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제주의 마을

의귀리

하늘타리. 2011. 12. 22. 14:36

 

제주문화유산답사회 214차 정기답사

2011년 11월 13일(일)

 

 

 

제주 마을 집중탐구

-의귀리의 어제와 오늘-

 

 

제주문화유산답사회

 

송장환

의귀리

 

Ⅰ.마을의 특성

 

1. 지리, 입지적 특징

 

한라산을 배경으로 제주도 동남쪽에 위치한 중산간마을로서, 해발 약 70-110m의 범위에서 생활의 중심 공간을 형성

 

남원읍 중앙에 위치한 마을로 남쪽으로는 남원1리, 태흥1,2리 ,서쪽으로는 한남리, 남원2리, 북쪽으로는 수망리, 동쪽으로는 신흥2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음.

법정리와 행정리가 동일하며 자연마을은 월산동, 산하동 및 중앙동 3개로 구성됨

 

주요 중산간 지역을 연결하는 중산간 도로(국도 16호선)가 마을을 통과하고 있으며,

남원-제주 사이 교통 중심 도로인 남조로가 의귀사거리에서 교차하고 있음

 

2. 생태, 환경적 특성

 

마을 중앙에 넋이 오름이 자리를 잡고 있으며, 서중천이 마을한복판을 가로질러 동남쪽으로 흐름.

의귀천이 마을 동쪽을 지나 서중천과 합류하고 있어, 두개의 하천이 마을을 통과함.

 

제주도의 남단 북태평양에 위치하여, 난대성 해양성 기후를 보이며,

연중 따뜻한 날씨와 온화한 기후로 겨울철에도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경우가 드물어 감귤 재배의 최적지고 알려져 있고,

8.9 평방Km(남원읍 전체 면적 188.7평방km의 4.7%)의 면적에 1,240여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음

 

3.역사, 문화적 특성

 

조선시대로부터 ‘말의 고장’ 이라 불릴 만큼 말 사육이 번창했던 ‘제주마의 본고장’ 이자 감귤 주산지로 널리 이름난 마을로서,

예전에는 의귀원이 설치되어 정의현성과 서귀방호소를 연결하는 교통의 길목이었음.

 

일제강점기의 행정구역 개편 등으로 그 면적이 축소 조정되었지만

고지도에서 확인이 되듯 지금의 남원1,2리 지역, 신흥2리의 일부, 수망리의 일부, 한남리의 일부까지 포함하는 아주 큰 마을이었음.

 

(출처. 제주마의 본향. 의귀리. 2010)

 

Ⅱ.마을의 역사

 

1. 고려 말 설촌 이래 광산 김씨, 광주 김씨, 양씨, 고씨 등이 입촌

(넋이 오름 북동쪽에서 탐라전기 적갈색 경질토기 발견)

- 설촌시 마을이름 : 오귀 또는 옥기 (한문명 五耳里, 김상헌, 남사록, 1601)

- 1680년대 후반 탐라도: 衣貴村(옷기), 탐라순력도(1703) : 衣貴(옷귀)

- 이원조‘ 탐라지초본’(1842) 권4‘ 정의건치연혁 산천조 도로원첨부조’ : 義貴院

- 경주 김씨 가문설화 :

중종치세간 김만일의 부 이홍이 호종단이 정해준 집터에 집을 지어 이주 하여 설촌(?)

- 오성찬, 1992년 : 김만일의 헌마로 그의 후손이 어의 한 벌을 받은데서 옷귀라 한다(?)

 

(현재의 의귀마을)

 

2. 호구총수(1789년 간행)에 정의현 소속으로 토산면과 호촌면이 나오고, 호촌면은 수망리, 東衣貴里, 西衣貴里, 화등리, 위미리, 보한리, 호촌리의 지명이 나옴

 

3. 1789년 말 정의현에 좌면, 중면, 우면을 설치. 동의리에 중면 면소를 설치

 

4. 1906년 중면이 동중면과 서중면으로 나뉨에 따라 동의리에 서중면 면치소 설치

 

5. 1914년 재산이개(지금의 남원포구)에서 부터 서의귀지역까지로 남원리가 설치됨에 따라 서의리가 남원리에 편입되고 동의리가 의귀리로 됨

 

6. 1926년 남원리로 서중면 면치소 이전

 

7. 1935년 서중면이 남원면으로 이름을 바꿈에 따라 남원면에 속함

 

(연도는 자료마다 약간의 차이를 보이나 공적자료와 오래된 자료를 우선하여 종합)

 

 

III. 역사의 흔적

 

1. 의귀원터

 

이증의 ‘남사일록’(1679).

‘...벌포 서쪽연대를 지나 衣貴院에 도착하여 점심을 하였다. 이곳을 정의의 큰 마을로 김만일이 여기에 살았고, 지금은 그 자손들이 그 터와 그의 묘를 지키고 있다...’.

 

이원조의 탐라지초본(1842).

정의건치연혁 山川조 및 도로 院站附조, '수망천은 정의현청에서 西로 30리에 있다하였고, 같은 거리상에 義貴가 있고 그곳에 院站 '義貴院'이 있다.'

 

 

(참고) 옮겨진 비석들

 

(1) 정씨열녀비

비문

〈앞〉烈女鄭氏之碑 高麗石谷里甫介之妻哈赤之亂其夫死鄭年少無子有姿色安撫使軍官强欲娶之鄭以死自誓引刀欲自刎竟不得□(娶?)至老不嫁事

〈뒤〉到處見聞 重修古跡 莫非其惠 且矜無后 牧使韓公 特下後振(?) 改造石碑 道光十四年(1834)三月 日

 

해설

旌義人 職員 石阿甫里介 妻 無名 年二十而稼 居九年 夫死無子 無父母奴隸 甘心窮餓 求婚者 衆 終 不改節

(세종실록 권 42, 세종 10년 1428년 무신 시월)

 

高麗鄭氏 : 職員 石邦里甫介之妻 合赤之亂 其夫死 鄭年少 無子 有姿色 按撫使軍官 强欲 娶之 鄭以死自警引刀欲自抉意 不得娶 至老不嫁 事 聞 旌閭

(이원진, 탐라지 정의현 열녀조, 1653년)

 

(2-1) 황구하 선진활민비

 

비문

<앞> 가운데 '□□黃公□□善賑活民碑'

오른쪽 '田□無收 公奉聖旨 區餓將□望 來賑島中

왼쪽 珉編活生炅德 死生 □政蕩□?死命後世不忘'

<뒤> '□□□公龜河善賑碑' '□□德及函冥難亡千春'

황구하(黃龜河)는 숙종 42년(1716) 정월 5일에 교리(敎理) 직에 있다가 제주별견어사(別遣御史)로 임명되었다.

