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순동을 다녀왔어야 하는데.....
문화유산답사회원들과 한국전 유적에 대한 답사를 다녀왔습니다.
도순동에는 꼭 가야한다고 안내자에게 신신당부하고
안내자도 도순동에는 꼭 가겠다고 했는데...
도순동에 아무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는 몇몇분들의 말에
그곳에 갔다가 허무해질까봐...
안덕에서 마치자는 다중의 의견에 동의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자꾸 생각이 납니다.
2003년 발굴작업이후로는 항상 스쳐지나갔습니다.
이번 답사기회에
도순동에 뭍혀있던 슬픈 영들이 떠난 자리가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그 흔적이라도 보고
해원상생을 기원해 드렸어야 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자꾸납니다.
자꾸 발굴작업전의 모습만이 떠오릅니다.
제주신보 1951년 3월 18일자에 이런 기사가 있었습니다.
"모 유력한 소식통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한라산 폭도 토벌에 본도 국민방위군이 출동하리라 한다.
즉 맥(麥)수확기 내에 폭도를 완전히 섬멸하기 위한 각 방면의 요망에 따라
국민방위군 제3단 수뇌부에서는 무기만 획득하면 감연(敢然) 출동할 것을 언명한 바 있었다는데
이에 따라 강경옥(康慶玉) 국회의원은 지난 17일 급거 중앙으로 향발하였다 한다.
강(康) 국회의원은 금월 말 이내로 귀향할 것이라 하는데
중앙과의 교섭에서 충분한 무기 급여를 받을 것이 확실시된다."
몇년전 이 기사를 열람하면서 무척 웃었습니다.
웃다보니 웃어야 될 사안이 아니데 웃었다는 미안함에 한동안 기분이 않좋았습니다.
국민방위군!
총도없고 군복도 없고 신발도 없는 거지부대이자
피골이 상접한 해골부대이자
각종질병에 노출된 환자부대입니다.
그들을 데리고 한라산폭도토벌을 간다?.
한국전쟁때 운용된 국민방위군을 아세요?
방위병을 이야기하는 거냐고요?
방위병제도는 1970년대 시작되어 1990년대 중반까지 운영된 것이니까 그건 아니고요.
성격도 다릅니다.
통상 6.25라고 하는 한국전쟁이 발발한후
낙동강이남으로 밀려내려갔던 한국정부가 인천상륙작전후 압록강경계선까지 진격하여 북진통일을 눈앞에 둔 듯했다가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다시 후퇴가 시작되었습니다.
두번째 후퇴이지요.
북한 인민군의 진격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한강 다리까지 폭파해가며,
서울 시민을 내팽개치고 달아났다가 뻔뻔하게 서울로 다시돌아왔던 이승만 정권이 다시 후퇴 길에 나서게 된 것입니다.
1월 4일에 서울을 다시 빼앗겼다고 하여 1.4후퇴라고 하는 거지 후퇴는 12월 부터 시작되었지요.
(서울의 중앙청을 점령한 중공군)
그런데 정부에서 생각해 보니
자기들만 내려가면 나중에 자기들을 대신해 싸워줄 사람이 없습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제주도젊은이들은 다 전장에 투입되었고
육군 각부대 장병들도 싸우다 죽으면 보충할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군인으로 보충할 젊은이들을 다 데리고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1950년 12월15일,
군경과 공무원이 아닌 만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장정을 제2국민병에 편입하고,
이들 중 학생이 아닌 자는 지원에 의해 국민방위군에 편입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국민방위군 설치법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다음날 국회의원들은 내용도 않보고 이 법안을 통과시킵니다.
법안의 주요내용은
①군경과 공무원이 아닌 만17세 이상 40세 이하 장정들을 제2국민병에 편입시킨다.
②제2국민병 가운데 학생을 제외한 자는 지원에 의해 국민방위군(國民防衛軍)에 편입시킨다.
