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걷기학교가 끝나고 전주로 돌아올때
전주에서 일박하고 내일은 군산을 가려했는데 ..
걷기학교에서 후미통제를 책임지셨던 류재훈 선생이
방학이라 시간이 있다고 본인이 사는 고창에 가지 않겠냐고 합니다.
불감청고소원.
류선생의 차를 타고 고창으로 와서 뻔뻔하게 저녁과 잠자리까지 제공받았습니다.
고마움을 언젠가 갚아야지 하고 잊지 않으려 글로 남깁니다.
그런데 더 고마운 것은 오늘하루 고창을 안내해 주겠다고 합니다.
고창읍내는 처음 들어와 봅니다.
장성쪽으로 해서 장성에서는 축령산, 고창에서는 문수산이라 하는 산을 한번 올라가봤고
정읍쪽에서 들어와 선운사를 두번 다녀왔고
부안군쪽 곰소만에 왔다가 인촌생가를 잠시 다녀온 게 아마 전부일겁니다.
밤새 비가 엄청왔습니다.
숙소에서 뉴스를 보니
특히 이쪽 전북지방에 집중호우가 내렸다 하고
내가 가고자 한 군산은 물난리가 나서 엉망이랍니다.
그리고 이곳도 비가 계속 내립니다.
하지만 나는 움직일겁니다.
안전을 걱정해서 망설이는 류선생에게 거의 떼를 쓰다시피 함니다.
먼저 문수산을 가기로 합니다.
고창천을 건넙니다. 저쪽으로 모양교가 보입니다.
고창의 옛 지명 모양현(牟陽縣)에서 따온 것이지요.
모는 보리, 양은 태양을 뜻합니다.
보리가 잘 자라는 고장이라는 뜻이었을 겁니다.
다리를 건너자 마자 차를 세워달라고 했습니다.
"읍내를 들어서려고 하는데
노목(老木) 수십에 싸인 돌담 안에 높다란 석주(石柱)가 서 있음을 보고,
오래 떠났던 자모(慈母)에게 달려드는 것처럼 무의식중에 그리로 뛰어갔다. "
1952년 육당의 글 '심춘순례'에 육당이 고창읍내를 들어가자 마자 느낀 것을 쓴 부분입니다.
지금의 내모습입니다.
계속 육당의 글을 옮기면..
"하부(下部)는 모지고 위로 차차 빠아 올라간 너덧길 되는 반(半)자연 석주요,
위에는 탑 처마처럼 가공한 꼭지 있는 석개를 덮었는데,
으례 검줄을 둘렀고 앞에 황토까지 폈으며,
그 두짝 귀에 풍경을 달아서 뎅그렁 거리는 소리가 나는 족족 사람의 마음을 성성(惺惺)케 한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과연 마슬마다 선돌을 보아서 더욱 거기 대한 소신을 굳혔었지만,
이렇게 거룩하고 훌륭한 그것을 만날 줄은 뜻하지 못하였다.
한 시읍(市邑)-마한 옛 식으로 말하면 한 국도(國都)가 되는 이런 곳에는
이만큼 장엄한 선돌이 대개 당연 필연한 신앙적 표현으로 있었을 것이다."
육당이 쓴 것과는 달리 지금은 황량한 공사장 한가운데 덩그러이 서 있지만
내마음을 확 잡아 끈 그것은...
고창 오거리 당산 중 중리 당산입니다.
고창오거리당산이 처음 세워지게 된 시기는 알 수 없습니다.
고창문화연구회의 이병열선생의 글을 옮겨 봅니다.
" 조선조말 대홍수로 3곳의 당산이 사라지자
1803년 2월과 3월에 당산을 세웠다는 것은
당간(幢竿, 흥덕당간지주를 말하는 듯 )의 명문에서 알 수 있다.
이 당시에 세워진 당산은 화강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당산에 삿갓을 씌워 만든 것이 특징이다.
삿갓을 씌운 이유는 입석을 무겁게 하여 물에 떠내려가지 말라는 뜻이다.
또한 갓의 모양이 중리당산은 원이고, 중거리와 하거리는 사각으로 만들었다.