제주에 도착한 황구하는 윤3월 9일에 '도민 가운데 굶어 죽은 자가 매우 많으니 청컨대 향축(香祝)을 보내시어 설단(設壇)하여 제사를 지내서 굶주린 영혼을 위안하십시오.' 하고 장계를 올리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5월 10일에는 '회전복(灰全鰒)은 해마다 봉진하기 어렵습니다.' 하고 장계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특별히 우선 감하라.' 하고 본도의 진상 물종도 모두 3분의 2를 감하라고 하였다.

6월 23일에는 '진제하고 남은 곡식 1,440여석은 섬의 삼읍에 분배하여 계속하여 보리가 다 된 후에 진휼하도록 하고 새 보리로 환상하는 것도 역시 감봉할 것을 청합니다.' 하고 장계하니 임금이 허락하고 환상은 또한 절반만 징봉하라고 하였다.

황구하는 9월 8일 환조(還朝)하였다. 이 때 과거 시험에 응시하는 유생들의 시권(試卷)을 가지고 갔으므로 대제학 송상기로 하여금 과차(科次)하도록 하여 고만첨 등 3인에게 사제(賜第)하고 전시(展試)에 직부 하도록 하였다.(조선왕조실록 중 탐라록 494∼498쪽)

 

(2-2) 현감 위혁만 청덕선정비

 

비문

<앞> 가운데 '縣監魏公赫萬淸德善政碑'

오른쪽 '盡必奉公政令明信 惟國是務治理庶平

왼쪽 澤被魚獸公乎公乎 德治民生千載不忘'

 

(2-3) 현감 신상흠 휼민선정비

 

비문

<앞> 가운데 '縣監愼公尙欽恤民善政碑'

오른쪽 '公性仁厚視民如子 尊聖愛士辨穀賑窮'

왼쪽 '勸奬農桑不煩?役 居官三載始終如一'

'咸豊元年辛亥 西中面'

 

제주도 조천읍(朝天邑) 출신이다.

1823년(순조 23) 계미(癸未) 정시(庭試)에 병과(丙科) 3위로 급제하였다.

벼슬은 1825년(순조 25)부터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 승문원검교(承文院檢校), 대정현감 겸 제주병마절제도위(大靜縣監兼濟州兵馬節度尉) 등을 역임하였고, 철종 때에는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예조좌랑(禮曹佐郞), 사헌부지평(司憲府指平) 등을 지냈으며 고종 때에는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 행 공조참판(行工曹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2. 마구왓

성안에 사는 제주 고씨 성주공파의 후손에게 출가한 헌마공신 김만일의 손녀가 그의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넋이오름 서북편에 있던 남편의 윗대가 되는 전적 고홍진 선조의 묘를 거문오름으로 옮기고 이 곳에 정착하니 그의 후손들이 마소를 많이 사육하였으며 농사에도 힘썼는데 그 때 마소를 사육하던 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

 

 

3. 넋이 오름(魄犁岳)

 

전설 1. 태흥리 출신 날개 돋은 장수가 관군에 쫓기자 한 달음에 달아나면서 오름의 정상을 팍 밟으니 오름 넋이 그만 나가버렸다.

전설 2. 큰 비가 내린 뒤 섯내가 흘러가는 북서쪽 동산을 지나던 송아지가 냇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것을 본 어미소가 그만 넋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 높이 146미터

 

4. 괴수모수

 

예로부터 이 소는 수심이 매우 깊어 아무리 가물어도 바닥이 드러나지 않으니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꽤나 깊은 소라 하여 붙여진 이름.

 

5. 넋이 오름 널당

본풀이 : 웨은 들러 웬도깨비 노다 들러 노단도깨비

둘레낭굽 일뤠한집 넋이오름 상갈퀴 삼신선또 계보 : 토산계

 

과수원 울타리 뒤쪽으로 넓게 돌담이 둘러져있고 돌을 쌓아 제단을 만들었다.

(널당 : 널(넙적하고 긴 바위)위에 목감木龕을 올림)

 

제단 양쪽에 팽나무가 한그루씩 자라고 있는데 제단 왼쪽 팽나무(男神木)에는 지전,

오른쪽 나무(女神木)에 여자 한복 한 벌이 걸려있다.

이 당을 ‘도깨비 당’이라고도 하는데 신의 계보가 토산계이다.

마을 사람들의 호적, 장적, 물고, 생산 등 생활 전반을 관장하며 수호해 준다.

 

6. 군모루

마을 구전 :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연대를 조성하고 그것을 관리하기 위해 군사가 주둔하던 언덕배기인 데서 연유한 이름

 

7. 연딧동산 / 마조단터 

마을구전 : 왜구의 침범이 잦은 데 따른 군사방어수단의 하나로 이곳에 연대를 시설했던 데서 연유한 이름.

 

김인호 : 몽고인이 말의 수호신 房星에 제사 드리는 제단, 마조단(馬祖壇)

(주장의 근거) 몽고어 ok(옥)이 天空·하늘, uk(욱)이 방목장 곧 天神과 放牧. 완전히 몽고어를 포함한 북방유목민의 기본 관념·생활양식을 상징하는 언어들임.

(남원읍 노인회, 老人誌, 1990.)

 

8. 창새미소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의귀리 사람들뿐만 아니라 멀리 수망리, 신흥리 사람들의 생활용수로도 쓰였다고 한다.

 

9. 창새미소 당

신명 : 일뤠할망(물우랏당에서 가지갈라옴)·

여드레할망(토산계)

 

일렛날 : 허물이나 부스럼 낫게 해달라고

물우랏할망에게 빈다.

여드렛날 : 액막이로 닭이나 돈을 갖고 간다.

당의 내부에는 조그만 연못이 있는데, 이 연못에서 손을 씻으면 사마귀가 낫는다는 말이 전해진다.