③육군참모총장은 국방부장관의 지시를 받아 국민방위군을 지휘 감독한다
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지원자로 국민방위군을 창설한다는 규정은 모두 거짓입니다.
당시 서울시에 붙여진 공고문 내용입니다.
공 고
전 서울지구內 에 居住하는 제2국민병 該當者는 左記 各項을 遵守할 事.
記
1. 身體檢査통지서를 領受한 제2국민병으로서 정당한 이유 없이 不應할 時는 병역법 제74조에 의거하여 2개월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2. 正當한 이유가 있다고 認定되는 자랄지라도 身體檢査통지서를 領受한 3일 이내에 身體檢査를 받어야 하며 不應時는 제1항에 準한다.
여기에 어디에 지원이고 어쩌고가 있습니까?
해당자 전원을 제2국민병에 편입시켜놓고 그 대상자 전원에게 신검에 응하지 않을시 징역에 처한다고 겁을 줍니다.
첫 부대로 1만여 명이 창덕궁에 소집됩니다.
(창덕궁에 집결한 서울지역 제2국민병)
그때부터 죽음의 행렬이 시작됩니다.
1951년 1월부터 전국 각지에서 50만 명에 이르는 17~40세의 남성들이 징집된 국민방위군이
적에 의해서가 아니고 ....
그들을 보호하고 책임져야할 정권과 정권의 하수인에 의해 저질러진 내부 비리와 부패로 인해.....
남하행군과 교육대 수용과정에서 수만 명이 굶어죽고 얼어죽고 질병에 시달리다 죽어갑니다.
무려 90,000여 명이 죽었습니다.
결국 국회는 1951년 4월 30일 국민방위군의 해체를 결의했고,
군법회의에 회부된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과 부사령관 윤익헌 등 5명은 사형이 선고되어 그해 8월 12일 총살되었습니다.
조금 자세히 써볼까요?
전국각지에서 징집된 50만명의 인원을 후송하는데 쌀 한 톨 군복 한 벌 안 주고,
언제까지 집결(集結)하라는 것도 없이
막연히 ‘착지(着地) 부산 구포’라는 명령만 단위별 책임자에게 주어집니다.
단한가지 양곡권(糧穀券)이라는 것이 지급되었는데,
행군 도중에 대열 책임자가 이 양곡권을 경유지의 시장이나 군수에게 보이고
급식을 해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성모(申性模)의 국방부와 조병옥(趙炳玉)의 내무부가 서로 양곡지급권한을 갖겠다고 다투는 바람에 양곡 지급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여기에다 내무부는 전국의 시장 군수에게 양곡지급을 중단하라고 지시하는 사태까지 벌어집니다.
조병옥
대단한 사람입니다.
50만 명의 국민방위군 장정들에게 '밥을 주지 말라'고 지시한 사람으로
말 그대로 헐벗고 굶주린 50만의 죽음의 행렬을 만든 사람입니다.
또한 제주도 4.3사태 당시 경무부장(지금의 경찰청장)에 재직했고,
대통령 이승만과 함께 20만명이나 되는 국민보도연맹 연맹원에 대한 학살을 지시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자기딴에는 이승만보다는 깨끗하다고 스스로 대통령이 되겠다고 입후보했으나,
미국에서 병사하고 말지요.
하여간 조병옥때문에
홑껍데기 옷을 입고, 겨울행군에 나선 방위군들은 수도 없이 끼니를 굶어 해골(骸骨)같이 야윌 수밖에 없었고,
유난히도 추웠던 그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굶고 얼어 죽는 자가 속출할 수밖에 없었던 것 입니다.
이들은 걸어서 혹한의 천릿길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제대로 된 숙식이 제공되기는커녕 혹독한 추위에 몸을 가릴 군복조차 지급되지 않았지요.
2명 당 한 장씩 지급된 가마니때기 한 장이 군복이었고, 이불이었습니다.
지옥의 행군이 계속되면서 동사·아사·병사·낙오자와 도망자들이 속출했음에도 아무런 대책도 마련되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행렬’ 혹은 ‘해골들의 행렬‘이라는 말이 그래서 나온 겁니다.