원과 사각으로 각각 만든 것은 중리는 고창의 오방 중 중심이기 때문에 원으로 만들었다. "
이병열 선생은 이글의 앞부분에 이 당산이 새로이 만들어진 배경을 쓰셨습니다.
옮겨 봅니다.
"고창은 행주형(行舟形) 또는 파주형(波舟形)으로 불린다.
행주형의 풍수형국은 많은 고을에서 불리는 형국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파도치는 바다를 항해하는 배로 비유하는 파주형은 그 예를 찾기가 어려운 형국으로,
고창고을이 인간이 살아가기에 얼마나 척박한 곳인지를 단적으로 표현한다고 하겠다.
대표적인 것이 조선 정조 말인 1790년에 있었던 고창의 대홍수를 꼽을 수 있다.
당시 홍수로 고창의 오거리당산 중 중리, 하거리, 중거리 당산이 쓸려가고,
겨우 상거리와 교촌리 당산만 남았다.
홍수로 인한 수재와 질병으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조정에서는 이를 빨리 수습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자 고창읍민들은 수재의 원인이 아전들의 지나친 갈취로 하늘이 노해 그렇게 된 것이라며
아전들에게 당산을 조성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고창의 아전들은 그들이 시주와 화주(化主)가 되어 쓸려간 중리, 하거리, 중거리의 당산을
순조 3년인 1803년에 완성하여 설치하였다."
그래서 상거리와 교촌에 있는 당산은 자연석 몸체의 당산이고
없어져 다시 세운 중리, 중거리 그리고 하거리 당산은 인공신체로 다듬어진 삿갓당산입니다.
고창오거리당산은 1969년 12월에 중요민속자료 14호로 지정되었다 하며
1803년 정월대보름 부터 중앙에 위치한 중리당산에
고을의 전체주민이 참여하여 당제를 올려 왔다합니다.
일제강점기와 개발독재기에는 미신이라는 구실로 탄압되어 은밀하게 당제를 지내오다가
1981년부터 고창오거리당산제라는 이름으로 축제를 벌입니다.
지금 이 당산에 둘러있는 줄은 당산제 줄다리기에서 이긴 팀의 줄을 이용 당산에게 옷을 입혀드린 것입니다.
한군데만 더 가보자고 부탁합니다.
중거리 당산입니다.
안내판을 읽고..
중거리 할아버지 당에는 '천년완골흘연진남(千年玩骨吃然鎭南)' 계해3월이라는 각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
굳이 해석하면 누천년 어리석은 남쪽 백성을 바르게 이끌다라는 뜻이되는데
마지못해 없어진 당산 3기를 다시 세워야 했던 아전들의 심통이 그대로 들어나 있습니다.
그러나 민중들은 진짜 어리석어서 인지
알고도 속는 것인지 그냥 용인해 줍니다.
금줄을 둘렀으니 당제를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적 금줄인지 삭아가고 있습니다.
나머지 세곳의 당산은 빠른 시간안에 다시 와서 돌아보기로 하고
문수산 문수사를 갑니다.
왜 문수산으로 데리고 가 달라고 부탁했느냐고요?
간단한 이유입니다.
고창에서 이곳까지 대중교통이 없습니다.
소규모 산행에서 갈때는 택시를 타고 간다해도 올때가 문제입니다.
그렇게 지체하다 보면 돈은 돈대로 쓰고 다른 곳을 제대로 가보질 못하지요.
그래서 몇번을 가보고 싶었는데 건너편 축령산으로만 올랐습니다.
아름다운 숲을 자랑하는 문수산 문수사입니다.
천연기념물 463호로 지정된 수령 200여 년의 단풍나무 수십 주가 군락을 이루고 있습니다.
산문에는 청량산 문수사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산이름이 무었일가요?
건너편 장성에서는 축령산.. 고창에서는 문수산.. 절집앞에 오면 청량산..
마음에 드는 이름을 택하시랍니다.
청량산이라고 쓰는 이유는
백제 의자왕 4년(644)에 자장이 지은 사찰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어서 일겁니다.