 

10. 관전밭

관소유의 밭이었던 데서 연유한 이름

10소장과 산마장과 별도의 10개 별둔장 중 양달장(楊達場)이 있던 곳

 

11. 몰진밭

마을 구전 : 말들이 진을 친 밭이었던 데서 연유한 이름

김만일과 그의 후손들이 말을 사육하던 곳이라 한다.

지금은 대부분이 과수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한자표기로 ‘馬田洞’이라 표기.

 

12. 몰진밭 일뤠당

신명 : 토산일뤠할망· 여드레 할망

 

일뤠할망 : 피부, 괴담, 안질을 치료해 준다.

여드레할망 : 아기를 넋들여 주고 액을 막아 준다.

 

1989년 태풍에 의해 신목이 잘려 나갔다.

그후 스레트건물을 짓고 그 안에서 제를 행한다.

당집의 입구에 자그마한 궤가 있는데 제의가 끝나면 여기에다 잡식한 것을 갖다 놓기도 하고 소지를 불사르기도 한다.

현재는 본향당의 역할을 함

 

13. 월산동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지역으로 동산에 올라 떠오르는 달을 본다 하여 붙여진 이름. 몰진밭 전역과 동카름 일부가 포함됨.

 

14. 옛 현의합장묘

4.3 당시, 1948년 10월 소개 작전으로 마을이 전부 불타 버리자 마을 사람들은 거처 없이 야산 이곳저곳을 전전하였고, 일부 검거된 사람(약80인)들이 폭도라는 누명을 쓰고 1949년 1월 18일을 전후하여 의귀국민학교에 수용되었다가 수용된 지 이틀 후인 1월 20일 30대 남녀 10여명이 처형되었는데, 21일 새벽 4시경 경비대가 유격대에 의해 습격을 받았다.

전투는 경비대의 승리로 끝났으나 습격에 대한 보복으로 22일 의귀학교에 남아 있던 60여명을 학살하였다.

학살당한 사람들 중에는 의귀, 수망을 비롯한 인근 마을 및 멀리 모슬포 사람도 있었다.

시신들은 경비대에 의해 학살현장에 가매장되었다가 3개월 후에 토벌군에 의해 현재의 위치에 3개의 봉분으로 합장되었다.

유족들은 시체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합장한 채 그냥 놔 둘 수밖에 없었고 매년 7월말에 모여 함께 벌초를 했다고 한다.

이후 이 곳에 가족이 매장되어 있다고 확신하는 유족들을 중심으로 봉분을 쌓고 성묘를 하며 1976년 ‘삼묘동친회’를 결성했다.

세 무덤에 묻힌 사람의 후손들은 같은 친척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1983년 ‘현의합장묘’ 비석을 세웠다.

 

- 당시 비석에 쓰여 있던 비갈

『아! 여기에 의로운 영혼들이 고이 잠드시도다. 삼십팔년간에 걸친 일제통치의 질곡속에서 해방된 조국산천, 그러나 사상대립과 좌우충돌로 빚어지는 갖가지 비극들. 1948년 4월 3일 4 ·3사건은 본도 전역을 휩쓸었고, 이 처참한 와중에서도 일편단심 초상전래의 고장을 지키다 산화하신 아, 갸륵하신 그대 이름들이여!

의귀리, 오승규(吳乘閨. 당 65세. 남) 12월 14일 졸(卒), 고창숙(高昌淑. 당 62세. 여) 12월 십사일 졸(卒), 양기필(梁祈弼. 당 52세. 남) 12월 12일 졸(卒), 김윤생(金允生. 당 50세. 남) 12월 12일 졸(卒), 고경평(高景平. 48세. 여) 12월 14일 졸(卒), 김일석(金一石. 상 14세. 남) 12월 14일 졸(卒), 양기홍(梁基鶴. 당 48세. 남) 12월 14일 졸(卒), 양을령(梁乙玲. 당 14세, 남) 12월 14일 졸(卒), 양기원(梁基元. 당 34세. 남) 12월 12일 졸(卒), 수망리 김애옥(金愛玉. 당 66세. 여) 12월 14일 졸, 김만홍(金萬鳳. 당 37세. 남) 12월 14일 졸(卒), 강매전(姜梅田. 당 36세. 여) 12월 14일 졸(卒).

이제 후손들이 효성 모아 의비(義碑)를 세우고 유덕(遺德)을 기리며 명복을 비옵나니, 고이 잠드소서.

1983년 계해(癸亥) 춘(春), 문학박사 김인호(金仁顥) 글, 청석(靑石) 변영탁(邊榮卓) 서(書)』

2003년 9월 16일부터 20일까지 유해발굴 및 추도식을 갖고 수망리 지경의 새로운 묘역에 안장했다.

봉분을 파헤친 결과, 서쪽 묘에서 17구, 가운데 8구, 동쪽에서 14구가 발굴되었다. 또, 숟가락, 비녀, 혁대, 머리에 박힌 총탄 등의 유물이 나오기도 했다.

현재는 현의합장영령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이하 4.3관련 기술은 4,3연구소 자료에 의함)

 

15. 개튼물

의귀리 중앙동 사람들의 생명수 이었던 곳

마을구전 1. 아지랑이가 피어난 물

마을구전 2. 놋사발뚜껑이 떠다니는 물

마을구전 3. '서위남동산’과 ‘너털모루/ 개석동산’ '톨동산’ 등 세 언덕의 지형지세가 꼭 솥뚜껑을 덮은 것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

 

16. 장터 / 장판거리

개튼물 일대에서 의귀리 네거리 일대까지

서중면사무소가 이 마을에 소재할 당시 이곳에서부터 당시 면치소가 있던 네거리까지 5일장이 들어섰던 데서 연유한 이름.

 

17. 의귀리 주민센터

 

제주마의 본향 의귀 비석

2008년 3월 당시 이장 OhmyNews 인터뷰내용

“우리 마을은 해변을 접하지 못한 마을입니다. 게다가 북쪽으로도 한라산과 매우 멀어요.

단순히 자연환경을 이용한 관광 상품을 개발하기에는 불리한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마을이 헌마공신 김만일의 고향이기 때문에 그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이 마을이 과거 제주도 육마의 중심지였다는 상징성으로 인해 말을 이미지화한 관광상품을 개발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마을 여러 주민들의 생각입니다.

가능하면 말 박물관도 유치하고 싶고…."

