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제주 올레

제주 올레 12코스

하늘타리. 2012. 9. 14. 14:18

9월 8일 토

 

올레 12코스를 갑니다.


 

습관적으로 배낭에 똑딱이는 넣어 다닙니다만
수없이 다닌 길 또 찍을  일 있겠나 했는데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사진기를 꺼냅니다.

 

9개월만에 올레길 사진을 찍고 포스팅하는 거네요.

 

마을길 안 올레안내판

 

잘 정비가 되어 있길래

무슨 시설인가 유심히 봤더니

소규모 하수 처리장이랍니다.

 

 

 

나팔꽃

해가 뜨기전 꽃잎을 닫아야 하는데

비날씨에 조금 헷갈려 게으름을 피었습니다.

 

오른쪽으로 돌아서

 

 보리빝

아니다 보리가 아니다.

 

평지교회

예전에는 교육관을 개방

자판기에서 커피를 무상으로 빼먹게 하여 그 고마움에 찍었는데...

 오늘은 교육관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자판기에 전기가 꺼져 있습니다.

유효기간이 지났나 봅니다.

그렇지요. 한두명도 아니고...

 

지난 태풍의 흔적

 

이 멀구슬나무도 잎과 열매가 남은 게 없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새로이 순을 움티웁니다.

생명이라....

 사람의 손만 안타면 천년 만년 버티어 볼텐데....

 

예전에는 좌우에 묘지가 어지러이 있던 길

 길 주변 많은 묘지들이 정비되고 옮겨졌습니다.

 

신도연못 아니 도원연못인가? 

목적한 치수개선은 되었는지 모르지만 볼품은 더 없어 졌습니다.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면 주변과 조화되겠지요.

 

아니 제주에서는 벼밭이라 해야되나...

 

조밭

 

녹남봉이 보입니다.

 

녹나무가 많다하여 녹남봉이라 하였다 하는데

이제는 소나무가 많으니 소낭봉?

2009년도엔가 잃어버린 숲을 되찾는다고 몇억을 들여 일대 3㏊에 녹나무 1천500그루가 식재했답니다만...

 어디로 갔나 어디로 갔나 어디가?

 

그냥 놔두세요.

이거 심는다고 저거 베고

그래서 결국 이것 저것 다 버려놓지 말고

그냥 훼손만 하지말고 자연이 흐르는데로 보고계세요.

 

그리고 원래 이름도 녹나무완 관계없는 농남봉(峰)인데

녹남봉이라 하다가 다시 장목악((樟木岳)이 된 케이스지요.

입심좋은 사람들이 스토리를 만든겁니다.

 

 

룰루랄라 노래하며 숲길을 따라 굼부리를 돌아갑니다. 

 

 

 

저기는 산방산, 단산, 모슬봉 그리고 절울이...

 

모슬봉을 당기니 그 앞 가시악이 따라왔네요

동계 정온이 제주도 모슬포 땅에 유배와서 쓴 글 중에 파고미(바구미오름, 단산)는 용과 같고

가시(가시오름,가시악)는 범과 같다했는데 어디서 봐야 범과 같은지 항상 궁금합니다.

 

 

얕으막한 오름이라 굼부리도 얕으막하네요.

 

많은 꽃들을 만날텐데

요새 자꾸 이름이 헷갈리니

잘못된 이름을 부를바에야 눈인사만 하렵니다.

 

 

 

 

 

 

 

 

 

 

 

 

신도리 마을

 

 옛 신도초등학교

아이들은 떠나고 지금은 도자기 체험문화공간으로 바뀌어 있지요
이름은 산경도예
기존교실을 개.보수해

각종 생활도자기와 작품들을 전시판매하고 있는 전시실. 교육장. 작업실.

그리고 자기를 구워내는 정통가마시설이 갖추어져 있다고 합니다.

 

1982년부터 시작되었던 소규모 학교의 통폐합은

1993년 말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되었지요.
그래서 본교는 분교로, 분교는 폐교가 되어 갑니다.
그 이유는 나름 합리적이지요.
복식수업진행으로 인한 교육과정의 정상운영 곤란,

학생들의 인격형성에 미치는 부정적 성격,

교육재정 운용의 비효율성 등을 지적하고 있으며,

분교는 운영이 방만하여 교육재정 운용의 비효율성이 심화되고 있어서 그렇다네요.


학생이 없어서 학교가 없어지고 학교가 없으니 어린 학생을 둔 젊은 부부들은 또다시 큰지역으로 떠나고

그러면 그나마 분교도 또 없어지고 악순환은 계속됩니다.
게다가 이곳 제주의 학교들은 국가예산으로 만든 것 보다 더 많은 학교들이

재일교포들이 마을에 지원해 준 성금으로 부지를 매입하거나 

 마을주민들이 출연한 토지 등으로 학교를 세웠는데
폐교가 되었으면 마을사람에게 돌려주어야지

그 재산권을 교육청이 가져가서 임의로 처분을 합니다.

