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셔와 가꾼 아뜨리움/음악편지

Richard Wagner // Siegfried Idyll

하늘타리. 2010. 1. 27. 14:01

 



바그너

Richard Wagner (1813-1883)

Siegfried Idyll
리하르트 바그너 - 씨그프리드 牧歌


        꼭 음악애호가들이 아니라도 독일 오페라의 대표적 작곡가인
        바그너를 이름으로라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탄호이서 Tannhauser", "로엔그린 Lohengrin", "트리스탄과 이솔데 Tristan und Isolde" 등 수많은 오페라를 작곡한 바그너의 작품 중 오늘은 대단히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순수한 기악곡으로 걸작 중의 하나인 "씨그프리드 목가"를 감상해 보지요. 바그너는 1813년 5월22일에 라이프치히에서 경찰서기였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9번째 자식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바그너는 태어난지 6개월 후에 아버지를 잃게 됩니다. 그의 어머니는 당시 유명한 연극배우이자 가수, 시인, 화가였던 루드비히 가이어(Ludwig Geyer)와 재혼을 하게 되는데 그런 이유로 바그너는 어린 시절 계부 가이어의 예술적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바그너는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의 생존 중에 가이어와 통정해서 생긴 아이가 바로 자신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여하튼 그의 가족은 그가 어렸을 때 드레스덴으로 이사하여 그는 9세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고, 18세 때 라이프치히대학에 들어가 음악과 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그의 첫번째 결혼생활은 불행이었습니다. 바그너가 23세에 결혼한 첫 아내인 여배우 미나 플라너(Minna Planer) 는 신혼 7개월만에 애인과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였고 그가 도망친 아내를 쫓아갔으나 허사였습니다. 그 후 미나는 잘못을 뉘우치고 되돌아 왔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이미 깊은 틈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1839년 9월에 런던을 거쳐 파리로 향하는데 이 때부터 1842년까지 계속 파리에서 거주하게 됩니다. 파리에서의 생활은 바그너에게 정신적인 고통은 물론, 많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역경을 가져다 준 시기였지만 다른 면에서는 그에게 문학적 그리고 음악적인 성장을 가져다 준 계기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바그너가 예술의 도시 파리에서 수많은 문학가와 예술가들과의 접촉을 가질 수 있었고 특히 그곳에서 리스트(Franz Liszt)와의 만남은 그에게 아주 중요한 음악적 삶의 밑거름이 되었지요. 바그너는 거대한 규모의 오페라를 10 여곡 남겼는데 이 모든 오페라의 대본을 직접 썼을 정도로 음악가로서는 보기 드물게 문학과 철학에도 조예가 깊은 명문장가였으며 음악작품의 대본 이외에도 "독일음악론 Der Deutsches Musikwesen"(1840) 등의 많은 저서를 남겼습니다. 스위스의 루체른(Lucerne)은 스위스에서 가장 경관이 아름다운 도시의 하나로 교외의 시립 트리시프엔공원 속에 있는 호수를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은 언덕입니다. 지금은 그 위에 바그너의 기념관이 되어 있는 3층의 흰 건물이 서 있습니다. 이곳은 바그너가 바이에른의 소도시 바이로이스(Bayreuth)로 옮기기 전에 사랑하는 아내 코시마(Cosima)와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었던 집입니다. 그 집의 현관으로 들어가면 나선형의 계단이 눈에 띄는데 그 계단이 바그너와 15명의 연주자가 자리를 잡고 "씨그프리드 목가"를 연주 했다는 곳입니다. 그보다 약 10년 전 바그너의 삶에 하나의 큰 사건이 일어납니다. 1857년, 당시 유명한 지휘자였던 폰 뷜로우(Hans von Bulow)가 아름다운 부인 코시마와 함께 결혼 기념여행 중 바그너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코시마는 바로 리스트와 소설가 마리 다구(Marie d'Agoult) 백작부인 사이에 혼외정사로 태어난 딸로 파리에서 교육받은 재원 이었고 코시마의 남편인 한스 폰 뷜로우는 차이코프스키가 그의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헌정했던 독일의 대지휘자이자 피아노의 대가였습니? 