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멜다 메디나의 과달루페 성모 그림을 지닌 순례자들
르네 마그리트의 순례자
순례란 여행의 의미를 넘어
자기의 신앙을 다지기 위해 먼저간 성자들의 혼과 자취를 체험하고 정진하는
기도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순례의 의미가
과달루페의 성모 그림을 등에 메고 그 자취를 찾아가는 고행의 길처럼
자기 믿음을 위한 길이었다면..
누군가 덕분에
천주교신자가 아니어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이어지는 순례자의 길 카미노 데 산티아고에 대해서는
한마디 쯤 할 수 있어야 그래도 여행자(순례자가 아닌 여행자)라 할 수 있는 지금의 순례는
르네마그리트의 순례자처럼
머리와 가슴에서 분리된 무표정한 표정으로
단지 스쳐보는 하나의 행사가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순례길이 전라북도에 열렸습니다.
'아름다운 순례길'
꽤 오래전부터 전주를 중심으로 하여 인근지역을 한바퀴도는 순례길이
만들어 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왔습니다.
㈔한국순례문화연구원에서 2009년 부터 추진한 아름다운 순례길이
전북도의 지원으로 전주·익산·김제·완주를 잇는 240㎞,
9개 코스의 길을 지난 여름에 완성하였습니다.
그 길에서 11월 1일 부터 9일까지
다양한 종교문화자원을 관광자원화하여 세계순례대회를 실시하였습니다.
그리고 10일에는 순례객이 함께 어울리는 ‘종교화합의 순례 한마당’이 개최되었었다 하고,
11일에는 '세계순례포럼’도 열렸었다 합니다.
그 결과나 반향등을 알수 없습니다만
모든 행사가 끝난 11월 12일 부터
혼자서
순례길이라 이름 붙여진 그 길의 일부를 걸었습니다.
사흘에 걸쳐 이중 2개의 코스뿐이 걷지 못하였습니다만
거창하게 전코스의 노정을 올립니다.
1코스 : 한옥마을~송광사 28.0km
2코스 : 송광사~천호성지 26.5km
3코스 : 천호성지~나바위 26.5km
4코스 : 나바위~미륵사지 27.5km
5코스 : 미륵사지~초남이 29.3km
6코스 : 초남이~금산사 24.0km
7코스 : 금산사~수류 19.7km
8코스 : 수류~모악산 21.0km
9코스 : 모악산~한옥마을 27.5km
1코스부터 걸어야 하는데
코스의 주요지점인 풍남문, 전동성당, 치명자산 등은 걸은 지 채 3개월이 않됩니다.
신리굴을 지나고 정여립 생가터를 지나고 상관저수지 옆을 지나는 길이 아쉽기도 하고
화심마을 순두부가 먹고 싶기도 하지만
2코스 시발점인 완주 송광사부터 출발하기로 합니다.
11월 12일 아침 9시 송광사 앞입니다.
송광사
무엇보다도 기억에 남는 것은
크지 않은 대웅전안에 앉아계시던 거대한 크기의 소조삼존불상
그리고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무사히 돌아올 것을 기원하던 목조삼전패가 모셔져 있던 곳
드물게 만나는 평지에 지어진 절집으로
그 가운데에 화사한 2층 십자종루가 참 아름다웠다는
기억이 남아있는 곳입니다.
그동안 많은 불사가 있었나 봅니다.
찬찬히 둘러 봅니다.
일주문
절집 입구에 세워 속세와 불계의 경계 역할을 하는 일주문은
지금의 위치에서 약 3km 떨어진 곳에 세웠던 것인데,
절의 영역이 작아져서 순조 14년(1814)에 조계교 부근으로 옮겼다가
1944년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일주문을 들어서니 한약 냄새가 코를 간지럽힙니다.
일주문 담장에 연해 있는 찻집에서 한약재를 말리고 있습니다.
장승 두기가 서 있습니다.
한 장승은 좋은 인연입니다라고 반기고
또 한 장승은 入此門來者莫存知解'라는 글을 걸고
이 문을 들어온 사람은 세속적인 생각, 분별하는 생각을 버리고
오직 한 마음으로 진리를 생각하여 불법에 귀의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금강문
금강문 옆으로 크지 않는 당간지주가 보입니다.
금강문에 들어서니 양 옆칸에 금강역사와 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동자와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동자가 있습니다.
금강역사의 검문을 무사히 통과하고
다시 보는 당간지주
신라 경문왕 7년인 서기 867년에 신라의 고승 보조국사에 의해 개창되었지만
1600년대 이후 고려 보조국사 지눌의 제자들에 의해 중창 되었다하니
아마 1600년대 이전 어느무렵 작은 사찰이었을때의 당간지주가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천왕전
편액은 천왕문이라 쓰여 있지만 문이 달려 있으니 천왕전이지요.