 

수도 없이 폐교되는 학교들이 문화와는 전혀 관계없는 곳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만

그나마 이곳은 잘 운영되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한번 둘러 보겠습니다.  

 

 

 

 

 

 

 

 

 

배움의 옛터

 옛터로 만든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세운 표석입니다.

 

누군가의 기념비

 

제남김선생일영기념비

 

언제적 활동하신 분인가를 보려 비석 뒷면을 봅니다만

연호부분을 쪼아 없에버려

그저 일제강점기려니 하고 짐작할 뿐입니다.

 

1900년대 전반의 거의 모든시기

일본왕의 연호를 어쩔 수 없이 써야 했다는 것은 어차피 다 아는 것인데

정으로 쪼아버리면 그 세월이 없어집니까?

 

 신도교회

 

어느 목회자의 선교비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난 어느 목회자가

1997년부터 이곳에서 사역을 하다 2006년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에게는 이세상 어디던 하나님의 땅이었겠지만

세속의 입장에서 볼때

객지에서 전교에 참 고생 많으셨겠습니다.

그러다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니  좀 않됬다는 생각에 잠시 머물렀습니다.

 

양용은이 살았다는 동네

어느날엔가 이부근을 지날때

이부근 어딘가에

양용은이 살았던 집이라고 표시까지 되어 있었는데

인기가 시들해 졌는지

보이질 않네요.

 

그냥 꾹꾹 몇장...

 

 

 

이제부터는 도원드르를 걷습니다.

 한때 1강정, 2도원, 3번네

또는 2번네, 3도원이라하여

제주에서 가장 풍족한 삶을 누렸다는 곳.

지금은 다 옛이야기지요

쌀을 생산해냈었지요.

단위면적당 보리나 조보다 엄청 많은 이득을 올리는 쌀을 생산해 냈으니

 인근마을보다 풍요로운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만

육지와의 교역이 활성화된 후 값싼 쌀들이 들어오자

결국 작물전환이 늦은 마을들은 주변보다 낙후해 집니다.

 

지금은 마늘이 주작물이라고 합니다.

 

마늘밭 옆 개똥참외

 예전에는 참 보기가 힘들었겠지만 지금은 밭옆으로 지천으로 흘러갑니다.

왜?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정 노란기만 보이면 따서 입에다 넣었지만

지금은 줘도 않먹으니

길옆에 지천일수 밖에 없지요.

 

마늘 영농조합

 

내부가 궁금해서 기웃거려 봅니다만

 

본다고 뭘 알아야지요 

공연히 뻘줌 해져서 돌아나옵니다

 

수월봉 그리고 당산봉

 

조금 당겨보고

 

뒤로 몸을 돌려 녹남봉도 불러봅니다.

 

올레사인은 않보이지만 오른쪽으로...

 

수월봉과 당산봉은 조금 물러 앉고

 

바다가 보입니다. 

 

도원바닷가 도원횟집에서 점심 한 그릇 맛있게 먹고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

바닷가로 내려갑니다.

 

바로 안내려가고

우물쭈물

 

바닷가를 보고

 

도로를 보고

 

 

어느길로 갈까 망설이다가

 

코스를 따라서 올레사무국에서 도구리길이라 이름붙인 바닷가길로 내려갑니다. 

 

발걸음 앞 보이는 바위마다 비슷한 형상을 생각해 내며 걷습니다.

 

 

 

 

 

 

 

 

 

 

 

 

 

 

 

 

 

 

 

 

 

 

 

도구리가 제법 크지요

도구리는 나무나 돌의 속을 파서 만드는 제주의 전통 그릇으로,

지금은 고무다라이등으로 다 대체되었으니 그 말이 생소합니다.

 

반바퀴정도는 돌면서 사진을 찍어주시고...

 

혹시나 문어 한마리 들어와 계실까 찾아봅니다.

 

바랠걸 바래야지...

 

바위가 만든 성벽넘어 바다를 보고

 

새로이 만들어 놓은 거욱대를 보며 길가로 올라섭니다.

그런데 이곳은 바닷가에서 오는 허함을 메꿀려고 거욱대를 세운것이 아닌가 봅니다.

 

 거욱의 방향이 바다를 등지고 있습니다.

해안도로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뽐내라고 세운것 같습니다.

 

제단같아 보이나 아무 시설의 흔적이 없습니다.

