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군에는 세곳의 향교가 있습니다.
고창군 무장향교
세워진 순으로 기술하면 1420년(세종2)에 무장향교가,
1512년(중종 7)에 고창향교가,
1621년(광해군 13)에 흥덕향교가 창건되었습니다.
향교는 현단위 이상에 설립되니까
고창군은 무장, 고창, 흥덕
이 세 현이 합쳐서 지금의 고창군을 이루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특히 이중 무장은 1401년(태종1)에 무송현과 장사현을 통합하여 진을 두어 병마사가 겸무하기도 하였습니다.
세종실록 지리지를 보면 세고을 중 무장현은 호수 356호, 인구 2,033인이었고,
흥덕현은 호수 216호, 인구 1,051인,
고창현의 호수는 164호, 인구는 974인이었습니다.
1895년 지방제도의 개편에 따라 무장현은 군으로 승격되어 전주부에 소속되었다가
이듬해 전라남도에 편입되었고,
1906년 다시 전라북도에 편입되었다가 1915년 고창군과 합병되어 면이 되었습니다 .
흥덕현은 1895년에 군(郡)으로 승격되었으나
1915년 행정개편에 따라 고창군과 합병하며
흥덕면과 성내면으로 나누어졌습니다.
가장 작은 고을이었던 고창현은 1895년에 군으로 승격된후
무장과 흥덕을 병합하여 고창군이 되었습니다.
무장향교는 1420년(세종 2년)에 지어졌으나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0년(선조 33)에 다시 지었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1842년(헌종 8)에 중건한 것이라 합니다.
향교내에 크게 보이는 은행나무는 2006년 기준 421살이 되었다 하고
당시 수고 20m에 둘레는 5m라고 합니다.
옆의 관리사를 지나 향교로 들어섭니다.
내삼문
당연히 내삼문이 잠겨있어
개구멍으로 카메라를 넣어 대성전을 한방 찍고 왔습니다.
향교에서 출발하자 마자 바로 차를 세워달라고 부탁합니다.
임난공신金公軸의적비
임진난때 의병을 일으켜 선무원종일등공신이 되신
金軸선생의 사적비입니다.
충남홍성(당시 홍주)출신이지만
아우와 함께 가솔을 이끌고 무장 청해방 방축동으로 이주해와 거주하시다가
난이 발발하자 아우와 조카를 이끌고 창의하여 많은 공을 세우신 분입니다.
인근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銘의 마애가 새겨진 바위가
아마 이분과 관계가 있을 듯 합니다.
무장향교옆 논둑길을 지나면 고인돌처럼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습니다.
이 고인돌에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는 통제사 이순신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들렀다 온다는게 다음 갈곳이 급해서인지
점점 굵어지는 빗줄기에 놀라서인지
깜빡했습니다.
다음에 다시 가고자하는 기약으로 자료사진을 올립니다.
충현사중건비입니다.
충현사는 고창군에서 가장 오래되었고,
오직하나뿐인 사액선원입니다.
祠宇로는 全國에서 일곱째 賜額이였다고 합니다.
중건비에 의하면 원촌리 漢峙(지금의 망치산) 南쪽에 있었는데
정유란에 소실되어 그 후 이자리로 옮겨왔습니다.
당연히 문이 잠겨있어 담넘어로 사우를 찍었는데
난중에도 불타지 않았다는 사액현판은 안에 넣어놨는지 현판이 없습니다.
石灘 李存吾先生, 眉巖 柳希春先生 그리고 主唱하신 警菴先生을 배향하고 있습니다.
이중 저의 관심을 끄는 분은 유희춘선생입니다.
선생은 1547년 벽서의 옥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고
1567년 선조즉위시 사면되어 직강 겸 지제교에 재등용되었습니다.
경사와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미암일기외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16세기 호남사림을 대표하는 인물로 손꼽힙니다.
1575(선조8)이조참판을 지낸 후 1576년 사망하셨는데
이러한 역사적 사실 보다
부인이신 송덕봉선생과의 스토리가 너무나 재미있습니다.
좌부승지 시절 승정원에서 숙직을 하던 남편이
궁궐 안에 있는 숙직실은 따뜻하지만 집에 있는 부인은 추운 방에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걱정이 되어
모주와 함께 자신의 사랑이 가득 담긴 시를 지어 보냅니다.
이에 아내 송덕봉도 이에 화답하는 시를 지어 보냈지요.
그시를 한번 보면
雪下風增冷(설하풍증랭) 눈 내려 바람 더욱 차니
思君坐冷房(사군좌랭방) 냉방의 당신 모습 생각났다오.
此醪雖品下(차료수품하) 이 술이 품질은 변변찮으나
亦足煖寒腸(역족난한장) 찬 속을 덥히기는 충분하리다.
부인이 답하길
菊葉雖飛雪(국엽수비설) 국화잎에 눈발이 날린다 해도
銀臺有煖房(은대유난방) 은대에는 따스한 방이 있으리.
寒堂溫酒受(한당온주수) 추운 집서 따스한 술을 받들어
多謝感充腸(다사감충장) 고맙게도 뱃속을 채웠답니다.
(*승정원을 줄여 정원(政院)이라고 하거나, 은대(銀臺) 또는 후원(喉院)이라는 별칭으로 불렀습니다)
연꽃이 가득한 죽산제, 남산제, 관우제를 지나 선운산으로 갑니다
가는길에 유희춘, 송덕봉부부의 주고 받은 시를 하나 더 생각해 봅니다
어느날은 부인이 낮에는 꽃구경을 하고 달 뜬 저녁에는 거문고 울리면서
함께 술 한 잔 마시자고 시를 지어 건네자
남편은 책 봐야 한다며 거절하는 시늉을 합니다.
부인이 한수먼저..
봄바람 아름다운 경치는 옛부터 좋은 것이요.
달아래 거문고 타는 것도 한가지 한가로움이지요.
술 또한 근심을 잊게 하여 마음을 호탕하게 하는데
그대는 어찌 책에만 빠져있단 말입니까?
남편이 농하며 답하길..
뜰의 꽃 흐드러져도 보고싶지 않고
음악소리 쟁쟁 울려도 관심없어
좋은 술 어여쁜 자태엔 흥미 없으니
참으로 맛있는 건 책 속에 있다네..
돌베개에서 나온 <조선의 여성들, 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나 비범했던>이라는 책과
문학동네에서 나온 부부라는 책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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