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5일
안산 봉수대입니다.
안산 봉수대에서 샘터로 내려옵니다.
샘터부근에서 예전에 봉원사로 가던 소로길을 찾습니다.
요사이는 이길을 이용하는 이가 드문것 같습니다. 한때 정성을 다해 만들었던 돌계단을 이용 봉원사로 갑니다.
안산자락에 위치한 봉원사는
신라 진성여왕 3년인 899년에
도선 국사가 현재 연세대가 있는 연희궁 터에 사찰을 지은 것이 시작입니다.
처음의 이름은 반야사였다고 합니다.
고려말 공민왕 때 태고(太古) 보우(普愚)가 중건·보수하고 금화사(金華寺)라고 개칭하였습니다.
조선조에서는 태조의 어진(御眞)을 모시는 진전(眞殿)이 있어
불교억압정책 아래에서도 번성하였다고 합니다.
태조의 어진이 봉원사에 모셔졌던 이유는
조선 태조 이성계는 스스로 태고국사의 문도(門徒)임을 자처하여
봉원사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임진왜란 때 당우와 암자가 소실된 것을 중창했고.
1651년 봄에 큰 화재로 대웅전과 요사채 등이 소실된 것을 1665년에 다시 중건하였으며.
1748년에 당시 왕인 영조가 직접 지금의 자리에 땅을 하사하자 절을 옮겨 세우고
이듬해에 영조가 '봉원사'라는 현판을 내린 것이 절이름이 되었습니다.
그 새절이라는 이름이 저 어릴때까지 불려와서 우리 어머니도 항상 새절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새로지은절이라 하여 신도들 사이에서 '새절'로 불렸고
조선말엽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은 이 절에 5년간 머물면서
1884년 갑신정변의 주요인물이었던 김옥균·서광범·박영효 등과 교류를 하여
봉원사는 개화사상의 전개와 보급에 일익을 담당했습니다.
6·25전쟁 때 소실된 건물을 복구하면서 흥선대원군의 별저인 아소재(我笑齋)를 옮겨 지금의 대방(大房:염불당)을 지었습니다. 봉원사는 한국불교태고종의 종찰(宗刹)이 되었습니다. 순천 선암사와 함께 대표적인 분규 사찰로 남아있습니다. 한반도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승려에게 혼인여부는 본인의 선택사항이지 그것이 어떤 줄을 세우는 기준이 되지 않았습니다. 조선이 망한후 일본 불교가 이땅을 장악할 무렵 우리 불교를 제대로 수호하자고 대처승인 한용운,이회광이 주도해 1910년 각황사를 지었고 1929년에 '조선불교 선교(禪敎)양종 승려대회'를 열었습니다. 1937년 각황사는 북한산 태고사 를 모태로 '태고사'로 이름을 바꾸고 1938년 조계종을 출범합니다. 일본 불교에 대항해 한국 불교 선,교양종을 통합하자는 것이었지요.
그 후 1970년 태고종(太古宗)이 조계종으로부터 분리됨에 따라
하지만 토지 소유권은 대한불교 조계종이 가지고 있어,
원증국사(태고 보우)가 선·교 양종을 통합해 '조계'라고 부른 것 처럼
그런데 이게 해방후 일본불교가 물러난 후에는 타도할 대상이 없으니 애매해 집니다.
이때 오래전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승만 대통령이
대처승을 일제불교의 잔재로 인식하며 부정적인 인식을 보이자
그동안 소수세력이었던 비구승려들이
왜색불교 척결을 외치며 종조(宗祖) 도 '보우'에서 '지눌'로 바꾸고
태고종 대처승들을 몰아내며 태고사 이름을 조계사로 바꿉니다.
결국 정권의 비호를 받은 세력이 승리하여 전국의 사찰재산 거의 모두를 차지하였습니다.
산을 내려서면서 봉원사 절집으로 들어 가면
경내 가장 깊숙한 곳에 지어진 만월전을 먼저 만나게 됩니다.
약사유리광여래불을 봉안하였다고 하는데
문이 닫혀있어 내부를 찍지 못하였습니다.
문득 떠오른 생각...
日中卽而月滿卽虧
해는 중천에 뜨면 기울고 달이 차면 이지러진다...
봉원사 극락전입니다.
미래불인 아미타불을 모신 불전으로 무량수전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문살은 대나무, 국화, 연꽃 및 각종 화초를 덧붙여 화려하게 장식했고 유리창문을 덧 입혔습니다.
주련의 내용입니다.
