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희의 ‘혼불’ 중 한구절을 옮깁니다.
"전주 부성 동쪽머리 만마관 골짜기에서부터 흐르기 시작하는 전주천 물살은
좁은목을 지나,
강모가 내내 하숙하고 있던 청수정의 한벽당에 부딪치며,
각시바우에서 한바탕 물굽이를 이루다가
남천교, 미전교, 서천교, 염전교를 차례차례 거쳐서 흘러내리며
사마교를 지난다."
그 전주천이 한벽당에 부딪치기전
최명희의 혼불의 배경 보다는 한참 뒤인 1977년에 만들어진
승암교 아래를 지납니다.
지금은 내가 밟고 서있는 자리에 새로운 승암교가 만들어져
저 다리도 사람과 차량 모두 통행이 드믈어 졌습니다.
그다리 넘어로 승암사가 보입니다.
도로표시판에 쓰여있는
진묵성지전통사찰 제 87호 승암사
올라가는 돌계단옆에 중바우산 승암사라고 표석을 세워놨습니다.
중바우는 이곳 수행하는 스님의 모습이라는
바위 벼랑으로 된 산의 이름이기도 하며,
동시에 그 산 아래 자리잡은 마을 이름이기도 합니다.
산 중턱에 동고사가 있고 하단 전주천변으로 중바우절이 있습니다.
중바우절은 꽤 오래된 절이라 합니다.
절집 규모는 작지만 2기의 영험한 돌미륵이 있고 아주 청량한 약수가 있어
전주의 많은 아낙네들이 전주천을 건너와 불공을 드렸다고 합니다.
돌계단을 올라가면 만들어 세운지 얼마 않되는 듯한 종루가 나옵니다.
승암사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 종루아래로 들어가서
종각을 돌아봅니다.
다가가 보았습니다만
승암사에는 고려시대 범종이 전한다고 들었는데
다른 곳에 보관하는지 최근에 주조한듯한 승암사라고 한글로 크게 쓰여있는 범종이 달려있어
그냥 돌아나오며
대웅전을 봅니다.
승암사는 876년(신라 헌강왕 2) 도선(道詵)이 창건하였다는
한국불교태고종에 소속된 사찰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전북 지방에서 가장 이름난 고승인 진묵대사가
이곳 진묵굴에 머물며 수도하였으며
1592 년(조선 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740 년(영조 16) 용담(龍潭)이 중창하였다고 하는데
중창당시 흔적은 전혀 남아있지 않습니다.
지금의 대웅전은 1983년에 지었고,
10년전인 1995년에 중수하였다고 합니다.
창살이 2분합 교창살로 되어 상당히 아름답습니다.
대웅전 앞에 절집의 안내판은 없고
소장불서에 대한 안내판이 서있습니다.
승암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불서는 묘법연화경으로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신 근본의 뜻을 밝히신 경전으로
1443년에 효령대군 등 많은 왕실의 종친들이 세종대왕의 수만세와
태종대왕의 극락왕생을 부처님께 빌기위해 간행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금강경오가해는 1558년에 간행된 불서로서 현존하는 판본이 매우 희귀하며
자료적 가치가 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북유형문화재 제 209호(2006..6. 16.)로 지정되어 있으며
승암사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습니다.
대웅전 측문으로 들어가다가 본 삼단물통
고무다라이가 아주 적절한 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래서 포대화상이 더욱 흡족해 하는 것 같습니다.
대웅전안으로 들어갑니다.
석가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입상과 보현보살입상이 협시하여 계십니다.
신중탱
승암산 중턱 동고사에서 1958년에 옮겨온 것이라고 합니다.
측벽에 반야용선
불기 2534년(1990년)... 그러면 중수하기전 부터 그려져 있던 그림이네요.
그 시기에 단청을 새로하면서 그렸다고 쓰여 있습니다.
단청을 봅니다.
도깨비와 학의 문양이 있네요.
수각옆에 석함이 있고 그 안에 돌부처가 계십니다.
봉보주수인을 하고 있는데
고려시대미륵불상이라 하나 정확한 조성 연대는 알수 없다고 합니다.
한명의 석인이 주변에서 돌부처를 호위하고 있습니다.
만응대종사공덕비
1943년 주지로 부임하여
1955년 봉수(鳳秀)선사와 함께 한벽선원(寒碧禪院)과 승암강원(僧巖講院)을 세우고
지역 불교계에 선풍을 일으켰던 분이라 합니다.
한국전통관광사찰정보에는 고려시대,
한국사찰문화재정보에는 조선후기에 조성된 석불 또는 석인상이 있다는 돌탑으로 갑니다.
만응대선사 부도
석탑이 양쪽에 호위하여 서있는 돌탑이 있습니다.
그 앞으로는 어느 화주의 부도가 있습니다.
