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3일
의주길 5구간을 걷습니다.
문산읍 선유리 삼거리에서 출발합니다.
선유라는 이름과 문산이라는 이름이 참 서로 않어울립니다.
문산이라는 지명은
임진강으로 흙탕물이 내려가다 서해의 조수에 밀려 더러운 흙탕물이 산더미처럼 밀려오는 지역이라하여 汶山이라 하였다는데
선유라는 이름은 인근 경치가 아름다워 신선이 유람하던 곳이라 仙遊라고 하였다하니
더러운 흙탕물 밀려오는 한가운데 선유할 도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임진강쪽으로 가기전에 선유시장 앞까지 걸어보며 마을 분위기를 읽어봅니다.
그렇다고 뭐 읽히는게 있는 것은 아니고요...
다시 돌아서 미군부대가 있던 곳으로 갑니다.
가림막 사이 빈틈으로 그 안에 있는 다리를 찍어봅니다.
선유리에는 지금도 미군부대 터가 그대로 있습니다.
그 지역을 예전 그대로의 철조망 안에 감추고 일반인의 접근을 막고있습니다.
화석정으로 가는 78번 도로로 접어들었습니다.
죄회전을 안하고 쭉가면 법원읍이 나오지요.
법원읍 사거리가 나오면 거기서 왼쪽으로 조금가서 다시 오른쪽으로 가면
율곡 이이를 배향한 자운서원으로 가는 마을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 한 30분 더 걸으면 자운서원에 닿습니다.
그래서 법원읍쪽길이 사임당로라고 이름붙여져 있나 봅니다.
지금 갈 건 아니고요...
가려고 마음먹었으면 아까 광탄삼거리에서 갔으면 좀 더 빨리 갈 수 있었겠지요.
지금은 일단 화석정으로 갈겁니다.
잠깐 걷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
화살표도 리본도 않보입니다.
방향은 당연히 이 방향이지만
포장도로를 피하여 천변으로 길이 있을 것 같아 되돌아 옵니다.
아까 그 미군기지 가림막 앞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깨끗이 치유해서 시민의 품으로 돌려드리겠답니다.
도대체 얼마나..
그리고 어떻게 오염을 시켰길래
철수해간 빈자리를 그렇게 꽁꽁 싸메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해야하는 걸까요?
천변으로 길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천변길을 걷습니다.
그리 얼마걷지 않아 78번 도로로 다시 올라섭니다.
왼쪽으로 이세화선생 묘가 있다는 표지가 있습니다.
조선 숙종 때의 문신으로 인현왕후를 폐(廢)한다는 소식을 듣고 상소를 올려 반대를 하다가 정주로 유배되었고
뒤에 인현왕후의 복위 문제를 맡으며 다시 조정에 올라왔습니다.
그 후 여러벼슬을 두루 걸쳤고 후에 청백리로 녹선된 분입니다.
화석정방향으로 계속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파주수도 관리단이라는 간판을 보고 혼자 웃습니다.
일제 강점기까지 이곳은 밀려온 서해의 조수가 빠져 나간다음에도
그 소금기가 우물과 내에 남아있어 짜서 먹기가 힘들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조금 여유가 되는 사람들은 모두 물을 사먹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수도관리단은 대단히 고마운 기관이겠습니다.
군부대가 있는데...
부대 정문 부근인듯한데 작은 절집이 앞으로 옆으로 몇 곳이 있습니다.
이 고개가 예전부터 기도발이 있는 고개였던 듯 합니다.
고개를 넘어가 화석정가는 소로로 접어듭니다.
군부대 훈련장 입구를 지나갑니다.
그 너머로 임진강이 보입니다.
왼쪽으로 보이는 곳 아래 임진나루가 있을겁니다만...
강건너를 잡아 당겨 봅니다.
저쪽은 우리땅 파주시 진동면 하포리일텐데요...
동쪽으로 보이는 다리도 잡아봅니다.
파노라마로 잡아봅니다.
화석정입니다.
율곡의 5대조가 지어 대물림했다는 정자입니다.
이 아랫마을에 강릉에서 여섯 살에 올라와 살던 율곡의 본가가 있었다고 합니다.
율곡은 이 정자에 올라와 자연의 풍정을 벗하며 어린 날을 보냈고,
벼슬에서 물러났을 때는 제자들과 학문을 논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율곡이 세상을 떠나고 몇해 안 있어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급히 한양을 빠져나온 선조일행이 임진나루에 도착했지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도무지 뱃길을 잡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에 선조의 피난길을 수행 하던 이항복이 화석정에 불을 지르라고 합니다.
