如是我見 寫而不作/블로거기자단팸투어

울산의 중심, 울산 중구여행 3. 울산 동헌 및 내아, 효자 송도 정려비

하늘타리. 2017. 11. 20. 13:21

"아래 포스팅은

 2019 올해의 관광도시 울산광역시 중구청 홍보 및 문화관광 , 그리고 맛집을 알리기 위하여

울산광역시 중구청에서 초청하여 진행한 공공팸투어에 참가한 후

후기로 작성한 글입니다."



울산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는 울산 동헌으로 갑니다.


동헌의 정문역할을 하던 가학루의 복원공사로 주변이 다소 어수선합니다.


울산동헌은 울산의 수령이 공무를 처리하던 중심건물인데,

울산이 부, 현, 도호부 등으로 승격되거나 강등될 때마다 위치를 옮겨왔습니다.


지금의 동헌은 1681년(조선 숙종 7)에 울산부사 김수오가 처음 짓고

그의 아들이 1695년(숙종 21)에 부사로 부임하면서 ‘일학헌’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1763년(영조39)에 울산부사 홍익대가 다시 지은 뒤 ‘반학헌’이라 불렀습니다.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군청회의실로 사용되었다가 1981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습니다.
동헌안에는 부속건물들도 있는데 그 중 내아는 수령이 살던 살림집으로 담이 없습니다.


동헌 앞 뜰에 울산부 여기저기 세워졌던 관리들의 송덕비를 모아

다시 세웠습니다.
그 비석이 세워진 유래는 발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진심으로 추앙받은 인물의 송덕비가 있는가 하면




마지 못해 세워진 송덕비가 있겠고

아예 송덕비를 세울 수 없는 인물이 있겠지요.


1875년 울산농민항쟁당시의 울산부사 정기대
1875년 수많은 농민들이 동헌으로 몰려듭니다.
아전들이 공금을 유용하여 끼친 손해에 대해

당시의 울산부사 정기대는 토지세를 가중 부가하여 해결하려 했습니다.
이 조치의 부당함을 항의하던 농민들을 강제 진압하는 과정에서

농민들은 관아로 몰려들게 되었고

힘이 뭉쳐진 농민들은 감옥을 부수고 재물을 반출하였으며

부사 정기대를 동헌에서 끌어내어 울산경계밖으로 추방하였습니다.
결국 증원된 관군에 의해 토벌되고 더 심한 압제와 노역에 시달리게 됩니다.



동헌 옆으로 효자송도선생정려비(孝子宋滔先生旌閭碑)가 있습니다.


정려비 앞면은 '효자성균생원 송도지려(孝子成均生員宋滔之閭)'라 적었으며,

뒷면에는 송도의 효행을 기록하였습니다.





정려비 왼쪽의 깨어진 비석은 '강희임진(康熙壬辰) 팔월(八月)'이란 구절로 보아,

숙종 38년(1712)에 세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중구 우정동에 있던 비석과 비각을 2006년에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송도(宋滔)는 연안송씨로, 조선 초기 울산에 살았던 효자입니다.
선생은 울산지역 최초의 생원(生員)으로, 병든 부모를 10여 년 동안이나 정성껏 간호했습니다.
눈먼 어머니가 생선회를 먹고 싶어했으나 구할 수 없자 물가에 나가 얼음을 두드리며 울었더니 붕어가 뛰어올랐고,

제사에 쓸 제물이 없어 근심하자 꿩이 날아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1년 사이에 부모가 잇달아 돌아가시자 몸소 흙과 돌을 져다 무덤을 만들고,

6년간 유교식 예법에 따라 사당을 세워 신주를 모시고 새벽마다 배알하고,

때에 맞추어 제사지내는 시묘살이를 하였습니다.
당시까지 불교식 장례가 일반화된 상황에서 송도의 효행은 매우 두드러진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세종 10년(1428) 효자로 정려되고 표창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은『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등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러한 선생의 효성은 중국에까지 알려져

명(明)나라 신종(神宗)으로부터 어제시(御題詩)와 홍문(紅門)을 하사받았는데,


효문동(孝門洞)이라는 마을 이름은 여기서 유래된 것이라 합니다.


공사중 가림막을 이리저리 피해 나오느라 우체국을 보지 못했습니다.

1898년 6월 1일 울산임시우체사로 시작한 우편시설이 아직도 이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표지석에 고마움의 인사를 보냅니다.


조선통신사가 지나간 길을 따라


충혼비앞을 지나 성남동 문화의 거리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