 

차라리 바닷가 이 바위가 큰 제단 같습니다.

 

올레길 개통후 개설된 쉼터

 

그냥 스쳐가지 말고

많이들 쉬었다 가세요

  

뽀뽀...

 

누군가의 학식자랑

 

쉼터에서 보는 원담

 

해수욕장으로 활용하려 했는데

해안도로의 영향으로 모래가 점점 날아갑니다. 

 

예전 신도잠녀들이 물질을 들어가고 나오던 곳

그 짐을 받으러 남자들이 경운기, 구루마끌고 가던 길이 이제는 흔적만 남았습니다.

 

 신도2리 포구

 

바닷가를 벋어나 다시 도원드르를 걸어갑니다.

아니다 한장드르인가?

아직은 도원드르입니다.

 

 

 바닷가에 보이는 또하나의 거욱대

 

저기서 조금 더 북쪽으로 가면

서귀포를 벋어나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한장동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당산봉이 납작 업드려 있습니다.

 

수월봉과 함께 당산봉을 봅니다.

 

벼를 길렀던 곳 답게 군데 군데 소류지가 있습니다.

한때는 상당히 고마운 곳이었지만 이제는 지저분하기만 합니다.

지금은 호스를 통해 공급되는 물을 살수기를 빙빙돌려 뿌리니 이제는 모기유충이나 서식하는 불필요한 곳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계속 메꾸어져나갑니다.

 

모아서 보고

 

갈라서 보고

 

 

멀구슬나무

잎은 다 떨어지고 열매만 남아 있습니다.

아까 그 나무는 열매를 못열었으니 기를쓰고 다시 순을 내서 꽃을 피워 열매를 맺으려 합니다만

벌써 9월

찬바람에 다시 꽃피우기전 잎이 질 겁니다.

같은 태풍을 맞았어도 열매를 보존한 나무는 나름 여유가 있습니다.

 

우리집 강아지가 업드려 있는 것 같은 당산봉을 보고

 

수월봉도 보고

 

다시 당산봉을 봅니다.

 

수월봉으로 올라갑니다.

 여기까지 오는 길이 예전과  많이 바뀌었습니다

밭은 엎어지고 있고

펜션을 짓는지 건설의 메아리 드높습니다.

 

맞아요. 돈이 될 듯하니 벌어야지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답니다.

결국 경관만 파괴하고 돈은 않되는 슬픈 결과가 너무 많이 일어납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일 무어라 무어라 말고 멀리 오름들을 봅니다.

산방산, 녹남봉, 모슬봉

 

누군가의 망사비

비문을 보아 미루어 추축건데

 형제가 함께 뱃일 나갔다 돌아오질 못했습니다. 

부모, 형제는 애닲음에 묘비라도 세웁니다.

 

다시 오름을 봅니다.

 

우리나라를 향해 불어오는

태풍을 맨 먼저 감지하는 고산기상대.

전망대를 올라가 볼까 말까하다 패쓰!!

 

수월봉 영산비

이 비석은 2000년도 인가...그 조금 지나서인가에 세워진건데

조금 더 윗쪽에 비석만 있다가 이쪽으로 자리를 넓혀서 옮겨세운 비석입니다.


2000년도 무렵 지역주민들이 이 부근에서 한쪽이 삐죽 나와 있는 비석한기를 발견합니다.
발굴해보니 조선 영조 33년(1757)에 당시 제주목사 남지훈에 의해 세워진 조선영산비(朝鮮靈山碑)인데

비문에 '이곳은 영산이므로 산 높은 부근에 밭으로 개간하는 것을 금한다’라고 적혀있었습니다.

그래서 원비석은 고산리 마을창고에 보관하고 그 내용을 기록한 비석을 다시 세웠습니다.
그 비석에 보면 이일대를 고근산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오름의 원이름은 노꼬메(높은오름)입니다.
이 오름은 해발고도가 78m에 불과한 오름인데 왜 높은 오름이냐고 물으신다면..

바다에서 보면 이오름이 옆 당산봉보다 더 높이 보이기는 합니다만 글쎄 왜 그랬을까? 하고 저도 반문을 해야 합니다...

미루어 짐작컨데는 대정현감 신재우가 이곳에 와서 기우제를 지낼만큼 신령스러운 산으로

지역주민들의 의식속에서는 가장 높은 오름이었을 겁니다.
옛지도와 탐라순력도 그리고 최근 일제초 측량지도 모두에 고산(高山) 또는 한자두(汗子頭)라고 나와 있습니다.

