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우리강 우리산

달성군 도동서원

하늘타리. 2012. 9. 26. 20:33

대구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입니다.


도동서원 앞 이지요.

 

도동서원을 가기전에 낙동강 건너편 경북 고령군 개진면 오사마을앞 봉우리를 봅니다.

이 강물은 강건너 고대 대가야와 이쪽 지역 신라와 대립하는 국경이었습니다.


저 봉우리 옆으로 나루가 있었습니다.
이쪽 나루는 도동나루라 부르고 저쪽 나루는 오사나루라 불렀습니다.
그 나루터에는 물품과 사람이 쉴새없이 드나들었고 사람이 많아지니 당연히 주막거리가 생겨 흥청거립니다.
1970년까지 나루터옆 버드나무 흐드러진 곳에 있던 주막, 유목정이라는 곳은 지금도 그 이름이 지명에 남아 있습니다.
드나드는 사람이 많으니 정주민도 많아지고 그래서 마을 뒤 제석산 기슭에 있던 커다란 절터에 학교가 들어섭니다.
지금은 아마도 폐교직전이겠습니다만 한때는 5~600백명의 학생이 다녔다고 하네요.

왼쪽으로 약 2km를 강물따라 더가면

고려 때 서해와 낙동강을 통해 옮겨온 팔만대장경을 이곳 나루터에서 일일이 머리에 이고 해인사로 옮겼다고 하는 개경포

지금의 개포가 나옵니다.

강건너 봉우리 하나에 너무 많은 생각을 담는군요.

 

몸을 180도 돌리면 도동서원입니다.

 

도동서원앞 은행나무...일명 김굉필나무입니다.

400년된 나무라고도 합니다.

통상 나무의 나이는 부풀리는 데 여기는 그러지 않는 이유는

도동서원이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선생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외증손인 예학자 정구(鄭逑)가 세운 400년 전 건축물이고

서원 앞의 은행나무는 완공을 기념하여 정구가 손수 심었다고 했으니

서원나이보다 너무 많으면 않되니까요...

키 25m, 줄기 둘레 8.7m, 나무가지 길이 사방으로 30m라고 합니다.

남쪽의 굵은 가지는 땅바닥에 까지 내려앉아 있습니다.


이 나무를 볼 수 있다는것. 그 자체만으로도 고마운 일입니다.

 

도동서원입니다.

서원(書院)이란 명칭은 당나라 때 궁중에 설치되어 서적을 편찬하고 보관하던 집현전서원에서 유래되었고

 송나라 때부터 선현을 받들고 어울려 공부하던 본격적인 서원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이곳 도동서원은 한훤당 김굉필을 배향하기 위하여

외증손인  한강 정구(寒岡 鄭逑·1543∼1620)가 주축이 돼

1605년에 건축되었습니다. 


 한훤당 김굉필은 시호는 문경공으로 본관은 서흥입니다.
서울 정동에서 태어나서, 이곳 현풍에서 성장하셨고,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라 불렀다고 합니다.

학문적으로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통을 계승하여 성리학의 대가로 이름을 날리었습니다만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평안도, 전라도로 유배를 다니다가

갑자사화 때  51세 나이로 전라도 순천에서 효수형으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중종반정 이후 우의정으로 추증되고

광해군 2년에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선생과 더불어 조선 5현의 수현(首賢)으로서,

조선의 선비로서는 최초로 성균관 문묘에 배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1568년에 비슬산 자락 유가면 쌍계리에 서원이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보로동 사원으로 세워졌습니다.

1607년에 도동서원으로 사액되었고

비훼철 47서원으로 그 모습을 보존하고 있으며

강당과 사당, 담장이 보물 제350호로 지정돼 있읍니다.

 

입구에 있는 모든 안내판을 다 읽어보면서 좌에서 우로...

 

 

 

 

 

 

모든 비석을 보면서 우에서 좌로...

문경공 한훤당 김선생 5백주기 추모비

 

국역 신도비

 

도동서원 사적비

 

신도비가 있는 비각으로 왔으나

 

문이 잠겨있고...

 

수월루로 갑니다.

이곳 누마루는 1855년 만들어졌다 합니다.
아마도 그 무렵에 서원에 누마루 양식이 도입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에는 누마루가 없습니다.


사실 이곳 누마루는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불타버려 터만 있었습니다.

그러다 1973년 복원되었는데요

무엇을 근거로 복원하였는지는 모르나 다른 건물의 담박함에 비하여 지나치게 기교적이고

부재들이나 구조도 빈약하여 오히려 도동서원의 품격에 흠이 된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수월루 아래 외삼문으로 들어갑니다.

 

환주문

 

강당의 담장

 

이 담장이 중정당과 사당과 함께 지정된 보물의 일부입니다.
흙담에 박아놓은 소박한 장식들에 매료되어 보시지요

 

환주문(喚主門)

주인을 부르는 문이랍니다.

