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사에 왔습니다....
일주문으로 들어 섭니다.
월정사에 대한 기록은 여러가지입니다...만
디지털제주문화대전의 글을 옮기면....
"월정사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오라2동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3교구 본사 관음사의 말사.
[설립목적]
제주 불교가 관음사 창건을 계기로 중흥기를 맞이하였으나 당시 제주에는 체계를 갖춘 선원이 없었다.
이에 선원 중심의 사찰을 운영하여 제주 불교의 내실화를 꾀하기 위하여 월정사를 창건하였다.
[변천]
1934년 음력 4월 8일 김석윤이 제주 포교소 월정암을 창건하면서 월정사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월정사 자리는 1871년 무렵 토굴을 마련하고 수행하던 승려가 머물렀던 곳이라 한다.
1938년 10월 1일자 『불교시보』를 보면,
월정사에 조선불교 중앙선리참구원 제1지방 분원이 마련되어
제주 최초의 선원이 탄생했음을 알리는 기사가 소개되었다.
이 제주 선원은 1940년대까지 존속했으며 참여한 승려들의 수는 10명 이내로 기록되어 있다.
해방이 된 후 1948년에는 제주 4·3사건으로 사찰이 전소되고 승려들이 희생당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그 후 1960년대에는 몇몇 승려들의 노력으로 월정사 터에
7평 가량의 난민 보건 주택을 짓고 법당으로 사용하면서 사찰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월정사가 본격적으로 재건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지문에 의해 대웅전과 요사가 신축되면서부터다.
이후 계속된 불사에 힘입어 2001년 10월 25일에는 전통 사찰로 지정되었다
[현황]
현재 월정사에는 2002년 12월 제주도 문화재자료 제4호로 지정된 소조여래좌상과 목조보살입상이 보존되고 있으며,
안정된 기반 위에서 불법 홍포(佛法 弘布: 불교를 널리 알림)에 나서고 있다."
......고 되어 있습니다.
석조여래입상과 극락보전, 대웅전, 불사리탑이 눈에 들어 옵니다.
극락보전과 50척 높이의 석조여래입상
여래입상 아래에는 지하천불전이 있습니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범종루가 보이고
그 앞으로 금년 봄에 세운 중흥주 비구니 지문의 공덕비가 있습니다.
비문 옆면에 김석윤, 정명, 정진, 비룡, 현도 순으로 스님의 명단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뒷면에는 주지 지문스님의 공덕내용이 기록되어 있군요.
금년 4월에 세운 불사리탑입니다.
진신사리 3과가 모셔져 있다 합니다.
연기문에 기술한 바와 같이 그 광명이 우리 중생에게 나투게 하옵소서.
대웅전으로 가서 부처님을 뵙습니다.
극락보전 입구의 문화재자료 표시판
극락보전 안으로 들어가 앉아계신 여래와 서계신 보살을 뵙습니다.
소조여래좌상은 조선시대 후기 17세기 것으로 추정하고 있고,
목조보살입상은 상호가 원만하고 전신에 영락이 장식이 되어 있는 점과
동체 각부의 조각양식과 수법이 고려 말에서 조선조 초기의 작품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좌 협시가 본디의 상이고 우협시보살은 좌협시보살을 모사하여 모신 것입니다.
신중탱화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의 시립을 받고 있는 지장보살을 뵙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 항상 영원히 우리들과 함께 계시면서,
우리들의 고통이 안타까워 눈물흘리시며,
모든 중생을 부처로 만들어 지옥을 비우시고자,
시방세계 백천 만억세계마다
백천만억의 분신과 화신을 보내
모든 중생을 성불시키기로 원을 세우신...
지장보살을 뵙습니다.
나무지장보살 나무지장보살 나무지장왕 보살마하살!!
박정희대통령부부와 노무현대통령을 함께 품고 계십니다.
법당뒤로 돌아갑니다.
예전에는 대웅전 뒤에 달이 걸려있을 만큼 큰 우물이 있었다고 하여 월정사라고 하였다고 하는 말도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조그마한 연못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연못속에 마음을 담아보고 돌아섭니다.
제주에서는 안봉려관이 관음사를 개창한 1908년까지를 무불시대라 합니다.
사찰이 없으니 머무를 승려도 없었지요.
그렇지만 불맥은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1892년에는 서산사를 창건하신 강창규스님이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면 죽림사에서 출가득도 하셨고
1894년에 김석윤스님이 전라북도 전주군 위봉사에서 사미계를 받고 1898년 해남 대흥사에서 내전 초등과를 수료한 후
제주로 돌아와 1902년까지 제주 광양서재 등의 교사로 활동하면서
안봉려관과 함께 관음사와 법정사 창건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김석윤스님은 1908년 전라남도 장성에서 항일 의병 활동을 하던 기우만과 긴밀히 연락하던 중
1909년 고사훈을 만나면서 의병활동에 뛰어들게 됩니다.
제주성 밖 광양동의 대장간에서 무기를 제조하고 황사평에서 군사 훈련에 돌입하는 한편,
자신이 초안한 격문을 제주 전 지역에 보냈지요.
그러나 사전에 기밀이 누설되어 거사는 실패했습니다.
김석윤은 광주지방재판소 검사국으로 송치된 후 내란죄로 10년 유배형을 받았지만,
그 다음해에 풀려납니다.
제주로 돌아와서 관음사 서무에 취임하였다가
1911년에 관음사 해월학원 교사를 역임하기도 하였습니다.
1934년에는 오라리(현 제주시 오라동)에 제주 최초의 근대 선원인 범어사 제주포교소 월정암(현 월정사)를 창건하였고,
1939년에는 위봉사 표선면 포교소(현 영천사)를 설립합니다.
(석윤스님의 교적부참조)
1945년에는 관음사 소림원 주지, 제주교구 고문을 역임했으며,
1946년부터는 김녕 백련사 주지를 맡으셨다가 4·3 사건 시기인 1949년에 입적하셨습니다.
김석윤 스님에게는 세 명의 출가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막내인 김덕수 스님은 1948년 12월 월정사가 방화될 때 월정사를 지키다가
토벌대에 의해 아라동의 박성내로 끌려가 학살당합니다.
당시 김덕수스님의 나이 19세였습니다.
그 다음해인 1949년 김석윤 스님과, 맏아들 김성수 스님, 둘째 김인수 스님도
이런저런 심화로 세상과의 끈을 놓았습니다.
아래사진은 월정사동쪽 숲속 아무도 찾지않는 곳에 있는 김덕수스님의 비석입니다.
1956년 경에 1943년경 대만해상에서 25살 나이로 사망한 어느분의 위령비를 세우면서
불쌍하게 숨을 거둔 6촌형제 덕수스님의 위령비도 함께 세웠습니다.
하지만 바로 옆 절집에서도 이사실을 모르듯 아는이도 없고..
찾아와 위령해 주는 이도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잊혀갑니다.
Chopin / Fantasie Imprompt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