 노꼬메(높은오름)를 한자로 표기 고산이 되었고 마을도 고산마을로 불리우다가 고산리가 된 것이지요.
그런데 1910년 수월공 고지남의 숭모비가 이오름 중턱에 세워집니다.
그 후 부터 수월공봉우리라 하다가 수월봉이되고

여기서 입심께나 있는 사람에 의해 녹꼬와 수월의 전설이 만들어 집니다.
이렇게 부른들, 저렇게 부른들 이오름이 무어라 하지는 않습니다만..
그 연혁은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해서 또닥거려 봅니다.

 

비석뒤에서 먼 오름들을 봅니다.

 

정자도 당겨보고

 

정자로 향해가는 길에 있는 제주도 세계 지질공원에서 세운 안내판

그림에 의하면

원래 바다에서 올라온 둥그런 오름이었는데 다 무너져 없어지고 한 귀퉁이만 남은 곳에 우리가 있답니다.

 

차귀도를 보고

 

엉아래 길이라는 엉알길을 봅니다.

 

다시 차귀도를 보고

 

엉알길을 봅니다.

 

차귀도와 엉알길 그리고 그 뒤 당산봉을 불러 모읍니다.

 

밑으로 내려와 한의사 좌임관의 비석뒤에서 고산들을 봅니다.

 

한의사 좌임관선생 기념비
1964년 고산리 진태준이라는 분이 세운 비석으로

이곳 고산일대에서 십수여년동안 의술에 종사하며 은혜를 베푼 한의사 좌임관 선생을 기리는 내용입니다.

우리나라 韓醫師제도는 해방후인 1951년에 실시되었습니다.
그전에는 의생제도라는 것이 있었다 합니다.
일제는 1915년 의생제도 시행시 당시에 한의업을 하고 있던 사람에게 면허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한의학에 대한 체계적 전달체계가 없이 도제형태로 사승을 통해 한의사가 양성되자

이들을 의생이라 하면서 한지한의사로 면허를 주어 주로 무의촌에 근무하게 합니다.
해방후 1951년 9월25일에 국민의료법을 제정하면서 부칙으로

“본법 시행당시에 현존한 의생(醫生)은 이를 한의사(韓醫師)로 , 산파는 이를 조산원으로,  간호부는 이를 간호원으로 개칭한다”라고 하여

한의사 면허를 주었고 1974년도에 면허를 갱신 재부여하였습니다.
이곳 비석의 주인공 좌임관선생은 면허기록에 빠져 있는 한의사(韓醫師)입니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이 분을 정식 한의사로 인정않하는 경우도 있는데...
1974년 이전에 작고하셨던 분들은 면허번호 갱신시

“대한 한의사협회”, “보건복지부” 등의 정부 관련 자료에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 경우에 해당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단석주서각견우영세기념언 그 글처럼..

비록 붉은 글씨는 색이 바랬으나 영세기념만은 변치마시길 바랍니다.

다시 수월봉 수월정을 올려다 보고 ...

 

수월봉 안내판

 

이제부터는 차귀도와  와도를 나누어 이야기 합니다.

 

와도와 엉알길

 

엉알길 뒤로 수월봉기슭이 있고  그 한참뒤로 당산봉인데..

엉알길 바로 위에 당산봉이 있는듯 보입니다.

 

한장 더 찍고

 

올레코스를 따라가는 일행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혼자서 수월봉 기슭을 타고 옛사람들이 다니던 길을 이용 바닷가로 내려갑니다.

 

 

 

 

 

바닷가로 내려와 만나는 자연동굴 2.

첫번째 동굴은 그냥 지나쳐 왔습니다.

 

다가가서 보면

 

윗부분 암석은 버티고 있고

 

그 아랫부분은 해식, 풍식되어 물고인 동굴이 되었습니다.

 

여기는 인공동굴. 일제의 진지동굴로 쓰였던 곳이지요.

앞부분이 위에서 떨어진 바위에 의해 부분 괴몰되어 있습니다.

진지동굴 2

 

무너져 아래부분이 덮여있는 입구의 모습입니다.

 

진지동굴 3.

 

1,2,3,을 한꺼번에 돌아보고..

 

진지동굴 4, 5

 

진지동굴 4

 

진지동굴 5.

그냥 패쓰


또 누가 착각할라.. 이 번호는 내가 엉알쪽으로 가면서 만나는 순서대로 임의로 붙이는 겁니다.

 

자연동굴 4.

 

자연동굴 4의 내부

 

자연동굴 3.

진지동굴 5와 자연동굴 4사이에 있습니다만 접근하기 편하게 4부터 갔다 3으로 왔습니다.

 

다시 자연동굴 4의 앞입니다.

지질공원에서세운 화산재층과 화산탄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엉알길로 접어들어서 보는 안내문

 

엉알길을 걷습니다.

