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그 걸작! 숨이 멎고…쓰러진다 | |
[이주헌의 알고싶은 미술] 스탕달 신드롬 | |
고흐도 ‘유대인 신부’앞 망부석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라고 읊은 이는 고려 말의 문신 이조년이다. 누군가에게 혹은 뭔가에 마음이 끌려 병을 앓을 때가 있다. 상사병이라는 이름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그렇다면 미술 작품에 마음이 끌려 생기는 병도 있는가? 있다. 바로 ‘스탕달 신드롬’이다. 스탕달 신드롬은 19세기 프랑스의 문호 스탕달의 이름을 딴 병리 현상을 말한다. 사람에 따라 걸작 미술품을 보고 갑자기 흥분 상태에 빠지거나 호흡 곤란, 우울증, 현기증, 전신마비 등의 이상 증세를 보이는 경우가 있는데, 이 증세가 스탕달 신드롬이다. 심하면 병원에 입원해야 하지만, 안정제를 먹거나 익숙한 환경으로 돌아오면 대부분 회복된다. 스탕달은 그의 책 <나폴리와 피렌체-밀라노에서 레조까지의 여행>에서 “산타크로체 교회를 떠나는 순간 심장이 마구 뛰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며, “생명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고 걷는 동안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았다”고 기록했다. 교회 안에 있는 예술품을 보고 충격을 받아 이런 증상을 겪었다는 것인데, 이 기록에 의거해 1979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정신과 의사 그라치엘라 마게리니가 스탕달 신드롬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마게리니는 이와 관련해 모두 107건의 임상 사례를 학계에 보고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환자들이 모두 관광객이며, 이 가운데 이탈리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환자가 부재한 것은, 피렌체에서 발생한 사례를 토대로 한 연구이기에 이들이 르네상스 걸작에 이미 충분히 ‘면역’이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인 환자의 사례 또한 보고되지 않았는데, 이는 일본 관광객들이 주로 그룹으로 몰려다니다 보니 걸작과 개인적으로 만날 여유가 없기 때문이라는 게 마게리니의 판단이다. 이런 점으로 미뤄 볼 때, 스탕달 신드롬은 위대한 걸작에 대한 동경을 막연하게나마 품고 있던 이들이 막상 실물과 일대일로 대면하게 되면서 순간적으로 강렬한 정신적 충격에 사로잡히는 현상이라 하겠다. 스탕달 신드롬에 빠지는 사람들은 이지적이기보다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감정에 충실한 편이라고 한다.(피렌체에서는 매년 12명 정도가 스탕달 신드롬에 걸린다. 요주의 장소로는 우피치 갤러리의 보티첼리 방, 아카데미아 갤러리의 ‘다비드’ 상 앞, 사크레스티아 누오바의 미켈란젤로 작품 앞, 팔라초 메디치 리카르디의 루카 조르다노의 방 등이 꼽힌다.)
레니의 ‘베아트리체 첸치’를 스탕달 신드롬을 야기한 작품으로 잘못 지목한 풍설은, 그림의 주인공인 베아트리체가 비극적인 운명의 희생양이었다는 사실(베아트리체는 자신을 겁탈한 폭군 아버지를 다른 가족과 함께 힘을 합쳐 살해한 소녀로, 로마 시민들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끝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과 스탕달이 그 이야기에 흥미를 느껴 <첸치 일가>라는 소설을 쓴 것이 겹치면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기록으로 보면, 레니의 그림에 지독히도 혼을 빼앗긴 문인은 스탕달이 아니라 영국 시인 셸리다. 셸리는 1819년 로마에 갔다가 당시 콜로나 궁에 소장되어 있던 ‘베아트리체 첸치’를 보고 깊은 감동과 전율을 느껴 스탕달의 작품과 동일한 제목의 희곡을 썼다. 화가가운데서는 빈센트 반 고흐가 스탕달 신드롬으로 추정되는 증세를 보인 적이 있다. 렘브란트의 ‘유대인 신부’를 보았을 때 그랬다. 반 고흐는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이 개관한 해(1885년), 이곳의 걸작들을 보려고 친구와 함께 미술관을 방문했다. 설치된 작품들을 둘러보다 ‘유대인 신부’를 보는 순간, 그만 발이 얼어붙고 말았다. 감동과 충격으로 도저히 다른 작품을 볼 수 없었다. 보다 못한 친구가 그와 헤어져 미술관을 다 돌 때까지도 그는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반 고흐는 친구에게 “이 그림 앞에 앉아 2주를 더 보낼 수 있게 해 준다면 내 수명에서 10년이라도 떼어 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비록 혼절 상태까지 이른 것은 아니지만, 명화와의 만남으로 비롯된 극도의 흥분이 그를 그렇게 돌부처로 만들어버렸다. 마게리니의 보고 이후, 그의 동료 학자들 가운데서 이 연구의 지평을 확장해 보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로마 심리학 연구소의 연구자들은 최근 미술관의 고전 걸작들(특히 인체를 그린 명화들)이 일부 관객에게 관람 후든, 아니면 바로 그 현장에서든 성적인 의미가 담긴 행동을 하도록 이끄는 경향이 있음을 밝혀냈다. 연구소는 이 현상을 ‘루벤스 신드롬’이라고 이름 지었다. 17세기 바로크 미술의 대가 루벤스는 그림에 살집이 풍성한 여성들을 관능적인 자태로 그려 넣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화포에서 여성들이 누드 혹은 세미 누드 상태로 근육질의 남성들과 어우러진 모습은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에로티시즘을 발산한다. 신화 주제를 다룬 ‘땅과 물의 결합’ 같은 작품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로마 심리학 연구소 조사에서, 2천 명의 미술관 관객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약 20% 정도가 이 루벤스 신드롬을 나타냈다고 한다. 이 신드롬이 스탕달 신드롬처럼 극히 제한된 사람이 아니라, 매우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현상임을 그 숫자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미술 감상이 때로 사람들의 정신과 심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비판해도 할 말은 없다. 마게리니가 스탕달 신드롬에 대해 보고하면서 자신의 연구가 이탈리아의 문화관광 산업에 피해를 줄까봐 조심스러워했던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상사병이 무섭다고 사랑하지 말라고 할 수 없는 것처럼 스탕달 신드롬이나 루벤스 신드롬이 무섭다고 미술 감상을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람이든 예술 작품이든 대상에 내재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거기에 매혹당하는 게 우리의 운명인 까닭이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그 운명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느낀다.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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