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岳金岡聞宇(환)
雖然未竝漢拏山
根蟠大海猶嫌窄
肩出重(소)不許攀
九月天寒先雪下
四時雨積半雲間
由來爭說是仙境
爲問安期幾日還
심재 김석익 선생의 한라산이라는 시입니다.
오악과 금강산이 나라 안에 소문났지만 한라산과는 겨룰 수 없다라는 내용이지요.
그중 3연과 4연을
2009 제주교육박물관에서 열린
청연서회초청 제주교육과 선비정신전에서의
양상철님 글씨를 올려 봤습니다.
심재선생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중반까지 살았던 제주의 한학자이십니다.
스스로를 일컬어 "세상과 교류함을 즐기지 아니하고 오로지학문에 전념하여 평생토록 外榮에는 뜻을 두지 아니하였다."라고 하시면서
탐라기년, 증보 탐라지, 耽羅觀風案, 破閑錄, 槿域詩話, 儒理漫筆 등의 저술을 하셨습니다.
탐라기년에서는 탐라국 시절부터 조선 후기까지 역사를 정리하였고,
증보탐라지등에서는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 후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는 근대사에 이르기까지를 서술하셨습니다.
12월의 어느날 오문복선생님의 안내로 심재선생의 자취를 따라 가는 기행을 했습니다.
그 기록입니다.
생가터 (제주시 이도2동 38-1번지)
제주 객사동 자택터 (삼도동)
심재묘소 (오등동)
더이상 찾아갈 곳이 없나 봅니다.
그래서.....
심재선생의 9대조 김진용선생관련유허지를 갑니다.
한국학 중앙연구소의 한국 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에서 발췌한 김진용선생 관련 글을 먼저 옮깁니다.
"조선중기 유학자·문신. 자는 진숙(晉叔), 호는 명도암(明道菴)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제주도 구좌읍(舊左邑) 한동리(漢東里)에서 출생하였다.
제주 입도조(入島祖) 김윤조(金胤祖)의 8세손으로,
어모장군(禦侮將軍) 김귀천(金貴泉)의 현손이고,
부친 교생(校生) 김경봉(金景鳳)의 차남으로 태어나,
처가가 있는 제주읍(濟州邑) 봉개리(奉蓋里)로 옮겨 살았다.
1615년(광해군 7) 제주에 유배 온 간옹(艮翁) 이익(李瀷)에게 수학하여
경서에 밝고 행실이 정결(淨潔)하였다.
1634년(인조 1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상경하여 성균관(成均館)에 진학하고,
1643년 숙녕전참봉(肅寧殿參奉)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이후 다른 벼슬을 하지 않고 귀향하였다.
1658년(효종 9)에 이괴(李檜)가 목사(牧使)로 부임하여
학문의 작흥(作興)과 조례규범(條例規範)을 오직 그에게 자의(諮議)하였다.
학교를 창건(創建)하고 장수당(藏修堂)이라 편액(扁額)하니
이로부터 학문이 진흥하여 문교(文敎)가 널리 행해져서
남방풍속(南邦風俗)이 일변(一變)하였다.
아들은 예조정랑(禮曹正郞) 김계륭(金繼隆)·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김계창(金繼敞)을 두었다.
1831년(순조 31) 유림들의 진정으로 영혜사(永惠祠: 일명 상현사(象賢祠))에 추향되었으나,
1849년(헌종 15) 고득종(高得宗)의 봉향처인 향현사(鄕賢祠: 1667년 현액된 귤림서원(橘林書院)의 별사. 일명 영곡사(靈谷祠))로 옮겨 배향하였다.
1965년 10월 탄신 6회갑 기념으로
이숭녕(李崇寧)의 명문으로 된 ‘명도암김진용선생유허비(明道菴金晉鎔先生遺墟碑)’가 명도암오름에 건립되었다."
명도암 마을입구
김진용선생 유허비
향현사
향현사 유허비와 그 주변
장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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