죽음의 천릿길 행군 끝에 부산에 도착한 이들 거지부대들은 경남북과 제주도의 교육대에 옮겨졌습니다.
국민방위군을 창설할 때 정부는 경남북과 제주도에 51개의 교육대를 설치하고 병력을 이곳에 집결하도록 했습니다.
국민방위군 병력을 1개 교육대당 1만 명 정도가 할당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51개 교육대에서 보고된 도착한 인원을 취합하여 보니 40만 6천명뿐입니다.
50만과 40만 6천의 차이는 해석할 능력이 없으니 모른다치고
여기서의 처우는 조금 나아졌을까요?
아닙니다.
여기서는 당시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당시 돈으로 23억 원(圓)의 예산(당시의 국회조사에서는 최고 60억 원)과 쌀 5만2,000섬을 빼돌려 착복합니다.
결국 교육대에 도착한 장정들도 해골의 형상을 한 채 차례로 죽어나갔습니다.
이의를 제기하면 돌아오는 것은 가혹한 구타(毆打) 뿐이었고,
심한 경우 빨갱이로 몰려 맞아 죽는 경우까지 속출했습니다.
게다가 일부 교육대에서는 해골이 되다시피 한 병력이 도착하면, 이들을 수용(收容)하는 것이 아니라
대신 이들 병력(兵力)을 이른바 ‘돌려치기’로 활용하였다고 합니다.
서울이나 한강 이북에서 떠난 병력이 천신만고 끝에 집결지에 도착하면
자기들 교육대에는 수용능력이 없다고 김해로 가라고 하고,
김해교육대에 가면 진주로 가라하고,
진주교육대는 또 마산으로 가라하고 이렇게 계속 뺑뺑이를 돌렸답니다.
그러면서도 각 교육대에서는 이들을 며칠씩 수용한 것으로 서류를 꾸며 예산과 식량을 빼돌렸지요.
문제는 그 와중에 하루에도 수 백 명씩의 장정들이 굶어죽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군대는 군대였지만, 명부도 없고 군번도 없고 무기도 없고 군복도 없는 부대입니다.
명부(名簿)도 없으니 몇 명이 동원되었고, 어디서 어떻게 얼마나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정부의 공식기록(公式記錄)인 ‘한국전란 1년지’에는 천 수백 명 사망으로 돼 있지만
또다른 공식발표에는 제2국민병 68만여 명을 소집하여 질병, 동상 등에 의한 낙오 및 도망자를 제외하고 약 30만 명이 수용되었으며,
사망자는 1,234명이라고 발표하였습니다.
자기들 스스로 인정한 38만여 명에 달하는 낙오자의 행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이들 낙오자들의 생사여부에는 관심조차 없었다는 반증입니다.
중앙일보(中央日報) 간행의 ‘민족의 증언’에는 50만 명의 대원 중 2할(10만 명) 가량이 병사나 아사했다고 돼 있고,
부산일보(釜山日報) 간행의 ‘임시수도 1,000일’에는 사망자가 5만여 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사학자 중에서 이승만을 가장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유영익 교수조차
이 사건을 “9만 명가량의 군인이 동사ㆍ아사ㆍ병사한 천인공노할 사건”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런데 국민방위군의 참상이 곳곳에서 목격되면서 사회문제로 비화되는데도
당시의 대통령과 국민방위군사령관은 일말의 반성도 없이 사태를 호도하기만 했습니다.
여기에서 당시의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김윤근은 이승만 대통령이 총재로 있던 대한청년단 단장 출신입니다.
그는 1948년, 우익성향의 어용단체인 대한청년단에 들어갑니다.
대한청년단에 들어간지 얼마되지 않아 그는 뜻하지 않은 행운을 얻었습니다.