쇼팽이 그의 연습곡(Etudes) 작품번호 10번과 25번을 바그너의 장인과 장모인 리스트와 마리 다구 백작부인에게 각각 나누어 헌정한 것은 묘한 인연이라 하겠습니다. 바그너의 전처 미나는 그 전 해에 이미 세상을 떠났는데 바그너와 코시마의 이 운명적인 만남으로 인해 후에 코시마는 남편을 떠나 바그너와 함께 생활하게 되었고 두 사람사이에 3명의 자녀가 태어납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그의 나이 56세 때인 1869년 6월에 출생한 장남 씨그프리드는 바로 이 아름다운 음악의 주인공이자 훗날 아버지의 음악 지휘자 겸 작곡가가 됩니다. 바그너는 인생도 황혼에 접어들 무렵인 늦은 나이에 장남 씨그프리드가 태어나 매우 큰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아들을 낳은 뒤 뒤늦게 결혼한 사랑하는 아내 코시마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작곡한 것이 이 "씨그프리드 목가"로서 코시마의 33번째 생일인 1870년 12월 25일의 이른 아침 트리프시엔의 이 집에서 처음으로 공연한 것입니다. 총연주 시간이 20분도 채 안되는 소품이지만 목가적인 정서를 노래한 바그너의 걸작 가운데 하나입니다. 곡명인 씨그프리드는 물론 아들의 이름에서 딴 것입니다. 이 곡이 그와 같이 아침 일찍 연주되었던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코시마의 생일선물로서 이 곡을 몰래 작곡한 바그너는 그녀가 아직 자고 있는 동안에 연주하여 그녀를 깜짝 놀라게 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전날 그는 15명의 악사를 모아 근처의 호텔에서 연습을 끝내고 당일 아침 그것을 실행에 옮긴 것이지요. 그 날 코시마는 아름다운 음악 소리에 눈으 떴는데 문을 연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그녀의 침실로 통하는 계단의 정상에 자리한 바그너와 계단의 위에서부터 아래로 모여 앉아 각가지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15명의 악사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만면에 웃음을 띄우고 연주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뜻밖의 광경에 코시마는 놀라고 남편 바그너의 따뜻한 배려에 눈물을 글썽이며 기뻐했다지요. 이 "씨그프리드 목가"를 흔히 '계단의 음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와같은 일화때문입니다. 바그너를 존경하고 있던 토스카니니는 언젠가 "이와 같은 훌륭한 음악에 의해서 잠이 깬 코시마 부인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부인이었다..."고 진지하게 이야기한 일이 있습니다. 이 곡의 '조용한 감동을 갖고'라고 지시되어 있는 온화한 처음 부분을 들으면 그 토스카니니의 말이 떠 오릅니다. 마침 오페라 "씨그프리드 Siegfried"를 작곡 중이던 바그너는 여기서 악상을 얻어 썼다고 합니다. 오페라 "씨그프리드"나 "발퀴레 Die Walkure" 속의 선율이 이 곡에 사용되어 전체에 목가적인 기분을 주고 있습니다. 곡은 옛 독일의 자장가에 의한 것으로 '씨그프리드'라고 이름지은 자기 자식의 장래에 행복과 희망을 품은 바그너의 사랑을 나타내는 명곡입니다. 조용하고 우아하게 현악기들의 하모니로 시작하여, 먼 산에서 메아리 처럼 들려오는 목동들의 피리소리같은 혼, 클라리넷, 오보에 등 관악기들의 조화에 시원한 바람을 타고 흐르는 들꽃들의 향기같은 이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푸른 평화와 새하얀 상쾌함이 절로 느껴집니다 바그너는 언제나 자기 작품의 일부를 피아노로 코시마에게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이 곡에는 코시마의 귀에 익은 선율이 몇개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마 코시마에게는 이 곡에 담겨진 바그너의 마음이 명료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이 훌륭한 곡이 증정된 코시마는 토스카니니가 말한 것처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었습니다.



Tannhauser Overture 탄호이저 서곡 Amsterdam Concertgebouw Orchestra Willem Mengelberg, Conducto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