 

18. 의귀초등학교

(1) 일반현황

2011년도 재학생 약 75명(유치원제외)

의귀리, 수망리, 한남리를 학구로 하는 자율형 학교

 

-1941. 6. 25 남원공립초등학교 병설 의귀간이학교

-1943. 3. 31 남원 북국민학교 승격 교명 변경

-1945. 9. 1 의귀국민학교로 교명 변경

-1948. 12. 15 4.3사건으로 폐교

-1949. 8. 1 남원국민학교의귀분교장 (4학년 2학급 인가)

-1949. 11. 18 수업재개

-1959. 2. 20 의귀국민학교로 독립 개교 (6학년 4학급 인가)

-2011. 2. 10 제52회 졸업식 (총 2,200여명 졸업)

 

(2) 폐교간 현황  

4.3 당시 2연대 1대대 2중대가 주둔했던 장소다.

이 곳에 수용된 주민들에 대한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었다.

의귀리는 한동안 면 소재지였기 때문에 이 지역의 문화, 산업의 중심지였다.

또한 마을 사람들이 일본 유학을 많이 다녀와 개화사상 및 평등의식과 민족의식을 갖추어 의식수준이 진보적이었다.

당시 유학생들을 포함한 상당수의 지식인들이 4 ·3사건 당시 좌익에 동조하였다고 한다.

해방후 인민위원회조직이 이마을에도 있었는데 야간모임을 가지면서 조직적으로 활동했다.

 

1948년 5월 10일, 의귀초등학교에서는 군인 12명과 남원지서장이 직접 감시하는 가운데 5 ·10선거가 치러졌는데 지서습격의 주범으로 의심되던 마을 청년 7명이 투표를 거부하고 산으로 올라갔다.

무장대에 대한 토벌이 본격화되면서 지금의 의귀초등학교에는 1948년 12월26일부터 1949년 1월 20일까지 제 2연대 1대대 2중대가 주둔했다.

실제 2중대원으로 이 곳에 근무했었던 이윤은 ‘진중일기에 학교주변에 4개의 초소를 세우고 옥상에는 기관포를 설치했으며 주위에는 모래가마니로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다고 한다. 1949년 1월 12일. 무장대는 군 주둔지 습격을 감행했다.

이날 토벌대 6∼8명이 전사한 반면 유격대는 훨씬 더 큰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유격대의 피해정도는 그 부상자와 사망자가 동료들에 의해 산으로 이송된 경우가 많아 정확한 피해 상황을 확인할 수 없다.

유격대가 후퇴한 후 군인들은 유격대에게 자신들의 토벌작전 정보를 제공해줬다는 혐의로 마을 사람들 수십여명을 총살하였다.

‘진중일기’에 의하면 이들 군인들은 무장대 습격 직후인 1월 20일 이곳에서 철수하여 태흥리로 이동했다고 한다.

 

19. 무장대 희생터

의귀초등학교 북쪽 밭, 오00의 우영팟으로 1949년 1월 12일 무장대의 군부대 습격 당시 교전 중에 군인이 쏜 기관총에 맞아 사망한 무장대의 시신들이 1년 간 방치되어 있었던 곳이다.

1년 뒤 의귀리가 재건되면서 이곳의 시신들은 마을 사람들에 의해 송령이골에 수습되어 묻혀 있다

 

20. 수용자 학살터 

1949년 1월 10일 30여명, 1월 12일 80여 명의 주민들이 총살된 곳이다.

의귀초등학교에 주둔한 2연대 1대대 2중대는 주변 수색을 계속 하여, 초토화 이후 집을 잃고 은신하던 의귀리, 수망리, 한남리와 가시리 주민들을 붙잡아 국민학교에 수용했다.

이 과정에서 젊은 청년들을 1949년 1월 10일 이곳에서 김개춘, 양기필 등 30여 명이 1차 총살되었다.

이어서 1949년 1월 12일, 의귀리 주둔 군부대에 대한 무장대의 기습으로 치열한 전투 끝에 4명의 전사자를 낸 2중대는 곧바로 의귀국민학교에 수용되어 있는 인원들을 끌어내 이 곳에서 총살했다.

이 곳에 흙만 씌운 채 아무렇게나 버려졌던 희생자들의 시신 일부는 1년쯤 지난 1950년 마을 재건 즈음에 유족들이 찾아갔다.

이 때 옷가지나 기타 특이사항으로 신원을 확인 할 수 있는 시신 일부를 유족들이 훔치듯 찾아간 것이다.

찾아가지 않은 나머지 시신들은 토벌대의 명령에 따라 민보단에 의해 들것에 실려 의귀리 765-7번지 (구 현의합장묘역)에 집단 매장되었다.

 

21. 못거리/상뒤거리 

의귀리 설촌터의 하나

제주 양씨 중랑장공파의 14대손 중의 한 사람이 이 못의 북쪽에 터 잡고 정착, 개척하여 날로 번창하였고 좌수 벼슬을 살기도 했다.

그의 택호를 <상뒤거리>라 고 한 데서 연유한 이름. 지금 의귀장로교회가 위치.

(참고) 의귀교회 : 수망리로 시집갔던 부인이 1951년 친가인 의귀리로 돌아와서 어린 아이들을 대상으로 성경학교를 시작했다.

당시는 교육의 혜택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때라서 120여명의 어린 아이들이 모여들었고, 성경을 통한 한글공부를 시켰다. 이후 1953년 개인 주택에서 의귀교회가 설립되었으며, 1968년에 현재 건물을 지어 옮겨왔다.

그 이유인 듯 의귀교회는 성인신도수가 상당히 많으며 지역 내에는 사찰이 없음.

 

22. 향사터 / 일본주재소터

김만일댁의 사랑채로 느티나무와 소나무로 잘 지은 5간집 이었다.

강제병합 이후 1915년 도내 15개의 순사주재소를 설치할 때 서중면 전체를 관할하는 주재소로 쓰이다가 주재소가 남원리로 내려간 이후 마을에서 운영한 신성사숙의 교사로도 활용하였으나 서기 1948년 4.3당시 소실되었다.

(의귀초등학교 16회 동창회 카페)

 

23. 김만일 생가

(1)마을구전 : 중국의 명나라 지관이었던 호종단이 "제주에 인물이 날 수 없도록 맥을 끊으라."는 명나라 왕의 명을 받들고 제주로 들어왔다. 호종단은 제주에서 지맥을 살피며 맥을 끊는 중 의귀리 인근 수망리 마을에서 경주김씨 김이홍과 연을 맺게 되었다.