대한청년단의 총재인 이승만이 청년단을 방문하던 날,
이승만이 그의 앞을 지나면서 관등성명을 묻자 우렁찬 목소리로 답변하여 대통령의 눈에 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김윤근은 이승만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발발한 한국전쟁은 김윤근에게 고속 출세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전쟁이 터지자 대한청년단은 이승만의 지시에 의해 청년방위대를 증설하였고,
후방에서 치안유지를 담당하는 역할을 맡게됩니다.
이로 인해 대한청년단의 간부들은 국민들을 상대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마구 휘두르며 열심히 사복을 채워나갔습니다.
김윤근은 이승만의 오른팔인 국방장관 신성모와도 끈끈한 인맥을 맺어 그의 소개로 결혼까지 했으며,
1950년 말 무렵에는 대한청년단의 최고 권력자인 단장에 취임했습니다.
대한청년단의 단장이 된 그에게 이승만은 더욱 큰 감투를 내려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새로 창설된 국민방위군의 사령관 직위입니다.
국민방위군사령관은 공식적으로 한국 육군의 준장 대우를 받는 자리에 해당됩니다.
일제말기에 일본군 사병 노릇을 잠깐 했다는 것이 군 경력의 전부인 엄연한 민간인 신분이었던 김윤근은
이렇게 해서 졸지에 준장이라는 장성직에 올랐습니다.
그 과거야 어찌되었건 중책을 맡은 뒤 잘 했으면 될텐데 사복만을 채웁니다.
국민방위군사건이 백일하에 드러났는데도 사령관 김윤근은 1951년 1월 8일,
“우리의 앞에는 국민방위군 50만 명이 있고, 먹을 식량이 있고, 산같이 쌓인 군기군물이 있다”고 전 국민을 호도합니다.
여기에다 이승만도 그 다음날 “방위군사령관이 8일 발표한 성명과 같이 우리는 방위군과 청년단 수십만 명을 앞세우고,
다 일어나서 중공군의 인해전을 인해전으로 막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나섰습니다.
국회에서 국민방위군의 참상을 둘러싸고 논의가 거듭되자 김윤근은 1월 20일 다시 성명을 발표하여
“일부 불순분자들이 여러 가지 낭설을 퍼뜨리고 있다”면서
“금번 국가방위에 필요한 인적자원을 남하시켜 철저히 확보했다는 것은 큰 성공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자찬을 합니다.
국방장관 신성모는 더욱 가관이었습니다.
방위군사건과 관련하여 국회에 출석한 그는 “희생자가 아주 적게 난 것을 아주 행복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너스레를 떨면서
“제5열(스파이)의 책동이 가장 위험한 일이니 제5열의 책동에 동요 말기를 바란다”고
국민방위사건에 문제제기를 한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았습니다.
그뒤의 과정은 이야기 하지 않겠습니다만..
(신문기사)
(방위군간부들에 대한 공개총살집행장면)
결론적으로 국민방위군사건은 국가권력에 의한 학살입니다.
방위군 병사들을 직접 죽인 것은 아니었다하더라도
그들에게 보급품과 식량을 지급하지 않고 횡령하여
수만 명을 굶어죽고, 얼어 죽고, 영양실조로 병들어 죽게 한 가장 잔인한 학살입니다.
세계전쟁사를 살펴보면 적의 포로나 민간인들을 붙잡아 후방으로 후송하는 과정에서
온갖 비참하고 잔인한 일들이 수도 없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자국의 소중한 예비병력들을 말살한 경우는 대한민국의 국민방위군사건이 전세계에서 유일한 경우입니다.
자신들의 가용자원에 대한 태도가 이런 정도였으니
불순분자라고 생각하는 민간인 집단에 대해 참담한 학살이 일어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겁니다.
제주도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제주도에는 1951년 1월 독립제3단과 제1교육대에 5266명과 9770명이 도착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독립제3단과 제1교육대가 어디인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활용되었고 어떤 활동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책임자가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한승훈님의 까페에 있는 사진입니다.