 

공연한 아쉬움에 뒤돌아 봅니다.

 

앞을 보고

 

다시 뒤를 보고

 

구부러진 길을 돌아드니 용이 입으로 물을 토해내고 있습니다.

 

그 옆으로 진지동굴이 두곳있습니다

 

이 곳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에는 자살특공용 보트와 탄약이 보관되어 있던 곳이라고 쓰여 있습니다만...

위 사진의 특공정은 아까 지나온 1,2,3에서 바로 바다를 이용 적선박에 접근할 수 있도록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용운천이라는 멋진 비석이 있는 샘입니다.

그러나 음용불가랍니다.

그렇죠. 이 벼랑바로위 기정에 있는 밭에 농약을 뿌리니 그 물이 스며들어 이리 흘러내리니까요.


허망한 물을 쏟아내는 거북이.

 

그리고 용

 

 

차귀도와 와도

 

지실이가 차귀도에서 분리되어 나옵니다.

독수리 또는 매가 하늘을 날기위해 날개를 펴기 시작합니다.

 

엉알길 전면으로 보이는 와도를 보고

 

지실이, 상여도, 막내장군바위, 죽도가 완전히 분리된 차귀도를 봅니다.

내가 잘못본건가?

사진이 잘못나왔나?

아니면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상여도와 죽도 사이 촛대처럼 삐죽이 올라온 바위가 막내장군바위라고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 뭐?

그게 없어졌다고 했었거든요...

 

금년 1월 지역신문기사에서 차귀도 막내장군 바위가 사라졌다 하던데...
그 부근에서 물질을 하던 해녀가 “작은오백장군바위가 없어졌다”며 고산리 어촌계장에게 알려와

어촌계장이 해양경찰서에 신고하고 신고를 받은 해양경찰이 조사해 보니 정말 없어진 것이 확인되었답니다.

그래서 그 무렵 차귀도 북서쪽 2Km지점에서 대덕연구단지 한국전력연구원이 파력발전기 실험을 하다가

막내장군바위를 파손한 것으로 추정한다는 기사를 보았지요.
말인즉슨 당시 파력발전 시험 수역은 국가지정 천연기념물 제422호 차귀도 천연보호구역 밖이었기 때문에 제주시에서 허가를 했는데

이게 강풍으로 좌초, 조류에 밀려 차귀도까지 흘러들었고

이것을 막내장군바위에 결박했으나 강풍으로 파력발전기가 크게 밀리자

막내장군바위 밑둥이 잘리면서 사라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답니다.
파력발전기는 이미 예인선이 예인하여 부산으로 철수하여서 알아보질 못한다네요.

파도를 이용 전력을 생산한다는 파력발전기가 파도에 밀려왔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제주시 문화재 담당은 파력발전 사용허가 자체를 몰랐고

강풍으로 파력발전기가 천연보호구역까지 침범한 사실도 몰랐고

 막내장군바위가 없어진지도 몰랐고

그냥 그런거지요 뭐...

그렇게 없어지면 없어지는건데

해녀가 쓸데없는 신고를 해서 여러사람 귀찮게 만들뿐이지요..

그런데 오늘 제눈에 보입니다.
내가 처음부터 막내장군바위를 잘못알고 있었는지...

잘라진 부분이 물속에 갈아 앉아 있는 것을 찾아서 복구를 한건지..
당시 지역신문에서는 설문대할망이 통탄할 일이라고 기사를 쓰더니 그 이후 후속기사는 찾을 수 없습니다.


 나에게는 지금 본 저 바위가 예전에도, 지금도, 내일에도 500장군중 막내의 모습입니다.

 

차귀도에 관한 전설에는 크게 두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현용준선생이 채록한 제주도 전설중에..
"옛날 오백 아들을 둔 설문대할머니가 계셨다.
식구는 많은데다 계속되는 흉년으로 오백 형제들은 날이면 날마다 식량을 얻으러 헤매 다녀야 했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오백 형제는 식량을 구하러 모두 밖으로 나갔다.

오백 아들의 어머니, 설문대 할머니는 큰 가마솥에다 아들들이 돌아오면 먹을 죽을 끓이는데,

워낙 큰솥이라 솥을 빙빙 돌며 힘겹게 휘젓다가 그 휘젓는 힘에 끌려 그만 가마솥에 빠져 죽고 말았다.

하루 종일 양식을 구하러 돌아다니다 몹시 배가 고픈 상태로 돌아온 아들들은 불러도 대답이 없는 어머니는 뒤로 제치고

우선 허기를 채우느라끓여져 있는 죽을 떠서 맛있게 먹었다.

그날 따라 죽은 유난히도 맛이 있었다.