김이홍이 천운을 타고 난 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호종단은 김이홍에게 지금의 의귀리에 집터를 정해주어 살게 했다.

의귀리로 이주해 온 김이홍은 명종 5년(1550)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 낳은 아들이 말을 길러서 부귀영화를 한 몸에 누렸던 김만일이다

(어떤 기록에는 제주목사가 이 일대를 지나다가 김이홍에게 집터를 정해줬다고도 한다).

김만일의 처는 강씨인데 강씨 집안은 상당히 재력이 있었지만 양반들로부터 별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만일은 양반집안 출신이기는 했지만 매우 가난하고 아무런 재산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이었는데 강씨 집안에 장가들면서 처가로부터 물려받은 수말(種馬) 한 마리를 포함한 몇 마리의 말을 목장에 놓아기르는데 하루는 이 수말이 사라져 버렸다.

이튿날은 말을 찾기 위해 동고량(차롱)에 점심을 싸들고 목장에 가 보았더니 놀랍게도 이 수말이 수십 마리의 암말을 거느리고 그 자리에 와 있었다.

살펴보니 그 말들은 전부 처가의 것이었다.

사위는 곧 처가에 연락하여 이 말떼를 다 몰아가게 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이 수말이 또 다시 그 말떼를 전부 거느리고 돌아왔다.

몰아가면 말떼를 이끌어 가고 오고를 수십 번 하다보니 처가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그 말떼들을 전부 가져 버리도록 하였다.

그래서 김씨 댁은 일약 부자가 되었다.

이 말이 새끼를 낳고 또 새끼를 낳아 수년 내에 말은 수백 필이 되었다.

김만일의 말이 많다고 하더라도 혹 진상에 합당한 것이 없을 때에는 관가에서 말이 있는 집의 가동을 가두어 징삭(徵索) 하였고 이렇게 해서도 얻지 못하면 편복에 따라 그 처(妻)를 가두고 그 자식을 장(杖)하는 등 無所不至의 방법으로 하였다.

더구나 탐관오리는 진상을 빙자하여 많은 말을 징(徵)하여 사용(私用)으로 삼아버리며 또한 馬屯(말무리)에 다소 좋은 말이 있으면 삼읍의 원님들이 다투어 탈취하므로 준(駿)한 말이 남아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김만일은 말의 절종(絶種)을 걱정하여 성장하여 준마가 될 말에 일부러 눈에 상처를 내어 맹목(盲目)이 되게 하거나 피부와 귀를 째어서 흠이 있는 말로 만들어 잘 보존하였다가 종마로 사용하였다.

그 뒤 목장은 날로 번창하여 광해군4년에는 마필 수가 국영목장인 국둔마의 3~4배 이상이 되었다.

그는 선조33년과 광해군12년 전투마 3백 필과 5백 필을 각각 바침으로써 오위도총부부총관직(종2품)을 제수 받았다.

 

(2)김만일에 대한 역사 기록의 정리

-1594년. 김만일이 인근 사마목장주와 함께 상경 전마(戰馬)를 바침.

-1600년. 다시 전마 300필을 바쳐 품관직과 부(父)·조(祖)·증조(曾祖)에게 증직제수

-1612년. 조정에서 김만일에게 값을 주고 말을 바치게 함.

-1618년. 점마관(點馬官) 양시헌(梁時獻)이 김만일(金萬鎰)과 세 아들에게 멋대로 형을 가하다 파직 당함.

-1620년. 김만일(金萬鎰)이 말 500필을 바치자, 서울에 올라가 오위도총부 부총관(副摠管)을, 그의 아들 대명(大鳴)은 수령을 제수 받고, 둘째 아들 대성(大聲)은 당상에 오르고, 그의 손자 려는 변장(邊將)을 제수 받음.

부(父)·조(祖)·증조(曾祖)에게 추가 증직

-1622년. 김만일(金萬鎰)이 네 필의 말을 특별히 키워 그의 아들 김대명(金大鳴)을 시켜 서울로 올려 보냄.

-1628년. 조정의 요청에 따라 수년에 걸쳐 다시 말 240필을 바침.

-1657년. 김만일의 아들 김대길과 손자 김려(金礪, 김대성의 아들)가 말 208필을 바침.

-1658년. 목사 이증(李增)이 그 공로를 기리기 위하여 종문세습직으로 감목관직을 특설하도록 조정에 품신하였다. 효종은 이를 받아들여 산마장을 만들고, 마필을 바친 공로로 산장감목관(종6품)에 임명하고 후손들이 이를 세습토록 함.

-1702년. 김만일 집안에서 목졸(牧卒)에게 멋대로 형을 가한 사건이 발생하여 정소(呈訴)당함. 조정에서는 산마감목관 세습(世襲)을 폐지하고 정의현감이 겸임하게 함.

-1719년. 김만일의 자손 김세화의 격쟁으로 산마감목관직을 회복함.

-1782년. 김만일(金萬鎰) 집안의 산마감목관을 목사가 문중(門中) 사람 중에서 택하게 함.

-1895년. 산마감목관직이 폐지됨.

 

(3)헌마공신이라는 단어의 출처 :

1899년 정의읍지 인물조, 김만일이 만력 경신년(1620)년에 헌마공신이 되었다.

벼슬이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이르렀다.

(萬曆庚申獻馬功臣...)

-나의 해석 : 헌마하여 공신이 되었다 (납속수직을 뜻함)

-해석의 근거

광해군 일기 4년. 1612

제주의 정병으로 전날 진상한 공로로 제주의 품관을 제수 받은 김만일은 말을 놓아 번식시키는 곳 모두 국가토지이므로 국가의 은혜가 지대하다 하겠다.

광해군 일기 12년 9월. 1620년

전교하기를 김만일이 말 500필을 바쳐왔으니 실직을 제수하고 그의 아들 대명은 수령을 제수할 것이며 둘째 아들 대성은 당상에 오르게 하고 손자 김려는 본도의 변장에 제수하라.

 

24. 뒷술

경주 김씨 종가댁 그 위쪽 뒤에 연이어 숲이 울창하여 하늘을 가릴 정도로 우거지니 이에 연유하여 붙여진 이름. <술>은 숲을 일컫는 제주지역어

 

 

25. 돈물 

제주 양씨 중랑장공파의 14대 손 가운데 진용이라는 이가 이 곳에 터 잡고 정착한 뒤 벼슬길에 나서 마을에 공헌함이 컸다 하여 그의 택호를 ‘동정지왓’이라 하였음.