내 마음의 주인은 누구인가를 묻는것 같습니다.
논어 이인편(里仁篇)에서 나의 도는 하나로써 모든 것을 꿰뚫는다(吾道, 一以貫之)는 공자의 말씀에 따라,

수월루에서 환주문을 거쳐 사당까지 일직선상의 축으로 꿰고 있습니다.

 

강당인 중정당

도동(道東)은 道果東矣(성리학의  도(道)가 동(東)으로 건너오다)라는 뜻으로,

우리 나라의 도학은 정몽주에서 시작하였고, 김굉필 선생은 포은의 도학을 조선에서 다시 일으켜 세웠다는

도통론(道統論)에 바탕을 둔 글입니다.

 

강당 전면 처마 밑에는 퇴계 이황이 썼다고 하는...

사실은 퇴계 이황의 글씨를 집자하여 모각한 도동서원 현판이 걸려 있고

 

강당 대청의 뒷벽 중앙에는 모정(慕亭) 배대유(裵大維)선생이  경상감영 도사(都事)로 계실 때 썼다고 하는

선조의 사액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중정당의 중정(中正)은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 염계 주돈이선생이 지은 태극도설(太極圖說)에 나오는

聖人定以中正仁義, 而主靜, 立人極焉

.(성인은 알맞음과 바름과 인의(仁義)로써 모든 일을 정하였고, 고요함을 중심으로 해서 사람의 기준을 세웠다)에서 따왔다 하고

그 글씨는 숙종때 이조판서를 지낸 이관징(李觀徵)이 썼다고 합니다.


거인재(居仁齋)

 

거의재(居義齋)

동재를 거인재(居仁齋), 서재를 거의재(居義齋)라고  한 이유는

오륜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방위로는 仁(동), 義(서), 禮(남). 智(북). 信(중앙)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도동서원은 전체적인 방향이 북쪽을 향하고 있어 동재가 놓인 곳은 방위상으로는 서쪽이 되지만

강당에서 볼 때 왼쪽이 되어 동재가 됩니다.

주빈의 입장에서 볼때 왼쪽이 동쪽이고 오른쪽은 서쪽이라는 전통적인 방위 개념 때문이겠지요.

 

강당에 오르기전 둘레를 한바퀴 돌아봅니다.

 

계생대(繫牲臺)

제사에 쓸 희생물을 묶어두던 곳

 

 

 

 

도동서원 기단석 위에는 네 마리의 용이 서로 모습을 달리하면서 여의주와 물고기를 문 머리를 내밀고 있습니다.

공부하는 학생들이 용이되어 깨고 나오란 이야기일까요?

 

 

장판각

 

 

 

토담은 돌과 흙과 기와를 골고루 이용하여 튼튼하게 쌓아올리고, 암키와를 지붕으로 덮어 마무리 지었습니다.

 

 

 

사우로 올라가는 계단 좌우에 만들어 진 어떤 형상..

 

 

 

 

한바퀴 돌아와 환주문 뒤에서 북향을 보다가 몸을 돌려 마주한 중정당

정면 중앙에는 제례 때 솔가지나 기름통 등으로 불을 밝히는 일종의 조명대인 정료대가 있습니다.

그리고 강당 원주 상단에 흰 문종이를 완장처럼 둘러 수현서원(首賢書院)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기단의 높이는 1.4m랍니다.

앞면을 높이 쌓아올렸으며 돌은 하나하나 다듬어서 끼어 넣었습니다.

크기와 색깔을 달리하는 돌들이 서로 섞여 조금의 틈도 없이,

서로 잇고 짝을 지어 맞물려서 조화를 이루며 높은 기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강당에 올라 강당 내부를 두리번 거리고...

 

중정당 벽에는 많은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임금이 내리신 전교문(傳敎文) 현판이 걸려있고

 

중국의 주자(朱子)가 제정한 백록동규(白鹿洞規)의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중정당 창호를 통해 석축에 수직으로 잇대어 있는 사우의 정문인 내삼문을 바라 보고

 

그 계단을 올라갔다가.

 

꼭꼭 잠겨있는 자물쇠를 보고.

돌아섭니다.

 

사우에 있다는...

 한훤당 선생의 유시(遺詩)를 그림으로 나타내었다는...

 달아래 한가로이 떠있는 일엽편주를 그린 강심월일주(江心月一舟)라는 그림과

노송에 걸린 달을 그린 설로장송(雪路長松)이라는 그림을 못 보는게 아쉽습니다.
사우에는 못들어가게 하는 곳이 여기 뿐이 아니고,

어제 오늘일도 아니지만 그냥 아쉽네요.

문득 떠오른 강심월월주라는 그림이 그려지게 한

선생의 船上(배 위에서)이라는 시를 기억나는 부분 부분을 읊조리며 돌아섭니다.

 

찾아 올립니다.
船如天上坐 魚似鏡中遊 飮罷携琴去 江心月一舟
배는 하늘 위에 앉은듯하고 물고기는 거울 속에서 노는 듯 하다.

술자리 파한후 거문고 끼고보니 강에 내린 달빛이 배에 가득찼다. 
 

지오반니 플라티 / 오보에 협주곡 G단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