이 절집의 창건 설화는
당나라 청량산에서 열심히 기도하던 자장율사가 꿈속에서 문수보살을 만나 부처님의 뜻을 깨닫고 돌아온 뒤
땅의 형세가 당나라 청량산과 비슷한 곳에 절을 짓고 문수사라 이름 지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호남 제1문수도량이라고 큰 돌에 새겨놨습니다.
문수사로 들어가는 길은 수백 년 묵은 고목들이 빽빽하게 우거져 짙은 숲 그늘을 드리웁니다.
늦가을로 접어들면 붉게 물든 단풍 터널이 형성되어
아주 매력적이고 고혹적인 자태라고도 합니다만
지금도 충분히 매력적입니다.
이곳에는 단풍나무 외에도
고로쇠나무, 물푸레나무, 서어나무 등이 하늘과 땅과 사람을 연결시켜주고 있습니다.
그래도 단풍나무숲이 더 멋있나 봅니다.
관리사무소에서는 단풍나무 숲만을 자랑합니다.
절집으로 가는 길입니다.
작은 계곡
어느스님의 공덕비앞을 지나...
내리는 비에 씻기는 푸른 물감이 뚝뚝 떨어지는 돌계단을 올라갑니다.
계단이 끝나는 지점
앙증맞은 글자체로 쓰여진 불이문을 지나
부처와 중생, 생과 사, 만남과 이별
이 모두의 근원은 하나라는 해탈의 경지로 들어갑니다.
강당으로 쓰이는 만세루 측면에 문수사라고 현판이 붙어 있습니다.
그 아래 시화 몇점. 그중 하나
산사...중에서
숲은 그 숲이오
햇살도 그 햇살이오
청량바람 가득안고
돌계단을 올라서니
빛바랜 추녀끝에
풍경소리 은은하네...
몸을 돌려 절집마당에 섭니다.
대웅전
안내문을 참고하고..
그런데 이해가 안가는 것은
신라의 자장스님이 이절을 지었다면
그당시 이지역은 백제영토인데...
종교에는 국경이 없다지만 그것은 조금 무리가 아닐까요?
주불인 목조석가여래의 왼쪽에는 대세지보살이, 오른쪽에는 관세음보살이 계십니다.
문수사창건기(1758) 및 고창현취령산문수사한산전중창기(1843)의 기록에 의해
1653년 매적당 성오대사가 대웅전을 창건한 후
그 다음해인 1654년 조성되었다고 알려져 왔는데
최근 중앙 석가모니불의 복장에서 조성기가 발견되어 1654년에 조성된 것이 확실해졌다고 합니다.
또한 2001년도 삼세불상을 개금하던 중 석가모니불의 좌대 아래 부분에서
도광24년(1844) 5월 18일 해운당의 시주에 의해 중수한 기록이 발견되어
1844년 불상을 중수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문화재청 왈. 불상의 조성내력과 중수내용 등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
동 시대 불상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합니다.
신중탱
문수전은 대웅전 바로 뒤에 있습니다.
현판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라고도 합니다.
안내판에는 자장스님 이전에 지은것으로 보여진다고 쓰여있습니다.
안내판의 글과는 조금 다른 설은 1764년(영조 40) 신화화상이 문수사를 중창할 때
이곳에서 석불 1구가 발견되자 건물을 세워 안치하고 문수전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합니다.
현재의 문수전은 근대에 새로 지은 것으로
법당 안에는 조선 말기에 돌로 만든 문수보살입상을 안치하고 있는데
이 입상이 문의 방향과는 어긋나게 남쪽으로 향해 있는 것이 조금 특이하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문수보살상이라 하는 이석상의 공식명칭은
문화재자료 제181호인 문수사석조승상(文殊寺石造僧像)입니다.
돌로 만든 승려의 상이란 뜻이 되는데
옷의 형태나 머리의 모습 등으로 볼 때 승려상 같기도 합니다..
금륜전입니다.
산신각과 응향각의 현판이 함께 걸려 있습니다.
미륵상 뒤 칠성탱
독성탱
산신탱
그런데 향기가 모이는 곳
즉 스님들의 선방이거나 또는 요사채 또는 대웅전 관리채를 말하는
응향각 현판이 어떻게 산신각과 같이 있을 까요?