조천에 사시는 어느분이 제공하셨다하는데
국민방위군 교육대 폐쇄얼마전인 1951년 4월 15일에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부대정문에서 웅변대회입상학생들과 사진을 찍습니다.
그안에 있던 교육생들에게는 지옥이었지만
간부들에게는 천국과 같은 곳이지요.)
동아일보 1951년 4월 기사에 한줄이 나옵니다.
"본토와 지리적 거리가 먼 제주도로부터의 제대 제2국민병의 귀향은 시급을 요하고 있으며
현재 제주도의 제2국민병 제대자는 8,595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지난 30일 경기도 출신을 제일 먼저로 귀향시키기 위하여 선박이 부산항을 출항하였는데
2~3일 중으로 입항될 것이라 한다.
그리고 제주도내에서 귀향할 제2국민병 제대자의 도별(道別) 수는 다음과 같다 한다.
△경기 6,191명 △강원 862명 △황해 392명 △충남북 218명 △전남북 99명 △경남북 119명 △38이북 714명 △총 8,595명"
제주에 온 인원는 15,000명이 넘는데 복귀대상자는 8,595명입니다.
그리고 이들도 제대로 고향으로 갔는지 그 여부를 알길이 없습니다.
육지로 가는 수송선을 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합니다.
서귀포국민학교에 수용되었다 돌아간 현 인하대 명예교수 심재갑의 증언에 의하면
교육대는 8월에 폐쇄되었는데
육지로 가는 배편을 구하지 못해 기다리는 중 그 사이에
극도로 쇠약해진 젊은이들은 하루에도 십여 명 씩 죽어 나갔다고 합니다.
1993년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됐다가 제주 수용소에서 유명을 달리한 金國鎭씨(당시 37)의 장남 興淳씨(61.상업.서울시 강서구 염창동 2774의 34)가
국민방위군으로 제주에 수용됐던 3-4명의 고향분을 통해 부친 소식을 전해 듣고
20여년간 조사 끝에
부친을 포함한 수십구의 국민방위군 유해가 강정천 하천부지에 가매장된 사실을 확인하고
현지에 '무명용사탑'만이라도 건립해 줄 것을 청와대와 서귀포시 등에 진정했습니다.
서귀포시는 당시 수용소 관계자와 주민 등 10여명의 증언을 통해 金씨의 주장이 사실로 확인됐지만
국방부나 육군본부 등 관계기관에서 "전사자료가 없어 공식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밝혔기 때문에 해줄일이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었지요.
2003년 입니다.
군유해발굴단에 의해 44구의 유해가 강정천 하천변(서귀포시 道順동 1368 하천부지)에서 발굴됩니다.
발굴된 44구의 국민방위군 유해에 대한 합동 영결식을 제주지역군부대에서 치르고
제주시 양지공원에서 화장후 이송하였습니다.
2010년 7월입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는
제주·경상도 지역에 49개 국민방위군 수용시설을 확인했습니다.
50만 이상을 동원했고 수용한 실제 인원은 40만 6000여 명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수용중 사망한 인원수는 밝히지 못한채
수용중 사망이유가 굶주림과 전염병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울러 희생자들은 교육대 주변 공동묘지나 야산에 임시 매장되었으며
유해 매장 사실을 유가족에게 통보하는 등 후속조치도 없었다 고 밝힙니다.
진실화해위는 국민방위군 피해에 대한 전반적인 실태 조사에 국가가 나설 것을 주문하면서
정부가 공식적 사과와 함께 위령제를 열고,
피해자에게 전사·순직자에 준하는 예우를 갖춰 줄 것을 권고했습니다만
지금까지 국민방위군에 대한 그 어떤 조치가 있다는 이야길 들은 것이 없습니다.
(답사회 백민자선생님에게 받은 강정천변 지금의 사진입니다)
문화유산답사길에 그들이 머물렀던 곳에 우리라도 들러서 위령을 했어야 했는데
옮겨졌다는 이유로 바이패스했습니다.
패스했습니다.
그게 가슴에 걸려 한참을 주절거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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