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孔子)의 진위 – ‘유학(儒學) 변천의 수수께끼’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듣기위해 방문하는 사람들.
우리는 여태까지 공자(孔子)와 유가사상(儒家思想)을 말할 때 중국 전통문화의 정수(精髓)로 중국 봉건사회의 통치사상이자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뿌리내린 마땅히 지켜야 할 규범이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 봉건사회가 시종 선양했던 공자와 유가사상(儒家思想)이 몇 천 년의 발전과정에서 이미 커다란 변화를 겪어 진짜 공자는 서서히 죽고 가짜 공자가 공자의 기치를 내걸고 난립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본 사람은 드물다.
저명한 학자 주여동(周予同)선생은 공자와 공자에 관한 역사적인 내용 및 공자사상(孔子思想)에 대한 개조에 대해 말할 때 “진짜 공자는 죽었고, 거짓 공자가 중국의 경제조직, 정치상황과 학술사상의 변천에 따라 잇달아 출현했다 ……따라서 공자(孔子)는 비록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이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공자가 반드시 진짜인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진짜로 주선생의 말과 같다면 설마 공자(孔子)가 진짜와 가짜 둘이란 말인가?
공자(孔子)는 중국 유학(儒學)의 종주로, “사직이 수시로 바뀌고 군신의 지위가 수시로 변하던(社稷無常奉, 君臣無常位)” 춘추말년에 활동한 몰락한 귀족출신 사상가이다. 사회 대변동에 대한 그의 태도는 다소 모순적이었는데 곧 사라질 구제도를 보호, 구제하고 또 구제도에 대한 ‘손익’을 따지고자 그것이 사회조류와 서로 부합하도록 힘썼다.
그래서 그의 정치주장은 신흥지주계급의 반대는 물론이거니와 노예주 귀족에게 인정받지 못하였는데 이는 공자의 일생을 우울하게 만들었고 뜻을 이루지 못하게 하였다.
공자(孔子)는 세 살 때 부친상을 당하여 “가난하고 천하며(貧且賤)”, “비천한 일을 잘하였는데(多能鄙事)”, 유학을 업으로 삼아, 스무 살 이후 ‘위사(委史)’, ‘승전(乘田)’을 지냈고, 서른 살에 평민교육을 시작하여 제자들을 받아들여 강의를 하였고 후에는 정치에 종사하였다.
공자(孔子)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어 몹시 가난하였으나 공부에 전념하였다. 그는 시장 점포에서 일을 하기도 했는데 양을 재는 것과 수를 세는 것이 모두 매우 공정하였다 하여 칭송받았다. 17세 때부터 말단 관리가 되어 일하면서 노(魯)나라의 대학에서 ‘시경(詩經)’과 ‘서경(書經)’ 등을 배웠다.
쉰 한 살에 노(魯)나라의 중도재(中都宰)를 역임했고, 후에 대사구(大司寇)로 승급되어 상사(相事)를 지냈다. 후에 학생들을 데리고 제(齊), 위(衛), 진(陳), 채(蔡), 송(宋), 초(楚) 등의 나라를 두루 다님에, 17년이 걸렸는데 정치적 견해가 채택되지 않자 노(魯)나라로 다시 돌아왔다.
이후에 오로지 문화교육과 고적 정리에 몰두하면서 생을 마감하였다. 공자의 일생은 정계에서는 비교적 평범하여 두각을 드러낸 인물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상가로서 그는 ‘인(仁)’을 핵심으로 체계적인 일련의 논리적 사상을 펼쳐 통치자에게 종법제도 및 통치계급과 백성과의 관계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사상적 무기를 제공하였다.