極樂堂前滿月容
극락당전만월용
극락당 앞에 둥근 달과 같은 아미타 부처님 용모
玉毫金色照虛空
옥호금색조허공
옥호의 금색광명 허공을 비치네
若人一念稱名號
약인일념칭명호
만약 사람들이 일념으로 명호를 부르면
頃刻圓成無量功
경각원성무량공
잠깐사이에 무량 공덕 원만히 이루리다.
극락전뒤 자애수입니다.
느티나무와 단풍나무
종류가 다른 두 나무가 한뿌리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봉원사는 개화사상의 중심지답게 현대식 건물의 불전이 있습니다. 미륵전입니다.
내부에는 미륵부처님의 입상을 봉안하고 있으며, 인등을 모신 인등각으로도 사용되어집니다.
미륵전 앞에는 '나무아미타불'이라 적힌 비석과 군더더기 없는 형태의 석탑이 있습니다.
이 미륵전에서 일제강점기에 오늘날의 한글학회가 창립되었다고 합니다.
명부전입니다.
지장보살 좌우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하고 있으며 십대왕이 좌, 우에 모셔져 있습니다.
불상 및 십대왕은 목조각품(木彫刻品)으로 빼어난 형상과 가치가 보물급 수준으로 평가된다고 합니다.
편액은 600년전 유학자 정도전의 글씨이고 주련은 친일파로 지탄받는 이완용의 글씨입니다.
조선의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 인물들입니다.
봉원사가 위치한 안산(鞍山)은 조선 때 안현(鞍峴 길마재, 현 무악재)에서 지명으로 쓰고 있지만
무악산(毋岳山)이라고도 합니다.
조선건국시 경기도 관찰사 하륜 이 여기에 궁을 짓자고 했으나
정도전이 북악산 밑으로 강력히 주장하였다고 합니다.
산의 높이나 지세로 볼때는 당연하다고 생각됩니다만
정도전은 한때 궁궐이 지어질수도 있었던 자리에 들어선 절집 명부전 현판을 쓰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리고 절집 전각 편액까지 슨 정도전이 어쩌다 대표적인 억불론자가 되었을까요?
이완용이 썼다고 하는 주련의 내용입니다.
安忍不動如大地
안인부동여대지
잠잠히 인내함이 대지와 같이 동요함이 없도다.
靜慮深密若秘藏
정려심밀약비장
선정의 심오하고 비밀스럽게 감추어진 보배이신 지장보살이여.
地藏大聖威神力
지장대성위신력
지장보살님의 위대하신 신통력이여
恒河沙劫說難盡
항하사겁설난진
억겁을 두고 설명해도 다하기 어렵도다.
見聞瞻禮一念間
견문첨례일념간
보고 듣고 예배하는 잠간 사이에도
利益人天無量事
이익인천무량사
인천(人天)에 이익 된 일 무량하여라
칠성각둘레로 담을 쌓고 그 담에 감실을 만들어 참 예쁜 아기보살을 모시었습니다.
언젠가 야지위에 그냥 좌정하신 모습이 꽤나 스산해 보였는데..
고맙고 기쁩니다.
칠성각은 봉원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듯 합니다만 가장 화려한 단청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불로는 약사여래불을 봉안하고 있으며,
내부에 조성되어 있는 탱화들도 대단히 좋은 작품으로 평가됩니다.
삼천불전(三千佛殿)이 보입니다.
1945년 45간 규모의 광복기념관으로 지어졌으나 6.25때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1988년 삼천불전으로 복원을 시작하여 9년만에 단일 목조건물로는 210평의 국내최대 건물로 완성했습니다.
내부에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 과 과거세의 천불, 현재세의 천불, 미래세의 천불 합쳐서 모두 삼천일불을 봉안했습니다.
삼천불전으로 가는 길에 해수관음이 계십니다.
글쎄요...
조금뜬금없다는 생각이...
해수관음보살은 바닷가에 있는 절에 있기 마련인데
강에서 멀리 덜어진 이 곳에 왜 해수관음을 모시었을까요.
물을 다스리는 힘으로 물의 힘으로 이곳에 화재가 더이상 생기지 않게 해달라는 바램아닐까요??
믿음이라는게 스스로 합리화 시키면 다 통하는 것이니까요.
대웅전을 스쳐지나가며 안 들르면 않되겠지요.