입구벽면에 대웅전 천정의 비천도중
비천 나발 주악도를 모사한 그림을 걸어두었습니다.
사천왕은 갑옷을 입고 위엄이 충만한 무인상을 하고,
동·서·남·북의 사천국을 다스리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 초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에는 사찰입구에 사천왕문을 세워 모시고 있습니다.
이 곳 송광사의 서방 광목천왕상 왼쪽 머리끝 뒷면에 조선 인조 27년(1649)에 조성된 것을 알 수 있는 글이 있으며,
왼손에 얹어놓은 보탑 밑면에는
정조 10년(1786)에 새로이 보탑을 만들어 안치하였음을 알려 주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천왕전에서 모든 삿된 기운을 털고 나오니 포대화상이 웃으며 반깁니다.
마로니에 동산 목각장승들의 환영에 황홀해 집니다.
종루로 갑니다.
내 기억속의 송광사를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열심자로 된 종루 중앙칸에 범종을 모시고
동·남·서 3칸에 목어, 운판, 법고를 각각 모셨습니다.
종루의 지붕은 중앙에서 모아지는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고
마루 밑의 기둥들은 모두 원형기둥을 세워놓았습니다.
동종
비천상
대웅전
대웅전은 조선 인조 14년(1636)에 벽암국사가 짓고,
순조 13년(1813)에 2층이던 대웅전이 기울어지자 1층으로 개축하였으며
철종 8년(1857)에 제봉선사가 한 번의 공사를 더하여 현재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현판은 선조의 8번째 아들이며 광해군의 동생인 의창군이 쓴 것입니다
오랜 세월에 못이겨 몸통은 사라지고 받침만 남은 석등
석수
보물 제1243호 완주 송광사 대웅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목조삼전패
보물 제1274호 소조삼불좌상및복장유물
설명문을 찬찬히 읽고 법당에 들어섭니다.
석가여래부처님을 주불로 모시고
우측에 아미타부처님, 좌측에 약사 부처님을 흙으로 빚어 모셨습니다.
법당이 너무 작아 보입니다.
그렇다고 다시 지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모습이 한층 커보인다는 뜻입니다.
지금이 딱 좋습니다.
1993년 본존불에서 세 분 부처님의 조성기가 발견되었는데
그 '조성기에 의하여 숭정 14년(인조 5년, 1641) 6월 29일
임금과 왕비의 만수무강을 빌고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조속한 환국을 기원하면서 만들었음이 밝혀졌습니다.
각각의 삼존불 옆에 나무로 만든 전패가 세개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임금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글씨가 있고,
뒷면에는 조선 16대 왕인 인조 때 조성되었다는 제작연대가 밝혀져 있다고 합니다.
다른 2점은 왕비와 세자의 안녕을 기원하였습니다.
104위 신중탱
불교의 호법선신(護法善神)을 그린 신중탱은
범천과 제석, 동진보살을 중심으로 하여
소수의 천부중과 신중들이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입니다.
그런데 이곳 신중탱의 경우 화엄경의 104위 신중을 모두 표현하고 있어
독특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세로로 긴 화면의 중앙에 동진보살을,
그리고 상단 좌우에 대범천왕과 제석천왕을 배치하고
화면이 가득 차도록 104위의 신중을 채웠습니다.
그리고 부처님 머리위에서 춤추는 비천주악상
천정에 비천무당무(飛天巫堂舞)를포함한 11폭의 벽화는
다른 절집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선사합니다.
대웅전 외벽 좌우와 후면에 천정 벽화를 모사한 그림을 붙여두어 흥겨움을 함께 합니다.
최근에 조성한 미륵전과 불탑
중창비
예전에는 불탑이 있는 방향을 지나 뒤로 가면
3기(?)의 고인돌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담장으로 막힌듯 합니다.
나가면서 시간나면 들러 보기로 하고요.
관음전으로 갑니다.
지금의 성물판매소 자리에서 1층은 식당, 2층은 관음전으로서
각종 법회 및 학생들의 수련대회에 사용되던 2층 건물이었다고 합니다.
2003년에 2층만을 지금의 위치로 옮겨 단독 건물로 복원하여
관음보살좌상과 관음탱을 봉안하였습니다.
이 전각을 템플스테이에 이용하는 것 같습니다.
관음전앞에서 본 송광사 전경
지장전으로 가는 길에 만난 마로니에
천주교 박해시절,
박해를 피해 이쪽 산간으로 숨어든 신자들을 송광사 스님들이 따뜻하게 맞아주었다고 합니다.
