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야기/한라산 자락

추사 김정희 유배지

하늘타리. 2010. 8. 18. 16:00

 

추사관 출구를 돌아나오니

커다란 비석이 불쑥 다가섭니다.

추사김선생적노유허비

 

그 뒤로 온전히 한세대가 살아도 될만한 집이 있습니다.

이 집에서 추사선생이 유배중 가장 긴 시기를 지내셨습니다.

비석 뒷면 첫부분에 "이곳은 김정희 산생이 유배되어 9년동안이나 적거하셨던 유허지이다"라고 기술되어 있는데

그것은 사실과 조금 다릅니다.

 

추사는 1840년 10월 대정현에 도착해서 대덩읍성내 송계순의 집에 살았습니다.

송계순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위리안치라는 형이 집행되어

가시울타리를 칩니다.

가시울타리를 치는 것을 본 추사는 후에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씁니다.

"가시울타리를 집터의 모양따라 설치한다. 그래서 집안 마당과 뜰사이는 걸어다닐 수가 있으니 다행이라 하겠다"

이곳에서 몇년정도 지내신후 

위리안치에서는 풀리셨는지

이일대 전부가 자기땅이라고 하는 안성리거부 강도순의 집으로 옮겨져서

모거리에서 생활을 하며 찾아오는 이들에게 학문을 가르킵니다.

추사는 이곳에서 가장 오래 살았습니다만

유배가 풀리기 1~2년쯤 전에 마실물이 불편하여 자주 아프다하여 대정형 창청리로 거소를 바꾸었고

그곳에서 유배가 풀립니다.

 

가장 오래지내셨던 강도순의 집으로 들어갑니다.

이집은 1948년 4.3으로 인해 불타 없어졌으나

1984년  제주도 자체적으로 기념관을 세우고 집을 복원할 때

강도순 증손의 고증과 당시 마를사람들의 증언에 의해 복원된 집입니다.

 

정낭이 있습니다만

이 정낭은 관광객을 위해 만들어 졌을겁니다.

제주에서는 대문없이 주로 정낭만을 설치하지만

마을의 몇몇 부호들의 집은 대문을 세우고 그옆에 쉐막을 만들었습니다.

이따 한번 보시지요.

 

소나 말을 이용하여 곡식을 빻는 말방애입니다.

통상 마을 공동의 공간에 위치하여

마을 사람이 다 같이 쓰는데

강도순의 집은 부자라서 개인 집에 설치되어 있었나 봅니다. 

 

그 뒤로 보이는 대문을 겸한 쉐막에서 살던 소가 이 방애를 돌렸을 겁니다.

 밖거리

돗통시 

탈곡하기전의 농산물을 단으로 묶어 쌓아두거나

탈곡하고난 짚을 쌓아 놓은 것. 눌이라합니다. 

 안거리

 물팡과 물허벅

바닷가의 샘물이나 고인빗물을 물허벅으로 길어와 여기 정지앞 물팡에다 내려놓습니다.

 

 정지

육지일부지방에서도 부엌을 정지라 하지요.

육지지방과 달리 취사와 난방을 위한 구덩이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취사를 위해서는 바닥에 솥덕이라하는 4~5개의 돌로 만든 화덕을 두고 사용하였습니다.

 안거리

 

모거리 (별채)

 모거리용 돗통시

 

 모거리 내부

 안거리 다시한번

밖거리 다시한번

모거리 다시한번 

정리해서 말하면

제주의 전통 초가집은 한가구 울타리안에 안거리(안채), 밖거리(바깥채) 이렇게 두동의 건물이 있거나

안거리, 밖거리, 모거리(별채) 이렇게 세동의 건물이 있는 집이 있는데

강도순의 집은 3동(쉐막까지 4동)짜리 집으로서

주인댁이 살았던 안거리, 사랑채인 밖거리, 별채인 모거리, 두곳의 통시, 대문간, 방앗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념관쪽 정낭은 추가로 만든 것입니다.

추사는 밖거리에서 강도순의 친외가쪽 아이들을 포함하여 마을청년들에게 학문을 가르켰고

모거리에서 기거를 하며 추사체를 완성하고 세한도를 비롯한 여러점의 서화를 남겼습니다.

 

 대문과 쉐막 

 

기념관쪽 정낭으로 나와

올래를 걸어 

 모거리와 방앗간 사이 이집 대문앞으로 와 봅니다.

 

다시 기념관쪽 정낭으로 와서

김정희가 살았던 모거리와 학문을 가르켰던 밖거리를 한번 더 보고 

발길을 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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