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조선국통훈대부행사헌부지평장령부공묘갈명
아아! 부군종인(夫君 宗仁)이 객지에서 사망했는데, 아들 계연(啓淵)이 찾아와 그 묘에 명(銘)을 청하였다. 나는 군(君)과는 멀리 떨어진 사람이지만 예부터 아는 사이여서 요청하는데 늙은이가 거절할 수가 없다.
군(君)의 자는 자량(子諒)으로 제주인(濟州人)이다. 증조는 만웅(萬雄)이고, 조부는 행충(行忠)으로 모두 벼슬을 하지 않았다. 부친 도훈(道勛)은 군 덕분에 영례(榮例)에 따라 통정(通政)의 자품이 수여되어 관위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비(妣) 숙부인(淑夫人)고씨(高氏)는 같은 지방의 한청(漢淸)의 딸이다.
군은 정해(丁亥, 1767년) 3월25일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말과 행동거지가 또래에서 높이 평가되었고, 조정철(趙貞喆)이 제주에 유배되었을 때에 제주사람 모두가 두려워 떨며 감히 다니지를 못했는데, 군은 혼자서 가끔씩 따라다니며 시격(詩格)을 토론하였다.
갑인(甲寅, 1794년)에 문과에 뽑혀 성균관(成均館)에 예습하여, 승정원(承政院)에서 가주서(假注書)로서 왕명을 받들고 연산(連山)에 순무사로 갔다가 나중에 복귀하니, 상감께서 이르시기를, “이 사람은 탐라(耽羅)의 대성(大姓)이다.”며 영릉(寧陵)별검(別檢)을 제수하고, 얼마 후 휘릉(徽陵)으로 다시 옮겼다.
정사(丁巳, 1797년)에 전강시(殿講試)에 응시하여 으뜸을 차지하여 특명으로 6품에 올랐다. 이때부터 내직으로 병조와 예조의 좌랑(佐郞), 후릉(厚陵)의 영(令), 성균관직강과 사예, 승문원(承文院)의 판교(判校)를 역임하였고, 외직으로 대정(大靜)과 자인(慈仁)의 두 현감을 지냈다.
기사(己巳, 1809년)에 비로소 사헌부(司憲府)에 들어가 지평(持平)이 되고, 경오(庚午, 1810년)에 장령(掌令)에 올랐는데, 상소하기를 강연에 힘쓰고 학문을 닦아야 한다고 하니, 상감께서 정중히 답하였다.
사망한 날은 정축(丁丑, 1817년) 8월26일이다. 이듬해 정월 제주 연자동(蓮子洞) 자좌(子坐)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진주강씨(晉州姜氏) 종효(宗孝)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군보다 먼저 15년전에 사망하여 군묘의 왼쪽에 합장되어 있다. 김녕김씨(金寧金氏) 정관(鼎寬)의 딸에게 다시 장가들었다. 계연(啓淵)은 강씨(姜氏) 소생이다. 1남2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아아! 군은 바다 밖의 하나의 독특한 유신(儒臣)이다. 권면하여 인도함이 없이, 능히 스스로 학문에 분발하여 30세가 되기 전에 과거급제를 마치 지푸라기 줍듯 시험을 통과하여 조정과 지방에 이름을 날렸으니, 당시로서는 한 고장의 수재라고만 할 수도 없다. 군은 어버이를 효도로 섬겨서 어버이 상(喪)에 건강이 훼손되어 거의 실성하였다고 한다. 집안을 다스림에는 법도(法度)가 있어 칭찬할 만하였다. 군이 서울에서 관리를 지낼 때에, 참봉 서격수(徐格修)의 집에 유숙을 했는데, 참봉은 나에게는 종부제(從父弟)되어서 나는 군에 대한 것을 아주 자세히 들어왔다. 마무리하여 명(銘)에 이르노니 바깥변방에서 분발하여 교룡과 악어가 이웃들 하는데 그 지위의 기록과 그 관직의 영광 자기 어버이에게도 베풀어졌도다. 이것은 오직 학문을 열심히 한 공적이니 아아! 남방의 사람들이여.
숭정기원후 3무인 중추 대광보국 숭록대부 원임 의정부 영의정 겸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 감사 서매수 찬 병서
有明朝鮮國通訓大夫行司憲府持平夫公墓碣 銘
鳴呼夫君宗仁歿于之逆旅遺孤啓淵謁于余以銘其墓余惟君遠人也有舊要不可以耄辭君字子諒濟州人曾祖諱萬雄祖諱行忠皆不仕考諱道勛用君有待從榮例授通政資官僉知中樞府事妣淑夫人高氏同鄕漢淸女君以英宗丁亥三月二十五日生自兒時言語動止爲儕輩推重趙吏部貞喆謫本州州人皆惴栗莫敢通君獨時時往從討論詩格擢甲寅文科隸成均館間以承政院假注書奉明使連山旣復上敎曰此耽羅大姓也除寧陵別檢尋復移徽陵丁巳厯殿講試居魁特命陞六自是內而歷兵禮曹佐郞厚陵令成均館直講司藝承文院判校外而監大靜慈仁二縣己巳始入司憲府爲持平庚午陞掌令上疏請勤勵學問上優答之歿之日丁丑八月二十六日也翌年正月葬于本州蓮子洞子坐原聚晉州姜氏宗孝女先君十五年歿墓祔左再聚金寧金氏鼎寬女啓淵卽姜氏出有一男二女俱幼鳴呼君海外一畸儒也不由勸導克自奮學年未三十取科第如拾芥遍試內外揚名當時可不謂一鄕之秀也乎君事親以孝聞親喪毁幾滅性御家有法度可稱君宦游京師館于徐參奉格修家參奉於余爲從父弟余聞君事頗詳乃來之銘曰有奮於要荒之外蛟鰐之隣而豸基冠墨基授榮施于其親玆性勤學之功於呼南方之人
崇禎紀元後三戊寅仲秋下澣大匡輔國崇祿大夫原任議政府領議政兼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徐邁修撰 幷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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