배움이 부족하니 궁금한 것은 많고
그냥 답답할 뿐이지요.
홍매화가 나를 보고 피식 웃습니다.
또 다른 궁금중
왜 산사에는 홍매화가 많을까?
유준화님의 시한수
천오백년 전 우리는
웅진성 중장골에 살았었지요
내가 백제 병사로 수자리 살러 떠나기 전 날
제발 살아 돌아오게 해 달라고
부처님께 기도하러 가자, 하면서
그렁그렁 그대의 눈에 눈물이 고였지요
황산벌에서 목이 잘린 나를 안고
다음 생에나 함께 하자고
감물드린 저고리에 피범벅 하던 당신
이승에서나 저승에서나
우리 서로 만나지 못하게 되면
일 년에 한 번은 계룡산의
일주문 지나 절로 가는 오리 길에서
황매화꽃을 들고 기다리자 약속 했었지요
일 년에 한 번 씩이라도
보고 싶을 때 접어 두었던 황매화꽃
보여주자 약속 했었지요
오백 년이 지나고 또 천 년이 지났는데도
사월이 오면 갑사 가는 길
노란 황매화 꽃잎이 가득 하네요.
명부전
문이 잠겨있습니다.
절집에서 명부전이 잠겨져 있는 것은 처음 경험했기 때문에
굉장히 당황했습니다.
이 명부전에는
도유형문화재 제208호 문수사목조지장보살좌상 및 시왕상이 봉안되어 있다고 합니다.
지장보살상 1구와 시왕상 10구 등 총11구의 불상입니다.
양쪽 인왕상이 없는 것이지요.
2004년의 어느날
제1진광대왕, 제4오관대왕, 제5염라대왕, 제9도시대왕 및 인왕상 2구 등 6구를 도난당하였고,
그 후 시왕상 4구는 다시 찾았으나
인왕상은 아직까지 찾지 못하여 현재는 11구의 불상만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듯 싶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절집에서 절집을 찾는 사람을 다 그리 취급해서는 않되는 것 아닐까요?
베롱나무가 세상 다 그렇게 착각하고 사는거랍니다.
스스로는 착한 사람으로 착각하고 남은 다 나쁜놈으로 착각하고...
베롱나무 자체가 착각의 나무이지요.
꽃 하나하는 하루살이 인생이지만
작은 꽃들이 연속하여 피기 때문에 사람들이 백일을 간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계속 나고 죽지만 인간은 계속 이어지겠지요.
그럼 인간이 영원히 사는 걸까요?
범음각
편액글씨가 예쁘네요.
이 길 옆에 있는데...저 건물이 요사채인줄 알고.. 빠꾸..
이리 가야 나오려나?
이 위에 있으려나?
아니면 이쪽뒤에...
엉뚱한 곳만 헤메다
신라와 고려시대 부도의 전형적인 형태인 팔각원당형으로 세워졌다는
전북유형문화재 제154호로 지정된 두개의 부도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 아쉬울때 돌아가자.
부도탑만큼 멋있는 나무
그렇게 세월을 말해준 나무와 인사하고..
다시 한번 노거수들이 만들어 내는 푸르름의 조합에 찬탄을 보내며
그 푸르름을 가슴 깊숙히 들여마십니다.
안녕 문수산, 아니 축령산, 아니 내 마음을 청량하게 해준 청량산아!
문수사에서 내려오는 길..
길 오른쪽으로 번듯한 재각이 보여 차를 멈춥니다.
막상 다가가 보니 아무 관리도 받지 못하는 재각입니다.
어느날 어느시기 정성을 들여 마련 했지만
꽤 오랜기간 사람의 발길이 닿지를 않은 듯 합니다.
지금은 꽤나 쑥스러워 보이는 중수사적비
돌아서는데
재각지붕뒤로 무슨거사의 묘비가 보여
뒤돌아 중수사적비의 내용을 다시 읽어 봅니다.
사적비 뒤로 이어진 산길
이길도 곧 없어 지겠지요.
무장읍성으로 갑니다.
Jakob L. F. Mendelsso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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