다 죽었다 이게 효열입니다.

이씨부인자료에 의하면 남편이 죽자 졸곡후 친정에 돌아가 음식을 끊었다면 열은 될 수 있어도 절대 효는 인정되지 않습니다.

원래 조선초기까지 남편과의 이별후 재혼이 가능했습니다.

사별후 재혼은 아주 당연한 것이고요.

그래서 조선초기의 열녀비는 사별후 재혼하지 않고 자식을 잘 키운 부인에게 주어졌지요.

그런데 이게  나중에 여자의 재혼을 법으로 막아버리다 보니

남편없이 고된 시집살이 견뎌내기 어렵겠다고 죽어버리는 사람이 생기고

이걸 막아야 할 조정에서 이걸 표창하니 남편을 따라 죽지 않은 여자가 아주 이상한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가문에서 억지로 열녀를 만들어 내는 비극적 상황이 역사에 왕왕 등장합니다.

모두 다 가부장제도를 유지하려는 어긋된 통치이념의 피해자입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열녀비, 효열비등을 새우는 사람들을 삐닥하게 보고

특히 말도 않되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사람들을 아주 않좋아 합니다.

 

그리고 그 앞줄의 충혼비는 1948년 11월 5일 무장대가 중문리를 습격했을 때 순직한 경찰관 김호석과 김권석.

그리고 4.3기간 토벌활동 중에 순직한 경찰관들의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하원도 그렇고 중문도 그렇고 어제는 무장대에 의해, 오늘은 토벌대에 의해 이런 저런 피해가 많았습니다만

요새는 풍조가 무장대의 습격이라는 용어자체를 쓰지 않기 때문에

아마도 중문 중학교에 있는 군인들 기념비.

무장대의 습격으로 교실과 직원실이 모두 소실되자 그 후 군인들의 도움으로 1950년 4월 학교를 재건했다는 내용의 비석도

아마도 얼마지나지 않아 없어질겁니다.

 

그렇다 치고 아무도 관심같지 않아 서운한 비석이 두개 있습니다
스승의 집에 드나들며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이 그 스승이 세상을 떠나시자 그를 기려 세운 비석 두기가 열녀비 옆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일반적인 기념비려니 하고 잊혀져 갑니다.
그 비석의 전면과 측면 한 비석은 문하생이라고 쓰여있고 또한 비석에는 문인이라고 쓰여있습니다.
이렇게 문하생들이 비석을 새운 것은 제주도 전역에 그리 많지 않지요.

 

 

 

 

백구천물길을 따라 내려갑니다.

 

다람쥐소

(아래아를 써서 도람쥐 비슷하게 발음해야 합니다)

 

다람쥐궤당입니다.

 

내부

다람지궤당은 마을의 호적을 차지한 ‘굴묵당’과 함께 중문리 본향당으로 큰당이라고 합니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동굴 안쪽 정면에 길게 제단을 만들고 그 한쪽에 작은 석실을 짓고

가운데 걸멍을 위한 작은 구멍을 만들어

한라산계 산신인 중문이하로산(산신)과 진궁하늘진궁부인(산육·농경신), 아기씨(치병신), 요왕또(치병신)을 당신으로 모십니다.

남녀 4위를 모시기 때문에 제단 위에 지전물색을 걸기 위해 길게 연결한  노끈에 관복 1벌과 여복 3벌이 걸려 있어야 하는데

궤당 위쪽 도로위를 개발한 후에는 비만 오면 온갖쓰레기들이 밀려내려오다 보니 들어가 비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어느집 착한 아들이 작은 굴이 있는 바위 옆 후박나무에 지전물색을 걸수 있도록 하고

그 옆으로 작게나마 어떤 구조물을 만들었는데 그것도 한쪽이 부셔져 있습니다.

과거 이당에서는 정월 보름의 신과세제를 ‘산굿’으로 하고, 팔월 보름의 마블림제는 ‘앉은제’로 올렸습니다.