돌탑속 감실에 계시는 돌부처
얼굴, 특히 코부분이 많이 마모되어 있습니다.
석불의 코부분 돌가루를 가지면 아들을 난다는 속설 때문이겠지요.
그 돌탑 뒤 한갓진 곳에 역시 조성시기를 모르는 여래상이 한기 서 있습니다
숲으로 난 사잇길로 살림집이 보입니다.
가지 않으려 하다 그 옆에 전각이 한채 보여 다가가 봅니다.
전각은 현판도 없고 문이 잠겨 있습니다.
전각 앞 계단옆 한쪽에 한기의 석인이 서 있습니다.
사립문을 지나 돌아내려갑니다.
대웅전 주변을 잠시 왔다 갔다 합니다.
진묵대사가 수도하였다는 진묵굴은 어디 있는 걸까?
완주 봉서사에는 진묵대사의 흔적이 부도로 남아있습니다만
이곳은 진묵성지전통사찰이라 하면서
진묵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음이 많이 많이 아쉽습니다.
그리고 고려시대범종은 어디에 있을까?
궁금해 하며 종루를 보다가 대웅전앞에서 몸을 오른쪽으로 돌립니다.
대웅전 왼쪽뒤로 절집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한 교회를 만납니다.
중바우마을을 지납니다.
옛방식으로 쌓여 있는 돌담이 정겹습니다
공공예술이라는 표방하에
농촌마을환경개선을 위해 시작된 '마을담장 벽화그리기`가 이마을도 지나갔나 봅니다.
몇년전 이러한 운동이 시작되었을때
정말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보냈습니다만
지금은 하는구나정도입니다.
그림그려 환경을 밝게하는 것도 물론 의미가 있지만
삶의 질의 개선이 없이 그림만 덩그러니 그려 놓고 그 뒤 사후관리가 전혀 않되다 보니
해당 마을 사람들도 처음에는 기대에 들떠 있다가
결국 동물원 원숭이가 되어버린것이라고 자조하고 맙니다.
공동체 복원...생활에서 혁신..
다 그저 표방하는 이야기 일 뿐입니다.
사실 공공예술이라는 것의 정의 부터가 그 주체가 누구냐가 명확치 않습니다.
공공예술이란 예술생산자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대사회적 책무를 가지고
공동체의 집합적인 사상의식과 생활정서에 바탕을 두고
'생산의 문화 예술'을 꿈꾸는 개념 이다라고들
통상 이야기하는데
그 예술생산자가 예술 그 자체 말고
다른 어떤 수단으로 대사회적책무를 완수할 수 있을까요?
결국 관의 지원이 후속되어애 한다는 것이 되는데 이게 또 애매합니다.
결국 재개발을 조금 늦춘다.
재개발전까지 노후 담벽등을 깔끔하게 유지한다
정도에서 멈추는 것이지요.
이제는 처음부터 그러한 한계를 명확히 하고
마을 특성에 맞게 마을 주민들이 주도하는
공공예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승암교로 내려왔습니다.
다리를 건너 약수터로 갈까?
그럼 그곳에서 보는 이 뒷산이 정말 스님의 모습일까등을 잠시 생각하다가
다리를 건너지 않고 하천변을 걷습니다.
나무에 붙어 있는 안내판에 의하면
이 하천은 수변생태공원으로 조성된 지역이며
전주시와 한국 SGI간의 결연된 하천입니다.
한국 SGI
예전에는 창가학회라고 하던 곳이지요.
맞나? 맞을 겁니다.
남묘호렌게쿄로 대표되는 불교학회입니다.
1960년대경에는 우리나라에 선풍적으로 퍼졌던 일련정종을 생활화한 종교단체였었는데
일련정종의 교주라 할 수 있는 이치렌성인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일련정종과 갈라서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불교에도 종파가 여렀있지만
일본불교는 우리보다 종파가 더 많을 겁니다.
그중 이치렌 성인과 관계있는 곳이
일련종, 일련정종, 그리고 SGI라고 하는 창가학회가 있지요.
차이는 일련종은 이치렌성인을 인정하지만 부처가 아닌 보살이라 하는 거고,
일련정종은 이치렌성인이 부처라고 하지요.
SGI는 이치렌본불론은 같으나 어떤이유에서인지 파절하여 갈라져 있고
스스로를 종교 그 자체가 아닌 종교학회라고 합니다.
이렇게 지방자치단체와 손잡고 생태공원조성등의 사업에 나서는 것을 보면
포교 또는 전교의 능력이 대단한 듯 합니다.
참 안내판도 많습니다.
전주시 생태관광종합안내도
전주천 생태 문화지도
한벽교에 앞이 막혀있는 한벽당이 보입니다.
뒤돌아 보는 두개의 승암교
자연생태박물관 주변 답게 아름다운 꽃들이 많이 심어져 있습니다.
꽃길을 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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