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한라산 자락

장전리 충혼탑과 열녀비

하늘타리. 2011. 6. 3. 17:23

 
장전리 충혼비와 열녀비


장전초등학교앞 사거리에서 광령쪽으로 큰길을 따라 걸어가면

왼쪽 한편에 비석 세기가 나란히 있는 것이 보입니다.

 

바라보아 왼쪽

충혼비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전사한 장전리 출신 젊은이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1963년도에 건립한 비석입니다.

 

충혼비옆 조그만 조두석 전면에 8명의 전사자이름

 

뒷면에 6명의 순직자이름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오른쪽 비석

 

學生孫處權妻烈女朴氏之閭라고 쓰여 있는 붉은 큰 글씨
그리고 오른쪽에 上純祖十七年十月 日命旌,

왼쪽에 嘉慶二十一年丙子라고 작은 글씨로 쓰여 있습니다. 

 

이해하기가 어렵네요.
순조 17면이면 1817년이고 가경은 청나라 인종의 연호로 21년이면 순조18년이고 1818년이라는 이야기인데

순조 몇 년이던 가경 몇 년이던 한가지로 쓰지 않은 이유를 알 수가 없어요.
그리고 읽을 때도 오른쪽 왼쪽 나누어 읽으면 않되고

上純祖十七年十月 日 띄우고 命旌 嘉慶二十一年丙子라고 읽어서

1817년 10월 보고내용에 의해 1818년 정려되었다로 해석해야 합니다.
명정은 말 그대로 임금이 명하는 정려이기 때문에

그 집안뿐이 아니라 마을의 경사라 하여 육지에서는 관청의 지원으로 마을전체 또는 가문전체의 공의에 의해 세워지는데

이상하게도 제주에서는 많은 정려비가 그 자손이 자비로 비를 세웁니다.

그것도 글자를 보아서는 전문가의 솜씨도 아닙니다.


비석은 비각으로 잘 보존되어 있어

현장에서는 뒷면 글을 확인하지 못하여

북제주군 비석총람이라는 책자에서 그 내용을 찾았습니다.
뒷면에는 男德福 孫恩悌 曾孫珍奕,

좌측면에는 光緖十四年戊子 月 日改建, 우측면에는 門宗珍奎 鐫字라고 새겨져 있다는 것을 보니

고종 25년 증손에 의해 다시 세워졌습니다.

 

북제주군 비석총람이 인용한

1906년(光武10년)에 鄭殷采가 각도의 忠臣, 孝子 등을 조사 기록한 續修三綱錄 烈行條의 기록을 옮겨보면
朴氏籍密陽 孫處權妻 素以貧窮 東○西織孝養舅姑

得病侍湯 侍側晝夜 不懈將至周年

舅姑俱歿 葬以禮祭以禮 鄕里咸稱曰孝婦其夫忌日下從

 御使 揚 純祖丙子啓聞旌閭

라고 하여 엄청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날품으로 시부모를 봉양하고

게다가 남편이 병이 들자 지극정성 병구완

그리고 남편이 죽자 3년까지 모셔주고

시부모 장례와 제사 다지내주었다

그래서 어사가 그 내용을 보고해서 순조병자(1818년)에 정려되었다는 내용입니다.

 

한마디로 너무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만
이 분 돌아가실 때쯤에는 정말 속이 다 삭아 없어졌을 테니

그 자손이 당연히 속이 다 녹아내리고 온몸에 가시가 난 머구낭 지팡이를 짚을 수밖에 없겠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각종 정려비에 나타난 극단적인 사례를 극렬하게 비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례들이 孝心을 담았던 형식일 뿐이지

그 자체가 바로 孝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씁쓰레 하면서도 정려를 찾아다니는 것은

그 시대 그 상황 하에서 그러한 형식을 통해 나타난 하나의 양상일 알고자 하는 것이고
그 양상 속에 담긴 새로운 효의 진정한 의의를 발견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다수의 정려는 가슴을 무겁게 합니다.

 

그러다 보니 가운데 있던 누군가의 공덕비는

무슨 이유에 세워졌는지도 확인 안하고 그 자리를 떠나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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