임금과 신하, 호위 군졸 등을 태운 배는 화석정이 밝혀준 불빛덕분에 강을 무사히 건넜다 하지요.
무능한 군주야 곤욕을 당해도 되지만
그때 잡혔다면 조선은 그때부터 일본의 통치에 들어갔을 것이고
지금쯤은 일본의 한 변방지역으로 굳어졌겠지요.
정자에 불을 붙여서라도 잘 피난했으니 다행입니다.
시한수가 정자에 걸려 있습니다.
그 시를 돌에 다시 새겨 놨습니다.
“수풀 속 정자에 가을이 깊으니 시인의 회포를 달랠 길 없도다
강물은 하늘과 맞닿아 푸른데 서리맞은 단풍은 타는 듯 붉구나 /
먼 산은 외로운 달을 토해내고 강은 만리의 바람을 머금었도다
아아, 찬 기러기는 어디로 가는고 처량한 울음소리 저녁구름 속에 그치네”
이 시를 율곡이 여덟 살 때 지었다니 글쎄요...
그렇다니 그렇다고 합니다만 글쎄요.
화석정일대를 돌아봅니다.
이런 저런 안내판을 참조하세요.
임진나루쪽으로 갑니다.
산딸나무 익은 열매 몇개 따먹었습니다.
크림같은 것이 입안에서 터지며 참 달콤합니다.
그러다가 텁텁한 것 하나....꾹....으...
속을 알수 없으니 인생이 다 그렇지요 뭐
지하도를 지나고
흐르는 강물을 멀리 보며 걷습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하고 시상을 떠올리려는데 뭔가 거북한 풍경입니다.
배 한척도 없습니다.
꽃에 나비가 없고 나루에 배가 없으니 유명무실이지요.
유명무실 무감합니다.
임진나루 뱃사공이야기
이곳에서 기껏 안내판을 세워서 올릴 스토리가 이것 뿐이 없었을까요.
휘돌아 가는 물길을 봅니다.
임진리나루터마을로 가는 이정표입니다.
화살표 따라가야 음식점뿐이 없습니다만 그래도 그리 가야합니다.
내려가는 길 옆에 어느 개인의 미술관입니다.
잠시 들러서 숨한번 돌립니다.
나루로 다가가다가
"살다가보면" 이라는 '이근배'의 시를 만납니다.
작가의 의도는 그것이 아니겠지만 내 스스로를 합리화시킬때 혼자 읊조리곤 하던 시구인데
여기서 만나니 왠지 쑥쓰럽네요.
살다가보면...그렇습니다...
그냥 반구정쪽으로 돌아갈까하다가
내려가 봅니다.
닫힌문
임진나루 진서문 자리
예나 지금이나 같은 용도의 다른 문이 있습니다.
그 당시도 한양도성을 방어하기 위해 양쪽 단애를 이어 성을 쌓은 후 성문을 달았고
지금도 강안을 방어하는 부대에서 설치한 문이 있습니다.
최근 임진리 주민들은 임진나루터를 개방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6·25 전쟁때문에 출입이 막혔다 하지만
전쟁 이후 70년대 초반까지만해도
문산읍 임진리와 파평면 율곡리 주민들은 임진강에서 고기를 잡을 수 있었고
나룻배를 이용해 농사를 지으러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지역 방어 책임이 미군에서 한국군으로 교체된 1972년 이후
임진강 북쪽 뚝방에 설치됐던 철책을 철거하고,
남쪽 뚝방에 설치하면서 주민들의 임진강 출입이 어민들 이외에는 제한돼 왔습니다.
어민들도 출입이 그리 쉬운것은 아닌듯 합니다.
최근 인근주민들의 불만이 하도 강해지자
일년에 한번씩 개방을 해서 관광객을 끌어들인다고 합니다만 ...
글쎄요..근본적인 검토를 해서
꼭 필요하면 주민을 설득해서 현상태를 유지해야 하고
풀어도 된다면 행주나루인근 처럼 개방을 해야 겠지요.
돌아서서 반구정쪽으로 갑니다.
임진나루를 넘어가지 못하니 이제 옛 의주대로는 임진나루앞 닫힌문에서 끝이 났습니다..만...
최근 새로이 이름붙인 의주길은 평화누리길를 이용 임진각으로 갑니다.
평화누리길과 함께 하는 의주길을 계속 걷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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