그 일가와 부근 사람이 사용한 물.

 

26. 쏠대왓

무관들이 활쏘기를 연마할 목적으로 나무장대 끝에 과녁을 달아 세워놓고 훈련하던 밭인 데서 연유한 이름.

*마을마다 쏠대왓이 있는 이유 : 제주자제, 체아직

 

27. 새솔왓

이 마을에서 처음으로 이곳에 소나무를 심었다 하여 연유한 이름.

지금도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

 

28. 웃물통

약 250여명의 희생과 함께 완전 폐허가 되었던 의귀리는 1950년부터 재건이 시작되었고 뿔뿔이 흩어졌던 주민들이 하나둘 들어와 새로운 터전을 일구었으나 동산가름과 웃물통, 장구못은 복구되지 않았다.

웃물통은 양아홍씨 등 13호가 살았던 마을이지만 돌아온 이가 없어 복구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잃어버린 마을로 남았다.

현재는 집터가 과수원으로 변해 옛 모습을 찾을 수 없다.(제주4·3유적Ⅱ 305~308쪽)

 

29. 선대기소

이 소의 물을 옛날 ‘밤밭골’에 살던 현씨네가 주로 이용했다 하여 붙여진 이름

<선대기>는 <현댁>의 변형이다.

 

30. 박대기소 / 이대기 소

마을구전 1: 이 소는 아주 깊어 열여덟 발 가량이나 되지만 크기는 꼭 바가지만하다 하여 연유한 이름.

바가지의 제주어는 박세기인데, 선대기와의 음의 조화를 꽤하여 인위적으로 박세기를 박대기로 변형시킨 것으로 추측됨

마을구전 2: 박씨 댁과 이씨 댁이 이용하던 물.

박세기소는 새카름다리 북쪽에 있었다.

 

31. 김만일 묘역 

崇政大夫同知中樞府使五衛都摠府都摠管金公之墓, 1632년 경 건립

 

김만일 분묘는 원형의 대형봉분으로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민묘와는 형태와 규모면에서 크게 달라 유적으로서도 가치가 크며 분묘 문인석의 경우도 17세기 전반에 조성됐기 때문에, 조선중기의 표식유물로 삼을 수 있는 충반한 가치를 지녔다.

김만일 가계의 소장 고문서들은 1994년 후손들에 의해 제주교육박물관에 기탁됐다.

김만일의 아들인 김대길의 초대 산마감목관 임명 교지를 포함해 국가가 김만일 가계의 구성원에게 관직을 내리면서 발급했던 교지와 교첩, 과거급제 합격증서 등 모두 51점에 달한다. (제주일보 2007년 10월 5일)

 

32. 김만일 부 김이홍 묘역 

金公利弘之墓, 1620년경 건립

 

마을구전 : 옷귀 설촌과 호종단

중국 명나라의 복주당 출신인 풍수지라사 호종단이 임금의 명을 받고 제주의 형을 떠 출중한 인물의 탄생을 원천봉쇄하려고 제주섬에 들어와 맥을 더듬어 대혈 중의 하나인 반득전 정통에다 압침하고 나서 입도맥에도 여지없이 압침을 하고는 바닷가로 이어진 맥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그 때 수망리에 사는 경주 김씨 집안 노인 한 분이 선친을 여의고는 복중이라 상복차림으로 목이버섯을 따러 반득전 숲으로 들어가 이리저리 살피는데 굵은 철침이 땅에 깊숙이 꽂혀 있어 무심코 뽑아버렸다.

분명히 대혈을 누르면서 내려오는데도 전혀 맥이 죽지 않아 이상하게 여긴 호종단은 거슬러 올라갔다. 그런데 분명히 눌러놓은 철침이 뽑혀있고 웬 상복차림의 노인만이 무심하게 목이버섯을 따고 있었다.

혹시 침을 뽑았느냐고 물었더니 아무리 말 못하는 땅이기로서니 생땅에 침을 꽂아놓은게 좋아 보이지 않아 뽑아버렸노라고 노인은 대답했다.

호종단은 그의 인상을 살펴보니 천복을 타고 났던 것이다.

그는 노인에게 자신이 한일이며 노인이 무심코 뽑아버린 압침이 하늘의 뜻임을 깨달았다면서 그곳을 제혈해줄 것이니 선친의 묘를 쓰라고 했다.

그러면 당대에 발목하여 자손번창하고 영화를 얻어 거부가 되리라고 하면서 노인이 천복을 타고 난 덕분이라고 한 후, 노인에게 발에 힘을 주어 땅을 밟고 있으라고 했다.

노인이 호종단이 시킨 대로 밟고 있으려니 발바닥이 뜨겁고 진동이 워낙 심하여 그만 발을 조금 움직이니 땅속에서 비둘기 한 쌍이 솟구쳐 하늘 위로 날아올라 한 마리는 서쪽으로 날아가고 한 마리는 남쪽으로 날아갔다.

이에 호종단이 말하기들 어쩔 수 없잖느냐 남쪽으로 날아간 비둘기가 앉은 자리에 집을 지어 살라.

이 묏자리는 비둘기가 날아가 버리긴 했어도 아직도 혈맥이 뜨듯하니 기가 살아있다면서 선친의 묘를 쓰라고 했다.

그 후 노인의 아들이 조선조 선조 33년에 남쪽으로 날아간 비둘기가 앉은 수망리 남쪽, 바로 옷귀에 집을 짓고 이주하니 마을의 설촌의 시초가 되었다.

그 당시는 숲이 우거지고 가시덤불만이 뒤덮인 황무지였다.

그러나 이주해와 개간을 하자마자 농사가 잘되어 재산이 불어났다.

그의 아들이 바로 김만일이다.

그는 국가에 큰 변이 있을 때마다 자신의 재산을 털어 나라에 충성하고 지역민을 돌보니 그의 자손들도 대대로 그렇게 하였다.

김만일 이후 무려 12대에 걸쳐 83명이 감목관 직을 세습했는데 늘 한결같은 맘으로 충성을 다하였다.