아마도 지금은 그리 하지 않을 겁니다만

정월 대보름날의 산굿은 심방이 3~4명의 소무(악사)를 데리고 서서 하는 규모가 큰 굿이며,

당신이 밥도 장군, 힘도 장군인 장수이므로 본향당신을 청하여, 마을의 도액을 막고, 마을의 화재를 막고,

귤의 수확과 나락의 수확을 잘 되게 해 달라고 빌며 마을제를 지냈습니다.

앉은제는 추석 명절이 끝난 뒤 신앙민들이 모여 제단에 제물을 차려 놓으면,

심방은 앉아서 요령을 흔들며 간단하게 제를 드립니다.

 이 제는 단골신앙민들의 산을 받아 신수를 점치고 액을 막는 추수감사를 겸한 의례이지요.

이때는 신의 옷들을 꺼내어 마(곰팡이)를 불린다(말린다)는 뜻의 마블림제를 함께 드렸습니다.

 

돌아오면서

이 구간의 내의 이름 백구내를 생각해 봅니다.

백구물, 백구천, 백구교, 백구마을

 

분명히 몇년전에 어디서 보았거나 들었는데.....
벽기, 백기, 배꿉


화요일 아침 내가 가장 치열하게 연구한다고 인정하는 오창명선생에게 전화를 합니다..
1986년 한글학회에서 발행된 한국지명총람에 다람쥐궤 북쪽 50미터 지점에 백기내, 백기물이 나와있다고 합니다.
내가 물어보기전에 생각한 적은 없어서 정확한 답은 아닐 수도 있겠지만

아마 그 것은' 밖에 나가보라' 는 말의 그 일대 발음  '배낏디가보라', '백기강보라'에서 유추 할 수 있듯이

마을 바깥에 있는 물과 내라서 백기물, 백기내라고 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동네 어른 들에게 정확한 음가를 들어봐야 알 수 있다고 대답해줍니다.
그리고 또 다른 이름으로 동네는 벽기가름, 물은 벽소라고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을 바깥 물과 내라서 백기라면 마을이름이 백기마을이면 않되는 것 아닌가?

 

그때 떠오른 생각

한 몇년전 그 색달천 따라 올라가다 천변으로 올라왔을때 만난 할아버지
나한테 이 배꿉내에는 왠일인가 그랫거든요.
그래서 내가 예? 배꼽내요? 여기어디 배꼽같은 형상이 있어요?하자
그게아니고 배꿉내라고 말하며 말도 못알아먹는 놈을 한번 쳐다보고 그 자리를 피하시던 생각이 납니다.
배의 굽, 배꿉입니다,


그럼 중문마을이 배의 형태이니 배의 굽 즉 배꿉..
아 그래서 배꿉물이라는 이름이 생기고

배꿉물을 지나는 내니까 그 구간은 배꿉내가 되고

그 옆 마을이니까 배꿉마을..
이게 변음되서 백구마을이 된거구나...
그런데 왜 여기가 배밑창이지 에이 말도 않돼...라고 생각하면서도..

 

중문리마을 홈피로 들어가 봅니다.

마을이 배의 형상이라고 설명하면서 제시한...
이그림

 

배꿉물입니다.

딱 내가 사진찍은 이 자리.

왜 여기가 배의 굽(안에서 보는 밑창)이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쨋든 어원은 풀렸습니다.
배꿉-백기-백구로 변환되었는지

백기-배꿉-백구로 변환되었는는 모르나

배꿉물이 백구물이 되니 배꿉내가 백구천이 됩니다.

그러니 마을 이름도 백구마을이 되고

새로 놓은 다리는 영문도 모르고 백구교가 되었습니다.
처음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방향으로 말이 흘러갑니다.

 

길옆 오래된 듯한 나무에게 이 변천사항을 설명해달라고 했더니

웃고 마네요.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는 채구석폭포가 걸려 있는 붉은덕기정

 

그리고 베린내성창

베린내성창을 멀리서 보며 동네 잠녀들이 부르던 노래 한곡 따라 부릅니다.
천지연 폭포 흐르는 물은 베린내 가락으로 내리건마는 이내 눈에서 흐르는 가슴의 한 썩은 물은 어디로 내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