그러나 유독 막내는 죽도 먹지 않고 언제나 돌아오면 반기던 어머니가 안 보이고 불러도 대답이 없는 것을 이상하다고 여기었다.

결국 죽을 거의 다떠먹은 솥바닥에서 뼈가 나왔다.

이제야 어머니가 죽을 끓이다 가마솥에 빠져 죽은 사실을 알아차린 형들은 울음바다를 이루며 그 자리에 쓰러져 말없는 바위들이 되었고,

막내는 혼자서 대성통곡을 하며 이곳 까지 와서는 말이 없는 바위가 되어 버렸다.

이 바위가 바로 차귀도의 장군석이라고 전해진다."
이어지는 또 다른 전설
"중국 송나라에서는 제주도는 장수가 날 지세라 하여 지맥을 자르기 위해 '고종달'이라는 사람을 보냈다.

그는 제주 지리서를 가지고 지금의 종달리에 내려 서쪽으로 가면서 수백과 지맥을 끊었고, 

안덕면의 산방산 부근까지 다다랐다. 그곳에서 왕과 장수가 날 곳이라 하는 용 형상의 잔등을 끊게 되었고 잔등에서 피가 나와 주변을 물들였다.
그렇게 제주도 수맥, 지맥을 끊은 '고종달'을 태운 배가 중국으로 돌아가려고 고산,용수앞 바다를 지날때

어디선가 날쌘 매가 한 마리 다가와 배를 침몰시켰다.

한라산 산신의 노여움을 받아 오백장군중 막내로 하여금 그의 길을 막게 한 것이다.

이에 조정에서 한라산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비슷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대 섬을 '고종달'이 제주도 지맥을 끊고 중국으로 돌아가는(遮) 길을 차단(歸)했다고 해서 차귀도(遮歸島)라고 했다"고 합니다.

 

자르기 전에 보내지 왜 자르고 난 후에 매를 보냈을까요?

이미 그리 생긴 형상에 스토리를 붙이다 보니 그리 되었을 겁니다.

하여간 이런 저런 전설을 가지고 있는 섬 답게 차귀도는 각각의 섬에 이름이 있습니다.
본섬은 죽도, 대나무가 많이 난다해서 대섬이고요.

매의 형태와 닮았다하여 매섬이라고도 하는 지실이,

그리고 장군섬, 그리고 상여를 닮았다고 하는 상여섬.

이 모두를 합쳐서 차귀도라고 하고요.


그옆에 떨어져 있는 것은 한많은 여자거인의 누운 모습이라하여 누운섬, 와도라 합니다

 

누운섬의 모습은 용수쪽에서 보시면 아 그렇구나 하실겁니다.

 

 

오징어 덕장이 도로변에 이어집니다.

 

차귀도의 오징어는 화살모양을 하고 있어 화살 오징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경북 동해안지방 피대기처럼 포구에서 바람에 말려 꾸들꾸들 해 살짝 불에 구우면 부드럽고 쫄깃합니다.

여기는 제주도인데 갑자기 경상도 말이 생각납니다
"불에 구워 묵으모 말랑말랑한 기 끝내주니더"

이어도라는 영화를 찍었다는 표지판과 자구네포구

 

자구네 도대불

 

제주도의 포구는 바위에 연해서 돌로 쌓아 만들었기 때문에

해져물녘 들어오고 나가다다 이런 저런 사고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관에서 세운 등대에 힌트를 얻어 마을사람들이 정성을 모아 포구에 도대불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대개의 도대불이 현무암을 직육면체로 다듬어 사다리꼴형태로 축조하였으며

위에는 등화장치를 보호할 수 있는 구조물을 만들었습니다.
위로 올라가는 돌계단을 쌓은 곳도 있고 외부에서 사다리를 이용하는 구조도 있는데

이곳 자구네포구 도대불은 사다리를 이용하는 형식입니다.
등화는 관솔(제주어 솔칵)을 이용하는 곳이 많았고

장소에 따라서는 생선기름 또는 등유를 이용했다고도 합니다.
개발 만능시기에는 유행처럼 부수다가 몇곳이 남아 있었는데  요사이는 유행처럼 복원합니다.
이곳은 예전것이라고 합니다.

 

도대불이라는 이름은 이런저런 설이 많은데...

 등대의 일본어 도우다이에서 나온게 맞을 겁니다.
일정시대에 관에서 만든 등대를 본따 등대의 역할을 하게 만든 것으로 이름도 그리 불렀을 겁니다.
신촌등지에 남아있는 도대의 표지석에는 천황즉위 몇주년기념 등명대라고 한문으로 붙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도대불옆에서 차귀도 일대를 돌아 보고

 

당산봉을 봅니다.