공자(孔子)의 뛰어난 제자 열사람 ‘공문십철(孔門十哲)’
공자(孔子)는 고향 곡부(曲阜)에서 큰 은행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노(魯)나라 사람이 가장 많았으며 신분이 높은 사람은 적었다. 공자의 제자로 널리 이름이 알려져 있는 사람은 총 77명이다. 그 중 가장 뛰어난 제자 10명 즉 ‘공문십철(孔門十哲)’은 성현으로 추앙받고있다. 공자(孔子)의 뛰어난 제자 열사람 ‘공문십철(孔門十哲)’ 이란 안회(顔回),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 염옹(冉雍), 재아(宰我), 자공(子貢), 염구(冉求), 자로(子路), 자유(子游), 자하(子夏)를 이른다.
태재(太宰)는 “그대는 성인인가? 어찌 그리 재주가 많은가? (夫子聖者與? 何其多能也?)”라며 감탄하였고, 자공(子貢)은 “중니는 해와 달이라, 아무도 넘을 수 없다.(仲尼, 日月也, 無得而逾焉)”고 칭송하였고, 안연(顔淵)은 공자의 학문과 도덕을 “우러러보면 더욱 높고, 뚫으려 하면 더욱 굳어진다.(仰之彌高, 鑽之彌堅)”고 감탄하였다. (‘안연 顔淵’은 공자의 제자 ‘안회 顔回’의 다른 이름이다)
물론 공자는 당시 사회적 논란의 대상으로 위와 같이 여러 칭찬을 받기도 하였지만, 장저(張沮), 걸닉(桀溺), 접여(接與) 등은 그를 “사체를 부지런히 하지 않고 오곡을 분별하지 못하는(四體不勤, 五穀不分)” 기생충 내지는 “그것이 안 될 줄 알면서도 행하는(知其不可而爲之)” 완고파로 보았고, 정(鄭)나라 사람은 “피로로 인하여 뜻을 잃은 것은 상가 집 개와 같다며(累累若喪家之狗)”며 그를 욕하기도 했으며, 송(宋)나라 사마환퇴(司馬桓魋)는 심지어 그를 죽이려고 까지 했다.
이것들이 살아 있을 때 진짜 공자의 상황이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뒤 일자리를 잃고, 권세를 잡은 신하에게 멸시당하고, 야인에게 조롱당하고, 폭도들에게 포위당하여 굶주리는 등 큰 어려움을 겪었다.
곤궁함에 빠진 공자를 표현한 ‘재진절량(在陳絶糧)’
공자(孔子)가 송(宋)나라를 지나던 중에 환퇴(桓魋)의 공격을 받아 궁지에 몰렸다. 진,채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한 채 식량이 떨어져 7일 동안 굶주리기도 했다. 공자(孔子)가 활약할 당시 공자의 존재는 시종 노(魯)나라의 실권자인 3환세력에게 커다란 위협이었다. 공자(孔子)가 3환 타도를 꾀하다가 실패한 뒤 14년에 걸쳐 비록 '주유천하'를 표방하기는 했으나 사실상 망명에 가까운 생활을 영위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동중서(董仲舒).
동중서(董仲舒)는 오늘날 허베이성의 광저우(廣川) 출신으로 진(秦), 한(漢)제국의 사상가, 학자, 시인이자 한대(漢代) 역사를 기록한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의 스승이었다. 진(秦) 제국이 멸망 한 후의 혼란을 수습한 나라가 바로 한(漢) 제국인 것이다.