자신들도 힘들고 어려웠지만 그들에게 양식과 의복과 도피처를 내어준 것이지요.
이러한 스님들의 마음에 답하는 의미로
천주교 신자들이 대웅전 마당에 마로니에를 심어주었다고 하는데
그 마로니에가 그 뿌리를 자꾸 대웅전 아래로 뻗어가서
그 나무는 제거하고 이곳에 새로 심었다 합니다.
요새는 종교화합의 상징으로 많이 거론된다합니다.
세심정
불어오는 바람에 마음을 씻고...
지장전
1999년 신축하여 지금의 극락전인 명부전에 모셔져 있던
1640년에 만들어진 소조지장보살상과 시왕 등의 권속을 옮겨 봉안하였습니다.
흙으로 빚어 조성된 지장보살은 나무로 만든 연꽃무늬 대좌 위에 모셔져 있습니다.
지장보살은 지옥의 중생이 모두 구제되고
한사람도 지옥으로 가지 말기를 바라며
지옥중생이 모두 성불한 다음에 성불하겠다는 서원을 세웠지요.
지장전과 극락전 사이에 모셔진 아미타부처님
49재를 끝내고 망자에 속한 나머지를 소각하면서
부처님의 가피를 빕니다.
극락전
원래는 명부전이었으나 신축된 지장전으로 지장보살 외 권속을 옮긴 후
극락전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바퀴 돌아봅니다
천왕문 옆에 자리잡은 아주 오래된 돌수조
그 안에서 단풍이 불타고 있습니다.
뒤에 있는 바위에 아주 희미하나마 마애의 흔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워짐이 아쉬워 작은 불상을 하나 모셨습니다.
세심정앞 천진동자
참 웃을것도 없는데 무엇때문에 웃냐고 타박을 주다가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맙니다.
약사전이었는데 지금은 요사채로 쓴다고 합니다.
1636년(인조 14) 벽암(碧岩) 스님이 중창하였고,
1814년(순조 14) 정준스님이 중수하였습니다.
하여간 가지 말라는 이야기
이 뒤로 가야 개창비와 부도군을 볼 수 있습니다만...
못가는 거지요 뭐
개창비는 이 절집이 처음 개창(開創)되었음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형태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올리고 용을 새긴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고
비의 앞면에는 비 이름과 비문이 새겨 있는데,
고려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전주 종남산을 지나다가 절터를 잡아놓고
제자들에게 사찰 건립을 당부했다는 내용과,
보조국사에서 벽암대사에 이르는 스승과 제자의 계보가 주된 내용을 이루고 있습니다.
신익성(申翊聖)이 비문을 짓고,
선조의 여덟 번째 아들인 의창군 광이 글씨를 썼으며,
1636(인조 14)에 세웠습니다.
그렇다는 이야기이지요.
절집이 자꾸 중창불사를 하니 좋게 말해 오밀조밀해지고
스님은 늘어 요사채는 부족하고
그러다 보니 공간이 더더욱 협소해지고
그렇게 관광사찰이 되는 것이지요.
게다가 이곳은 평지사찰이라 길만 알려만 지면 사람이 끝없이 올 곳입니다.
사실
이곳으로 오면서
이곳만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길 바라는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만..
말이 않되는 말이지요.
대웅전 뒤로 하여 나한전으로 갑니다
나한전 정면을 보면 작은 문이 2개 배치되어 있습니다.
일반 초가집 같이 정겨움을 느끼게 하지요.
이곳 나한전은 효종 7년(1656) 벽암 각성대사가 송광사를 다시 지을 때 같이 지은 것입니다.
내부에는 목조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16나한과 오백나한, 인왕상, 동자상, 사자상을 모시고 있습니다.
삼성각
비석
사람이름인듯 화주들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던 것 같습니다만
글자가 거의 마모되어 갑니다.
이런저런 아쉬움에 경내를 다시 한번 돌아봅니다.
아하 여기가 목적지가 이니지요.
여기가 오늘 여행의 시발점인데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네요.
절집을 나섭니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다원을 들러 차한잔 하려 했습니다만 ..
오늘은 이만 발길을 돌리는게 참 좋은 인연이라며 문이 잠겨 있습니다.
고인돌쪽으로 가다가 발길을 다시 돌립니다.
절집앞 문닫은 가게 앞에서 담배한대를 피워물고 다리를 건넙니다.
송광사를 되돌아 보고
다시 순례길에 들어섭니다.
F. Mendelssohn
2. Adagio
3. Allegro mol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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