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외수... 글, 그림
안개꽃은 싸락눈을 연상시킵니다.
그대가 싸락눈 내리는 날 거리에서 고백도 하기 전에
작별한 사랑은 어느날 해묵은 기억의 서랍을 떠나
이세상 어딘가에 안개꽃으로 피어나게 됩니다.
아무리 방황해 보아도 겨울은 끝나지 않습니다.
불면 속에서 도시는 눈보라에 함몰하고 작별은 오래도록
아물지 않는 상처가 됩니다.
그러나 정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랑이 꽃으로 피어나게 된다면
그대가 싸락눈 내리는 날 거리에서 고백도 하기 전에
작별한 사랑은 아무래도
안개꽃으로 피어나게 되지 않을까요.
어디쯤 봄이 오고 있을까
잠결에도 내다보는 유리창 바깥
그대 홀로 먼 길을 떠나는 겨울이
아직도 깊어 걸음마다
백엽식물로 번성하는 성에의 수풀
비록 절름거리며 어두운 세상을 걸어가고 있지만요.
허기진 영혼 천길 벼랑 끝에 이르러도
이제 절망 같은 건 하지 않아요.
겨우내 자신의 모습을 흔적없이 지워 버린 민들레도
한 모금의 햇빛으로 저토록 눈부신 꽃을 피우는데요.
제게로 오는 봄 또한 그 누가 막을 수 있겠어요
구제불능이지요.
아무리 세공을 해 보아도 보석이 되지는 않아요. 다만
햇살 따가운 봄날에 그대 집 마당가로만 데려다 주세요.
눈길 한번 주지 않아도 종일토록 흐르는 강물소리.
누구의 영혼을 적시는지 가르쳐 드리겠어요
온 세상 푸르던 젊은 날에는 가난에
사랑도 박탈당하고 역마살로 한 세상 떠돌았지요.
걸음마다 그리운 이름들이 떠올라서 하늘을 쳐다보면
눈시울이 젖었지요. 생각하면 부질없이 나이만 먹었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알 수 있지요. 그리운 이름들은 모두
구름 걸린 언덕에서 키 큰 미루나무로 살아갑니다.
바람이 불면 들리시나요.
그대 이름 나지막히 부르는 소리.
아무리 정신이 고결한 도공이라도
영원히 깨지지 않는 도자기를 만든 적이 없듯이
아무리 영혼이 순결한 사랑이라도
언젠가는 금이 가고 마는 줄 알면서도
칸나꽃 놀빛으로 타오르는 저녁나절
그대는 무슨 일로 소리죽여 울고 있나요.
유년의 여름날 초록 풀밭에 누우면 생시에도
날아가는 새들의 영혼이 보였다.
그 시절에는
날마다 벽에다 금을 그으며 내 키를 재 보았다.
그러나 내 키는 조금도 자라지 않았다. 단지
날아가는 새들의 영혼만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다.
지난 밤 그대에게 보내려고 써 둔 엽서.
아침에 다시 보니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어 성냥불을 붙였다.
끝까지 타지 않고 남은 글자들. 외. 로. 움.
마음을 비우면 인생이 아름다워진다는 말을 누가 믿으랴
젊은놈들은 모두 구정물처럼 혼탁해진 도시로 떠나버리고
마을 전체가 절간처럼 적요하다 기울어지는 여름풍경 속에서
하루종일 허기진 그리움으로 매미들이 울고 있다
평상에 홀로 앉아 낮술을 마시는 노인의 모습
이따금 놀빛 얼굴로 바라보는 먼 하늘이 청명하다
인생이 깊어지면 절로 구름의 거처를 묻지 않나니
누가 화답할 수 있으랴 부처가 연꽃을 들어 보이지 않아도
노인이 먼저 입 가에 떠올리는 저 미소
가을밤 산사 대웅전 위에 보름달 떠오른다
소슬한 바람 한 자락에도 풍경소리 맑아라
때로는 달빛 속에서 속절 없이 낙엽도 흩날리고
때로는 달빛 속에서 속절없이 부처도 흩날린다
삼라만상이 절로 아름답거늘 다시 무슨 깨우침에
고개를 돌리랴 밤이면 처마 밑에 숨어서
큰스님 법문을 도둑질하던 저 물고기 지금은
보름달 속에 들어앉아 적멸을 보고 있다
이제는 마른 잎 한 장조차 보여 드리지 못합니다
버릴수록 아름다운 이치나 가르쳐 드릴까요
기러기떼 울음 지우고 떠나간 초겨울 서쪽 하늘
날마다 시린 뼈를 엮어서 그물이나 던집니다
보이시나요 얼음칼로 베어낸 부처님 눈썹 하나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지나간 날들은 망실되고
사랑한 증거도 남지 않았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자폐증에 빠져 있는 겨울풍경 속으로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리면 시간이 깊어진다 인생은 겨울밤
얼음 밑으로 소리죽여 흐르는 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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