당산봉은 지질학자들이 하는 말로 당산봉응회암, 고산층, 그리고 수월봉 응회암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답니다.
지금 바라보이는 곳은 당산봉 응회암이 되는 것이지요.

 

오른쪽 완만한 경사가 고산층 그러니까 고산리에 있는 퇴적층이라는 이야기고

 

오른 쪽 아래부분 암석 부위는 다시 응회암인데 이것은 수월봉에서 연결된다는 이야기지요.


박사들이 그렇다고 하니 그러련 해야 하고
그래서 여기가 지질학의 보고다 그래서 지질공원으로 선정했다 합니다.

수월봉은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고 합니다만

그건 아니고

사람을 끌어모을 레테르 하나를 더 붙였다는 것 뿐이지요.
세계 지질공원(Global Feoparks)이란 유네스코가 지질학적으로 뛰어나고 자연 유산적으로 가치를 지닌 지역을 보전하고

관광을 활성화함으로써 주민소득을 증대시키기 위해 지정하는 구역입니다.

지정 후 별도의 재정적 지원은 없지만,

특별히 보존이 필요한 지역을 제외하고는 개발이 허용된다는 점에서

보호에 중점을 둔 생물권보전지역이나 세계자연문화유산과는 다릅니다.
현재 세계지질공원 인증을 획득한 곳은 21개국 66곳이라 하고.

한국에서는 제주의 한라산, 성산일출봉, 만장굴, 서귀포층, 천지연폭포, 대포동해안 주상절리, 산방산, 용머리해안, 그리고 수월봉이

2010년 10월 세계 지질공원으로 인증을 받았지요.
인증후 이곳 현지사람들에게 물어 보면

성산일출봉과는 달리 "지질공원이라 해서 예전보다 더 많은 관광객들이 오는 것 같지 않다
단지 일년에 한번씩 지질공원축제같은 것을 할때 차귀도를 들어가 보게 하니 그때 뱃사람들이 조금 더 재미를 보는 것 같다.
마을사람을 지질공원 도우미로 쓰는데 한창 마늘 수확철이라서 확실치 않은 거기에 신경쓸 겨를이 없다" 등등 말씀하십니다.
그래도 지적호기심 또는 지적허영심이 있는 사람들은 지질공원축제 때 와서 뭔지 모를 설명에 고개를 끄덕거릴테고

배삯을 내고 차귀도를 다녀올테니

절반의 성공이라고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차귀도를 등에 지고

 

포구길을 쭈욱 따라가서 ...

 

용찬이 궤입니다.

 

이 마을 좌용찬이라는 분이 이 해식동굴에 싱싱한 해물들 보관했다가 일본에 팔아 큰 돈을 벌었답니다.

 

 

선주와 선원 그리고 잠녀들의 비념이 쌓인 곳

 

고산층

 

즉 고산에 있는 퇴적층의 모습입니다.

예전에는 안내판이 있었는데

깍아낸후 퇴적층이 보이니 설명이 필요없어 치운 것 같습니다.

  

당산봉으로 올라갑니다.
산 중턱으로 보이는 풍식동굴

내 기억으로는 저 사면에 네갠가 다섯갠가의 굴이 있고
기슭을 따라가다 바다와 접하는 곳에 저승문이라하는 커다란 해식동굴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 동굴이 이지점에서 저렇게 보이질 않았는데...

 주변이 무너져 나무가 쓸려내려간 것인지 의아스럽습니다.


오른쪽으로 수월봉의 전부와 그앞에 펼쳐진 고산리 신석기유물 산포지가 보입니다.

 

당산봉 올라가는 입구

고산성당에서 용수성지를 거쳐 신창성당까지 가는 천주교순례길이 올레길과 함께갑니다.

 

오늘은 지나가지 않을 거북바위를 보고...

 

철거직전의 안내판..

 

천주교순례길싸인

 

지질공원답사길

 

올레길

 

참 많은 싸인을 보고 오르막을 올라오니 여기도 이런 저런 표지판..

반갑기도 하고 어지럽기도 하고...


당산봉 둘레길을 걸어갑니다.

 

포구와 섬

 

 

무릇의 향연

 

 

지나지 않아도 되는 대나무 숲을 지나고..

 

당산봉 둘레길표지

 

왼쪽 쑥들어간곳으로 내려가면 아주 큰 와류가 도는 해식동굴 저승문이 있습니다.

저멀리 풍차. 보기에만 그럴듯하지요.
그 밑에 서면 풍차도는 웅웅소리 정신이 없습니다.

 

다시 섬...