 

33. 김만일 아들과 감목관

 

(1) 큰아들(大鳴)

보성군수 (김시민 휘하에서 진주성 전투에 공을 세움)

嘉義大夫寶城郡守金公大鳴,

配貞夫人東萊鄭氏之墓

1917년 고쳐 세움

(비음중)....崇禎己巳(1629년)卒壽五十四 墓衣貴境 西位南旨子坐...

 

(2) 작은 아들(大聲)

折衝將軍行龍양衛副司直金公, 淑夫人高氏之墓 1962년 3월 고쳐 세움

.(비음중)...長子大鳴卒 依考命攝行宗祀...

김만일의 장남 대명이 졸하므로 고명에 따라 차남인 대성이 종사를 섭행하게 되었다.

 

(3) 역대 산마 감목관

-절충장군행중추부첨지김공지묘

(김대성의 장남 김려) 1676년 비를 세움

-절충장군행감목관김공지묘

(김만일의 증손. 김려의 장남 사종, 이장해옴)

1671년 비를 세움

-절충장군행산마감목관김공,숙부인강씨지합묘

(김만일의 현손. 김사종의 장남 진욱부부, 이장해옴) 1710년 비를 세움

-통사랑상의원부직장김공지묘

(김만일의 5세손, 시룡부부, 이장해옴) 1694년 비를 세움

-산마감목관김공지묘, 의인 강씨지묘

(김만일의 6대손, 세태 부부, 이장해옴) 1753년 비를 세움

-가의대부동지중추부사행산마감목관유향좌수 김공, 정부인강씨지묘

(김만일의 7세손, 석범부부, 이장해옴) 1803년 비를 세움

(비음중)....음관으로 벼슬하였고 나라의 경사로 3대를 증질추영받았다...

-통정대부행감목관김공지묘

(최초감목관 김대길의 9대손, 최후의 감목관 경흡)

(비음중에) 고종29년(1892년) 이규원목사에 의해 감목관 특천, 고종35년(1898년) 폐지 300년 영예의 직위가 사라지다. 1936년 비를 세움

 

* 산마장 :

침장, 상장, 녹산장으로 구분,

녹산장내에 갑마장을 두어 산마감목관이 위치

(218년동안 83명의 경주김씨들이 감목관직을 세습)

  

34. 대미수출용 감귤저장고

신문기사 1. 衣貴里 감귤 수출단지는 지난해 농림수산부가 수출단지로 선정, 총사업비 48억1천8백만원(농가부담 50%)을 투입, 오는 97년까지 단지 조성 사업을 벌이게 되는데 현재 55농가가 참여해 55㏊를 수출전략단지로 조성, 연간 2천t을 생산할 계획이다.

감귤 수출단지는 올해 7백t을 수출하는 것을 시작으로 95년과 96년 각각 1천t, 97년에 1천2백t을 수출할 계획이다.(‘94.03.16.연합)

 

신문기사 2. 캐나다와 미국에 대한 올해 제주산 감귤 수출이 감귤 수매가를 둘러싼 생산농가와 무역업체의 이견으로 차질을 빚을 것으로 예상된다.

제주교역은 미국과 캐나다의 현지 수입업자가 ㎏당 1천4백40원선의 수출가격(본선 인도가격 기준)을 제시하고 있어 감귤수매가는 ㎏당 6백70원 정도가 적당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생산 농가들은 올해산 극조생 감귤의 시중 거래가격이 ㎏당 평균 1천2백원선인만큼 아무리 낮아도 ㎏당 8백 원 선은 보장해 줘야 한다고 맞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95.10.12. 연합)

 

신문기사 3. 95년도 시작한 감귤 수출단지사업이 중단된 지 오랩니다.

우리 귤이 미국에서 가격경쟁력이 약하고, 대미 수출절차가 까다로워서 수출 오퍼상에서 물량주문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미국으로 수출해서 얻는 이익보다 내수시장으로 판매해서 얻는 수익이 높을 때가 많아서, 농민들도 수출에 대한 의욕을 잃었습니다.

되돌아보면 한국 정부가 미국의 개방 압력을 극복할 길은 없고, 한국농민들의 저항은 잠재워야겠기에 수익성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생색내기로 수출단지를 조성했던 거예요

(‘08. 3. 오마이뉴스. 이장 김용호와 대담)"

 

35. 동산가름   

김병돈 등 30여 호에 150여 명이 살았던 마을이다. 1948년 11월 7일 군인들에 의해 초토화된 후 복구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잃어버린 마을로 남았다.

현재는 집터가 과수원으로 변해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으나 올레와 대나무 숲이 간간이 보인다.

(제주4·3유적Ⅱ 309쪽)

 

* 포제단터/광대코지

의귀리 리사무소 북쪽 700m 지점에 비쭉이 광대뼈처럼 나온 곶이라 하여 광대코지라 하던 곳에서 포제를 지냈으나 지금은 일대가 감귤원으로 조성되어 형체를 알 수 없음.

   

36. 양애왓

광산 김씨 제주낙향조 11대 손이 이곳으로 와 정착한 의귀리 설촌터 중의 하나.

양애왓은 택호라 한다.

 

37. 의귀리 재건 후 신주거지

해방 후 의귀리는 4.3사건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제주의 여러 마을 중에서도 특히 그 피해를 많이 입은 마을로 손꼽히고 있다.

4.3 사건 후 7개월 동안은 마을에 단 한사람도 살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의 의귀리는 4.3사건 후 재건된 마을의 형태로 그 이전의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4.3 사건 때 모든 건물이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마을이 재건된 이후 의귀리는 조, 보리 등을 비롯, 60년대에는 고구마, 무말랭이, 유채 등의 특용작물도 많이 재배해 오다가 60년대 말부터 몇몇 집에서 감귤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마을의 모든 농토가 과수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감귤재배가 잘 되어 소득을 증대시켰는데, 제주지역에서의 농가 소득수준이 가장 높은 남원읍 중에서도 부촌으로 손꼽히기도 했었다.

 

38. 서동 주민 사용 물통 

(1) 진물

(2) 하니소

 

39. 속령이골 집단묘지

"반세기 이념 대립 상징 잡풀 우거진 또 다른 묘"

속칭‘속령이골집단묘지’는 일반인은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곳이다.

길이 험해서가 아니다.

4․3 당시 숨진 무장대 유골들이 묻혀 있기 때문이다.