유학(儒學)은 공자(孔子)에 의해 창도되어 한 대(漢代)에 이르러 동중서(董仲舒)에 의해 종교적인 색체가 농후한 신비주의로까지 변모하였다. 오륜(五倫)이란 유교의 기본강령중 하나로서 인간관계에 임하는 다섯가지 덕목이다. 맹자시대 까지만 하더라도 사단(四端)이라 하여 ‘인의예지(仁義禮智)’ 뿐이었으나, 중국이 진나라로 통일되고, 진나라가 통일의 원리로 오행론을 수용하면서 문화 전반에 걸쳐 모든 부분을 오행에 맞춰 정리하던 중, 전한(前漢)때의 인물인 동중서(董仲舒)가 공맹(孔孟)의 교리에 입각하여 삼강오상설(三綱五常說)을 논한데서 유래되어 우리나라에서도 태조 이성계가 성리학을 들여오면서 사회의 기본적인 윤리로 존중되어 왔으며 지금도 일상생활에 뿌리깊게 박혀있는 윤리도덕적 잣대가 되었다. 기원전 5세기에 창시된 유교(儒敎)는 한(漢)나라 때 국가 이념으로 채택된 후 2천년 동안 중국의 지배 이념으로 기능하였고, 우리 나라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그는 공자, 맹자의 ‘인(仁)’과 ‘인정(仁政)’을 ‘견고설(譴告說:꾸짖고 훈계하는 것)’로 바꾸어 ‘하늘(天)’로서 민의를 구현하고 군권을 제한하려고 하였다. 그는 견고설의 특허권을 공자에게 부여하여 “공자가 《춘추》를 지을 때 위로는 하늘의 도를 헤아리고, 아래로는 모든 인성을 살피며 옛 것을 참고하여 지금의 것을 고찰하였다.
고로 춘추를 비방하는 것은 해(害)를 더하는 것이고 춘추를 혐오하는 것은 괴이한 조치다.(孔子作《春秋),上揆之天道, 下質諸人性, 參之于古, 考之于今, 故《春秋)之所譏, 災害之所加也; 《春秋)之所惡, 怪異之所施也).”라고 하였다.
봉건의 강상(綱常)을 절대적으로 침범할 수 없는 ‘천리(天理)’로 받들어 백성의 최소한의 물질욕망을 극악무도한 ‘인욕(人慾)’이라고 질책했으며 사람들에게 “인욕을 없애고 천리를 복원할 것(革盡人慾, 復盡天理)”을 주장했다.
정이(程頤)는 과부의 개가가 절개를 잃는 것이라 여겨 “굶어죽는 일은 극히 하찮은 일이지만, 절개를 잃는 일은 지극히 큰 것(餓死事極小, 失節事極大)”이라고 부르짖었다.
동시에 그들은 유가 전적을 진일보 경전화하여 주희(朱熹)는《논어》, 《맹자》,《대학》,《중용》을 합하여《사서(四書)》로 편성하였고 일생의 정력을 쏟아 부어 《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集注)》를 제작했다.
공자(孔子)의 유가사상(儒家思想)을 집대성한
유가(儒家)의 학술경전들이 황제의 감수 하에 제작되었다.
송대(宋代)에 와서 통치를 굳건히 하고자 하는 이념으로 유가사상(儒家思想)을 개조하여 이학(理學)을 건립하고 유가 전적을 진일보 경전화하여 주희(朱熹)는《논어》,《맹자》,《대학》,《중용》을 합하여《사서(四書)》로 편성하였으며《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集注)》를 제작했다. 송대(宋代) 이후, 이 책은 황제가 친히 제정한 교과서와 과거고시의 표준답안이 되었고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배워 익혀 왕도의 정치를 회복하는 본보기가 되게 하였다.
송(宋)이후, 이 책은 황제가 친히 제정한 교과서와 과거고시의 표준답안이 되었고 “천하의 모든 사람이 그것을 어려서부터 익히고(天下之人, 童而習之)”, “변론을 허용치 않는(不容于辯論)” 경전이 되었으며, 심지어 “군주가 천덕과 왕도의 정치를 회복하고자 할 때, 반드시 이것에서 본보기를 취했다(時君世主, 欲復天德王道之治, 必來此取法).”고 하였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공자(孔子)와 유가사상(儒家思想)은 비로소 진정한 독존의 지위를 얻게 되었고 주희 역시 이로 인해 공자 이후 일인자로 추앙받게 되어 “주자가 전하는 것이 아니면 감히 말할 수 없고 주자의 가례가 아니면 감히 행할 수 없다(非朱子之傳不敢言, 非朱子之家禮不敢行).”는 국면을 출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