 

숲너머로 보이는 용수리 너른 밭

 

누운섬에서 용수리 포구옆 코지까지의 바다

 

그 가운데 떠 있는 선단들

 

오름을 내려오며 뒤돌아본 정상부

 

 

오른 쪽으로 뒤돌아본 바다. 누운섬이 왼쪽으로 자리를 바꿨습니다.

 

가목(監牧)개, 조선시대 진상하는 말을 뽑아서 배에 실었던 포구

 

진짜로 여기서 말을 실었을까?
실었다면 어떻게 실었을까?

 

궁금해 하며 보고 또 봅니다.

 

내친구 똑딱이는 밧데리아웃으로 잠시 쉬겠답니다.

휴대폰 꺼내들고

오름 경사지 옆 바닷가를 계속 뒤돌아 봅니다.

 

두럭바위가 나오는 가 보려구요.


저 촛대처럼 생긴 바위가 두럭바위인데 저곳이 고산과 용수의 경계구역입니다.
그리고 용수 물질구역은 두럭바위에서 차귀섬으로 이어지는 선까지입니다.

 

용수 어촌계에서는 소라가 그리 많이 잡힌답니다.

몇년전 이야기입니다만 한림읍 열여덟어촌계에서 다섯손가락안에 든다하더군요.
하지만 이곳 잠녀들의 슬픈 이야기는 그들의 물질을 참으로 애처럽게 느끼게 합니다.

용수리의 잠녀들은 누운섬과 죽도 사이에서 물질 작업을 합니다.

그런데 이곳은 항상 물살이 세고 거칠어서 물질 작업하는 잠녀들이 조난당하기가 일쑤였다합니다.

용수리잠녀는 조난을 당해 떠내려 갈때

“우리 애기 젖멕여줍서 우리 애기 젖 멕여줍서,

젖 멕여 주민 우리집의 뿔오그라진 검은 암쉐 주쿠다, 우리애기 젖 멕여줍서”라고 읊조리다 숨을 거둔다 합니다.

 

 

애잔한 마음에

차귀도에서 눈을 피해보고

 

또 다시보고...

 

그런데..언제 어느 무식한 사람이 여기다 편석을 깔았습니다.

불필요한 부지런함. 이런것이 보다 더 편하려고 결국 포장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다시 섬을 봅니다.

 

그리고 그리움이라는 꽃말을 가진 숨비기와 인사합니다.

그리움이라는 것은 눈앞에 없다는 것이고

기다림이 없는 그리움은 떠나간 이에 대한 것이지요.

 

왼쪽에 보이는 돌쌓았던 흔적은 잠녀들이 물질을 나가기전, 그리고 돌아와서 몸을 녹이던 옛 불턱자리입니다.

 

잠녀, 뱃사람, 표류선까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차귀도 앞바다에서 목숨을 잃고 이곳으로 사체로 떠내려옵니다.

그래서 생겨난 전설이... 아니 실제행동이 또 하나 있습니다. 아니 있었습니다.
이 부근 바닷가 어디(몇번을 왔는데 찾지못했습니다) ‘화를 면하는 물’이라는 뜻의 화상수가 있다 합니다.

이곳 샘에서 제를 지냈답니다.

 

용수리사람들에게는 죽도는 너울쓰개 쓴 여인네들의 장례 행렬의 모습을 닮고,

오백장군의 막내라고 하는 막내장군바위는 상제의 형상을 했다고 하여,

많은 사람이 죽는 것을 막기 위해 화상수에서 목욕을 하고 1주일간 제관으로서 몸을 정결하게 한 후

화상수물 옆에서 제를 올렸었다 합니다.

 

용수성당과 김대건신부 포착기념관이 마주 보입니다.

 

용수리 거욱대중 한 곳입니다.

 

바다는 생계를 책임지는 바다밭이이기도 하지만 삿된 기운이 몰려오는 곳이이기도 합니다.
그 삿된 기운을 막으려고 용수리 바닷가에는 거욱대 2기가 세워져 있습니다.

암수가 있는데 아마 이쪽 거욱대가 숫탑일겁니다.
이곳 거욱대는 그 꼭대기에 매를 솔짝하게 올려놓았다해서 매조재기라고도 부릅니다.

 

용수성당으로 갑니다.

 

 

 

용수성당을 들어 갔다가 일행들을 기다리게 하기 뭐해서 입구에서만 기웃거리다 돌아나옵니다.

 

기적의 성모님

이제와 우리죽을때

우리 죄인을 위해 빌으소서.

 

 

 

 

용수포구에서 일행을 기다립니다.

 

 

 

북쪽 거욱대로 내려오는 석양을 보며 하루를 마칩니다.

Ludwig van Beethoven  

Piano Sonata No.23 in F minor, Op.57 "Appassion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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