무장대 시신들은 1949년 1월 의귀초등학교에 주둔했던 2연대와의 전투에서 숨진 뒤 학교 주변에 방치됐다 이곳으로 옮겨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유족회 관계자 등에 따르면 이 전투 이후 현의합장묘 학살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아직까지 정확한 신원이 파악된 희생자는 거의 없다.

15~17구의 유골이 묻혀 있다는 증언이 전해지고 있지만 이 역시 확실치는 않다.

2003년 5월, 50여 년만에야 공개적인 ‘벌초가 이뤄졌다.

생명평화탁발순례단과 현의합장묘유족회, 4․3연구소 관계자들이 나서 덤불 속에 감춰졌던 무덤의 형태나마 알아 볼 수 있도록 땀을 흘렸다.

탁발순례단은 '우익과 좌익 모두 이념대립의 희생자로 규정한다.'고 새긴 표지판도 세웠다.

벌초 후에는 천도재와 함께 주변 돌들을 모아 작은 방사탑도 쌓았다.

(제민일보 2004년 8월 8일)

 

40. 현의합장묘

2003년 9월, 의귀리에 있던 현의합장 묘역이 수망리 지경으로 옮겨와 조성된 곳이다.

‘현의합장묘 4.3 유족회’는 2003년 9월 16일 의귀리 765-7번지에 있던 집단매장지의 봉분을 파묘해 유해발굴을 했다.

이 날 발굴된 39구의 유해는 화장을 거쳐 9월 20일 이 곳에서 ‘4.3현의합장 영가 하관 및 추도식’을 갖고 이곳에 안장되었다.

묘역에는 전시관과 조형물이 세워져 있고, 주변은 잔디밭으로 예쁘게 잘 조성되어 유족들의 정성어린 손길이 느껴지는 곳이기도 하다.

 

"우리 유족들은 가해자들이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하지는 않았지만 용서하렵니다.

서로 증오하고 미워함을 계속할 때지난날의 굴절된 역사가 반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을 한으로 풀고 미움을 미움으로 풀어서는 않되리라 생각합니다.

한과 미움을 넘어선 성숙한 자세로 우리 제주가 평화가 가득한 행복한 섬으로 거듭나기를 기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해자들을 잊지는 맙시다" (유족회장 주재사) 

 

41. 물 나는 이맹이

일제 강점기 공동목장 운영당시 목감(목축을 관장하는 사람)전용 식수통으로 이마처럼 튀어나왔다하여 이름 지어진 샘물.

최근 수량은 극히 적으나 정비가 잘 된 흔적이 남아있어 보존가치가 있다고 판단됨. 

 

42. 김만일 3대, 2대 선조묘역(경주 김씨 입도 4세, 5세 묘역)

 

-경주김씨 입도 5세 김보(金譜)와 부인(配) 정부인(貞夫人) 양천(陽川) 허씨(許氏)의 묘

-김보의 아버지 김자신(金自愼)의 묘

  김만일의 할아버지 김보의 사망(卒)연대는 명종 17년(1562)이다.

그 후 김만일의 헌마로 2차에 걸쳐 추증되어 광해군 12년(1620)에 어모장군(禦侮將軍) 가선대부(嘉善大夫) 형조참의(刑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광해군 12년(1620)에 증직된 경주 김씨는 모두 3사람으로 김보, 김보의 父 김자신, 김보의 子 김이홍이다.

김보의 아버지 김자신(金自愼)은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되었다.

김보의 아들 김이홍은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겸(兼) 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都摠管)에 추증되었다.

김보의 무덤은 쌍분으로 조성되어 있고 원묘이다.

원래 원묘는 조선초기의 무덤 양식이나 제주에서는 조선중기까지도 간혹 보인다.

김보의 무덤에는 화강암으로 된 복두공복의 문인석 2기가 무덤 앞에 서 있다.

옛 화강암 비석은 글자가 마멸되어 조면암 비석으로 교체되었고, 구비석은 산담 안쪽에 눕혀져 있었다.

이 화강암 문인석은 1620년 김만일의 헌마(獻馬)로 인한 벼슬을 추증 받을 때 육지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같이 벼슬을 추증받은 김만일의 아버지 김이홍의 무덤에는 육지의 화강석 문인석이 아닌, 제주 조면암으로 만든 문인석과 동자석을 세웠으나 오래전에 도굴되었다.

김이홍의 석상들이 김만일의 무덤 석상들과 형태가 같은 것으로 보아 김만일의 무덤 석상을 만들 때 같이 만들어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김만일의 증조인 김자신의 방묘 무덤에는 육지나 제주의 문인석이 세워져 있지 않다.

 

(1) 제주 음택지지라고 하는 곳

➀사라 ➁개미목 ➂영실 ➃돗투맹이(민대가리동산) ➄반득전 ➅반화전(애월읍 별진밭)

 

(2)제주 양택지지라고 하는 곳

➀구와랑 ➁여호내(남원읍 신흥리) ➂사반(안덕면 창천리 배염바리) ➃한교(한림읍 한다리) ➄의귀 ➅어도

 

 

43. 민오름 둘레 목축흔적

(1) 민오름뒤 중잣성

(2) 오도물옆 하잣성

(3) 간장담

(4) 의귀공동목장 봉천수

 

44. 영군모루

영군모루주둔소는 1948년 12월 하순부터 1949년 1월 중순까지 의귀국민학교에 주둔했던 2연대 1대대 2중대 군인들이 전방초소로 활용했던 곳이다.

이후에도 경찰 주둔소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고 한다.

주민 김홍석 씨는 “귀순 후 1949년 봄에 이 곳에서 군인들의 심부름을 한 적이 있다. 영군모루주둔소 아래쪽 샘물이 있는데, 거기 가서 물을 떠오라고 해서 철모에 물을 받아온 적이 있다.” 고 말했다.

흔적은 전혀 남아 있지 않다.

 

45. 영궤

4.3당시 주민들 피난처로 이용되었던 궤라기보다는 엉장으로 보이는 작은 굴이다.

이곳에 잠시 몸을 피하러 왔다는 주민 고기저 씨는 의귀리 마을이 불탄 후에 이 곳에 피신해 있으면서 토벌대들의 동태를 살폈다고 한다. 이곳은 입구가 탁 트인 공간으로 오래 숨어 있지는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46. 남원읍 충혼묘지  

무장대 의귀초등학교 습격시 토벌대 희생자 순직비

 

 

.끝.

 

참고자료 : 기재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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