대웅전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68호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이 건물은 영조(英祖) 대왕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대웅전에는 영조대와의 하사품인 "대웅전" 현판이 있었다고 하나 화재로 소실되었고
중창한 건물또한 1991년 화재로 소실되어 1994년에 다시 복원하였습니다.
화려한 닷집안에 삼존불이 모셔져있습니다.
지금의 탱화와 단청은 인간문화재 이만봉 스님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주련입니다.
塵墨劫前早成佛
진묵겁전조성불
한없는 세월 전에 빨리도 성불하셔서
爲度衆生現世間
위도중생현세간
중생을 제도하려 이 세상에 오셨다네.
巍巍德相月輪滿
외외덕상월륜만
거룩하신 지혜덕상 만월처럼 원만하여
於三界中作導師
어삼계중작도사
이 삼계 모두 이끌어 주시는 스승이 되시네.
대웅전 아래 왼쪽에 대방이 있습니다.
대방으로 가기전에 대웅전 옆 작은 전각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갑니다.
운수각
봉원사 노전붕괴 위험하오니 주의하십시오
아니 붕괴위험이 있으면 보수를 해야디 현수막만 펼쳐놓으면 건물이 버텨준답니까.
필요없는 전각이니 일부러 철거하지 않고 자연붕괴를 기다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건 아니겠지요.
이 운수각은 한때는 조실스님의 거처로 사용되던 곳입니다.
전씨영각이 있습니다
전씨 부부가 평생모은 재산을 봉원사에 기부했다고 하며
봉원사에서는 전씨부부의 기일에 매년 제사를 모시고 있다고 합니다.
영안각입니다.
일정기간동안 혼백을 모셔두는 곳으로 아미타불이 봉안되어있었습니다.
대방앞으로 내려왔습니다.
대방은 염불당입니다.
이 건물은 1966년경 흥선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 본채건물을 이건하면서
일부 변형 및 축소되어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각각의 편액은 청나라 옹방강의 글씨인 무량수각, 추사 김정희 의 청련시경, 산호벽루입니다.
대웅전앞의 모습입니다.
봉원사에서는 12년 전부터 연꽃축제를 합니다.
언제부턴가 '서울연꽃문화대축제'라는 거창한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큰 연못이 없는 이 절집에서 연꽃축제를 하기위해서
그 노력이 이루 말할수 없을 듯 합니다.
이곳의 연꽃은 모두 커다란 돌확이나 물통에 키워진 것들입니다.
저 통 안에 하나하나 심어지고 여름 동안 키워진 것이지요
금년에도 이달초에 아름다운 연꽃축제를 했을 겁니다.
.
그 꽃들이 지고나서 몇개만 남아있습니다. 남아있는 몇개를 찍었습니다.
절 입구 양쪽에 위치한 16나한상을 사진에 담습니다.
엄숙하고 근엄한 표정, 괴상하고 익살스러운 다양한 얼굴 표정을 담아봅니다.
봉원사 입구 작은 연못
청신녀 누구누구 공덕비
비각속에 있는 대단월기념비
단월이라는 것은 원래 단군 왕검을 모시던 사람이라는 뜻이었지요
그게 불교가 들어오면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에서 불교신자에게도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불교에서는 시주 또는 화주라는 용어로 바뀌었습니다만
일제 강점기까지는 섞여 쓰였다고 합니다
그 과도기에 만들어진 비석인지
앞에는 대시주누구누구송덕비라 하고
자세한 내용을 쓰는 비음에서는 예전부터 써오던 대단월누구누구라고 썼습니다.
만월전에서 부터 움직이다 보니 전각배치도를 이제야 봅니다.
연혁안내판을 읽어보고
보호수앞을 지나
멀리 보이는 종각을 한장찍어보고
그 라인에 앉아 있는 나한 중 지금의 내 심상과 흡사하신 한 분을 다시 찍어 봅니다.
약수주변
포대화상
그리고 대웅전과 대방을 배경으로 한 연꽃 물통들을 찍습니다.
삼천불전앞 사리탑
1991년 스리랑카에서 모셔온 사리 1과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개화승 이동인선사의 수인상
삼천불전에 들어가 부처님들을 뵙습니다.
어제와 오늘을 지켜주신 부처님 내일도 지켜주시길 바랍니다.
봉원사가가 새겨져 있는 비석을 읽어보다 아하!
삼계가 화택인데 사생들도 편히쉬네라는 글에서 다시 한번 부처님의 가피를 생각합니다.
전각사이를 거슬러 가며 안산자락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솔향 그윽한 등산로를 걷습니다.
삼계도사 사생자부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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